염천에 찾아간 곰절
신라 하대 왜구 침략이 잦았음은 무염화상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다. 화상의 속성은 김 씨인데 무열왕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구도 구법을 하고 왔다. 충남 보령 성주사에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창했다. 흥덕왕은 지리산에서 수도 정진 중인 스님을 국사로 임명해 부처님 힘으로 왜구를 물리치려고 곳곳에 절을 세우도록 했다. 사후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국보 8호다.
무염국사가 창건한 절이 우리 지역에 세 군데 있다. 창원 북면과 인접한 함안 칠원 무릉산 장춘사가 그 하나다. 법당 뒤 무염국사가 제자의 병을 낫게 하려고 찾아낸 약수는 물맛이 좋기로 알려져 있다. 불모산이 동남으로 뻗어 굴암산이 흘러내린 진해 웅천 대장동의 성흥사도 무염국사가 창건했다. 성흥사에는 조선 후기 그려진 무염국사 영정이 전한다. 그리고 불모산 성주사다.
불모산은 창원 토박이들에게는 곰절로 불린다. 무염국사가 창건할 당시 성주사는 현재 위치보다 계곡 안쪽에 자리했다. 지금 상수원보호구역인 그곳에는 당시 절터였던 축대 흔적이 있고 바깥에는 부도가 몇 기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절을 다시 세울 때 곰이 그곳에 쌓아둔 목재를 하룻밤 사이 현재 위치에 옮겨 놓아 절터가 바뀌었다. 그래서 한때 웅신사로도 불려졌다.
속설에는 성주사 폐사는 병화가 아니라 뱀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성주사 폐사지는 Y자 계곡 양쪽 다 축대 흔적이 있다. 그곳은 흩어진 바윗돌이 많은 지형이었다. 뱀은 바위 틈새를 서식지로 삼는 특성이 있다. 절간에서 수도 정진하던 스님이 뱀에 놀라 떠나게 되어 폐사 되었단다. 성주사 뜰로 오르는 계단에 돼지를 조각한 석상이 있는데 뱀을 물리치려는 비보의 뜻이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칠월 하순이다. 금요일 이른 아침 근교 산행 행선지로 성주사가 자리한 불모산 기슭으로 택해 길을 나섰다. 반송 소하천을 따라 원이대로를 건너 창원실내수영장 앞으로 나가 진해로 가는 151번 버스를 탔다. 이른 시각이라 시내를 곧장 달려 남산동 터미널을 지나 안민터널 입구에서 내렸다. 성주사 절간 가는 길을 따라 천변 천선동 당산나무 곁을 지났다.
수원지 바깥은 제 2안민터널이 공사가 한창이었다. 수원지를 두르는 진입로를 따라 성주사로 들었다. 절간을 찾는 이들 다수는 자동차로 이동하지만 나는 언제나 걸어서 다녔다. 안민고개에서 불모산으로 건너가 절간을 빠져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깥 주차장 약수터에는 샘물을 받아가려는 이들이 보였다. 절 경내로 들어 법당 뜰에서 두 손을 모으고 관음전을 돌아 산으로 올랐다.
절에 딸린 채전을 지난 불모산으로 오르는 길을 비공식 등산로였다. 사람들이 다니질 않아 묵혀진 길처럼 보였다. 계곡을 건너 숲으로 들어 삭은 참나무 등걸을 살펴봤다. 불모산은 소나무에다 여러 종류 활엽수가 섞여 자라는 혼효림 식생이었다. 그 가운데 참나무들도 있어 고사목이 가끔 보였다. 숲을 누빈 보람은 있어 산마루를 넘으면서 손바닥 크기 영지버섯을 두 개 찾아냈다.
숲속에서 등산로로 나와 어디로 나아갈지 정해야 했다. 정상까지는 오를 생각이 없어 산중턱 갈림길에서 불모산동 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갈까 싶었다. 아니면 현 위치에서 되돌아 산허리를 넘어가 불모산동 저수지로 가도 되었다. 그 두 곳 선택지가 아닌 개척 산행으로 남사면 골짜기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오래 전 낙엽이 진 겨울에 두 차례 다녀봐 주변 지형지물은 낯설지 않았다.
숲을 헤쳐 나가니 맑은 물이 흐르는 너럭바위가 나와 배낭을 풀고 이마의 땀을 씻었다. 땀내를 맡고 달라붙던 모기들도 사라졌다.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 계류 가까이 앉아만 있어도 시원함이 느껴졌다. 절로부터도 한참 떨어진 그윽한 골짜기였다. 인적이라곤 만날 수 없고 물소리에다 매미소리만 들려와 속세와 단절 고립된 느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걸어 절간에 닿았다. 21.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