毒魚
[신춘문예 당선작] 이정은 '毒魚'
집을 나서기 전에 딱히 잡고 싶은 놈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비해 장비가 많다. 돔이면 돔, 정어리면 정어리로 정해놓아야 봉돌이건 바늘이건 필요한 것만 가져왔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운이 좋아 바다 가까이 편편한 바위로 자리를 잡았다.
바다의 빛깔도 검지 않은 게 해초도 피한 것 같다. 나는 간이의자를 펴고 앉아 바다 공기를 한숨 들이켜본다. 초여름 갯바위를 베고 지나가는 바람은 신선하고 차갑다. 바람은 옅은 편인데 파도는 물이 드느라 꽤 거세다.
물때가 바뀌는 시간이라 바다 밑에서 노니는 놈들도 일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나는 아직도 어떤 놈을 노릴 것인지 정할 수가 없다. 그래도 종아리까지 튀어 오르는 파도의 느낌이 참 좋은 날이다.
나는 바늘과 봉돌 그 외 작은 도구들을 담아 놓은 플라스틱 상자 뚜껑을 연다. 오른쪽에 봉돌이 킬로그램대로 가지런하다. 다른 쪽에는 돔잡이용 바늘들이 크기대로 갈치잠을 자듯 나란히 놓여 있다. 투명한 반지 케이스 안에 한쪽이 잘려나간 상어잡이용 바늘이 반짝 빛을 낸다.
정어리용 인조미끼는 세 개나 되는데 포장은 여태껏 뜯지 않은 상태이다. 대부분 엄지손가락만하게 크거나 새끼손가락보다 작아서 쓰임이 잦지 않은 것들이다. 바늘들은 크든 작든 간에 모두 예리하다.
때문에 나는 잡은 고기의 입에서 바늘을 뺄 때마다 손끝에 피를 보곤 한다. 물에서 공기 속으로 던져지는 놈들은 이리저리 펄떡거리며 죽겠다고 난리다. 목장갑이라도 끼고 있으면 바늘 빼는 일이 그리 부산스럽지는 않을 텐데 손끝의 느낌을 놓치기 싫은 탓에 나는 때마다 미끈거리는 녀석들의 비늘과 전쟁을 치른다.
그러다 보면 개중 이빨이 날카로운 녀석에게 베이기도 하고, 뽑은 바늘을 손가락에 꽂은 채 펄떡거리는 녀석을 아이스박스로 옮기기도 한다. 그래서 내 손은 항시 바늘 흉터를 안고 산다.
미끼는 냄새가 날수록 좋다. 홍합이나 새우처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살갗에 배고 마는 강력한 비린내를 가진 미끼는 특히 돔이나 광어를 노릴 때 필수품이다. 하지만 나는 홍합도 새우도 쓰지 않는다. 냉동멸치만 쓴다.
연한 살 때문에 자주 떨어져 나가고 해동이 되면 피를 흘리기도 하는 냉동멸치를 고집하는 이유는 생선을 잡기 위한 생선이라는 점 때문이다. 자신과 닮았지만 다른 무엇인가에 이끌려 덥석 사랑에 빠지듯, 차가운 체온과 비릿한 향내에 이끌려 녀석을 물고 올라오는 생선들.
나는 그런 놈들이 좋다. 너무 사랑해서 연인의 뇌를 먹어버렸다는 어느 여인처럼 생선을 먹는 생선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실인가. 나는 잠깐 한 뼘 만한 미끼용 멸치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토막을 내어 작은 고기들을 노릴 것인지, 아니면 성질이 급하고 덩치가 큰 놈들을 노려 생선째 던질 것인지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다. 아버지는 늘 돔을 노렸다.
바늘도 돔잡이용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돔잡이용 바늘은 평범한 ‘J’ 자 모양인데 끝이 갈라져 ‘사람 인(人)’자를 거꾸로 해 놓은 듯하다. 그래서 고기들은 한 번 물기만 하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 아버지는 늘 ‘인’자를 덥석 삼킨 놈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어떤 녀석이든 사람을 물면 뱉지를 못해. 사람도 똑같아. 한 번 물면 끝이야.”
아버지와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나 또한 돔잡이용 바늘이 좋다. 개중에 빼내는 것이 가장 간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어리용 인조미끼에 비하면 돔잡이용은 양말을 꿰매거나 단추를 달 때 쓰는 바늘만큼이나 단조로운 것에 속한다. 인조미끼의 바늘은 꼬리에 세 개의 바늘이 각각 일정한 간격과 방향을 유지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확히 중심에 축을 두고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입이 아무리 큰 정어리가 걸려도 바늘은 녀석들의 입천장과 아래턱에 박혀버린다. 간혹 뭣도 모르고 인조고기를 한 입에 삼킨 놈들 때문에 배를 갈라야 하는 일도 생기곤 했다.
얼마 전 나는 정어리를 잡았다. 바보같이 무작정 놈의 아가리를 벌리고 바늘을 잡아 뺐다. 장이 같이 딸려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피를 토하는 생선이라니, 팔뚝보다 크고 굵은 놈이 속을 다 빼앗긴 채 입만 뻐끔거리는 모양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녀석은 마지막까지 목숨의 끈을 놓지 못하고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나는 놈을 놓아주거나 미안해 하거나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한 플라스틱 미끼를 물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장까지 빼어준 한심한 녀석이 보기 싫어 아이스박스 안으로 휙 던져버렸다. 사람과 물고기가 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
물고기는 바늘을 무는 그 순간 죽음으로 달음박질한다는 것을 느낀다. 따가운 햇살 아래 비늘을 번뜩이며 팔딱거려 보지만 이미 죽음과 직면했을뿐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미끼를 물고도 죽고 사는 것에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낚시꾼이 된 줄로만 알고 서로를 팽팽하게 당길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미끼이고, 다른 누군가는 낚시꾼이다. 그렇다면, 그와 나 중 낚시꾼은 누구였을까?
나는 정어리용 인조미끼의 포장을 벗긴다. 형광색 바탕에 은색 무늬, 부자연스럽기만한 꼬리. 아무리 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화려함이다. 낚시에 걸리는 정어리들은 대체로 큰 편이지만 회로 먹어도, 구워 먹어도, 육질이 그다지 부드럽지 않고 푸석푸석하기까지 해서 별로 매력적인 고기가 아니다.
나는 인조미끼를 포장 안에 다시 넣고 상어잡이용 바늘에 눈길을 돌린다. 상어잡이용은 바늘 중에서 가장 섬뜩한 기분을 들게 한다. 돔잡이용 바늘 세 개가 고리로 이어진 게 꼭 중세 때나 썼던 고문도구 같아 보인다.
나는 바늘을 봉돌과 함께 낚싯줄에 엮는다. 그리고 첫번째 바늘로 아가미 바로 아래쪽을 겨냥하다 말고 눈알을 헤집어 관통시킨다. 아가미 아래쪽이 꿰기는 쉬우나 그 만큼 헐거워서 미끼를 놓치기 십상이다. 이미 윤기가 빠져나간 채 불거져 나온 눈알은 박혀 있으나 빠져 있으나 별반 의미가 없다.
어차피 바다를 보는 것은 녀석의 눈이 아니라 내 손끝이니까. 두번째 바늘은 반대쪽 배에, 마지막 바늘은 그 반대편 꼬리쪽 몸통에 살짝 돌려 깊숙이 끼운다. 바늘이 미끼의 살을 파고 들어가 뼈에 걸리는 소리를 손끝으로 듣는다.
서걱, 뼈와 뼈가 부딪치는 듯한 이 서늘한 느낌을 꼭 확인해야 한다. 이 소리는 바늘이 얼마나 안전하게 미끼를 잡고 있는지 알려주는 내 눈인 것이다. 아직 해동이 덜 된 냉동멸치는 휘어진 허리에 단단히 바늘을 휘감고 있다.
나는 왼손으로 낚싯줄과 낚싯대를 움켜쥐고 안전핀을 푼다. 그리고 낚싯대를 머리 뒤쪽으로 넘겼다가 손목을 꺾는다. 손목의 스냅이 좋다. 봉돌을 따라 냉동멸치는 포물선을 그리며 뻗어나간다. 휘익, 휘파람 소리를 내며 줄이 풀린다.
냉동멸치의 회귀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미끼가 '퐁당' 하고 떨어진 바다에는 옅은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해가 뜬 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바다는 설탕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이 반짝인다. 햇살이 흩어진 달콤한 바다! 한 스푼 떠서는 향이 좋은 커피에 소르르 타서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그날도 햇살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날이었다. 아침에는 잠깐 이별하기에 좋은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이미 떠나버린 내 마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선명하게 보여주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그와 나는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북한강 줄기가 보이고 저녁이면 통일호 열차가 기적을 울리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사실 이미 헤어지겠다고 마음을 잡아놓고 그를 본다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으나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기도 했고, 다시는 나를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 않은 욕심이기도 했다.
그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아무런 물음도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자마자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잠깐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면서 제발 어설픈 변명이나, 이유도 없는 사과 따위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우습게도 그는 내가 한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결혼에 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조금 다르게 더 정확하게 고쳐 말했다.
“이봐요. 조병기 교수님. 모르겠어? 당신이 실수한 거야. 그냥 조용히 당신 아내한테 돌아가. 난 당신 아이를 만들 생각도 당신이랑 같은 집에 살 생각도 애초에 없었어.
있던 애도 없앨 판에 남의 애까지 떠맡으며 사는 거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자기도 그냥 바람이었잖아. 나도 마찬가지였어. 생각을 해 봐. 내가 미쳤다고 주위 사람들한테 못 들을 욕 들으며 유부남이랑 살림을 차리겠어?”
나이보다 순수한 면을 많이 갖고 있던 그라서 그랬을까. 그의 눈빛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별보다 나에 관한 배신감이 더 컸을 터였다. 그 사이 헤이즐넛 커피가 우리 앞에 놓여졌다. 역시나 그곳의 헤이즐넛은 향이 은은하면서도 오래 가는 것이 매력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커피 향 덕분에 몸에서 올라오던 비린내가 조금 덜한 것 같았다. 생리가 끝난지도 여러 날인데 비릿한 악취는 내 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티스푼으로 하얀 설탕을 떠서는 내 커피잔에 넣어주려 팔을 들었다.
나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는 그의 손목을 쳤다. 설탕가루가 탁자 위에 쏟아졌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언제나 회를 치기 전 고기의 머리를 칼등으로 내리친다. 그러면 녀석은 잠시 기절을 한 채 감지도 못하는 눈으로 공허하게 나를 쳐다본다.
나는 녀석의 비늘을 하얗게 긁어낸다. 내장을 빼내고 대가리를 쳐내려고 칼날을 세우면 새하얀 아가미가 달싹거린다. 짧고 날렵하게 아가미 아래로 칼날을 꽂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가 튀고, 녀석도 깨어난다.
대가리가 생각 외로 클 경우에는 무딘 칼에 으끄러지는 녀석의 대가리를 보고 마는데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럴 때면 칼등에 무게를 실어 으끄러진 대가리를 빨리 잘라낸다. 어쨌든 가장 좋은 방법은 단 칼에 녀석의 대가리를 쳐내는 것이다.
그러면 녀석은 사력을 다해 꼬리를 치켜든다. 하늘로 뻗은 녀석의 꼬리는 싱싱하다는 증거이다. 나는 녀석의 살만 발라내어 찬 바닷물에 헹군다. 녀석의 발가벗은 살은 투명하다. 나는 그 즉시 듬성듬성 썰어 빨간 초고추장에 찍어 입안에 넣는다. 어금니에 감기는 육질은 언제나 부드럽고 쫄깃하다. 녀석의 사명은 내가 그 맛을 음미하는 여기까지다.
톡. 톡. 톡.
무엇인가 입질을 시작한다. 나는 잔뜩 긴장을 하고 얼레를 감는다. 꽤나 묵직한데 느낌이 좋지 않다. 무게에 비해 반항이 약하다. 이럴 때면 백이면 백 복어다. 복어 새끼들이 아침부터 극성이니 오늘 대물을 기대하기는 그른 것 같다.
녀석들이 미끼를 다 먹어치울 것이다. 그래도 바다에 사는 복어가 걸어다니는 놈들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고기는 그 겉모양으로 복어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능한데, 남자는 다르다.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대물인지 한낱 복어떼 중 하나인지 구별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놈을 바늘에 매단 채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놓아주는 것을 결정할 수 있다.
복어 같은 남자라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복어는 시력도 기억력도 어느 하나 뛰어난 것이 없다. 언제나 놈들은 놓아주어도 다시 미끼를 물고 올라온다. 한 번은 헐겁게 끼운 미끼가 스냅의 반동에 날아가 버린 적이 있는데 그날만큼 복어에게 진저리친 적이 있었을까. 나는 미끼가 날아갔으니 당연히 바늘을 거두려 얼레를 감았다. 그런데 낚싯대가 마치 살아서 버티려는 것처럼 다루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느끼던 손맛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겁고 흔들림이 둔한 무엇인가가 걸려든 것이다. 얼레를 감고 있던 손이야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머리 속으로는 물에 퉁퉁 불은 시체나, 고기를 잡으러 잠수를 하던 갈매기 같은 것들을 낚아보았다는 이들의 얘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물체는 수면 바로 아래에서 흰색과 푸른색으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기어코 놈이 형체를 드러냈다. 미끼가 날아간 바늘에는 세 마리의 복어가 걸려 있었다. 이십 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던 복어 한 마리는 엄지손톱 만한 입에 빈 바늘을 걸고 있었고 그 보다 훨씬 작은 두 마리는 나머지 바늘에 등이 걸려 올라왔다.
바늘 빼는 일도 쉽지 않은 녀석들이 세 놈이나 걸리다니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오늘도 자리가 좋다 싶었는데 역시나 복어떼가 덤벼드는 것이 재수가 좋은 날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미끼를 던지고 기다리는 동안 맞은 편 절벽과 어우러진 바다를 보기에는 좋은 곳이라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다.
나는 잡힌 복어를 바다로 던지려다 말고 갯바위 위쪽으로 던진다. 어차피 바다에 던져도 복어 머릿수만 채울뿐 하등의 이득도 없다. 말려 죽이는 게 한 마리라도 더는 게 되지 않을까. 나는 다시 미끼를 바늘에 걸어 멀찍이 던지고 간이의자에 앉는다.
누군가가 회를 뜨는지 초고추장 냄새가 난다. 침이 고이자 입안의 상처가 따끔거린다. 나는 혀끝을 움직여 상처를 살짝 핥아 본다. 옅은 피맛이 난다. 상처가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새살이 돋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어느새 해는 머리 위를 비추고, 파도도 잦아든 것 같다. 바다는 하얀 도화지처럼 조용하고 평온하다.
이따금 지나가던 고깃배도 점심 시간이라 드물다. 저렇게 잔잔한 바다 아래 나의 고기들은 그네들 나름의 낚시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놈도 물결 아래 어느 곳에서 한낮의 평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놈의 이름은 블루 샤크(Blue shark). 나는 놈을 보았다. 그것도 내 낚싯대에 매달려 세차게 몸을 흔들어대던 그 놈을 보았다. 푸르고 미끈한 등과 날렵한 지느러미는 햇살에 부서지며 더 짙게 더 윤이 나게 푸르렀다.
나는 그때의 모든 세세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낚시보다는 등산이 더 어울릴 법한 그 날씨도, 한 점의 바람도 없이 힘차게 쳐대던 파도도 아직 눈에 선하다. 녀석은 손목을 후려치는 듯 거세게 미끼를 건드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서며 양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낚싯대는 머리채를 잡힌 채 이리저리 끌리듯 중심을 잃었다. 나는 얼레를 감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녀석은 발 밑에서 빙글빙글 돌았는데 대강 삼사 미터 정도 아래에 있었다. 녀석의 동태를 확인하는 것은 손끝으로 전해오는 느낌들로 충분했다. 녀석이 얼마만큼의 속도로 내 밑을 돌고 있는지 얼마나 깊은 수심이 팽팽한 낚싯줄에 잘려나가는지 또렷하게 보였다.
녀석이 지느러미를 왼쪽으로 휠 그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천천히 조용히 얼레를 감았다. 녀석과 나는 서로 낚싯줄을 잡아당겼다. 서서히 수면 위로 녀석이 얼른거리며 나타났다. 손목의 스냅. 녀석이 몸을 드러냈다.
감청색 지느러미가 파란 하늘에 선을 그었다. 진주빛 배는 종이비행기처럼 가볍고 날렵하게 파란 선을 따랐다. 툭! 나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은 하늘을 날아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날렵한 지느러미로 물살을 가르며 유선형으로 가볍게 미끄러졌다. 내 손을 거친 어떤 녀석들도 상처를 가지지 않았다. 녀석들은 뼈만 남기고 나의 입 속으로 때로는 다른 이들의 입 속으로 자맥질했다.
그것이 녀석들과 나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놈에게 상처를 남겼다. 아직도 놈의 입 속 깊은 곳에는 잘려나간 내 세번째 바늘이 박혀 있을 것이다. 이제 여름도 초입을 넘겼으니 녀석이 나타날 때도 멀지 않았다. 나는 그 때까지 꾸준히 이곳을 찾으며 감각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사실 돔 같은 대물도 익숙하지는 않으니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걸렸다!”
갯바위 뒤편에서 어느 사내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린다.
“으허허허. 흑돔이다. 흑돔.”
보통 한낮에는 흑돔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사내는 오늘 운이 좋다. 아버지도 사내처럼 흑돔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기록은 오십육 센티였는데, 내가 대학을 가고 낚시에 소원해질 무렵 올렸던 기록이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계속해서 육십 센티가 넘는 돔을 찾아 나섰다. 놈을 잡아서는 독수리나 오리처럼 박제를 해서 거실 한 가운데 둘 것이라 했다. 흑돔은 나의 블루 샤크보다 못한 놈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흑돔에 관한 애정만은 높이 샀다.
아버지는 나와 낚시를 다닐 때는 언제나 하루 코스의 바다를 좇았으나, 육십 센티짜리의 목표가 생긴 후로는 거의 모든 주말을 갯바위에서 보냈다. 가끔은 주중에도 가는 눈치였으나 회사가 요즘 불황이라는 말을 자주 했고 억지로 투덜거리며 출장짐을 꾸렸다.
아버지가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 모습에서 엄마와 내가 아버지의 은밀한 출장을 눈치 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반면 엄마는 아이스박스에 담겨온 아버지의 흑돔들을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 위칸에 쿡, 처박아 버리거나 고춧가루가 시뻘겋게 들어간 매운탕만 끓였다.
아버지는 싱싱한 놈들은 회를 쳐야 제 맛이라며 툴툴거렸지만 땀을 뚝뚝 흘리며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며 매운탕을 떠먹었다.
엄마는 아이스박스 안에서 살아남은 고기를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아가미가 달싹거리는 게 아까워 아버지가 회라도 치려 들면 집안에 비린내가 밴다며 짜증을 냈다. 나는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치를 떨었던 것은 비린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윗도리에서 나는 싸구려 향수냄새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툭. 툭.
분명히 또, 새끼 복어떼다. 다른 바닷고기들은 이렇게까지 둔하지 않다. 유난히 놈들만 경계심이 적어 한 번에 덥석 물고 만다. 놈들은 이름도 많다. 풍선처럼 배를 부풀린다고 해서 벌룬피쉬, 돌처럼 딱딱한 피부 때문에 락피쉬, 독을 가지고 있어서 포이즌피쉬라고 불린다. 또 푸른빛을 띠는 놈들은 블루피쉬라고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복어에게 파란색은 과분한 빛깔이다. 놈들은 누구에게든 홀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놈들만 나타나면 미끼가 남아나질 않는다. 지금 놈들은 내 미끼를 건드리고 있다. 이미 바늘을 물어버린 놈도 있고, 아직 운이 좋은 놈들은 허리고 머리고 할 것 없이 냉동멸치를 물어뜯는다. 낄낄거리며 아가미를 들추고 지느러미를 한 올 한 올 씹어댄다.
큰 파도가 몇 차례 녀석들을 치고 지나가지만 놈들은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 마냥 둥둥 떠서는 냉동멸치 뜯기에 여념이 없다. 허탈한 마음으로 천천히 얼레를 감아 올린다.
“허허. 저 아가씨 오늘 복어로 잔치하네 그려.”
복어 두 마리. 오른편 갯바위에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던 낚시꾼 둘이 싱거운 소리를 해댄다. 나는 그네를 쳐다보고 어색하게 웃어준다. 그리고 반대편 갯바위로 터를 옮긴다. 상어잡이용 바늘을 끊고 새끼손가락 만한 바늘로 바꿔 맨다.
남은 미끼의 아가미에 칼집을 넣고 칼을 바짝 뼈에 붙여 살만 발라낸다. 사람은 사람을 먹지 않는다. 돼지도 돼지를 먹지 않으며, 개도 개는 먹지 않는다. 그러나 생선은 생선을 먹는다. 이 덕분에 나는 미끼가 떨어질 무렵이면 냉동멸치 토막으로 새 미끼를 잡아 올린다.
새 미끼라 함은 작고 쓸모 없는 이를테면 가시만 많고 먹을 것이 없거나 기름기가 많아 회로 먹지 못하는 것들을 말한다. 놈들은 아직 새끼라 큰놈들보다 야생성이 덜해 잡아 올리기가 쉽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냉동멸치는 동강이 나 손바닥만한 놈들의 입안에 있다. 신선한 미끼 세 마리는 냉동멸치를 소화시키기가 거북한지 입을 뻐끔거리며 나는 쳐다본다. 가만히 내려다보지만 도무지 녀석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저 한 눈에 봐도 별로 비싸지도 특이하지도 않는 평범한 바닷고기다. 나는 개중 팔딱거리는 게 유난히 거슬리는 한 놈의 대가리를 누른 채 아가미 아래쪽에 칼집을 넣는다. 그리고는 칼을 눕혀 뼈를 따라 살을 도려낸다.
살집이 반쯤 배어내진 고기는 뭣도 모르고 꼬리를 쳐댄다. 나는 들어낸 살을 엄지손가락 만하게 잘라서 ‘U’자 모양으로 바늘에 끼워 다시 바다로 던진다. 아마도 입질은 시간이 좀 흘러야 할 것이다. 갓 잡은 미끼들은 그 비린내가 냉동된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 때문에 놈을 썰어 바다에 던져 놓으면 평소보다 입질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나는 낚싯대를 적당히 고정시킨다. 정수리를 내려 쬐던 해가 옆으로 살짝 비켜 선 게 조금 있으면 물이 빠질 시간이다. 달랑 미끼용 생선 두 마리만 들어 있는 아이스박스를 쳐다보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물때가 바뀌니 기대를 해 볼만도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아닌 듯싶다.
아침부터 방생을 간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도 억지로 낚시가방을 들고 나왔으니 무의식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낚시꾼보다 고기들이 먼저 안다. 일생을 야생에서 보내는 놈들이니 강자와 약자를 알아보는 것은 녀석들의 본능이다.
엄마가 방생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난 뒤부터다. 아니 정확히 그 일이 있었던 다음부터였다. 그 날 아버지는 오십 센티짜리 뱅어돔을 낚아오셨다. 녀석은 아이스박스 안에서 아가미를 달싹거리고 있었다.
흑돔도 아니고 목표에 달하는 크기도 아니었으나 분명 녀석도 무시못할 대물이었다. 나는 생기를 잃지 않은 녀석의 눈을 쳐다보며 아버지의 모험담을 들었다. 아버지는 잘 못했으면 낚싯대가 부러질뻔한 얘기부터 녀석의 입질이 얼마나 거셌는지 까지 신나게 풀어놓았다. 아버지의 과장된 모습에서 엄마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삼일이 넘게 연락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험담은 그리 신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 엄마는 아이스박스의 뱅어돔을 부엌으로 들어 옮겼다. 그리고 조용히 저녁상을 준비했다. 조용히. 조용히. 너무도 조용해서 상기된 아버지의 목소리마저도 무성영화 배우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뻐끔거리는 아버지와 조용한 엄마의 상차림에는 카랑카랑한 변사의 설명이 필요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엄마가 오후에 잠깐 외출을 했던 것과 아버지의 과장된 눈빛에 관한 설명이 내게도 필요했다.
탁! 탁! 탁!
갑자기 그 고요를 깨는 엄마의 칼 도마질 소리는 유리창에 금이라도 낼 것 같았다.
“여보, 돔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
아직도 돔은 아가미를 달싹거렸는데, 눈빛은 생기를 잃지 않고 있었는데, 꼬리를 턱턱 쳐대고 있었는데, 엄마의 칼은 돔의 허리에 눈에 배에 박혔다가 나왔다. 엄마의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비늘이 사방에 튀었다. 벌어진 놈의 살점 사이로 비늘이 박혔다.
박힌 비늘은 꽂혀 드는 칼날에 갈라지며 더 깊이 박혔다. 나머지 비늘들은 엄마의 앞치마와 얼굴에 마구 튀었다. 장이 터졌는지 쪼개진 비늘에도 마구잡이로 흩어지는 비늘에도 핏물이 얼룩져 있었다. 엄마의 칼질은 쪼개진 놈의 눈에서 하얀 알이 불거져 나오고 너덜너덜한 배가 두 동강이 나서야 멈추었다. 엄마는 반짝거리는 비늘 위에, 새빨갛게 흩어진 핏방울들 위에 털썩 주저 않았다.
그리고 울었다. 그 때까지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순간 사랑에 빠지듯 헤어지는 것도 어느 한 순간이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이혼은 너무도 쉽고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 후 엄마는 틈이 나면, 마음이 소요해지면 방생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만 변두리로 집을 옮겼다. 나는 보름에 한 번씩 엄마의 새집에 들르곤 했는데 가끔씩 기운이 빠진 바닷고기들이 빨간 고무통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어느 바닷가 어디쯤에서 방생을 하고 있을까. 물이 드느라 파도가 높아지는데 바닷바람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가 걱정이 된다.
“아이고, 아가씨 오늘 복어잔치 하느라 잔챙이 두 마리뿐이네.”
아까부터 힐끔거리며 내 쪽을 보던 낚시꾼이 어느새 등 뒤에서 아이스박스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휑뎅그렁한 아이스박스를 보고 뭐라 하는 복어 같은 사내가 짜증이 난다. 잠깐 손을 놓았던 낚시를 다시 하게 된 것은 한 집에 살지 않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고기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는 재미를 안 후로는 혼자서도 갯바위에서 시간 보내기를 즐겼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는 이런 날에는 꼭 멍청한 복어들이 주위를 서성인다.
“아가씨 솜씨가 없구먼. 내가 한 수 가르쳐 줄까?”
값어치도 없고 야생력도 없는 멍청한 복어들은 죄다 쓸데없는 독만 가지고 있다. 이런 부류의 남자들에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쳐다보거나 대답을 해주는 따위의 행위들은 미끼가 빠진 바늘을 감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나는 잡아 놓은 미끼를 모두 바다에 쏟아버린다.
“허참. 성질머리하고는…”
몸통이 온전한 녀석들은 잠시 기절해 있었는지 물위에 몇 초간 떠 있다가 바다 아래로 자맥질한다. 왼쪽 배가 없는 녀석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녀석은 아직도 왼쪽 배가 사라진 것을 모르는 지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곧 스스로의 목숨이 다해 죽거나, 다른 놈들이 달려들어 녀석의 남은 한 쪽 배를 뜯어대는 걸 보며 부레에 물을 채울 것이다.
아직 배가 오려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남아 있다. 미끼도 다 쏟아버리고 나는 무엇을 할지 난처해진다. 요즘 낚시를 올 때면 늘 복어와 전쟁을 치르다 가는 것 같다. 저번 아버지와 함께 왔을 때도 복어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아버지는 사람을 낚는 일은 고기와는 다르다고 했다. 사람을 낚는 것은 슬픈 일이라 했다. 잡은 고기는 먹으면 되고, 놓친 고기는 다시 노리면 되는데, 사람은 잡아도 놓쳐도 줄을 끊어버려도 가슴에 남는다며 씽긋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눈물이 날 뻔 했다. 복어 때문에 속상해 하는 내게 아버지가 말했다.
“복어가 왜 미끼도 없는 바늘을 무는지 아니? 그리운 게다. 분명히 다시 물면 바다로 내동댕이쳐지는 줄 알면서도 피가 흐르는 잇몸을 하고는 날카로운 바늘을 무는 게 바보 같아 보이지. 하지만 녀석들은 그 마음을 알고도 무는 거야.
그리워서. 우리같이 매번 바다를 찾아오는 꾼들도 복어랑 다를 게 없어. 사는 것도 다를 게 없고 말이지. 미희야 아버지는 말이다 네가 아버지처럼 살지 않았으면 한다. 복어처럼 후회도 하지 못할 인생은 살지 말았으면 해.”
아버지의 말을 듣는 중 문득 내 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것도 썩은 비린내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내 복잡한 사연은 전혀 비춘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아버지는 내 몸의 비린내로 그를 알게 된 것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단 한 번도 그와의 이별을 생각한 적 없었다. 엄마를 볼 때면 그의 아내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녀 몫의 인생이었다. 그런데 겁이 났다. 내 손에 배인, 옷에 스며든, 그 옷이 닿은 살갗마다 배인 비린내가 미치게 했다.
나는 그와 헤어진 후 며칠 간 사십 도를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고생을 했다. 선천적으로 나쁜 잇몸이 입을 다물기도 힘들게 부었었다.
제 멋대로 돋은 혓바늘은 곪아버렸다. 피고름을 뱉고 삼키며 며칠을 홀로 버텼다. 열이 내리고 곪고 터진 잇몸과 혀가 제 모습을 찾을 때쯤 혀에는 신기한 흉터가 생겼다. 혓바늘이 심하게 곪았던 오른쪽에 마치 활처럼 길고 가느다랗게 흰 골이 패인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다 아문 지금도 가끔씩 혓바늘이 시큰거린다. 대신에 몸에서 썩은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낚싯배가 컬렁컬렁 모터를 돌리며 내 쪽으로 온다. 높은 파도에 낚싯배는 연신 어깨를 들썩이는 것 같다. 나는 한 발로 뛰어 집으로 돌아가는 작은 배에 오른다. 낚싯배는 대물을 낚은 어떤 이의 모험담에 시끌시끌하다. 해는 수평선 쪽으로 거의 다 기울었다. 수평선 너머 내 블루 샤크가 있을 그 어디쯤에서 황혼이 번져 온다.
입안의 바늘이 자꾸만 시큰거려 입에 침이 고인다. 블루 샤크도 나처럼 입안이 시큰거리겠다. ‘사람 인’ 자가 박힌 입에서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겠지만 상처와 바늘사이 틈으로 짠물은 계속 파고들겠지. 황혼이 지고 구름이 내려앉고 파도가 거세지는 지금 같은 저녁이면 신경통에 다리를 주무르듯 입을 뻐끔거리겠지.
뱉어도, 뱉어도 고이는 침에서는 피맛이 날 것이다. 차가운 쇠맛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놈은 쓰리고 따가운 통각 때문에 차라리 바늘에 걸려 바다를 떠날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살아 남았다는데, 잃을 뻔한 자신을 찾았다는데 안도하며 바다 깊은 어느 곳에 숨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엄마처럼 살고 싶은 고기들의 손을 들어주는 게 더 깨끗하고 덜 아픈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미끼를 걸어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울 것이다. 새파랗게 날이 선 바늘을 달래려면, 끊임없이 살갗을 에는 이 통각을 지우려면 손목의 스냅이 좋은 날에 목이 좋은 갯바위에 앉아 손끝으로 바다를 훑으며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
멀리 부둣가에서 오징어배가 출항을 하려는지 불을 밝힌다. 물이 드느라 작은 낚싯배는 연신 널뛰기라도 하듯 넘실거린다. 새찬 바람이 귓불을 사정없이 핥고 지나간다. 한 바탕 소름이 몸을 감싸자 갑자기 허기가 밀어닥친다. 문득 바람결에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끝>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힘찬 문체·공평한 시선에 점수
예심 통과작들 중 묘사나 서술이 가장 차분하고 빈틈없었던 소설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외간남자와 버림받은 아이들’이란 옛소설 풍의 구도가 주인공들을 의연히 상투적인 센티멘탈리즘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남성의 폭행 공포를 다룬 ‘누구세요?’도 비슷하다. 그런 피해망상이 피상적이고 시류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사건의 추상화라는 말미의 그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을 까닭이 없다.
‘장어잡이’는 그저 그런 풍속 리얼리즘에 머물러 있었고, 마지막까지 논란이 됐던 작품의 하나인 ‘목각인형’은 이른바 월남전과 고엽제라는 낡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데다 정면으로 대들지를 못하고 고사해가는 손과 인형 깎기를 작위적으로 대비시킨 진행이 끝내 임포 상태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틈’은 이른바 레즈비언을 다룬 소설로 절제되고 충격적인 묘사도 신선하고 터부에 대드는 그 저돌성도 높이 살 만했지만 도를 넘는 파격이 결국은 읽는 사람의 윤리의식까지 참섭하고 저울질을 한다.
금기를 순리로 풀지 못하고 더욱 병적으로 ‘왕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필 이모와 조카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자문해 보면 그 까닭이 자명해질 법하다.
당선작이 된 ‘독어(毒魚)’는 바다낚시를 빌어 가족의 붕괴와 자신의 또다른 관계의 결렬을 점검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최대 장점은 바람을 탄 듯이 유려하고 힘찬 문체와 그 공평한 시선이다.
복어만 올라오는 갯바위에 버티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렬을 바라보며 멀리 줄을 던지는 화자의 시선은 고뇌에 차 있으면서도 치우침이 없다.
교수와의 관계는 좀 애매하고 난폭해도 보이지만 일종 ‘공허감에의 의지’라고나 해야 할 배짱으로 그것들을 정리하는 화자의 대범함이 그런 약점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90년대 우리 여성 작가들이 가출은 시켜놓았으나 이 세계와 사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망연히 서 있기나 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들에게 형평을 잃지 않은 이 등거리 시선은 최소한 그 입지점이라도 마련해 줄 것 같다.
/심사위원=이제하 윤흥길 오정희
[신춘문예 소설당선자 이정은] "발로 뛰는 글쓰려 노력"
“고등어 낚시는 추를 쓰지 않아요. 바닷물 위쪽에서 헤엄치기 때문이죠.”
소설 당선자 이정은(李政垠ㆍ24ㆍ추계예대 문예창작과4)씨는 바다 낚시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했다. 당선작 ‘독어(毒魚)’는 바다 낚시를 하는 여자의 안팎으로 상처난 가슴을 그린 것이다.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의 이 신인이 소설에서 묘사한 여자는 ‘바늘이 미끼의 살을 파고 들어가 뼈에 걸리는 소리를 손끝으로 듣는’ 사람이었다.
습작을 하면서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게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그래서 ‘발로 뛰는’ 소설을 쓰기로 했다.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부산 출생인 이씨는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와 바다 낚시를 다녔다.
미끼 생선에 바늘을 꽂고, 낚싯줄을 당겨 고기를 낚고, 잡은 고기의 입에서 바늘을 뺐다. 2001년 6월부터 10개월여 머물렀던 호주 퍼스에서도 그는 바다 낚시를 하면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문득 독을 안기는 물고기의 행위가 상처를 주는 인간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래오래 몸에 들러붙은 경험이 소설이 됐다.
딸 셋 중 둘째, 지독하게 욕심이 많다. 첫째에 대한 큰 기대와 막내에 대한 무조건적 애정에 치였던 이씨는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었다.
고교 문예반에 들어가면서 상을 타기 시작했다. 둘째가 이런 재주가 있구나, 부모님이 관심을 가졌다.
소설을 업으로 삼기로 결심하고 문예창작과에 지망했다. 세번째 신춘문예 도전에서 당선의 기쁨을 안았다.
최근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다시 읽었다는 그는 “소설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장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한다.
소설은 문학이라는 예술에 속해 있되 모든 사람이 쓰는 언어를 도구로 삼는다. 그는 자신이 쓰는 언어 속에 앎의 깊이, 삶의 깊이를 담고 싶어한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낯선 나라에서 앎과 삶에 대한 질문과 성찰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참이다.
[신춘문예 당선소감] "새 책가방을 선물받은 느낌"
소설부문 이정은씨
나는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쓸 수 있었던 말은 엄마가 종이에 써준 내 이름 석 자 ‘이정은’ 뿐이었다.
그 덕에 나는 아직도 ‘o(이응)’을 거꾸로 쓴다. 엄마가 쓰는 순서를 가르쳐 주는 걸 잊은 탓이다. 부유하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유치원을 다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 자체가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입학식 날 학교에 가는 그 길이 신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쓰리쎄븐 새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나는 동네 언니가 쓰다 버리려던 가방을 메고 있었다. 4학년이 되어서야 지긋지긋하게 메고 다닌 가짜 쓰리쎄븐 가방을 버릴 수 있었다.
드디어 내게도 새 책가방이 생긴 것이었다. 분홍색에 회색 지퍼가 달리고, 주머니가 여기저기 무려 여덟 개나 되던 그 가방을 나는 밤새 꼭 껴안고 잤다.
당선을 통보받고 나는 새 책가방을 선물받은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로 학교를 보내던 어머니의 말을 그제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아침. 신나고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자꾸만 콧노래가 나왔던 등교길.
새 책가방이 내 손에 오기까지의 여정이 그러했듯 당선도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재미를 알게 해 주신 김다은 교수님, 좋은 소설가가 될 것이라며 늘 격려해 주시는 윤호병 교수님, 처음 소설 쓰기를 가르쳐주신 사직여고 박명호 선생님 등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또 사랑하는 친구 현정이와 언제나 든든한 예리 언니, 마음 좋은 후원자인 친구들, 98동기들, 99친구들 그리고 많은 추계인들에게도 참 고맙다.
특히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크게 고함을 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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