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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중고24회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누리지기
인화로 뭉친 선생님들의 정성에 감복 24회가 입학했던 1968년은 3공화국이 경제발전을 독려하던 시기였다. 나의 고향 울산에서는 대형 공장이 속속 세위지고 신도시계획에 입각해 폭이 넓은 신작로가 계속 생겨났다. 내가 촌에서 소나 먹이고 자란 탓으로 막연히 부산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어떤 학교를 정할지는 망설였다. 같은 학급의 한 동기는 서울의 경복고로 간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다른 동기들도 이런 경험을 했겠지만 부산고와 경남고 중 어느 학교가 나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학교 선배들의 복장에서 부산고가 흰색 상의, 경남고가 푸른색 상의를 입고 있는 정도로 기억할 정도였다. 그런데 경남고보다는 부산고가 커트라인이 높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 중학 동기생 한명은 필자와 같이 부산고에 응시하려다가 이 소문 때문에 경남고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담임선생이 부산고 원서를 두개나 사가지고 오신 것이며 자신의 제자는 해마다 명문고교에 세 명 이상은 합격했다고 장담하시는 것이었다. 결국 담임선생의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입학시험을 치게 되었다. 나와 아우는 범일동에 있는 고모님 댁에 이틀 밤을 자면서 시험을 치렀고 고종형이 예비 소집일에 길을 안내해주었다. 시험을 치루고 나서 채점을 해보니 12개 정도 틀린 것으로 확인되어 안심이 되었지만 아우는 예상외로 많이 틀리어 매우 우울하였는데 다행히 모두 합격하여 담임선생님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 당시 울산제일중학교에서는 12명이 응시하여 6명이 합격하였다. 부산고에 진학한 필자는 3년간의 계획을 수립하여 실행에 옮겼다. 즉 1년간은 운동을 하고 그 다음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굳센 사나이가 되기 위해선 운동을 필수로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적어도 사나이로 태어나서 을지문덕·이순신 장군처럼 문무(文武)를 겸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학교 및 초량 삼거리에 있는 무덕관에 등록을 하고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영하의 추운 겨울에도 운동 후 냉수로 목욕하는 등 열심히 1년간 배워 초단을 땄다. 그런데 이미 무덕관에는 이병문, 정병헌이 1년 전부터 배워 홍띠를 매고 있었다. 정병헌은 졸업 후 9년 만에 1979년 10월 부마사태 후 필자가 계엄군 장교로 가 있을 때 부산대학 정문 앞의 식당에서 만나 소주 한잔으로 회포를 풀었다. 입학하고 나서 실감하였지만 부산고의 별칭이 초량농고라 부르듯이 시골 출신이 많다는 점을 느꼈다. 입학 후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3학년인 정홍식 선배, 2학년인 김정렬 선배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으며, 두 분 선배도 진주와 언양 출신이었다. 그 후 알게 되었지만 동급생 중에도 시골 중학 출신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았던 동기생들을 대략 열거하면 진주-하동-사천 출신으로 하태근, 장원관, 김성봉, 김성수, 이수철, 최광식, 조영준, 마산 출신으로 김해수, 이수철, 박무흡, 이성호, 이강우, 정영오, 구자용, 이선길, 이현성, 이재헌, 진해출신으로 홍종화, 고현민, 김성년, 조정래, 충무 출신으로 이창명, 밀양 출신으로 김기룡, 최병찬, 민주식, 김용학, 강대현, 안대영, 안병권, 신종돈, 안영직, 김진근, 최성현, 이재구, 박재호, 박선현, 김해 출신으로 김병곤, 강우현, 김옥근, 박영갑, 박영규, 손석남, 강영수, 김홍곤, 배재영, 안승균, 김원태, 이자웅, 도광용, 허 영, 박광흠, 백명수, 창녕 출신으로 차태균, 김부식, 신복기, 이종식, 서정수 등이 있다. 양산 출신으로 이종훈, 안수언, 서주홍, 이봉길, 황영구, 함안-산청 출신으로 안태영, 심연택, 안상목, 박홍래, 이술근, 박천수, 홍정기, 오동식, 남해-고성 출신으로는 이수철, 이수건, 강형호, 창원 출신으로 황창윤, 권호상, 이상인, 배동식, 한석동, 거제 출신으로 김윤권, 동래군 출신으로 김원갑, 최호신, 박홍기. 경북 청송 출신으로 심상렬, 경북 영일 출신으로 김천규, 경북 달성 출신으로 구철모, 경북 상주 출신으로 심한배, 신정봉, 나(이일걸)와 같이 울산-울주 출신으로는 임진혁, 정소걸, 최병만, 김호준, 이창걸, 정진석, 김충관, 이진근 등이 있다. 이들을 합해 100명에 가까우니 학급의 25%인 15명 정도는 시골 출신이었다. 이들은 영남의 뛰어난 수재답게 각고면려(刻苦勉勵)하여 현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교장은 키가 자그마하신 귀골형의 노은식 교장선생님이셨다. 부임하신지 2년 정도 되었으며 거의 10년 정도 재직하시다가 경남고롤 전근가신 걸로 기억한다. 노은식 교장선생님은 학교발전을 위하여 매우 노력하셨으며 전체 학생의 이름을 외울 정도의 정성을 기울인 분이셨다. 다정다감한 풍모에서 풍기듯이 선생님의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모든 선생님들이 인화(人和)로 뭉쳐 학력 신장에 온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모든 선후배들이 존경했던 교장 선생님이셨다. 당시 서울대학의 현역 입학률은 전국 1위를 연속 차지하고 있었다. 후에 대학 학장을 역임하셨으며 유명을 달리하신지 오래 되었다. 선생님 가운데 특히 박석중 교무 주임은 지리를 담당하셨는데 수업시간에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 했던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한국전쟁시 1.4 후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고향 선배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장교로서 장기근무를 권한 상관의 권유를 마다하고 교편을 잡게 된 사연을 말하면서 군무보다 평범한 훈장이 자신이 원하는 바였다는 이야기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 황창희 선생님은 모교 교장을 역임하셨고, 몇 년째 진학지도 담당을 하여 대학 입학 전략 수립에 이골이 나신 김정규 선생님은 수업보다 진학지도가 본업이었다. 항상 열을 올리며 정열적으로 강의하셨던 김일규 선생님은 3년 전 졸업 30주년 때 목발을 집고 나오셨다. 이승영 선생님은 동아대 교수를 역임하셨다. 1학년 때 담임이기도 한 윤진현 선생님 유명한(?) 별명을 달고 다니시어 모르는 동기들이 없다. 정효석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모교에 대한 긍지를 갖고 생활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2학년 때 담임이신 배한제 선생님은 느린 말투로 말씀하시지만 맑디맑은 심성을 어느 사이 드러내고 마는 분이셨다. 1학년 때 마산에서 전근 오신 배신환 선생님은 실력파라 하여 인기가 상승하였지만 매시간 치는 쪽지 시험에 혼쭐이 나기도 하였다. 별명이 베르그송이신 배익송 선생님은 시간마다 죄와 벌, 파우스트 등 세계명작을 읽어야 사람이 된다고 강조하셨다. 모교에 두 번째 부임하신 박용성 선생님은 국사에 대한 요점을 너무나 잘 강의해주신 것으로 기억난다. 동기생 박대영의 춘부장이시다. 2학년 때 독일어를 가르쳐주신 백원호 선생님은 가날픈 몸매로 열성을 다해 강의를 하였다. 특히 핵심을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설명하곤 하였는데 나 역시 그때 배운 실력을 제자들에게 발휘하였다. 모교의 선배이신 이영구 선생님은 별명이 ‘망치’로 불리워졌는데 독일어를 담당하였다. 언제나 생활 및 등교지도를 엄히 하여 모르는 선후배가 없다. 후에 해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 간암으로 요절하시니 동문 모두가 애석해 하였다. 뒤에 들은 사실이지만 모교 독어 선생님으로 부임 전에 성균관대학 독문학과에서 강사로 몇 년간 강의하신 것으로 보인다. 사서를 담당하신 장의정 선생님은 2학년 때 수학을 기르쳤던 선생님과 결혼하시어 학교 서쪽 부근에서 생활하셨다. 모교의 교장을 지내신 김경수 선생님은 1학년 때 부임하셨다. 경북대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고 지리를 담당하셨는데 가날픈 몸매로 인해 찬 바람이 불긴 부는데 어딘가 따뜻함을 느낀 감정이 아마 모교 선배였기 때문이었으리라. 3학년 때 1반 담임하시던 성호주 선생님은 호주(好酒)가로 이름 높았으며 주로 고문(古文)을 담당하여 이 분야에 짝할 만한이가 없었다. 가끔 수업시간에 어제 늦게 드신 주기(酒氣)를 내품는 것이 단점이지만 모교의 주당파 중의 한 분으로 낭만적인 분이셨다. 부산여대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주년 때 뵈었지만 얼마 뒤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 하셨다. 2반 담임이신 심모섭 선생님은 수학을 담당하시고 언제나 깔끔한 복장에 멋을 알고, 할 말만 하시는 젠틀맨으로 알려졌다. 졸고 있는 학생들을 부를 때 ‘부처새끼’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하였다. 3반 담임이시자 학년 주임이신 한창용 선생님은 고향이 북한인데 월남하신 분으로 알고 있으며, 현대문학을 담당하셨고 호탕한 모습마냥 유창하고 조리 있는 말솜씨로 우리들을 설득시키곤 하였다. 지난해 돌아가셨다는 소문이다. 4반 담임이신 김성근 선생님 영어를 담당하시고 중후한 풍모에 맞게 우리의 사표(師表)로 존경받았다. 학교 부근에 살았으며 아드님도 모교에 다녔으며, 30주년 행사에 여든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주셨다. 5반 담임은 김태홍 선생님이신데 현대문학을 담당하시고 아호가 ‘살매’이신 시인이시다. 종종 문단의 원로 문인들의 일화를 말씀해주시곤 하였다. 후에 동기인 임채진군을 사위로 삼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현대시론을 강의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한데 유명을 달리 하신지 오래 되었다. 제자 사랑이 유별나다고 소문이 났다. 6반 담임은 송종근(宋鍾根) 선생님으로 매우 어렵다는 물리를 담당하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강의하셨으며, 평생토록 교단에 서신 것을 긍지로 가지신 분이었다. 7반 담임은 최병달 선생님이시며 필자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경북 청도 출신으로 경북고 출신이며 영어를 담당하셨는데 사모님의 병환으로 인해 밝은 모습 대신에 과묵하셨지만 제자에 대한 사랑은 돈독하였다. 30주년 때 칠언절구의 한시(漢詩)를 지어 드리니 무척 즐거워하셨다. 8반 담임 선생님은 백대인 선생님으로 수학을 담당하셨고 별명이 ‘백도사’로 유명하였다. 수업시간에 “응 이렇게 하면… ” 언제나 즉석 풀이로 우리들을 매료시키는 낭만파였다. 당시 3학년을 담임하셨던 선생님들은 모든 면에서 훌륭하시어 성품이 인자하시고 원만하실 뿐만 아니라 제자 사랑이 유별나시어 언제나 우리들이 존경하신 분들이었다. 성격도 다혈질적이고 박력 있는 분이 안계셔서 그런지 동기 대부분은 세파를 많이 타는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이 별로 없다. 대신에 평범하게 사는 대학 교수, 의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 금융인, 개인 사업가 등이 많다. 이것이 모두 스승님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모교는 구봉산을 뒤로 하고 앞에는 부산 앞 바다가 바라보이는 자리에 있어 누가 보아도 명당 터에 자리잡았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들은 쉬는 시간에 푸른 바다를 보고 청운의 꿈을 키웠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은 구봉산에서 구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등산을 즐기면서 호연지기를 키웠다. 언젠가 10월 보름날 주금돈군하고 소주 한 병 들고 구봉산 능선에 올라 달빛에 난반사되는 금파(金波)를 바라보며 즐겼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 주금돈은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목사가 되어 있다. 기억나는 것은 소풍으로 간 곳이 태종대였는데 당시 인기 배우 문 희가 현장 촬영 중이라서 문 희의 실제 얼굴을 보았다. 키도 자그마한 하고 얼굴도 작은 느낌이었다. 동백섬에도 소풍을 갔으며, 다대포로 소풍을 간 것으로 기억이 난다. 수학여행은 2학년 때인 1969년 5월 초에 제주도에 갔다. 버스를 타고 용두암, 협제굴, 삼성혈, 산방굴, 천지연, 천제연 폭포, 정방폭포, 수목원, 금녕사굴, 성산일출봉 등을 구경하였다. 제주도 올 때는 도라지호를 탔는데 문제는 가는 날 태풍이 불어 타고 갈 배가 없어 하루를 제주시에 숙박하였다는 사실이다. 단체 영화도 보는 등 제주시내를 쏘다니다가 중학교 동기를 중국집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결국 큰 배가 없어서 학생들을 반으로 이분하여 4반까지는 성산포로 가서 배를 탔으며 이후 네 개 반은 제주항에서 중형의 목선을 타고 돌아오는데 심한 풍랑으로 인하여 대부분 뱃멀미로 인사불성이 되어 다음날 새벽이 되어 모두 깨어났다. 당시 배안에는 여대생들도 많이 승선하였는데 뱃멀미에 모두 초죽음이 되니 본의 아니게 남녀혼숙이 되어버렸다. 뱃멀미로 인한 그 고통이야말로 생전 처음이었다. 개교기념행사는 축구, 배구, 농구시합을 주로 하였으며, 11월 학생의 날에도 교내 체육를 열어 반별 대항 육상 및 줄다리기를 하였다. 당시 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입후보한 김길진, 김용준, 김종명 중 김길진이 당선되었고 부회장에 입후보한 사람은 이병조, 정기택, 배성우, 김인곤이었다. 따라서 학생회 구성은 이들과 각 반장들인 강우현 등과 김동진 등이 임원 활동을 하였다. 전체 대대장은 목소리 큰 김병곤이었다. 스승의 날에는 기념행사를 하여 스승님께 감사를 표시하였다. 학부형을 초청하여 어버이 학교를 열었다. 해마다 교련합동 검열을 받았으며, 열병과 분열을 위한 연습을 열심히 하였다. 심지어 행군대회까지 참여하였다. 또한 일일 입대하여 제식훈련, 유격훈련, 승선훈련 등을 받았다. 가을에는 축제 기간 중에 교내 음악회를 열었으며, 교내 미술전시전도 하였다. 기율반은 정영오, 이인영, 황창윤, 김태근, 신복기 등이었다. 교련시의 중대장도 엄경섭, 강우현, 손병운, 김용준, 정행석, 정기택, 이화균 등이 담당하였다. 특활활동 중 도서반은 서은규, 이채원 등이 활동하였으며, 문예반은 김상수 등이 담당하였으며, 지도교사는 이병수 선생님이셨다. 신문반은 이병구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임규순 선생님이셨다. 독어반은 김길진, 정영오, 김창홍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백원호, 감재실 선생님이셨다. 물리반은 김칠상, 김진우, 이정민, 박상욱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송종근 선생님이셨다. 생물반은 김종욱, 문무훈, 최경룡, 이장수 등이었다. 지도교사는 신창식 선생님이셨다. 생물반은 이때 “낙동강 재첩의 생태조사”를 교육과학 전시회에 출품하여 입상하기도 하였다. 화학반은 정필현, 허성일, 고인수, 허진욱 등이었다. 지도교사는 이형수 선생님이셨다. 방송반 및 시청각반은 이상용, 심한배, 허진욱, 이창렬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신창식 선생님이셨다. 음악부는 정기택, 김원갑, 차정섭, 오귀문, 조광제, 정국모, 차정섭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손영세 선생님이셨다. 미술부는 박세형 등이었으며 가을에 미술전시를 하였다. 유도반은 조경환, 김성봉, 조광제, 정행석, 김영근, 김형수, 한종택 등이었다. 지도교사는 홍범호 선생님이셨다. 씨름반은 김동진, 신복기, 황창윤, 이성호, 정진석, 정행석 등이었다. 지도교사는 구갑석 선생님이셨다. 육상반은 문광수, 오영우, 김성봉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김원소 선생님이셨다. 검도반은 박영갑, 우승연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최병규 선생님이셨다. 송구반은 이종식, 이진근, 정의태 등이었다. 역도반은 강우현, 김동진, 이종식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박성희 선생님이셨다. 당수반은 염규복, 이창렬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심모섭 선생님이셨다. 농구반은 신정봉, 김성봉 등이었으며, 수영반은 이병곤, 양진우 등이었다. 정구반은 김용준, 박영갑 등이었다. 학교를 대표하는 배구부는 김길진, 정필현 등이었다. 축구부는 김동진, 이창걸, 주금돈, 김성봉, 신복기, 윤태원, 박부일, 이종식, 신한옥, 정필현 등이었다. 원예반은 이환종, 박부일, 주금돈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안기문 선생님이셨다. 소년단반은 김수일 등이었으며, 원불교반은 정필현, 주금돈, 설홍수 등이었으며 지도교사는 김태홍 선생님이셨다. 도산반은 홍정기, 조관제, 장세용 등이었다. 지도교사는 김일규 선생님이셨다. 룸비니반은 성단경, 이수철 등이었으며 김태홍 선생님이 지도교사를 겸하였다. MRA반은 오귀문 , 김태근, 강병수 등이었다. PHSA라는 산악반은 설창효 등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활동도 진학을 위한 공부로 인해 1,2학년은 활발하였지만 3학년이 되어 다소 소극적이 되었다. 그리고 부산시내 학생체육대회에 참석하여 부산여고와 같이 합창을 하기도 하였으며, 모교의 야구부는 전국을 제패하는 등의 활동이 전국으로 알려져 있다. 야구부원은 주성로, 정동건, 조두복, 신중국, 홍일용, 차성철 등이었다. 구덕운동장에서 야구경기가 있는 날은 전교생이 응원을 가는 등 열성적으로 응원하였다. 신중국은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으며 졸업 후 상무 감독을 역임하였다. 주성로는 언더드로 투수를 담당하였으며, 졸업 후 한일은행에서 활동한 후 모교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전국대회 제패를 거듭하였다. 지금은 인하대학 감독으로 있으며,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여 세계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국위를 선양시켰다. 조두복군도 모교의 감독을 거쳐 고려대학 감독을 역임하였다. 24회의 분위기는 대체로 조용한 편이지만 다섯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세칭 서울대 법대, 의대 지향의 공부만 하는 일류파와 공부는 하되 자기 할 일만 하는 중도형파 및 공부는 하는데 주먹파와도 친한 외향성의 이류파, 자기 폐쇄형의 내향적인 성격파, 그리고 공부에 관심이 없고 잡기(?)에 능하고 자신이 주먹파임을 과시하는 형으로 구분되었다. 구공탄파인 3K 등은 새로 전학 오는 학우를 괴롭히기도 하였지만 원래 심성이 착하였다. 그 외 마운틴, 몬도가네파가 있어 모교의 기개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다. 1학년 때 목조교사가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마침 일요일이고 학교 뒤편에 있었던 관계로 전소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2학년 때는 방과 후 학교에서 대부분 축구를 많이 하였다. 가끔 대청동으로 동기들과 함께 탁구를 치려 다녔다. 오늘날의 탁구실력도 거의 그 때 쌓은 실력이다. 짝꿍이 유재희였는데 김세용, 문무훈, 옥선호, 정한모와 함께 여름 날 ‘무협지’를 마흔 권 정도 빌린 후 방문을 잠그고 읽기 시합을 해서 늦게 읽는 자가 책값을 내기도 하였다. 윤양현, 이영식과 함께 김해에 있는 박영갑에게 놀러가기도 하였다. 원불교에 다니는 주금돈의 권유에 따라 정필현, 설홍수 등과 월불교 교당에 다니기도 하였다. 어느 날 정필현, 박부식, 주금돈과 초량동의 밀주 집을 방문하여 과음한 일이 있었는데 그만 박부식이 뻗어버린 사건 아닌 사건도 있었다. 3학년 때 짝꿍이 정기택이었데 정기택은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이다. 그런데 옆에 앉은 정기택이 자꾸 막걸리 냄새가 난다고 하여 나에게 지난 밤 술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부인하기에 혼이 난 기억이 있다. 모두 재학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다. 동기생들은 뛰어난 친구들이 많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성단근 박사는 우주공학 분야에서 꼽아주는 학자이다. 포항공대의 최경만 박사도 뛰어난 학자이며, 인하대의 윤진호 박사도 경제학 분야에서 탁월한 학자이다. 또한 울산의대의 안태영 박사도 비뇨기과 및 남성학 분야의 대가이다. 교수를 역임하고 있거나 했던 동기들을 열거하면, 김영해, 김종욱, 김진근, 김진형, 김형수, 김세용, 나성린, 박세형, 박영규, 성단근, 안영직, 안태영, 양화식, 윤진호, 이국영, 이준식, 이환종, 정인석, 제해성, 조흥식, 하우봉, 강근택, 김부식, 김성태, 김수영, 김이석, 신복기, 오영우, 옥선호, 이종식, 정갑중, 정필현, 정한모, 최경만, 최병두, 하상조, 황창윤 등이며, 임진혁, 정길진박사는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도 40명이 넘는다. 또한 박사학위를 취득후 연구원에 근무하거나 학문에 매진하는 학자들은 정인수, 정소걸, 심상렬, 최광식, 최호신, 문대원, 구자용, 문외만, 이재룡, 이창걸, 정문건 등이 있다. 관계·법조계의 고위직에 있는 동기로는 임채진, 이수철, 차태균, 김해수, 박윤호, 김순규, 강대현, 이재구, 이재인, 이봉길, 문병우 등이 있으며, 국회에는 서병수가 있으며, 국영기업체 및 공공단체의 고위직에는 문무성, 권재욱, 엄경섭, 이영웅, 김성수, 김칠상, 전병룡, 강영수, 강주철, 서두석, 전경표, 조양욱 등이다. 변호사 및 변리사로는 구충서, 권영훈, 백강수, 이성오, 심연택, 조정래, 김달수, 김성봉, 정상태, 이병문 등이다. 감정사로는 이석영이 있다. 건축사로는 김영찬 등이 있다. 회계사로는 이원희 등이 있다. 의사로는 고영덕, 김갑식, 김성완, 김태근, 김성호, 이엽, 이수철, 이인섭, 이재웅, 정상립, 김경태, 김기룡, 김도균, 김수근, 김용준, 김진수, 김호준, 노응준, 박경환, 박대영, 박병규, 박성배, 박홍기, 백영철, 서우영, 선병호, 설창효, 신기영, 신문식, 양동규, 유진철, 윤성문, 이장수, 이진용, 이채원, 장경재, 전성환, 정흥태, 채규황, 허일오 등이다. 한의사는 김중배 등이며, 치과의사로는 강성수, 김진호, 정의태, 황영구, 윤임도, 이문한, 조재익 등이다. 약사로는 김태곤, 도광용, 김기술, 김하진, 이종철, 최성환 등이다. 금융 및 증권계 고위직에는 권혁추, 김무준, 김성년, 김영구, 김채윤, 김홍곤, 배동식, 송기문, 신태근, 여상식, 우승연, 윤태원, 이상원, 이술근, 이우석, 이재현, 이통천, 장세훈, 정동건, 황보윤 등이 있다. 교사로는 강진수, 고현민, 김범진, 김용태, 김천규, 문인우, 문정섭, 박천수, 서형석, 이일걸, 허성일 등이 있다. 언론계에는 홍정기, 한석동, 성기준, 최병찬, 안병권 등이 있다. 기업체를 운영하거나 고위 간부를 역임한 동기로는 강우현, 강성문, 강정웅, 권승. 권일, 권종근, 김길진, 김대원, 김옥근, 김상수, 김성욱, 김원갑, 김영근, 김영찬, 김성봉, 김수일, 김용수, 김인희, 김임석, 김지찬, 김평욱, 노익용, 문광수, 박도근, 박상식, 박영갑, 박영배, 박태웅, 박재길, 박현문, 반종규, 서은규, 서찬관, 설홍수, 성낙현, 성춘광, 손병운, 송원준, 송정원, 송태욱, 신성기, 심우경, 심한배, 안준호, 양기준, 양남규, 양숭문, 양진우, 오성철, 유재희, 오일호, 이대현, 이동정, 이병조, 이기영, 이상용, 이우열, 이인영, 이주호, 이창렬, 이학렬, 이화균, 임승태, 윤양현, 장문호, 장원관, 정국모, 정기택, 정영오, 정천조, 조경환, 조영준, 조영환, 조필제, 차성철, 최 윤, 최성범, 최점진, 최준철, 하태근, 한종호, 황철, 허진욱, 홍영근, 홍종화 등이다. 이처럼 각 분야에 뛰어난 동기생들은 대학을 진학 후 1973년도 가을 서울 문리대 대의원회 의장이던 박순권이 요절하면서 자연스레 모임이 만들었으며, 1975년 2월 김병곤의 출소 환영회에 동기들이 대거 모여 동기회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 때 동기회는 김길진, 김대원, 김영근, 김동진 동기를 중심으로 모임이 반복되었으며, 김영근이 다년간 회장 역할을 하는 등 구심점이 되었다. 1981년 10주년 때 결성되어 총동창회에 등록되었다. 재경 동기회장은 김대원, 김영근, 박윤원, 황영구, 김영근, 오일호, 박영규, 김태근, 이기영, 권종근, 성춘강, 정인수, 이통천, 한종호, 안준호, 김수일, 김원갑, 구충서, 이 엽, 이수철, 박현문이 회장을 맡았다. 역대 총무는 심우경, 윤태원, 박광흠, 여상식, 이화균, 홍문식, 이인영, 김수일, 여상식, 윤태원, 황태철, 이화균이다. 부산 동기회는 김길진, 권명수, 송태욱, 이우열, 이문한, 장문호, 조재익, 정흥태, 조영환, 이성호, 황창윤, 양돈규, 이학열, 성기준, 윤성문, 김기술, 조경환, 조정래가 회장을 맡아 동기생들을 위하여 고생하였다. 역대 총무는 김동진, 이창렬, 김태진, 백종국, 이정민, 남정배, 정국모, 조경환, 임병구, 손병운, 이종배, 이수건 등이 맡아 희생적으로 동기회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특히 1991년 20주년은 재경 동문 120명(부인 포함)이 부산으로 내려가서 부산 동기생 250명(부인 포함)과 함께 해운대 호텔에서 행사를 하고 모교를 방문하였다. 1996년 25주년 행사는 경주 보문호에서 서울, 부산 동기생들이 행사하기로 했는데, 서울 동기생 30여 명이 비행기에 탑승하였다가 다시 내려오는 등 기상악화로 인해 김포 근방의 회집에서 기념행사를 조촐하게 치루었다. 경주에는 총무단이 대표로 승용차로 내려가서 부산 동기생 80여 명과 어울렸다. 2001년 6월 9, 10일 졸업 3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윤성문 동기가 추진위원장을 맡고, 부회장에는 김기술, 부위원장은 이학렬, 박경환, 총무에는 남정배, 백종국, 정국모, 김길진, 김동진이 맡아 문집도 만들었다. 서울에선 김원갑 동기가 추진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에는 김대원, 총무에는 여상식, 윤태원이 맡았으며, 울산회장에는 김성청, 마창회장에는 강주철, 대전회장에는 정소걸, 인천회장에는 도광용이 맡아 성대하게 행사를 치렀다. 서울에선 새마을호 13, 14, 15호 차량을 전세 내어 대전 동기 부부들을 합한 150명이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 동기생들의 환대를 받았다.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개최된 행사에는 은사님이신, 김성근, 최병규, 심모섭, 임순규, 정호석, 손영세, 김일규 선생님께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었다. 45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선 모교의 교장선생님께서도 축사를 하시고 “존재의 이유”를 멋지게 열창하시어 인기를 모았다. 은사님께 선물도 증정 후 기념사진도 찍고 장기 자랑도 하는 등 유쾌한 시간을 보낸 후 숙소에 들어가서 2차가 시작되었으며, 해변 백사장에선 오래 만에 만난 동기생들의 음주 만담하는 노상 파티가 새벽 5시까지 성황을 이루었다. 7시경 해장국으로 속을 푼 다음, 일행은 중앙부두로 버스로 가서 관광유람선을 타고 영도 섬을 한번 돌아오면서 중식을 배안에서 먹었다. 정말 유람선을 탄 것도 처음이라 동기 부인들이 무척 즐거워하였다. 오후에는 모교를 방문하여 사진도 찍고 축구시합과 부인들의 팔씨름을 하였으며, 훌라후프 돌리기, 문과 이과 줄다리기를 하였다. 10년만의 모교 방문이다. 울산과 마산의 동기생 부부도 함께 참석한 자리라 삼삼오오 자리 잡아 대화를 나누었으며, 집행부에서 준비한 활어와 막걸리에 모두 취해 적조해진 동기생들 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소주, 맥주, 양주가 범벅이 된 화합주를 마시고 즐거워하였다. 얼마 남지 않는 35주년 행사와 10년 뒤의 40주년 행사 때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대학시절을 회고해보면 3공화국 시절, 유신독재에 항거했던 시절이라 우리 동기생들이 가장 많이 희생당하였다. 특히 민청학련사건시 김병곤군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재판관이 사형을 언도하니, ‘감사합니다’라는 대답을 하여 언론에 회자되던 사건이었다. 김병곤이 석방되던 날 동기생들은 광화문에 모여 환영파티를 열어 주었으며, 김병곤의 시국관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듣기도 하였다. 당시 동기생 한명과 나는 서울 외곽의 김병곤 집까지 가서 아버님을 만나고 왔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구로사건에 연루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던 김병곤은 위암 판정을 받고 요절하고 만다. 동기생 중 가장 뛰어난 김병곤이 지금 살아있다면 현 정치가 나아지지 않았을까하는 바램을 해본다. 김병곤과 친했던 권일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잡혀 들어간 인사로는 이 철, 유인태, 정동영, 이해찬도 있었는데 정동영은 바로 풀려나오고 권 일과 김병곤은 1974년 5월에 잡혀 들어가서 1975년 2월까지 형무소 생활을 한 후 군대에 끌려갔었다. 이후 사면 복권이 되어 1982년에 복학하였으나 무려 7년간을 허송 세월을 하였으니 그 심적 고초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외에도 내가 기억하기에는 데모사건으로 잡혀 들어간 동기생들이 수없이 많은데, 정기택, 장원관도 이 때 사건으로 졸업을 늦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필현과 전성환은 재일동포학생간첩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정도 형무소 생활을 하는 등 졸업도 4년이나 늦게 하는 심적 고통을 당하였다. 동기생 중에는 유명을 달리했던 친구들이 많이 있지만, 재무부의 이종훈 서기관의 타계는 특히 마음이 아팠다. 최근 노순일 동기생 사망 후 유가족 돕기를 하여 성금을 전달하였다. 동기회에는 여러 친목단체가 있는데, 서울이나 부산에선 등산모임이 제일 크다. 서울의 등산회 이름은 청관회라 부르고 있다. 지금 회장은 반종규이며, 매년 지리산 종주와 한라산 동계 산행을 실시하고 있으며, 서울 주변 명산의 대부분을 답산하였다. 부산은 ‘부부산악회’로 부르며, 부산 인근 명산은 모두 등산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6, 7일에 안동에서 일박한 후 청량산을 55명이 합동 등산하여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이 산행은 장문호, 박윤호 등산회장이 주관하였으며 부산의 조경환, 서울의 이수철 동기회장이 참석하여 후원하였다. 1994년도 계룡산에서 부산, 대전, 서울의 동기생 80여 명이 합동 등산 후 두 번째 합동 산행이었다. 다음으로 테니스 모임이 있는데 서울은 활동이 부진한 반면 부산은 활발하여 2001년엔 청조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하였다. 회장은 옥선호가 맡고 있다. 부산의 달리기 모임에는 ‘아사달’이 있다. 회장은 김달수이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등 무조건 달리기만 한다. 부산의 낚시회는 박병규가 회장을 맡고 있으며, ‘문화동호회’는 김기룡이 맡고 있다. 지역별 및 직장 별로 소모임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부산의 중석회(중구 모임, 회장 이성호), 럭키동기회(온천장 주위, 회장 서운규), 해운대지구 동기 모임은 윤성명 동기가 회장이다. 남수영지구 동기회는 김수영이 회장이다. 부산동기회의 특징은 동기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봄소풍을 5, 6월에 해마다 실시하고 있으며, 매년 여름에는 음악을 하는 동기 및 가족들이 출연하는 ‘예술의 밤’을 진행하여 동기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에선 80년대 서울의 금융단 모임이 있었지만 지금은 해체된 상태이며, 골프 모임인 ‘이사회’는 김수일동기가 주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두 달에 한번씩 동기회를 개최한다. 특히 2001년 6월 3일 24회 야구단은 제28회 총동창회장기 대회에서 4연패를 하여 우승기를 영원히 우리 것으로 한 바가 있다. 영예의 선수 명단은 조영환, 신중국, 염규복, 주성로, 홍일용, 조두복, 양돈규, 현필성, 구득수, 이학렬, 정동건, 차성철, 박종곤, 김동진이다. ‘아스라이 부산중고24동기회보’도 2000년 3월 24일에 창간하여 현재 24호가 넘었으며, 백종국, 김길진, 이대현군이 수고하고 있다. 서울과 부산 거주 동기생들 간에 적절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에는 ‘시시제(齋)’라는 동기사무실을 여상식 동기의 노력으로 2001년 북창동에 개설하였는데 지금은 김수일 동기 사무실에 두고 있다. 이젠 우리 동기들도 지천명의 나이도 훨씬 지났다. 남은 여생이나마 동기생들과 만나 오순도순 즐겁게 살아야겠다. 3년 전 졸업 30주년을 기념하여 지은 “동학회고음(同學懷古吟)”으로 마무리한다.(액자는 김원갑이 소장) |
첫댓글 서울동기회에서 퍼왔슴다.
내 이름 오자 수정할 수 없을까?
벌써 다 올라갔는 모양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