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왜놈들의 손을 엄청탓을게 뻔한 왕조실록과 주요 대표적 사서들의 임란부분 기록들은...
임란시기 조선군은...
왜놈들과의 백병전 칼싸움에서...몇 만 군대가 왜놈무사 몇늠의 용감무쌍한 돌격으로 무너졌느니 뭐니로 기록이 돼어...
우리 역사 연구가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또한, 친일 뉴라이트... 국적불명의 어린 아이들이 왜곡됀 역사서 쫌 줒어 보곤...
왜놈들 사무라이 메니아가 돼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좀 더 부지런히 찾아 보면 다 개소리다.
임란시기 조선군이 백병전이 형편없었다면...
대규모 전투보다는...소규모 백병전투에서 턱없이 깨졌어야 정상이다.
고로, 지방의 소규모 단위 유격대인 의병들이 왜놈들에게 도저히 상대가 돼지 못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왜란기록을 보면,,,그 반대다.
대규모 정규전에선 초반에 엄청 밀렸던 조선군은...
오히려 소규모전투이자 백병전 위주인... 각지의 왜놈 약탈군과 마주한 의병전에선 상당수의 승전을 거둔다.
이는...
임란시기 왜놈들이...화약무기의 대량 구입을 위해...
양놈들에게...화약 몇 근에 왜년 몇 명 꼴로 수십만의 왜년들을 성 노리개로 팔아 넘겼단 기록에서도 보다싶이...
왜놈들은.. 조선과 명군의 우수한 전투력과 특히,조선의 화살무기를 따라잡지 못했기에...
서양의 신병기인 화승총과 대포구입에... 지나라 여자들까지 수 십만명이나 양키들 성 노리개로 팔아넘길 정도로
화약무기구입에 올인했단 기록을 보건데...
평수길이가 조선침략전술의 제 1로 삼은건 대규모 화승총부대의 구축였으며...
이는 기존의 전통적인 전투양식인 대규모 기마돌격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세계 전투사의 변천사와 궤를 같이한다.
소규모 백병전투에서의 화승총은...
그 재장전시간등이 그때 까지도 좀 지체돼는 구조이니...
순간적 근접전에선 불리하나...대규모단위 전투에선...
적의 대규모 돌격선봉을 집중포화로 무력화시키며 승승장구할 수 있는 방식이기에...
전통방식의 조선군은 대규모전투에서 늘상 당했을 수 밖엔 없었던 것이다.
지아무러한 출중한 무공의 무사들도...총알을 화살같이 피할 수는 없는 이치기 때문이다.
조선군은...
항간에 좀 아는 자들이 나불대는 역사같이 백병전(칼싸움)에 왜놈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한 예로 임란당시의 "홍계남"이란 장수 기록을 보자.
그는 홍언수란 무관의 천출 서자(庶子)...더 정확힌 몸을 파는 창기출신의 모친에게서 난 서자란다.
서출이 출세할 수 있는길은 오로지 무관이라...금의위(왕실 호위군)군관으로 취직한다.
당시 조선침략이 임박했단 흉흉한 소문의 진위를 알고저...
조선이 파견한 두 명의 동인, 서인 두 파벌 대표 사신단 중...서인의 황진을 수행한 무사로서...
황씨는...당대 실세로 떠오른 유성룡,김성일등의 동인들에게 밀리던 서인출신 윤두수당파의 대표 사절이다.
당시, 왜놈들에게 보여준 무술시험에서 홍계남은...출중한 기마무술과 궁술을 보여줌으로해서...
왜인들에게 그 이름을 남겨 왜란때도 왜놈들이 그를 사전부터 기억했다 할 정도이다.
이미 이 때부터 평수길이는...
기존의 기마백병전으론 조선군을 난쟁이 왜놈들이 도저히 당하지 못한단걸 절감하고...
화약무기 구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됀 것으로 사료됀다.
신립장군이...
조령전투에서 개박살 나는 장면에...
왜병들 몇 마리가 용감하게 돌진하니...수만의 조선군들이 기겁하고 무너졌단 개소리...
왜놈들의 앞발을 탄 왜곡이라 보인다.
거기 홍계남이도 출전했다가 패전했단다.
왜놈들 몇 명이 대표로 백병전 돌격을 했다면...당연 홍계남같은 용장들도 대표로 맞대결해 싸웠을게 뻔하다.
그 기록이 없다.
왜놈들은 잘 준비됀 대규모 화승총부태로...무식하게 돌진하는 조선군을 손쉽게 제압했던 것이다.
신립은 협로 요지인 조령고개길에서 왜놈들의 화승총을 피해...유격전을 감행했어야 했었는데...
무식하게 화승총 포화속으로 군을 돌진시킨게 패인인 거지...
조선군이 백병전에서 밀린게 아니다.
홍계남도 왜놈들 정예 사무라이(평균키 120cm)애들에게는 졌을 거라고...?
밑의 간단한 기록 좀 보자.
홍계남이 안성에서 다른 의병군에 연락하러 진지를 비운 사이에...
왜놈들이 기습하여...급히 나가 싸우던 부친 홍언수가 전사하고...왜놈들이 시신을 부러 가져가서...홍계남을 유인한다.
당시 왕성주위 경기와 충청일대는...홍개남의 단지 몇백명 부대에게 왜놈들이 매일 처 깨져서...
대규모 정규전땐 몰라도...실질적인 약탈전인 각지의 소규모전투에선...
홍개남 이름만 들려도 왜놈들이 겁먹고 도망쳤단 말이 있을 정도로.,.왜놈들은 자존심이 심히 상했던 때란다.
이런 의기소침상태를 역전시키고저...
홍계남을 왜군들이 직접 사살했단 승전보를 일구기 위해...
부러 홍개남의 아비 시신을 지들 성으로 가져가서 매달아 놓고...찾아가라 홍계남을 유인한 거란다.
이에 홍계남이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고...
나도 같이 죽여보라고 도전을 한다.
왜놈들은 매달아 놓은 홍언수의 시신을 던져주어 홍계남이 한손만을 쓰게 만든다.
홍계남은 왼손으로 아비의 시신을 들고...오른손 한손으로 포위한 왜놈들을 도륙하며 왜놈들 포위망을 밧어난 후...
아비의 시신을 본영에 두고 돌아가 왜놈들 두어명을 또 베니 왜놈들이 도망쳤다 한다.
수 많은 섬 원숭이 사무라이애기들이...
잘 기획해서 만든 홍계남 제거전에서조차도...
갸오 한 손엔 무거운 아비의 시신을 든 조선 장수 하나를 못 당하고 깨지는 구절이다.
홍계남의 무공이 유별났기에...
천출 서자이면서도 역사에 남을 승진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하지만...
당대 기록들 보면...김덕룡은 맨손으로 호랑이 둘을 때려잡아 왜놈들에게 팔아먹는 바람에...
왜놈들이 그 얼굴까지 그려갔을 정도로 경계했고...곽제우...뭐시기 뮈시기...
수도없는 조선 맹장장들의 이름이 나온다.
오히려 기록에선 높이 포상됀 대표적 유력 고위지휘관들이 그런 무공이 나오질 않는다.
김덕룡은 ...
전란 끝나갈 쯔음...이몽학의 반란에 그 이름이 억울하게 올라 취조도중 고문으로 옥사한다.
그가 한 번 억울하다고 성질을 부리자...나무기둥과 몸에 묶었던 쇠사슬이 다 끈어질 정도의 괴력였단다.
이때, 홍계남도 그 명단에 올랐다.
곽제우와 함께 관련자 100여명으로 추포됐다 풀려났다는데...영 찜찜하다.
그렇게도 유명하던 영웅이...
단지 천출서자라고 생몰연대와 사인이 불분명하다...?
그래, 잠깐 찾아 보니...
그의 죽은 싯점은...아무래도 이몽학의 반란때 억울하게 연류됀 싯점과 맞물린다.
1597년 음력 1월에서...음력 5월 3일 사이에 죽은게 확실한데....
왜 생몰년도가 미상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이몽학의 반란군을 같이 토벌했음에도...
이몽학의 모사꾼인 한씨가 주뎅이로 그와 김덕명, 곽제우, 이덕형등이 공모했다고 했다 하여...
한 번 체포됐던 듯 하고...,김덕령은...단지, 토벌군을 출병하던 중 이미 진압됐단 소식에 군을 되돌렸다는 이유만으로...
늦은 출병을 꼬투리로 고문치사를 당하게 됀다.
역사가 김덕룡의 억울함을 누누히 회자하고..나중에 벼슬을 더 추증하는데...
이 가운데 홍계남도 천출임에도 또 추증건이 나오고,,,
특히, 선조의 언질 중,,,
전란에 혁혁한 공로가 있단 구절만 쓰고...나머지 얘기들은 쓰지 말라한 기록이 뭔가 석연치가 않다.
역시, 당파싸움으로...
당시, 전란에서 비겁하게 도망다니던 여타 고위군관늠덜의 시기 질투질로...전쟁 막바지에 제거됐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곽제우, 김덕룡과 동일하게...여타 많은 당대의 무명용장들과 동일하게...너무 잘라서..그것도 천출서자출신이라...
집권 고위군벌늠덜에게 토사구팽됀 정황같다.
이순신도 비슷한 경우이겠고...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친 비겁자는 맞지만...
여러 기록들을 보건데...그래도, 선조는 그들을 구명하려한 정황이 보이는데...
유력당파의 고관늠들이 이들을 죽인 정황이 보인다.
이늠의 나라 당파싸움은...국가위란시때도 여전했던 것이고...
조선은 그것땜에 망한 것이다.
나라의 존망도 상관치 않는 망국적 당파싸움은...현재도 여전하다.
피터지게 싸우다가도...국가 위급시기는 뭉처야 하는게 정상인데도...패망한 역대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늠의 민족성엔 비교적 고게 좀 모질라서 망하는 것이다.
개인적 역량들은 절대 모지라지가 않았다.
백병전(칼싸움)에서...
섬 원셍이 사무라이 애들은...홍계남, 김덕룡, 곽제우...등등등...조선 무사들에게...
께임도 않돼게 개박살난 기록이 수두룩하다.
어설프게 왜곡사서들만 처질러 보고서,,,왜놈 사무라이가 어쩌니들의 호들갑들 좀 안 떨었으면 싶다.
항시, 쫌 안다는 물건들이 더 문제다.
그리고 보너스...
당시 임란중의 경기도 지리설명을 보면...절대 현 한반도가 아니다.
수원이 왕경(한양)의 서쪽이며 경성에서 하루거리란다...?
경성(京城)과 왕경(王京)이 모가 다른진 의문이다...?
그러나, 현 한반도 수원은 서울의 정남쪽이다.
도보로 남대문에서 하루 더 걸린다.
양주(陽州)는 서울 동쪽이란다...?
그러나 현 한반도의 양주는...서울 정북쪽이면서 아주 살짝 동쪽이니...왕경의 정북쪽이라 해야 맞는다.
안성과 여주는...왕경(王京)에 있단다.
그런데 경성과는 하루 반으로 왕경 밖에 있어서 하루거리란 양주나 수원보다 더 경성(京城)과 차이가 난다니 뭔 소린진 모르겠는데...?
어쨋든지 수원이 왕경에서 하룻거리고...여주 안성이 하루반이란건 말도 않됀다...
현재의 안성과 여주는 더 먼 남쪽이다...서울 남대문까지 도보로 적어도 2~3일 거리다.
밑의 기록만으론.,,,왕경(王京)과 경성(京城)은 다른 장소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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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천 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천 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천 명, 수원부(水原府)에 주차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이상은 왕경(王京)의 서쪽에 있으며 경성(京城)과의 거리는 1일 정(程)이다.】 양주(楊州)에 주차한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천 명, 양근군(楊根郡)에 주차한 의병장 이일(李軼)의 군사 6백 명,【이상은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일 정이다.】 여주(驪州)에 주차한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천 명, 안성군(安城郡)에 주차한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백 명【이상은 왕경에 있으며 1일 반 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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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水原)의 충의위(忠義衛) 홍언수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던 바, 그 공으로 수원 판관을 임명하였다. 언수의 천첩(賤妾)에게서 난 아들이 있었는데, 계남(季男)이라고 하였다. 계남은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었다. 경인년에 통신사의 군관이 되어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일본에 갔다 왔기 때문에 적의 정상을 알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였으며, 전후하여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친 것이 거의 백여 급에 이르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적들이 두려워하여 나오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 아버지 언수에게 수원 판관의 임명이 있었던 것이다.
○ 처음에 언수가 계남과 더불어 여러 번 기특한 공을 세워 적의 머리를 많이 베니 이로써 계남은 당상관에 승진되어 경기 조방장(京畿助防將)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계남이 일이 있어서 다른 군진에 갔더니 왜적이 갑자기 달려들므로 언수가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자 적이 시체를 가지고 가버렸다.계남이 급히 달려 돌아오니 이미 군사가 패하여 아버지가 죽은 뒤였다. 이에 계남이 바로 단기(單騎)로 적진에 쫓아가서 크게 외치기를,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너희들에게 죽겠다.” 하였더니 적이 그 아버지의 시체를 던져 돌려주고 곧 군사를 내어 사면으로 포위하였으나 계남은 왼손으로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러 대적하니 적이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돌아와 아버지의 시체를 진중에 놓아두고 쫓아가 두어 놈의 머리를 베니 적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 뒤로부터는 거리와 마을에서 적이 노략질할 때 사람들이 계남의 이름을 부르면 적이 반드시 도망쳐 달아났다고 한다.
《일월록》○ 계남이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산꼭대기에 진지를 구축하고, 양천(陽川)ㆍ안산(安山) 등 두어 고을의 땅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켰다가 적을 엿보아 동쪽으로 서쪽으로 나타나면서 유격하였다.
○ 11월에 경기 조방장(京畿助防將)
홍계남(
洪季男)이 원수를 갚기 위하여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대략에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호흡을 하고 사는 자는 모두가 마땅히 창을 베개하고 쓸개를 맛보면서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나는 불행하게도 이 지극한 흉화를 당하여 흉악한 왜놈들의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이 목숨을 빼앗겼다. 어찌 구차하게 살아서 이 적과 한 하늘 밑에 있겠는가.생각하니 멀고 가까운 곳의 선비와 백성으로 나와 같이 슬프고 마음 아픈 사람이 반드시 백 명, 천 명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에 이들을 규합하여 한 부대를 만들고 ‘복수’를 군호(軍號)로 내걸고 아버지와 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한다. 부형과 처자의 해골이 들에 그대로 드러나 딩굴고 있어 원통한 혼백이 의지할 곳이 없는데 내 어찌 홀로 편안히 있으면서 원수 갚을 생각을 하지 아니하겠는가. 따라서 저승에 알음이 있다면 그들이 ‘나는 아들이 있다. 나는 아우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일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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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비가 내렸다. 김덕령(金德齡)이 운봉(雲峯)으로 향해
비전(碑殿)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호서(湖西)의 적 우두머리가 이미 잡혔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홍산(鴻山)에 사는
이몽학(李夢鶴)이 몰래 반역의 뜻을 품고서 오합(烏合)의 무리를 모으니, 수천여 명에 이르렀다. 연이어 두 군(郡)을 함락하고 사방으로 공격하며 겁을 주니, 대흥(大興)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ㆍ부여(夫餘) 등의 영장(令長)들이 기세만 보고도 달아났다.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금강(錦江)에 진(陣)을 치고 여러 날을 서로 대치했다. 홍주(洪州)에 사는
겸사복(兼司僕) 김모(金某)가 서울에서 오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겉으로 투항하여 들어가 용기와 지략을 보이니, 도적이 크게 기뻐하며 심복으로 삼았다. 촌집에서 함께 잘 때 사복(司僕) 김모(金某)가, 달게 잠을 자는 틈을 엿보아 몽학(夢鶴)을 참수하여 아군(我軍)에 고하였다. 아! 한 필부(匹夫)가 사람을 무리 지어 가만히 발호하니, 호서(湖西) 주군(州郡)의 수령들이 기세만 바라보고 달아났는데, 일개의 사복이 마음을 다해 적을 잡았는데, 손 한 번 드는 사이에 평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윗사람이 된 이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7월 16일 신사(辛巳)한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뇌계정(㵢溪亭)에 모였다. ○ 새 수령인
조욱(趙稶)은 초아흐레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 하질부(河質夫)가 조카딸 집에 왔다. ○ 호서(湖西)의 역적 두목은 곧 면천(沔川)에 사는
한현(韓絢)이라는 사람이다. 소식을 들으니, 홍주(洪州)에서 자수하여 갇혔다고 한다. 이몽학(李夢鶴)은 곧 이량(李樑)의 아우이고 이주(李柱)의 첩자식이다. 난을 피해 홍산(鴻山)에 살았다고 한다. 홍산 수령인
윤영현(尹英賢), 임천(臨川) 수령
박진국(朴振國)이 같이 홍주에 수감되었는데, 적에게 항복한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 7월 19일 갑신(甲申)이 성주(李城主)가 의금부(義禁府)에 있은 지 나흘 만에 풀려나, 오늘 남원(南原)에 이르렀다. 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기쁘고 위로됨이 어떠하겠는가.
○ 7월 22일 정해(丁亥)서원(書院)에 갔다. 지부(志夫)도 왔기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원에서 함께 잤다.
거접우(居接友)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 7월 24일 기축(己丑)새벽에 지부(志夫)와 함께 말을 타고 가서 공간(公幹)을 만나 보았다. 식후(食後)에 지나는 길에 찰방(察訪) 김지화(金志和)를 만나, 호서(湖西)의 도적(盜賊)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이후에 사근교(沙斤橋) 가에서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양정(郭養靜)을 만났다. 양정은 차사원(差使員)으로 경주(慶州)를 향해 가는데 길이 사근을 지나가므로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후에 한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운고(雲皐)에 모였다. 공사(公事)를 논하여 정함에 날이 저물어도 끝나지 않았다. 이에 운고에서 잤다.
○ 7월 25일 경인(庚寅)한 고을 사람들이 서로 읍(揖)하고 헤어졌다. 나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저물녘〔晡時〕에 승지(承旨) 서성(徐渻)이 충용장(忠勇將)을 체포하려고 군(郡)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적들이 공초(供招)한 말에 ‘김덕령(金德齡)은 호남(湖南)에서 거병하고,
홍계남(
洪季男)은 영남(嶺南)에서 거병한다.’는 말이 있었다. 덕령이 실제로 간여한 행적이 있다면, 거열형(車裂刑)을 준들 무엇이 애석(哀惜)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러한 행적이 없는데도 마구 떠드는 말만 믿었다면, 원통하고 억울함이 막심(莫甚)할 것이니 가련하다.
○ 7월 26일 신묘(辛卯)승지(承旨) 서성(徐渻)이 운봉(雲峰)으로 가서 김덕령(金德齡)을 잡아갔다. ○ 광주(光州)에 사는
무진사(武進士) 이완근(李完根)이 조카딸 집에 와서 잤다. 조용히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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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실 임란전쟁사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육전을 보면, 군주가 보낸 왕사가 거느리던 군대는 패전을 거듭하고, 지방에 있던 중앙군과 지방군은 수만에서 수십만이 집결하여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지 않고 눈치만 봅니다. 또 의병들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구요. 웃기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또 원균이란 인물도 억울한 평가가 있다하고, 이순신 역시 실제보다 과대평가가 많다고 보아집니다. 임란 당시의 모든 것들이 의문 투성이란 이야깁니다. 반도의 임란이야기는 이 전쟁에 수십만을 참전시킨 명나라의 역사서나 조선사의 기록에서도 전혀 다르게 기록된 부분도 있고, 무엇이 무엇인지....?
<임란사>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논한 적이 있으나,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수박 겉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는 것은, "내전"이었으며, 조선의 제후가 조선황제에게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방에 있던 중앙군이나 지방군 수십만은 눈치만 보면서 적당히 움직이며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내전은 대륙이 그 무대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닌듯 합니다.
기록들을 보건데...왜인들은 종족자체가 다르게 나옵니다.
조선 남방인들이...이빨을 검게 물들인 흑치였단 기록도 없습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지배계층이 주도했던건 맞으나...
그 주 종족은 조선과 다른 난쟁이 해양 왜족들였단 정황만 짓어집니다.
@궐한 그것은 "왜"자체가 똑같은 한 종족이 아닌 여러 종족이나 부족의 연합체였을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역사서에도 왜노국과 일본을 분리해 기록한 예가 있으며, 왜노국은 넓은 땅에서 활동했으나, 일본은 소국이었으나 야금 야금 왜노국을 먹어가다가 드디어 왜노국을 병합해버렸다는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왜"는 조선의 낙랑주변에 있었으나, 게속 밀려나 변방에 자리잡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종족과 부족들을 병합한다고 보아집니다. 흑치국이니 하는 것들도 조선의 통치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며, 이것은 직접통치가 아닌 자치같은 개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임란시기 조선의 군사력은 재래식의 무기 싸움이 아니라 화약무기의 싸움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이 있어도 그 쓰임새를 잊은지 오래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지금 안성유기 만들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나요? 1-2명 정도 남았을 겁니다.
그처럼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진화가 빨랐습니다. 화약무기가 보급이 되자
칼을 제외하고 무기의 사용법을 외울 필요가 없어진 거죠. 기록을 보니 조선조 초기 부터
총통을 차고 여진족의 본거지로 조사를 갔다고 합니다. 그때 차고 간 것이 매화총통인데
얼마나 작았으면 봇짐에 숨겨서 가지고 갔을까요? 그정도로 고려 때 부터 화약무기가
발달하여 재래식 무기는 사실 별 의미가 없었던 거죠.
조선시대 때 무기들을 보니 조총은 사정거리가 50미터 밖에 안 되지만 조준사격이 가능했고
총통은 아무리 작아도 300미터가 넘었지만 조준이 불가능 하여 대략 맞추곤 했죠.
조직적으로 군대를 전문적으로 편성하지도 않아서 이점이 지상전에서 크게 패한 주요 원인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군관은 실전 경험이 없는 문관을 낙하산 인사하듯이 보내서 머리로 싸울줄 아는 사람들이
나대니 결국은 패하고 말았던 겁니다. 아무리 하드웨어가 뛰어나도 소프트웨어거 뒷받침이 안 되면
결국 소프트웨어 수준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겁니다. 항왜(귀화한 왜인들)가 나중에
조총부대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 합니다.
마포대사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군요. 오랫동안 전쟁을 모르고 평화만을 유지하며, 당파싸움으로 허송세월을 했다고 보아지며, 사실 화약무기는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많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으나, 이것이 연속적으로 발전시키질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며, 당시 왜는 산업혁명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서구열강들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급속적인 발전으로 국부가 넘쳐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후대의 1차대전 또는 2차대전 당시의 항공모함이나 잠수함, 구축함, 전투기, 각종 무기들의 생산활동과 직결되는 것으로, 지금도 우리는 만들지 못하는(어떤 이유로든) 것들을 만들었지요.
당시 조선조정은 내치에만 정신이 팔리고, 당파싸움과 권력싸움에 치중하다보니,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미쳐 대비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고 보아집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정과 비슷하다고 보아지는데, 국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신자제는 과연? 또한 무기체계는? 정권의 실력자들은 군대라는 곳에 가보지도 못한 자들이 수두룩하다고 합니다. 또 육군과 해군, 공군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으로 육군에만 치중된 우리나라 전력구조 역시 큰 문제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들의 "정신자세인 사기"인데, 이것이 아주 고약하게 떨어져 있어,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조차 판단할 수 없을 정도?
<왜>곧 <일본>은 황기 2600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곡필로 만든 것일뿐,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인데, 문제는 이들의 정체는 <조선에 속한 제후였다>는 것입니다. 임란사에서도 "왕으로 봉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이 해양족이든, 대륙에서 밀려난 세력이든 이들은 여러 종족과 부족들을 병합하고, 이들과 야합한 세력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은 점점 동쪽으로 밀려나 결국 현 열도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인데, 조선이 반도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과 어떤 연관은 없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조선사의 진실은 곧 세계사의 진실규명과 쾌를 같이 한다고 보아지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