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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시경(詩經)』을 간추려 엮었다고 한다.
공자는 『시경』 공부를 학업의 맨 처음 단계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논어』 양화(陽貨)편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시경의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였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시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하고 있는 것과 같아 학업이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엄중히 말한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시경』의 공부가 학업의 필수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시경』의 작자 혹은 시편의 성립
현재 『시경』에는 305편의 시편이 들어 있는데, 그것들은 서주 초기인 기원전 1100년 무렵부터 춘추(春秋) 시대 중기인 기원전 600년 무렵까지의 약 500년 사이에 창작된 민간가요와 사대부들의 작품 그리고 왕실의 연회ㆍ의식이나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불렀던 노래의 가사들이다. 각 시편의 작가는 확실하게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계층도 각기 다르다. 시편의 제목은 시구 가운데 한 단어를 골라 매겼다.
현재 전하는 305편의 시는 공자가 교화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3천 여 수 가운데서 십분의 일을 추린 것이라는 말도 있다. 공자 이후에 시편의 정리와 해석은 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한(漢)나라 유학자들이 『시경』을 정리한 텍스트와 시편을 해석한 내용이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보는 『시경』이다.
근래에 전국(戰國) 시대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초나라 죽간 『초죽(楚竹)』에서 『시경』의 오래된 텍스트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중국 상하이(上海)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이 진품이라면 『시경』의 원문으로 가장 오래된 것인 셈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알려진 『시경』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시경』은 주로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를 채집한 국풍과, 통치자들이나 그들을 위해 복무하던 지배층 문인(文人)에 의해 지어진 시들인 아(雅) 송(頌)으로 이루어져 있다. 곧 『시경』은 15국의 국풍(國風)과 소아(小雅)ㆍ대아(大雅) 및 송(頌)으로 이루어져 있다.2)
옛날 학자들은 '풍(風)'자를 풍자(諷刺) 또는 풍유(諷諭)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풍(風)이란 풍자와 풍화(風化)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민간의 노래가 채시지관(採詩之官)에 의해 수집되어 조정에서 악사(樂師)가 불렀던 것을 일컫는다. 과거의 학자들은 풍에 정풍(正風)과 변풍(變風)이 있다고 보았다. 정풍은 왕의 교화와 어진 이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백성을 교화하는 것으로 주남과 소남이 여기에 해당한다. 변풍은 왕도가 쇠하여 성현의 훌륭한 행실이 실현되지 않게 되자 이들의 잘못된 처신 등을 노래하여 바른 법도를 회복하고자 풍자적인 의도로 노래한 것으로 패ㆍ용ㆍ위 이하 13개의 풍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민간가요라는 뜻인 풍요(風謠)로 풀이한다. '풍'자에 국(國)자를 덧붙여 국풍(國風)이라 한 것은 전국 시대 말엽부터인 듯하다. 더구나 주남과 소남은 은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의 작품이라고 간주되어 왔으나, 주나라 선왕 때부터 춘추 초기까지의 작품인 듯하다.
아(雅)는 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글자인데, 주로 왕정의 흥망성쇠를 노래한 것으로 소아와 대아가 있다. 소아와 대아는 주나라 때 사대부들이 지은 것으로, 서주의 수도 호경(鎬京)-오늘날의 서안-과 동주(東周)의 수도였던 낙읍(洛邑)-오늘날의 낙양-에서 이루어졌다. 소아는 대부분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고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배경 아래서 나온 것이라서, 현실을 비판하고 난리의 상황을 반영한 시가 많다. 이에 비해 대아는 조회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축복과 훈계의 뜻을 담았다. 가창의 대상은 주로 천자, 군자, 가빈(嘉賓)과 같은 통치자들이었으며 귀빈을 접대하고, 제후에게 상을 하사하며, 병사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많다. 특히 후직(后稷)과 무왕(武王), 선왕(宣王) 등을 찬양한 송가(頌歌)나 주나라 왕실의 통치를 미화하는 것이 주류이다.
송(頌)은 '형용' 또는 '모습'이라는 뜻의 '용(容)'과 통한다. 또한 '노래에 춤을 겸한다'는 뜻을 지닌다. 곧, 송은 제사지낼 때 신을 찬양하거나 조상들의 은덕을 찬송하는 것이다. 주나라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시대에 조정의 교묘악가(郊廟樂歌)에서 비롯되었다. 주송은 주나라 초기의 작품이다. 노송은 노나라 회공의 업적 등을 노래한 것이다. 상송은 은나라 조상이 천명을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통치의 기초를 마련한 선왕(先王)에 대해 찬송한 것이다.
『시경』의 해석, 경학에서 문학으로
지금 일반인들이 주로 보는 『시경』의 텍스트는 한대(漢代)의 모형(毛亨)이라는 학자가 해석을 가한 『모시(毛詩)』이다. 후한 때 정현(鄭玄)은 『모시』에 주석을 하였고, 당나라 태종 때 공영달(孔穎達) 등은 정현의 주에 다시 소(疏)를 달았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 초기에는 신배공(申培公)과 원고생(轅固生) 및 한영(韓嬰)이라는 사람이 『시경』을 풀이하여 당시의 글씨체인 금문(今文), 곧 예서로 기록해서 전하였다. 후세에 그 텍스트들을 '삼가시(三家詩)'라 불렀는데 지금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시경』의 맨 앞에 수록되어 있는 주남의 관저(關雎)편은 사랑 노래이다. 시 속의 남자는 아름답고 선량한 여인과 결혼하여 즐거운 생활을 누릴 것을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모시의 해석은 달랐다. 주나라 문공(文公)이 태어나면서부터 덕이 있었고 또 후덕한 여성인 사씨(姒氏)를 배필로 얻었는데, 태사(太姒)가 시집올 때 궁중 사람이 그녀의 후덕함을 보고 이 시를 지었다고 풀이하였다. 모두 3장인데 1장과 2장만 예로 든다.
'관관'하고 우는 징경이는 물가 섬에 있으니,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배필이라.
들쭉날쭉한 마름을 이리저리 찾는구나.
아리따운 아가씨여, 자나 깨나 그대를 찾노라.
찾아도 얻을 수 없어 자나 깨나 생각만 한다오.
그리움이 아득히 끝이 없구나, 이리저리 뒤척일 뿐.3)
남송 때 대학자 주희(朱熹)는 『시집전(詩集傳)』(8권)과 『시서변설(詩序辨說)』을 저술하여 「모시서」의 오류를 비판하고 『시』 본문에 의거하여 시인- 『시』의 작자-의 본뜻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희는 국풍의 대부분이 '민속가요의 시'라고 보고, 창작 시기를 크게 둘로 나누어 시기별로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하였다. 즉, 주나라 왕도가 행해지던 시기에 지어진 정풍(正風)과 주나라 왕도가 쇠퇴한 이후에 지어진 변풍(變風)을 나누고, 변풍에 나오는 많은 연애시들은 음시(淫詩), 즉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주희는 위의 관저편이 정풍이며, 문왕과 그 부인의 혼인에 관계된 시라고 보았으므로, 그 시를 완전히 민간가요로 보지는 않았다.
『시경』 가운데 정풍(鄭風)에는 남녀의 구애 노래가 많다. 그러나 한나라와 당나라 때 주석가들은 그것을 남녀의 구애가로 보지 않았다. 이를테면 장중자(將仲子)편을 보자.
둘째 도련님, 우리 마을을 넘나들어 우리 집 버들을 꺾지 마세요. 그것이 아까워서겠어요? 우리 부모님이 두려워요. 도련님도 그립지만 부모님의 말씀이 또 두려운 걸요.
둘째 도련님, 우리 집 담장을 넘나들어 우리 집 뽕나무를 꺾지 마세요. 그것이 아까워서겠어요? 손윗 형님들이 두려워요. 도련님도 그립지만 형님들의 말씀이 또 두려운 걸요.
둘째 도련님, 우리 집 뜰을 넘나들어 우리 집 박달나무를 꺾지 마세요. 그것이 아까워서겠어요? 다른 사람들의 말 많음이 두려워요. 도련님도 그립지만 사람들의 말 많음이 또 두려운 걸요.4)
『모시』에는 이 시를 두고, 정나라 장공(莊公)을 풍자한 것이라고 보았다. 정나라 장공은 태어날 때 다리부터 나와 하마터면 어머니 무강(武姜)을 죽일 뻔했다. 그래서 무강은 친아들인 장공을 증오했다. 그 대신 순산한 공숙단을 편애하여 왕으로 세우려 했다. 무강의 희망은 물론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봉지(封地)를 수도로 하게끔 했다. 교만해진 공숙단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정권 다툼에 실패하여 도망치고 만다. 이런 사태를 미리 짐작한 재상 제중이 거듭 간언(諫言)하지만 장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지식인이 장공을 풍자하여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희의 『시집전』은 이 시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대표적인 예로 보았다. 남녀가 예절을 어기고 몰래 만나 서로 즐기는 내용을 담은 노래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현대의 해석에서도 일정하게 계승되었다. 곧, 이 시는 여성이 남성의 구애를 조심스레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시경』의 가운데 국풍을 민간가요로 보고, 그것을 민속학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은 프랑스의 중국학자 마셀 그라네(Marcel Granet)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제례와 가요(Fêtes et chansons anciennes de la Chine)』에서 민속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였다. 이것이 『시경』을 근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효시이다. 중국인 학자 문일다(聞一多)5)는 그 방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문학으로서의 『시경』
『시경』 국풍의 왕풍(王風)에 「채갈(采葛)」편이 있다. 본래 칡 캐며 불렀음 직한 노래이다.
저 칡 캐는 처녀여, 하루를 안 보면 석 달이나 된 것 같아라.
저 익모초 캐는 처녀여, 하루를 안 보면 아홉 달이나 지난 것 같아라.
저 쑥 캐는 처녀여, 하루를 안 보면 삼년이나 흐른 것 같아라.6)
4음절이 한 행을 이루는 리듬이 세 번 반복하는 노래다. 그것도 거의 같은 뜻의 말을 반복하는 구조 속에서, 운(韻)을 바꾸고 말을 바꾸어 점진적으로 감정을 고조시켜 나간다. 삼월(三月), 삼추(三秋), 삼세(三歲)의 월(月), 추(秋), 세(歲)가 각각 갈(葛), 소(蕭), 애(艾)의 글자와 압운(押韻)7)을 맞추고 있다.
조정의 바깥으로 사신을 나가게 된 사람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군주와의 사이가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인해 벌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인 주석이었다. 하지만 이 시편은 그리운 정을 읊은 시가(詩歌)로서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고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경』은 한(漢)나라 이후부터 문학작품으로 감상되기보다 유가의 경전(經典)으로서 존중되어 왔다. 하지만 『시경』은 동아시아의 고전 문학으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째, 『시경』은 지식 계층 및 지배 계층의 문학만이 아니라 민간 문학을 문학의 한 주류로 삼았다. 곧, 국풍과 소아의 일부는 고대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민중의 사상 감정을 선명하게 표출하였다.
둘째, 국풍과 소아의 일부 민가, 대아와 소아의 일부 귀족 풍유시는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고 풍자하였다. 어떤 시는 지배층의 착취를 호소하였고, 많은 시들이 노역, 병역, 난리, 전화를 묘사하였다. 귀족의 시는 지배계층의 부패상을 반영하고 비판하였다.
셋째, 『시경』의 시편들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고 생동적인 언어를 이용하여 사물의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뒤에 보듯 『시경』은 비(比)와 흥(興)의 수법을 확립하여, 후대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시경』은 표현상 부(賦), 비(比), 흥(興)의 수사법을 많이 활용하였다. 시편의 양식을 분류하여 말하는 풍(風)ㆍ아(雅)ㆍ송(頌)과 이 부ㆍ비ㆍ흥의 수사법을 합하여, 『시경』의 육의(六義)라고 말한다.
'부'는 시인의 주관적 감정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직접 서술의 방식이다. '비'는 사물을 빌려다가 대상물을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직유법이나 은유법 등이 이것에 해당한다. '흥'은 먼저 어떤 것을 말하고 이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앞서 든 관저편에서는 즐거운 소리를 내며 모래톱에 내려앉는 물새를 보고는 숙녀와 군자가 좋은 짝으로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노래하였다. '비'는 심미주체자의 정감이 있고 난 후에 그것을 비유할 대상이 있으므로 대상보다 마음이 앞선다. '흥'은 어떤 물상을 통해 마음의 흥취를 일으켜 그것을 드러내므로 물상이 정감보다 앞선다.
『시경』의 시편은 비유의 수법을 잘 사용하였다. 패풍(邶風)의 북풍(北風)편에서는 통치자의 포학함을 북풍에 비유하여 이렇게 노래하였다.
북풍은 뼈에 사무치고
하늘 가득 대설이 내리네.
누가 나와 동심이 되랴,
손잡고 함께 가리라.
어찌 주저하고 헛된 말 하랴,
이렇게 긴급한 사정이거늘.8)
이 시는 위나라의 학정을 원망하고 풍자한 것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시인은 그의 친구에게 이 지방을 함께 떠나자고 호소하여, 현실에 대한 심각한 불만을 표현하였다.
위풍(衛風)의 석서(碩鼠)편이나 벌단(伐檀)편 등은 탐관오리의 가혹한 착취를 풍자하였다. 다음은 석서편의 3장 가운데 제1장이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기장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견뎌왔건만 너는 나를 돌봐줄 기색 없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땅으로 가리라.
즐거운 땅 행복한 땅이여, 거기에 내가 살리라.9)
한편 '흥'과 관련하여 국풍의 패풍(邶風) 간혜(簡兮)편 3장을 보자. 이 간혜편은 옛 주석에 따르면 위(衛)나라의 어진 이가 궁중의 악사가 되어 풍자하였다고 하고, 주희의 주석에 따르면 악사가 된 어진 이가 자조(自嘲)한 내용이라고도 한다.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음이 그 마지막 장인 3장이다.
산에는 개암나무
습지에는 감초 풀.
그 누구를 그리는가?
서방의 예쁜 사람.
어여쁜 사람아,
서방의 예쁜 사람아.10)
여기서 산의 개암나무나 습지의 감초 풀이 무엇인가를 비유하거나 상징한다고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시의 해석이 달라 질 수 있다. 어떤 주석가는 "개암나무의 열매가 달고 맛있거늘 산에 있고, 감초 풀의 줄기가 달고 맛있거늘 습지에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군주 가운데 아름답고 훌륭한 분이 서주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흥(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앞의 두 구절은 비유어가 된다.
그런데 주희는 이 시에 대하여, "어진이가 쇠미한 시대의 하급나라에 있으면서 성대한 시절의 어진 왕을 사모한 내용이다"고 해석하되, 앞의 두 구절에 대하여는 그것이 어떤 뜻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주희는 그 두 구절이 뒤의 구절들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의 실경과 실사를 노래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주희는 흥(興)에 해당하는 어구의 뜻을 천착하려고 하지 않고, 시에는 "본 바에 인하여 흥을 일으키는 법"이 있다고 확인하였다.
『시경』이 지닌 문학성의 여러 면모
위풍(魏風)의 척호(陟岵)편은 부역에 나가게 된 사람이 원망하여 부른 노래이다. 한 부역자가 높은 곳에 올라 고향 쪽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어머니, 형이 자신을 그리워하고 자신이 무사하게 귀환할 것을 기도하리라는 내용을 담았다. 모두 3장인데, 첫 장만 보면 이러하다.
저 민둥산에 올라,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
아버지는 말씀하시리라, "아아, 우리 아들이 부역에 나가, 밤낮으로 쉬지를 못하는구나.
부디 조심해라. 살아 돌아와야지, 거기 머물지를 말아다오!"11)
『시경』에는 돌아가신 부모나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애도하는 내용도 있다. 당풍(唐風)의 갈생(葛生)편과 소아의 요아(蓼莪)편이 대표적이다. 요아편은 특히 효자의 애절한 심경을 읊은 시로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과거의 주석가들은, 유왕을 풍자했다느니 부역의 곳에 있었다느니 하였으나, 주희는 이 시편이 효자의 심정을 읊었다고만 해석했다.
모두 6장인데, 그 가운데 제1장에는 "무성하게 자랐구나 지칭개여, 지칭개가 아니라 들쑥이네. 슬프구나, 우리 부모님, 나를 낳고 고생하셨구나!"12)라고 하였다. 지칭개는 좋은 풀이지만 들쑥은 천한 풀이다. 부모님은 나를 낳아 훌륭한 인물이 되라고 기대하셨지만, 나는 천한 인물로 되고 말았다는 자책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 3장은 비유의 말과 토로의 말이 이렇게 교차되어 있다.
병이 비어있는 것은 오직 항아리의 부끄러움일 뿐이네.
부모 잃은 고독한 백성의 삶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아버지 안 계시니 누구를 의지할까?
어머니 안 계시니 누구를 믿을까?
나가면 걱정뿐이고 들어오면 갈 곳이 없네.13)
한편 소아의 학명(鶴鳴)편과 소아 무장대거(無將大車)편은 상당히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장대거편에 대해 옛날의 주석은 대부가 소인을 이끌어준 것을 후회하는 내용이라 하였다. 하지만 주희는 부역에 나가 힘들고 괴로워서 근심하고 생각 많은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시에서 '수레'를 인생의 고뇌, 혹은 인생 자체를 비유한다고 본다면 이 시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노래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모두 3장인데, 1장만 보면 이러하다.
큰 수레를 끌지 마라, 스스로 먼지만 뒤집어쓰니.
온갖 걱정을 생각하지 마라, 스스로 병만 들게 하니.14)
진풍(陳風) 형문(衡門)편은 은둔자의 노래라고 풀이되어 왔다. '형문'은 문 대신 나무를 가로 걸쳐둔 집을 말하여 가난한 은둔자의 집을 가리키는 말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시 속에 나오는 기갈(飢渴)의 끝에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표현은 남녀의 성적 욕구가 충족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시는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처녀에게, 도도하게 굴지 말라고 내뱉는 말투이다.
초가삼간 집에서도, 느긋하게 살 수 있나니.
철철 넘치는 샘물로도, 요기를 할 수 있지.
생선을 먹는다 해서, 어찌 황하의 방어만 고기일까.
아내를 얻는다 해서, 제나라 강씨 딸이어야만 하랴.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어찌 황하의 잉어만 고기일까.
아내를 얻는다 해서, 송나라 자씨 딸이어야만 하랴.15)
또한 『시경』에는 주나라 민족의 기원과 발전을 읊은 서사시가 있는데, 대아의 생민(生民)ㆍ공류(公劉)ㆍ면(緜)편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황의(皇矣)ㆍ대명(大明)편은 문왕과 무왕의 전공을 칭송한 서사시이다.
한편 상송의 현조(玄鳥)편은 제비가 은나라 조상을 낳았다는 전설을 기록하고 은나라의 발전과정을 생동적으로 기술하였다. 현조편에는 "하늘이 현조에 명하시어, 내려가 상을 낳게 하시니"라는 노래가 있다. 하늘과 지상의 상(商)나라를 연결하는 메신저로서 새가 활용된 것이다. 이것은 새를 천상과 지상의 매개물로 보는 우리민족의 사유와도 유사하다.
우리 생활과 『시경』
『시경』은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지식 계층의 필독서였다. 경주 박물관에 신라 청년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학업의 성취를 약속한 내용을 새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이 있다. 그 글을 보면, 신라 젊은이들은 『상서』ㆍ 『예기』ㆍ 『춘추전』과 함께 『시경』을 필독 도서로 하였다. 또 서울의 경복궁(景福宮)의 '경복'은 『시경』에서 따왔다. 1395년 10월, 조선의 태조는 종묘에 나아가 신궁입궐을 보고하였는데, 정도전은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편의 "군자(왕)께서 만년의 수를 누리시고 군자가 하늘로부터 커다란 복을 크게 받으시길"16)이라는 구절을 따서 새 궁전의 이름을 '경복'이라고 지어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선조 때의 유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전란사라고 할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는데, '징비'란 말은 대아 소비(小毖)편의 "나는 앞서의 일에 데어서 후환을 경계하노라"17)고 한 구절에서 따왔다.
조선 왕조의 개국을 찬미한 노래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바로 『시경』의 시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 반포 이전인 1442년(세종 24) 3월 임술일(1일)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1447년 10월에 출간되었는데, 그 시가는 한글 가사와 한시로 이루어져 있다. 한시는 『시경』의 시형식을 본받아 4언시체로 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려면 『시경』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시경』에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성어들이 많이 나온다. 맨 앞에 소개한 '전전긍긍(戰戰兢兢)'은 그 한 예이다. 그 구절이 나온 소민편에는 "호랑이를 손으로 친다든가 황하를 맨발로 건너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을 한다"는 뜻의 '폭호빙하(暴虎馮河)'라는 말도 나온다.
그밖에 소아 학명(鶴鳴)편의 '타산지석(他山之石)', 소아 상체(常棣)편에서 나온 '금슬상화(琴瑟相和)', 왕풍 채갈(采葛)편에서 나온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패풍 격고(擊鼓)편의 '해로동혈(偕老同穴)', 위풍(衛風) 기옥(淇奧)편에서 나온 '절차탁마(切磋琢磨)', 대아 탕(湯)편에서 나온 '은감불원(殷鑑不遠)'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시경』은 문학 작품으로 읽어서 그 서정성과 사실성에 깊이 공감할 수도 있고, 또한 예지의 책으로 읽어서 그것으로부터 나의 생각을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시경』을 되읽어야 할 이유인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시경』을 읽으려면 여러 주석가들의 해설을 다 참고로 해야 하는가?
사실 『시경』의 시편을 읽기 위해 과거의 주석들을 일일이 읽어내기란 무척 성가신일이다. 『모시』와 한나라 때 경학가인 정현(鄭玄)의 주석 그리고 주희의 『시집전』 정도를 대조하면서 읽어보고, 그것을 기초로 하면서 현대인 의 새로운 번역이나 해설을 참고하면 좋겠다. 사실 『시경』의 시가 전하는 정서 자체는 단순하고 소박하기 때문에 현대인의 가슴에 의외로 와닿는 것이 많다.
2. 『시경』과 우리나라 고전 문학과의 관계는?
『시경』의 어구나 형식은 우리나라 고전 문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얼른 생각나는 예로,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책방에서 글을 읽으면서 춘향을 생각하다가 책을 집어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각종 한적을 인용하면서 패러디를 한 것인데 거기에도 『시경』이 언급되어 있다. 이도령은 『중용』, 『대학』, 『논어』, 『맹자』, 『시전』, 『서전』, 『주역』이며 『고문진보』, 『통감』, 『사략』, 이백, 두시, 『천자문』까지 내어놓고 글을 읽는데 바로 『시전』부터 읽기 시작한다. "『시전(詩傳)』이라. 끼룩끼룩 우는 징경이새가 물가에서 노닐도다. 얌전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훌륭한 남자의 좋은 배필이로다. 아서라 그 글도 못 읽겠다." 이도령은 『시경』의 문장을 읽으면서 거기 나오는 아리따운 아가씨, 즉 요조숙녀(窈窕淑女)를 춘향이라 생각하고 집어던진 것이다.
3. 조선 시대에 제일 많이 읽은 『시경』의 텍스트는 어떤 것인가?
주희의 『시집전』을 중심으로 하고 주희와 다른 주자학자들의 설을 한데 모은 『시전대전(詩傳大全)』이란 책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시전』이 바로 이 책이다. 본래 명나라 성조 때 편찬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그것을 수입하여 독자적으로 출판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본래 명나라 호광(胡廣) 등이 칙명을 받아 『사서집주대전』-줄여서 『사서대전』이라고 함-과 『오경대전』을 대전본(大全本)이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다. 조선 시대 선조 때 이루어진 『시경언해』의 번역도 이 책의 『시경』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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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토완역(懸吐完譯) 시경집전(詩經集傳)』(上ㆍ下), 성백효 옮김, 전통문화연구회, 1993.
『신역 시경』, 김학주 옮김, 명문당, 2002.
『시경선주(詩經選注)』, 류성준 역주, 푸른사상, 2004.
[네이버 지식백과] 시경 [詩經] - 시와 정치의 교과서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