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송화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송화
14일 새벽 4시 서울서 출발 대구 소재사 도착 7시30분
15일 저녁 7시 서울도착
이번 순례는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을보니 피곤함을 모르고 대구시 사찰을 다녔습니다
12곳 성지순례 하면서 2곳 적멸보궁을 보았습니다
관음사와 용연사입니다
모든 사찰 주차허용 됩니다
지금 까지 다닌사찰암자 약 800곳 이안에 오대적멸보궁 포함 15곳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
대구시 부인사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 남쪽에 있는 절.
부인사(符印寺) 또는 부인사(夫人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와 연혁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고려 현종~문종 때 이곳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고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 대장경은 몽골침입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현재 그 일부가 일본 교토[京都] 남례사(南禮寺)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창한 것으로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이 있다. 이밖에 절 주위에 신라말의 석탑양식을 보여주는 쌍탑을 비롯하여 석등·당간지주·마애불좌상·배례석 등이 있다.
북지장사
지장사는 신라 소지왕 7년(485) 극달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인조 원년(1623)에 지은 건물로 원래 극락전 또는 지장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앞면 1칸·옆면 2칸 규모이지만 앞면 1칸 사이에 사각형의 사잇기둥을 세워 3칸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수법을 따르고 있고 공포 위에 설치한 용 머리 조각 등은 조선 후기 수법을 따르고 있다.
관음사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전통사찰을 포함해 신흥사찰이건, 개인사찰이건 간에 아마 한국불교의 사명(寺名) 중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이름이 아마도‘관음사’일 것이다. 대부분의 관음사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삼아 기도하는 도량이다. 관세음보살은 말 그대로 세상의 고통받는 모든 중생의 소리를 살펴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한국에서는 석가모니불이나 정토신앙의 대명사인 아미타불보다 관세음보살이 더욱 신앙시되어 왔으며, 이런 이유로 관음사라는 사명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세음보살이 바로 일반 민중들의 현실적인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널리 믿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대구 도동의 ‘관음사’ 역시 이러한 관음신앙에 기대어 있다. 의상대사가 여기에서 기도하고 창건했으며 뒤이어 심지왕사가 중창했다고 알려진 관음사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인‘달성 측백수림’이 우거진 암벽 중턱에 난간과 계단을 세우고 멋들어지게 자리잡고 있다.
언제나 관음사가 자리한 곳은 관음보살의 상주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인도의 보타낙가산에서 유래한 지명을 따오듯 대구 도동의 관음사 역시 ‘낙가산(일명 향산-香山) 관음사‘라는 여법한 지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랜 세월 관음사와 함께 한 수백 년된 달성 측백수림은 대구 10경 중의 하나로 절경을 자랑하고 있어 사찰을 찾는 즐거움 외에도 또 다른 즐거움을 관람객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더욱이 관음사 관음전에 모셔진 영험스러운 석조관음보살입상 역시 이 곳이 관음기도처로서 이 지역의 성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수 년 전부터 관음사는 지역포교와 시민들을 위한 기도 및 수행, 문화도량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인근부지를 매입해 80여평 규모의 2층 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있어 불자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은적사
고려 태조의 숨은 자취 간직한 비슬산(琵瑟山) 은적사(隱跡寺)
푸른 숲과 맑은 공기, 각종 위락시설이 어우러져 있어 대구시민들이 즐겨 찾는 앞산공원은 비슬산 또는 대덕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앞산에는 골짜기가 많기로 유명한데 큰골, 고산골, 안지랑골 등 비교적 크고 이름난 골짜기가 있는가 하면 용두골, 메자골, 달비골 등 작고 아담한 골짜기도 많다.
이 중 큰골에 자리한 은적사는 앞산에 자리한 임휴사, 안일사와 아울러 고려 태조 왕건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싸움에서 대패한 뒤 신숭겸의 지략을 빠져나와 바로 이 곳에 구사일생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찰의 명칭도 은적사(隱跡寺)다. 그리고 임휴사와 안일사처럼 신라시대 영조스님이 창건주로 되어 있어 또 다른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은적사를 포함해 세 사찰 모두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어린이포교에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색다른 공통분모와 인연을 가진 사찰이라 하겠다.
그러나 은적사는 나머지 두 사찰과 달리 색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먼저 은적사가 자리한 큰골에는 낙동강 승전기념관, 충혼탑, 케이블카, 수영장, 체육시설(4개소), 인공폭포(1개소), 원두막 등 가장 많은 위락시설이 몰려 있어 대구시민과 관광객이 앞산공원 중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또한 2005년부터 처음 열린 미혼모를 위한 산사음악회라든지, 한문학당,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대구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룸비니합창단 등은 은적사 만이 갖는 독특한 자랑거리다.
이 외에도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좌상이 고려 말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또한 1880년대 조성한 지장탱화 역시 1880년대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다. 이는 은적사가 현대사회에 빠르게 발맞추어 일선에서 포교와 교육에 매진하고 있음과 동시에 이와 같은 유구한 전통과 유산도 함께 보존해 나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은적사가 전통사찰의 위상과 면모를 대변해주는 좋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임휴사
임휴사는 일찍이 신라 말엽인 921년(경명왕 5년)에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수행하여 크게 선풍을 진작하고 귀국한 영조대사(靈照大師:870-947)가 창건한 이래 서기 1811년(순조 11년)에 무주선사(無住禪師)가 중창하였으며 1930년에 포산화상(苞山和尙)이 3창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寺名)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던 팔공산 지역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일대 격전을 치른 곳으로 동수대전(棟藪大戰)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돕고자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견훤을 만나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크게 패하여 생명 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왕건의 심복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이 이를 진짜 왕건으로 보고 쫓아가 죽이는 바람에 왕건은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이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는 왕건에 관련된 지명이 남게되었는데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齋), 왕건의 탈출을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다
하여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대덕산은 은적사, 안일사와 왕건이 탈출하다가 임시로 군막을 치고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이 만들어 졌다.
왕건은 이곳에서 쉬면서 부처님 전에 기도를 드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결과적으로 후삼국통일의 발판이 되었다.
용문사
승천하는 용의 기운 서린 비슬산(琵瑟山) 용문사(龍門寺)
용(龍)은 우리나라가 삼국통일 이래 불교가 호국신앙으로 발전함에 따라 호국용으로서 영원한 왕권과 호국을 기원하는데 이용돼 왔다. 그러나 제왕과 같은 권위를 가진 신비로운 용의 모습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는 물을 지배하는 수신(水神)으로서 또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나 경사를 예고하는 상서로운 상징으로 여겨왔으며 이를 미술로써 풍속으로써 화현시켜 오기도 했다.
또한 어디를 가도 용소(龍沼)·용연(龍淵)·용정(龍井)·용암(龍巖) 등 용과 관련된 지명이나 호수·우물·바위·산 등의 전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대구 달성의 용문사도 이러한 지명과 연관지어 탄생한 사찰이다. 이른바 용이 승천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기운을 이어주기 세워진 사찰로 사명 역시 용의 관문이라는 뜻의 ‘용문’이라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용문사와 용문사의 주변은 ‘용문‘이라는 지명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용의 기운이 서려 있는 듯 하다. 비록 창건한지 100년도 채 안된 전통사찰이지만 절을 세운 뜻은 참으로 우리네 민족의 따뜻한 심성과 맞닿아 있다.
용문사는 작지만 수행도량으로서 알찬 프로그램으로 꾸려 나가고 있다. 매주 자비수참 참회법회를 신도들이 참여한 가운데 봉행하는 한편 장례지도 자원봉사대도 조직해 불자들에게 올바른 장례지도를 하고 나섰다.
화장사
화장사는 1925년 보원거사(普願居士) 김영옥(金英玉)의 발원으로 비슬산 서쪽 넓은 터인 화원읍, 즉 현재의 자리에서 창건됐다. 주위 사람들에게 도인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신심이 컸던 보원거사가 입적하자 다비를 하니 사리 7과 나왔는데 이를 부도를 만들어 봉안해 놓으니 그때부터 화장사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다.
화장사에는 예부터 칠성바위라 부르는 고인돌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달성군 화원읍에 김보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불경 뿐 만 아니라 한문과 지리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불자였으나 마을 주변에 절이 없어 안타깝게 여기던 중 부처님께 좋은 절터를 가르쳐 달라고 날마다 불공을 드렸지만, 3년 동안 불공을 드려도 허사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돌 7개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그 중 제일 끝에 있는 돌 주위에 절을 지으라고 일러주었다. 다음날 김처사가 그 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꿈 속에 말해준 7개의 바위가 모두 남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7개의 바위 중 6개는 모두 거의 붙어 있고 남쪽 끝에 있는 돌만 홀로 떨어졌다. 그 돌은 다른 돌보다 유난히 커 보였으며 주변의 지리적 위치가 상당히 좋았다. 드디어 그는 이 자리에 절을 짓고 열심히 불공을 드리며 일생을 보냈다.
그가 숨을 거둘 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땅 속에 묻지 말고 화장한 뒤 몸을 살펴보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그렇게 했더니 오색 찬란한 7개의 사리가 나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리의 수가 칠성바위의 수와 같아 사람들은 부처님의 절을 짓게 해주 주신 자비에 대해 열심히 노력한 기도의 결과라 생각하고 이름을 ‘화장사’라고 짓기에 이른다.
그 뒤 1980년대 김지우(金知愚)스님이 주석하면서 화장사의 가람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용연사
용연사에 관한 고려 시대의 사실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서야 사적이 전한다. 물론 법당 앞의 석탑이 고려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가람이 계속 유지되어 왔음에 틀림없으나 기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1419년(세종 1)에 천일(天日) 스님이 퇴락된 절을 보고 슬픈 마음이 일어나 장엄한 규모로 중창하였으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 사명 유정(泗溟惟政) 스님이 인잠(印岑)·탄옥(坦玉)·경천(敬天) 스님 등에게 중창하도록 하였다. 이 때 지은 전각이 대웅전을 비롯해서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도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650년(효종 1)의 어느 날 저녁 등불을 켤 무렵에 별똥이 떨어져 불이 나서 법당과 요사가 다시 소실되는 화를 입었으나, 이듬해 일언(一彦) 스님과 학신(學信) 스님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건립하였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 스님이 대웅전을, 승안(勝安) 스님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 스님이 만월루(滿月樓)를 세웠다.
이때부터 1661년(현종 2)까지 함허당(含虛堂),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10여 년 동안 거의 해마다 건립하였다. 1668년에는 대종(大鍾)과 금구(金口)를 주조했고, 다시 중창 불사가 계속되어 18세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었다.
유가사
유가사는 신라 혜공왕(765-780)대 창건설과 신라 흥덕왕 2년(827) 도성(道成)스님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어느 설이 확실한지 알 수 없으며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도성국사가 포산(비슬산의 옛 이름)에 살 때 시공을 초월한 도력을 갖고 있었다고‘삼국유사’피은편에 전한다. 한 때는 본사를 제외하고 속암이 99개, 거주 승려 3천명, 딸린 전답이 1천마지기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신라시대 때는 유가종의 총본산이기도 했다.
유가사는 창건 이후 진성여왕 3년(889) 탄잠(坦岑)선사가 중창했고, 고려 문종 원년(1047)에 학변(學卞)선사가 중수했다. 조선시대 문종 2년(1452)에 일행(逸行)선사가 중수했고 숙종 8년(1682)에 도경(道瓊)화상이 보수했으며 영조 51년(1776)에 밀암(密庵)선사가, 정조 21년(1797)에는 낙암(洛巖)선사가 각각 중건·중수했다.
한일합방 직후 발표된 ‘사찰령’에는 유가사가 동화사의 수반말사로 되어 있어 당시에도 상당한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1976년 대웅전과 용화전을 중창했고, 1979년 대웅전을 비롯한 각 전각들을 일신했다. 유가사에는 창건주 도성스님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몇 가지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다음과 같다.
소재사
소재사의 최초 창건 시기는 신라 시대로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한 개산 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사명이 ‘재앙을 소멸한다’는 뜻으로, 창건 당시의 사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풍수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이거나 자연재해 또는 국가적인 재앙, 일체의 재앙을 없애고자 하는 뜻으로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재사는 고려시대에 들어 1358년(공민왕 7)에 진보(眞寶)스님이 중창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57년(세조 3)에 활륜(活輪)선사가 중건했으며 1510년(중종 5년) 선주 외암(善珠 外巖)스님이 중수했다. 한편 1530년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권27 현풍현 불우(佛宇)조에 소재사가 보이고 있어 사찰의 건재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1701년(숙종 27)에 청심(淸心)대사가 중창했으며 1841년(헌종 7)에 완산(玩山)대사가 다시 중창했다. 1857년(철종 8년)에는 법허(法虛)화상이 중수했으며 1900년(광무 4)에 임왕산 스님이 중창했는데 한일합방 직후 발표된 사찰령에도 소재사가 동화사의 말사 명단에 보이고 있어 줄곧 가람이 유지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경북 청송군 용천사
1) 역사
용천사의 연혁에 관해서는 『청도군각북면용천사사적(淸道郡角北面湧泉寺事蹟)』이라는 책자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은 1927년에 간행되었는데, 1702년(숙종 28)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지은 목판본 사적기와 1703년 행규(行珪)가 지은 「용천지(湧泉誌)」를 한데 엮은 것이다. 김진규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대제학·예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사적기는 불과 1년의 시차를 두고 씌어져서 그런지 창건과 임진왜란 이후 중건된 내역에 관하여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김진규의 사적기가 글 앞부분에서 창건주인 의상 대사가 중국에 유학 가는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시작하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특히 김진규의 경우 그가 당대의 명망 있는 문신이자 유학자, 그리고 고위 관리라는 입장에 있으면서 이러한 사적기를 썼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지닌 인물이었던 데다가, 당시 용천사가 그만큼 비중 있는 사찰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진규의 사적기에 따르면 의상 대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670년(문무왕 10) 전국에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창건하였는데, 용천사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 의상 대사가 『화엄경』을 새긴 상아(象牙), 곧 「상간(象簡)」 8매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나중에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려 목판으로 보충하였다. 또한 삼국시대에 관기(觀機)·도성(道成)·반사(搬師)·첩사(瘡師)·도의(道義)·자양(子陽)·성범(成梵)·여백(女白)·우사(牛師) 등 이른바 구성(九聖)이 이곳에 머물렀었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원종(元宗, 1260~1263)대에 보각국사 일연이 중수하면서 용천사라고 하였다가 다시 불일사(佛日寺)로 바꾸었다. 일연 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원종 임금이 경주로 행차하면서 불일사에 들렀는데, 원종은 일연 스님을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일연 스님이 지은 결사문(結社文)에 서명까지 하였다. 이로써 불일사가 더욱 유명해지고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7)
2) 연혁
앞서의 「용천사사적」에 수록된 김진규의 사적기와 행규의 「용천지」에는 의상 대사의 창건과 일연 스님 때의 중창 사실에 이어서 당대의 중건 사항이 매우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용천사는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당우가 소실되고 여러 성보를 약탈당하는 등 사세가 몹시 기울었다. 그러나 1631년(인조 9) 조영(祖英) 스님 등이 중건하여 다시금 본래의 면목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위의 두 사적기가 간행될 무렵인 1702년·1703년에는 고려시대 일연 스님 주석
당시의 사관(寺觀)을 대부분 회복한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이 때의 광경을 「용천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전(佛殿)과 승료(僧寮)가 늘어선 것이 마치 바둑판에 돌 놓인 듯 정연하고, 층층이 올라선 누대(樓臺)는 하늘로 우뚝 솟아 뭇 별들을 사열하듯 하니, 이러한 사관은 거미줄처럼 뒤엉킨 민가와 함께 모란이 피어나듯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었다.
그 옛날 의상 대사께서 창건하시고 보각 국사께서 중수하셨다 하나 어찌 이 보다 더 장관이었으리요.”
근대에 와서는 절 살림이 몹시 어려워졌는데, 1907년 신도들이 모여 계를 만들어 법당을 중수하고 토지 9두(斗)도 구입하였다.
최근에는 1983년 범종각을 짓고, 우물인 용천각을 지으며 오늘에 이른다.
이 세상 한번/변해림
첫댓글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