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어떻게 와인문화를 만들었나?
‘신은 물만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이 있다. 그런데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는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였으니, 신과 인간의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이루어낸 셈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포도주를 담아 마셨을까? 구약에 보면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을 잤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때 노아는 600살이 넘은 나이였고, 아담의 탄생이후 홍수 때까지의 기간이 1,656년 경과되었으므로, 성경의 역사를 6,000년으로 볼 때, 현재로부터 따져보면 약 BC4,300년경의 일이 된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 것은 노아가 심은 포도나무는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의 물음이다. 아마도 그가 방주에 오를 때 농사에 필요한 모든 씨앗과 나무들도 준비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홍수 이전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들의 행위가 부패해있을 때에, 사람들은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고, 그 술은 그들의 마음을 황폐화 시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므로 아담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 나간 후, 탈무드의 이야기 같이 포도나무를 심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어성경에는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란 말에 정관사(the wine)가 붙어 있고 히브리원어에도 그러하다고 한다. 이는 노아가 이미 포도주의 성질을 익히 알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이란 자그로스산맥 북부의 ‘하지 피루즈 테페’(Hajji Firuz Tepe)라는 곳에서 발견된 화석에서 포도주잔액이 검출되었는데, 탄소측정결과 그 제조연도가 기원전 5400-5000년경으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포도주의 역사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때부터 신석기 인들이 야생동물을 가축화하고 야생식물을 재배하여 안정된 정착생활을 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포도주제조기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BC6000년 이후 시작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포도주의 화석이 이란에서 발견되었듯이, 고대 페르시아 우화에는 포도주를 처음 만든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여인은 왕으로부터 총애를 잃은 공주이다. 그녀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려는 방법으로 오래되어 상한 포도를 다량으로 먹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현기증이 나고 취한 나머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깨어난 그녀는 이전의 근심이 말끔히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러자 계속해서 상한 포도를 먹고 기분이 좋아지자, 그녀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하였고, 이러한 생각의 변화가 왕의 총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포도주의 발견은 우연한 기회에서 이루어졌으며, 어느 지역마다 이와 비슷한 우화를 찾아볼 수 있는데, 어찌되었든 이는 인류에게 놀랄만한 행운을 선사하였음을 포도주애호가들은 인정한다.
이제 인류문명발전과 함께 포도주변천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고대이집트인들의 상형문자 기록을 보면, 파라오들이 폭음을 했다는 사실이 나온다. 이들은 포도주의 품질 보다 양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또한 포도뿐 아니라 모든 과일과 함께 혼합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포도주와는 달랐다. 이제 포도주는 지중해 연안으로 전파되었다. 먼저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에 전했다. 크레타 섬 어느 무덤에서 발견된 포도주 짜는 기구는 BC3000-2000년으로 추정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신의 주스’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하여, 호머의 ‘일리아드’서사시에도 수차례 언급되었을 정도이며, ‘디오니소스’라는 자신들의 포도주 신을 섬길 만큼 그들은 포도주를 사랑하였다. 더욱이 알렉산더대왕은 동방원정에서 아시아에 포도주를 소개하는 공헌을 하였다. 드디어 포도주는 로마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인들이 본격적으로 포도를 재배한 것은 BC1,000년경이었으며, 실용적인 그들은 포도주제조의 과학화를 이루었다. 포도의 다양한 종류를 분류하였고, 포도주를 숙성하는 용기를 나무로 만들어 포도주의 원래 향을 보전케 하였을 뿐 아니라, 숙성과정에서 소량을 증발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리로 된 포도주병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코르크 마게도 고안했을 뿐 아니라, 포도의 병충해를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페니키아인들이 전파한 포도주는 거의 모든 유럽에서 포도주 산업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포도주는 교회에서 성찬식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포도주제조기법은 베네딕트 수도승들에게 의해 마치 복음이 전파되듯 유럽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든 포도주는 묽게 만든 것이어서 일반 시민들이 즐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귀족들이 교회와 함께 포도주제조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후 교회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포도재배와 제조의 특권은 혁명정부에 의해 농민들의 손에 넘겨졌다.
이제 영국의 포도주 문화를 소개할 차례이다. 빗나간 이야기이지만 국제무역성립이론에는 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이론이 있고,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이론이 있다. 절대우위이론은 이해가 명료하나 비교우위이론은 조금 난해하다. 리카도는 영국과 포르투갈 양국 간에 두 가지 품목 즉 영국의 직물과 포르투갈의 포도주가 서로 교환될 수 있음을 비교우위이론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왜 하필 영국이 포르투갈로부터 포도주를 수입하는 예를 들었냐는 것이 평소의 의문이었다. 중세 온난화가 지속되었을 때 영국에서도 한때 포도재배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영국은 포도재배가 불가능한 환경이 되었다. 이러한 기후조건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해양제국의 주역이 된 영국인들은 해외에서 획득한 풍요로운 국부덕분에 최상급의 포도주를 즐기려는 강한 욕구를 이룰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클라레(프랑스보르도 산 레드와인), 포르트(포르투갈 산 와인)와 샴페인과 같은 포도주종류가 영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특히 13세기부터 클라레는 영국인들이 비프스테이크에 가장 잘 어울리는 포도주로 여겨, 한 해에 90만 헥토리터(9억 리터)의 포도주가 영국으로 수입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1600년 말경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9년 전쟁(1688-1697), 스페인왕위계승전쟁(1702-1714),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1739-1748), 7년 전쟁(1756-1763), 미국독립전쟁(1774-1783)에 개입 또는 전쟁당사자가 되어,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포도주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포르투갈로 수입 선을 바꾸게 된다. 이를 위해 양국은 1703년에 메두엔조약(일명 포르트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은 포르트갈 포도주의 수입관세를 프랑스에 부과하는 것 보다 1/3적게 우대하였고, 포르투갈은 영국의 모직물에 무관세를 부과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조약은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이 조약으로 인해 강력한 정치적인 입지를 국제적으로 확보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브라질을 통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다.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무역수지적자를 시현하였으나, 브라질에서의 금광 개발에 의한 금의 유입으로 적자를 보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 포르투갈로부터의 영국의 포도주수입과정을 보면,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 중이던 1692년 영국 와인상인(Job Bearsley)의 아들이 포르투갈북부의 포도재배지인 두오로 상류(Upper Douro)에서 우연히 예수회수사들이 재배하는 양질의 포도밭을 답사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양질의 포도주를 생산지에서 강을 따라 항구인 포르토(Porto)까지 수송한 후, 영국까지 해상 운송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포도주 맛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초기 선적물량은 실패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통찰력 있는 수입상이 선적 전에 포도주통에 브랜디를 부어 섞어보았더니, 매우 강화된 포도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포도주가 숙성이 된 후에 소량의 포도주 주정을 첨가하고, 그 후 천연알코올로 변화되는 순간 무색의 브랜디를 섞었다. 이렇게 탄생된 포르토와인은 영국왕실에서 즐겨 마시는 포도주가 되었고 영국을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클라레와 포르트와인과는 달리, 샴페인은 영국이 다소 늦게 기여한 포도주이다. 샴페인의 이산화탄소압력을 견딜 수 있는 유리병 제조기술이 19세기 말에 더디게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샴페인은 달콤한 것뿐이었다. 1848년 런던의 와인상인 번즈는 프랑스와인 제조업자에게 달지 않는 드라이샴페인을 만들도록 주문하였다. 그러나 드라이샴페인은 대참사였다. 그 후 1860년에 와인제조업자들은 런던상인들에게 1857년산의 빈티지 드라이샴페인을 선보였다. 다행이 와인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게 되자, 샴페인은 스위트와 드라이 시장으로 양분되었다.
이와 같이 영국 와인애호가들은 다양한 와인종류 생산역사에 여러 면에서 영향을 끼치었다. 런던에는 와인을 감정하고 평가하는 Court of Master Sommeliers와 Institute of Masters of Wine이 있다. 고대수메르 인들이 ‘인생의 기쁨, 그 이름은 맥주’라고 한 반면, 영국인들은 ‘인생의 기쁨, 그 이름은 와인’이라고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 나오는 ‘술의 기원’이란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이 세상의 최초의 인간이 포도 씨를 심고 있을 때, 악마가 나타나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 인간은 훌륭한 식물을 심고 있다고 대답하자, 악마는 그런 식물은 본적이 없다고 대꾸한다. 이에 인간은 그 식물은 매우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어, 그 즙을 마시면 아주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악마는 자기도 친구들에게 꼭 가져다주어야겠다고 말하면서, 양과 사자, 돼지와 원숭이를 죽인 피를 가져와 밭에 비료로 뿌렸다. 이렇게 해서 포도주가 생겨났다. 포도주를 포함한 모든 술이란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양과 같이 순하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와 같이 강하게 되고, 더 마시면 돼지와 같이 추잡하게 된다.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는 악마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준 선물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