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시학 2013년 11월호 수록
봄날 외 4편
신매동
살고 있는
참 어여쁜 시인님이
지하철 2호선을 스무 정거장 타고 와서
칼국수 먹고 가라네,
아 그것도
손칼국수!
야호!
하고 외치며
뜀박질을 했다마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근무이탈 할 수가 없어
배달 좀 해 달라 했네,
스무 고개
넘어 와서
아 글쎄,
그랬더니,
아 그렇겐 못한다며,
정말로 먹고 싶으면 사표 쓰고 오라고 하네
에라이 사표를 쓰자,
작심했다....
참는,
봄날!
오순도순 살더라요
내가
아내더러
중전이라 불렀더니
아내도 나를 두고
폐하라고
불러주어
이 세상 내가 왕이다
큰 소리를
쳤는데요,
일월산
구름골에
살고 있는 한 부부는
달님이여!
해님이여!
서로 그리 부르데요
세상에 그 지랄병하며
오순도순
살더라요
말을 안 듣심더, 흐흑!
처음 발령을 받은 여학생 별명 참새,
한밤중 다짜고짜 난데없는 전화를 해 울음보 확 터뜨리네, 뭔 큰 일이 났나보네.
왜 그래? 왜 그래? 하고, 아무리 물어봐도 일체 대꾸도 없이 엉머구리처럼 울다
급기야 몸부림을 치며 아예 대성통곡일세
그래, 울어라 새야, 서럽거든 울어라 새야, 하지만 사연이나 말해주고 울어라 새야
“선쌤예, 아~들이 당최, 말을 안 듣심더 흐흑!”
바람 아니 났다 네요
내 한 때 ‘진주집’에 뻔질나게 드나들 때
혹시 바람이 났나, 걱정이 된 내 아내가
구룡포 점쟁이에게 점을 치러 갔다 네요
용하다는 그 점쟁이 사주보고 하는 말이,
이 사람 가마 나놔라, 들쑤시면 바람난다
그래서 가마 나놨디 바람 아니 났다 네요
시인의 얼굴
삼십년 만에 만난 옛 동창생 하는 말이,
“종문아 누가 니가 시인이라 그 카던데, 니 정말 시인이 맞나, 니가 정말 시인이가?”
“그래 맞다, 시인이다, 와 뭐가 잘못 됐나?”
“니 거울 한번 봐라, 시인같이 생겼는가, 아 니가 시인이라 카이 자꾸 우스워서 하하!”
“시인 천상병을 이 무식아 니도 알제?
시를 하늘로 삼은 천상 시인이지마는 그 얼굴 대체 어디가 시인 같이 생겼노?”
▪ 시인의 詩話/ 이종문
바늘구멍 속에다 황소를 밀어 넣자
<1>
다분히 사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는 <만고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고향인 영천 임고에서 어린 날을 보냈다. 게다가 선생을 모신 임고서원(臨皐書院) 앞의 거대하고 우람한 은행나무 밑에서, 포은선생과 임고서원이 함께 등장하는 초등학교 교가를 부르며 소꿉장난 치고 놀기도 했다. 아마 그래서 그렇겠지만, 나에게 문학적인 감흥을 불러일으켰던 최초의 작품도 포은 선생의 저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작품이 시조인 줄도 몰랐고, 시조라는 갈래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마저도 전혀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조를 시도 때도 없이 외우고 다녔다. 창작 동기와 내용으로 보면 어떤 비장감이 밀물처럼 울컥, 뜨겁게 밀려와야 마땅한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이 작품을 크게 소리 내어 외우다보면 비장감 대신에 율동적 신명감이 밀려왔고, 가락이 척척 맞아 떨어지는 바로 그 율동적 신명감이 이 시조를 거듭 낭송하게 했다.
얼마 후 중학교에 입학해서 보니, 국어 교과서에 옛날 시조들이 매우 높은 비중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정인보, 이병기, 이은상, 김상옥, 이호우 등이 지은 현대시조도 제법 많이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단심가」를 외울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율동적 즐거움에 도취되어 별로 외운다는 생각도 없이 그 많은 시조들을 척척 다 외웠다. 새벽에 일어나 불도 켜지 않은 채 외운 시조들을 낭랑하게 낭송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므로 3-4-3-4의 음수율로 따졌던 그 당시의 시조의 형식도 누가 가르쳐주기 이전에, 그 많은 시조들을 외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그 때 외웠던 시조들은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은데다 율동적 즐거움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도 대부분 거의 정확하게 외울 수가 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여 기를 쓰고 외웠던 자유시 가운데서 외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것들은 대부분 파편화된 이미지의 잔영(殘影)으로 천 길 만 길의 캄캄한 무의식의 바다 밑에 희미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아마도 체질적으로 자유시보다 시조와 궁합이 훨씬 더 잘 맞는 사람이네>, 하는 생각을 예나 지금이나 지울 수가 없다.
<2>
그러나 좋아하고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서 작품을 창작하는 문제에 이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궁합이 잘 맞아서 훨씬 더 좋아했던 것은 분명히 시조였는데, 막상 내가 중학생 시절부터 문청시절까지 쓴 작품들은 단 한 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자유시였던 것이다.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자가당착의 모순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한 자연인인 나 개인에게 있다기보다는, 그 당시 사회와 문단 분위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시조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낡은 형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때도 지금처럼 문단의 대세를 이루고 있었고, 시조를 쓰는 사람에게는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시조를 쓰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시조의 형식이 최소한의 예술적 성취를 선험적으로 담보해주는 문학적 장치라기보다는, 자유로운 표현을 제약하는 언어의 감옥>이라는 생각도 지금이나 그때나 문단의 대세였던 것 같다. 요컨대 <시조를 창작한다는 것은 황소에게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의 주장이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조가 지나간 시대의 낡은 양식>이라는 것을 검증해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조의 형식이 문학적 장치라기보다는 언어의 감옥>이라는 것도 검증된 적이 전혀 없었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주장들이 시조라는 나무에다 목을 매달고 정말 처절하게 몸부림을 쳐본 뒤에 나온 귀납적인 결론도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검증된 적도 없었던 막연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 기이하게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루면서, 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시조의 목을 점점 더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시조가 죽어야 나라가 사는 것도 결코 아니고, 시조가 죽어야 자유시가 사는 것도 물론 아닐 텐데, 허허 그것 참, 이거야 나 원!
<3>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문청시절도 다 끝나갈 무렵에 내가 우연히 딱 한편의 시조를 창작해 볼 기회를 가졌던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샘터』라는 잡지에 실리는 시조들을 보고, 장난삼아 써서 투고를 했던 작품이었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작품의 종장이 “저무는 천지현황(天地玄黃)에 가이 없는 노을이 진다.”였는데, 심사를 맡은 백수 정완영 선생으로부터 <크고 아득한 것을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몇 수의 시조를 더 써보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시조의 형식이 <지나간 시대의 낡은 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조의 형식이 자유로운 시상의 표현을 제약하는 <언어의 감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시조를 쓰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 때 국어책에 수록되어 있었던 초정 김상옥 선생의 다음 시조가 이와 같은 생각을 다소나마 고무시켜주기도 했다.
시조는 쉬운 것이 읊으면 되는 것이,
버선에 볼 받듯이 생각에 말을 받아
우리말 우리글들을 날로 씨로 짜거라.
초정의 말씀대로 <읊으면 되는 것이> 곧 시조라면, 시조를 짓는 일은 아주 쉽다. 바로 이 작품의 경우만 하더라도 퇴고니 뭐니 하는 고심참담한 절차를 거쳐서 마침내 완성된 시조가 아니라, <청산리 벽계수가 수이> 졸졸 흐르듯이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지어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초정의 시조에 격려를 받으며, <버선에 볼 받듯이 생각에 말을 받아 우리말 우리글들을 날로 씨로 짜>보기로 마음을 먹고, 그 동안에 지었던 자유시들을 평시조 형식의 바늘구멍 속에다 하나씩 하나씩 밀어 넣어 보았다.
막상 밀어 넣어 보았더니, 그와 같은 작업이 초정의 말씀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예상보다는 훨씬 더 쉬웠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작품 가운데는 애초부터 바늘구멍 속에 도저히 밀어 넣을 수가 없는 것도 더러 있었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냥 술술 들어가는 것들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처럼 들어가지 않다가도, 일단 밀어 넣고 언어를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말들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 척척 들어앉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에 일어났던 어떤 충격적 사건으로 인하여, 나는 창작활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연구 활동 쪽으로 인생행로 전체를 바꾸게 되었다. 그 바람에 이제 약간씩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던 나의 시조 쓰기도 그쯤에서 와장창, 끝이 나고 말았다.
<4>
10 여 년 동안 우왕좌왕과 우여곡절을 함께 겪은 끝에, 다소 늦깎이로 시조시인이 되어 창작의 세계로 다시 유턴한지도 어언 20년이 조금 넘는 세월이 지났다. 그 동안의 창작 경험에 의하면, 그래 맞다, 시조를 쓰는 일은 파인의 말대로 <황소를 바늘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조라는 형식의 바늘구멍이 뜻밖에도 놀라울 정도로 커서, 잘만 하면 황소는 물론이고 하늘과 바다까지 다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 선시(禪詩)의 할아버지 혜심(慧諶:1178-1234) 선사가 뿌리신 말씀대로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가고/ 조그만 터럭 끝이 우주 전체를 죄다 머금고 있다(芥子納須彌 毛端含刹海)>고나 할까.
이번에 나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짊어진 쌍봉낙타 다섯 마리를 시조 형식의 바늘구멍 속에다, 그것도 평시조 형식의 바늘구멍 속에다 슬그머니 밀어 넣어 보았다. 그런데, 어라? 쌍봉낙타의 뒤쪽 봉우리가 그토록 거대한 바늘구멍에 번번이 걸려 진퇴양난으로 뒤뚱대고 있으니, 우와, 이거 정말 큰일이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