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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명심 사진집 <이산가족>, 열화당, 2018
이산가족의 만인보
맹문재
1. 푼크툼의 얼굴들
규천아, 나다 형이다.
* 규천(奎天)은 1948년 1월 평양에서 헤어진 아우의 이름
.― 김규동, 「천(天)」 전문
육명심의 『이산가족』에는 이 세상의 어떤 얼굴로도 대체할 수 없는 표정이 들어 있다. 주름이 지고 머리숱이 빠지고 차림새가 허름하지만 함부로 대하기 어렵고, 삶의 굴곡을 견디어온 모습이 역력해 또 다른 괴로움과 어려움도 감내할 것 같은 인상이다. 헤어진 가족의 인적 사항을 적은 메모판을 목에 건 채 광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얼굴들,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하며 기뻐하는 얼굴들, 헤어진 사연이 소개될 때마다 텔레비전에 클로즈업되어 비춰지는 안타까운 얼굴들, 끝내 가족을 찾지 못해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얼굴들…….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푼크툼(Punctum)이다.
바르트는 사진이 담고 있는 내용의 범주에 따라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으로 나누었다. 스투디움은 지식과 문화 등의 친근한 내용을 담고 있어 사진 촬영자의 예술성이나 행운에 따라 다소 양식화되고 성공적인 사진을 만들어주는 데 비해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문화가 합리적으로 개입되어 격렬한 감정은 배제된다. 푼크툼은 이와 같은 스투디움을 파괴함으로써 발생한다. 점(点), 주사,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상처, 주사위 던지기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자극을 주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 텔레비전에서 진행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에 그 푼크툼의 얼굴들이 등장했다. 아침에 집 앞에서 우는 까치 울음을 듣고 길조라고 생각하고 방송국으로 달려갔다가 접수창구에서 서성이던 어머니를 찾은 아들, 비디오테이프 레코더(VTR)의 재방송을 통해 전남 여수에 살고 있는 오빠를 만난 여동생, 만주 안동에서 생이별한 채 살아오다가 방송국 본관에 붙어 있는 벽보를 보고 상봉한 오누이, 신혼 중에 헤어져 33년 만에 백발의 노인이 되어 만난 부부, 30년 만에 무작정 귀국해 방송국에서 오빠와 상봉한 미국 메사추세츠에 살고 있는 여동생,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가 전주에서 헤어진 뒤 33년 만에 상봉한 남매, 한강다리가 폭파되는 바람에 외가에 있던 동생과 헤어진 뒤 방송국에서 만난 자매, 피난길에서 헤어진 뒤 같은 서울시 동대문구에서 살아오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다가 방송 출연으로 만난 오누이…….
헤어진 딸을 만나 너무 기쁜 나머지 졸도한 어머니도 있었다. 다른 집의 양자로 맡겨져 성도 이름도 바뀐 채 살아오는 딸도 있었다. 심지어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살한 노인도 있었다.
극적으로 상봉한 가족들은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 깊고 서러워서 울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감격해서 울었다. 어느 누구도 연출할 수 없는 이산가족의 만남을 바라보는 사람들 또한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이산가족의 얼굴들을 이탈해서는 한국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음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음을 자각한다. 곤궁하고 그을리고 왜소한 그 얼굴들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연대감도 갖는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이산가족이 갈구하는 상봉이 이루어지길 기꺼이 응원한다. 그들과 함께하는 자세야말로 민족 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의 이산가족은 1864년부터 연해주 방면으로 이주한 노동자나 1902년 하와이의 사탕수수 재배 농장에 동원된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크게 세 차례의 역사적 격변에 의해 발생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초기에는 토지를 수탈당한 조선인들이 살 길을 찾아 만주나 간도 지방으로 떠나면서였고, 후기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징병과 징용으로 동원되면서였다. 1939년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일본, 사할린, 남태평양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들 수는 72만 명에 달했고, 1942년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36만 명을 넘었다. 두 번째는 8·15해방 이후 고착화된 38선에 의한 남북분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월남한 실향민의 수는 3백50만 명에 달했다. 세 번째는 3년 1개월간 지속된 한국전쟁 동안 사망, 피난, 행방불명, 포로 등으로 14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육명심의 『이산가족』에 등장하는 얼굴들에는 그 비극적인 역사가 배어 있다. 이산가족은 완전하게 해방되지 못했고, 안전한 곳으로 피난가지 못했다. 사회적인 지위를 지니거나,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거나,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왜소하고 힘없는 얼굴들은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다. 자식을 안쓰러워하며 한없이 품는 어머니처럼 간절하고도 절박한 표정으로 지치지 않는 힘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은 육명심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작품 세계의 본질이다. ‘인상’ 연작과 『예술가의 초상』(1972) 이후 아무런 벼슬도 없는 민초들의 얼굴을 담은 『백민』(1978), 동네 어귀나 사찰이나 산길에 민초들의 얼굴로 서 있는 장승을 불러 모은 『장승』(1985), 검은 모래가 깔린 제주도 해안에서 모래찜질하는 ‘어머니’들을 담은 『검은 모살뜸』(2009) 등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따라서 『이산가족』은 육명심이 추구해온 인물들을 확대 내지 심화한 산물로 볼 수 있다. 시대적인 혼란에 쫓기고 전쟁의 폭력에 고통당한 민초들의 얼굴을 역사의식을 가지고 끌어안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산가족』의 얼굴들은 눈과 코와 입과 귀와 이마 같은 생김새보다는 간절함과 안타까움과 슬픔과 기쁨을 나타내는 표정이 돌올하다. 그 얼굴들과 함께해온 바람과 햇살과 장맛비와 대지와 하늘은 무겁기만 하다. 그들의 얼굴에서 “고된 삶의 여정과 애환이 배어나오”고 있지만, “꺾이지 않고 그 무게를 감당해온 자의 은근과 끈기가” 느껴진다. 까르띠에 브레쏭(Henri Cartier Bresson)이 사진은 대상의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기고 ‘너’와 ‘나’라는 상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우리’라는 절대적인 입장을 견지한 모습을 육명심의 『이산가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2. 얼굴들의 시간
예 와서
삿대질하던
남과 북
60년 흐르니
너나없이
앞니가
빠져버렸네
어쩌면 좋담?
― 김준태, 「판문점」 전문
육명심의 『이산가족』에 들어 있는 얼굴들에는 슬픔과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시간이 흐른다. 기쁨과 설렘과 기대감의 시간도 비치고 있다. 이산가족으로서 겪은 시간들이 흔적으로 굳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는 그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보다 무겁고, 우연적인 시간보다 밀도가 높으며, 평면적인 시간보다 입체성을 띤다. 과거를 단순하게 기억하거나 미래를 막연하게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촘촘하게 직조하는 것이다.
얼굴에 밴 시간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기적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가령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려고 방송국이나 여의도 광장에 찾아온 이산가족이나 그들을 헌신적으로 돕는 방송 관계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려고 안방에서 또는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한국인들이 해당된다.
그들에게 기적의 시간은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이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생방송으로 진행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일어났다. 한국전쟁 33주년 및 휴전 30주년을 맞이해 남한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을 찾아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프로그램이었는데, 방송 출연을 신청한 이산가족 150여 명을 초대해 아나운서가 1시간 30분 정도 소개한 뒤 마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청 접수를 한 이산가족이 1천 명이나 되었고, 그들의 상당수가 방송국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방청석은 순식간에 그들로 채워졌다. 뿐만 아니라 방송이 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튜디오에 설치된 전화기들에 불이 났고, 생방송을 시청하던 이산가족들이 헤어진 혈육을 찾겠다고 방송국으로 몰려와 방송은 새벽 2시 30분 즈음에야 마무리되었다. 한국전쟁 동안 부산에서 헤어진 뒤 소식을 모른 채 살아오던 사촌 남매 7명이 한꺼번에 방송국에서 만난 것을 시작으로 총 36가족이 상봉하는 기쁨을 가졌다.
다음날에도 방송국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날 방송에 출연하지 못했거나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진 이산가족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리하여 방송국 중앙홀을 꽉 채운 인파는 본관을 거쳐 여의도 광장까지 이어져 질서 유지와 안내에 필요한 인력이 방송국 경비로는 부족해 경찰까지 동원되었다. 또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의 출연에 대한 문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국의 업무가 마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산가족들은 찾고자 하는 가족의 인적 사항을 적은 것을 방송국 본관의 벽에 붙이기 시작했는데, 금세 방송국의 계단이며 분수대, 가로등, 가로수, 아스팔트, 광장 주변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한국방송공사는 헤어진 가족을 찾고자 하는 이산가족의 간절함을 수용해 7월 1일부터 이산가족 찾기 추진본부를 설치해 방송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정규 방송 편성을 취소하는 대신 밤 10시 15분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생방송을 진행했다.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춘천, 강릉, 제주 등 9개의 지방 방송국에서도 이산가족을 출연시켰다. 접수된 이산가족을 모두 소개할 때까지 방송을 하기로 결정하고 연속적으로 진행했고 광복절, 추석 연휴, 국군의 날, 개천절, 한글날 등과 같은 날에는 특별방송으로 기획해 며칠씩 진행했다. 한국방송공사 제1라디오 역시 7월 6일부터 텔레비전과 동시에 방송을 진행했다. 방송한 내용을 다시 확인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요청이 쇄도하자 7월 6일부터는 한국방송공사 공개홀, 옥외, 만남의 광장, 9개 지방 방송국에 수상기를 설치하고 비디오테이프 레코더를 재생했다. 그리고 7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성중계 방송을 시작으로 미국, 일본, 서독 등 세계 각국에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전파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방송하기 이전에도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있었다. 1956년 대한적십자사는 납북된 사람들에 대한 접수를 벌인 뒤 7,048명의 납북 인사를 적십자사 국제위원회에 발송해 337명의 생존자 명단을 통보받았다. 또한 1972년 7월 4일에 발표된 남북 공동성명 이후 8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 회담을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1973년 7월 12일까지 7차례의 회담을 가졌다. 1973년 9월부터는 미수교 상태에 있던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찾기 위해 우편 교환 업무를 개시했고, 1975년 9월부터는 조총련계 재일동포에 대한 모국 방문을 허용했다. 그리고 1982년 6월부터 1년 동안 치안본부 전산실의 작업으로 이산가족 7,855건을 접수해 2,180가족이 상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일보 역시 1961년 신년 특집호에서 ‘10만 어린이 부모 찾아주기’ 운동을 시작해 1967년까지 전개했다. 그 결과 6,182건의 이산가족 사연을 게재해 350명의 어린이들이 부모와 재회했다. 또한 1968년 11월 5일부터 1974년 6월 9일까지 ‘부모·형제·친족을 찾아주자’는 캠페인을 벌여 24건의 상봉을 이루었다. 1974년 1월 5일부터 1976년 3월 12일까지 총 100회에 걸쳐 지상 캠페인을 벌여 164건의 상봉을 이루기도 했다.
서울신문도 1980년 2월 9일부터 ‘공산권 동포 혈연 찾기’ 사업을 벌였으며, 조선일보도 1984년 6월 25일부터 ‘남북인사 송환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펼쳐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밖에 사할린 억제 교포 귀환 촉진회, 재중국 동포 이산가족협회, 재일본 사할린 억류 귀한 한국인회, 일본인 처(妻) 자유 왕래 실현운동 본부, 이북 5도청, 1천만 이산가족 재회주진위원회 등도 발족되어 활동했다.
한국방송공사 라디오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이끌었다. 1972년 평양에서 가진 제1차 남북적십자 회담 이후 7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지만 이산가족 만남의 성과가 없자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이라도 만나게 하자고 1973년 10월 27일 제1라디오의 <오후의 교차로>에 한 코너로 신설했다. 그렇지만 매주 토요일에만 방송함으로써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1974년 1월 4일부터는 매일 편성해 방송했다. 그 결과 방송을 시작한 지 22일째 되는 날 의뢰한 동생과 매형 및 누님 가족들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후 10년간 방송을 진행해 총 342가족의 상봉을 이루는 성과를 냈다. 한국방송공사 라디오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1983년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진행될 수 있는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
한민족방송도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추진했다. 1972년 8월 15일까지 사회교육방송으로 불린 한민족방송은 한국방송공사가 반공주의 선전을 목적으로 뉴스, 해설, 보도 등을 전하는 국제방송이다. 남한은 물론 북한, 일본,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주요 청취 대상이다. 1972년 4월 3일부터 매주 1회 10분간씩 흘러간 노래와 조국의 소식을 들려주는 <사할린 동포에게>를 방송했는데, 공산권 국가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호응이 높았다. 그리하여 <북간도 동포에게>라는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방송 횟수와 시간을 늘렸다. 그 결과 조국을 방문하는 동포들이 증가했고, 가족을 찾아달라거나 농업 기술서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늘어났다. 그에 따라 1980년 10월 <사할린 동포에게>와 <북간도 동포에게>를 합친 뒤 1시간 방송으로, 1981년에는 1시간 30분 방송으로 확대 개편했다. 방송 내용도 생활에 필요한 정보 제공, 고국 소식, 이산가족 편지 소개 등 다양하게 마련해 동포들에게 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했다. 이외에도 국내 이산가족들을 위해 1975년 10월부터 1980년 7월까지 <그리운 희망 음악>을 신설했다. 흘러간 노래를 들려주면서 이산가족의 편지를 소개해 400여 가족이 상봉하는 기쁨을 가졌다.
한국의 이산가족 문제는 1945년 해방된 뒤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분할 통치하면서 심화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량 양산되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헤어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중․상층 이상은 그들의 사적 자원이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하여 대부분 이산을 극복해왔던 반면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자원에의 접근이 용이치 않았던 하층 이산가족들에게는 이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이들 하류 계층에게 가장 강력한 매체인 전국적 TV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사연, 자신들의 소망을 직접 발표할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하여줌으로써 그들의 말할 권리와 매체에의 접근권이란 커뮤니케이션권을 행사케 해”주었다. 1980년대에 들어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이산가족도 신문, 라디오, 전화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유하게 되어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1983년 11월 14일 새벽 4시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0만 952건의 신청접수 중 5만 3,536가족이 출연해 1만 189가족이 만났다. 19.03%의 상봉률을 나타내었다. 생방송 시간은 453시간 45분, 날짜로는 138일을 기록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와 같은 열기에 따라 1985년 9월 20부터 23일까지 남북 상호 취재기자 등 151명으로 구성된 예술공연단 및 고향 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에서 공연을 가졌고 가족 상봉의 꿈을 이루었다.
육명심의 『이산가족』에는 그 기적의 시간들이 들어 있다. 이산가족의 얼굴에 밴 시간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것이고, 단편적이지 않고 전체적인 것이다. 분산된 것이 아니라 집중된 것이고,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것이다. 정지된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움직이는 것이고, 그리고 푼크툼의 공간과 함께하는 역사성을 띠는 것이다.
3. 얼굴들의 장소
내 몸이 갈라질 바에야
내 마음이 갈라질 바에야
내 정신 흔들릴 바에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갈라진 황토흙에서
우리는 우리는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이 커다란 아픔을 견디는
돋아난 풀잎들
양지여 쏟아져라
우리의 꿈은
분단의 아픔뿐이다.
― 박봉우, 「분단에서」 전문
육명심의 『이산가족』은 현재진행형의 시간을 심화하고 확장하기 위해 장소와 결합하고 있다. 장소를 확장하고 심화하기 위해 시간과 결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산가족의 얼굴에 들어 있는 방송국의 벽보며 만남의 광장이며 텔레비전의 화면은 실제의 공간보다 유기적이고 전체적이다. 우연적인 공간성을 극복하고 통일성을 갖고, 운명과 분리되지 않는 역사성을 띠는 것이다. ‘만남의 광장’에 나온 이산가족들이 목에 걸고 있는 메모지 판에 쓰인 경흥, 명천, 옹진, 회령, 길주, 신천, 무산, 온성, 송화 등이 그 구체적인 장소이다.
1983년 8월 6일 여의도에 문을 연 ‘만남의 광장’은 1천만 이산가족을 치유해주는 진료소의 역할을 했다. 대형 벽보판에는 이전에 마구잡이식으로 붙여진 벽보 대신 한국방송공사와 대한적십자사에 접수된 신청서를 일목요연하게 분류해 함북, 함남, 평북, 평남, 황해, 경기, 강원, 기타 순으로 게시했다. 또한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연결하는 스튜디오, 컴퓨터 조회실, 명부 열람실 등을 갖추어 이산가족을 체계적으로 찾을 수 있게 했다. 안내소, 휴게실, 식당, 화장실, 우체국, 공중전화, 의무실, 파출소, 법률상담소 등의 부대시설도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평안남도 주간, 함경남도 주간, 황해도 주간, 평안북도 주간, 함경북도 주간, 경기·강원도 주간, 만주 동포의 날 등을 날짜별로 정해 상봉의 효과를 증진시켰다. 가령 만남의 행사를 가장 많이 치른 황해도 주간의 경우 10월 3일(해주시, 사리원시, 봉산군), 10월 4일(연백군, 벽성군, 금천군, 평산군), 10월 5일(서흥군, 신계군, 곡산군, 수안군), 10월 6일(송림시, 황주군, 재령군), 10월 7일(신천군, 안악군, 송화군), 10월 8일(은율군, 장연군, 옹진군)이었고, 10월 19일(연백군, 벽성군), 10월 20일(서흥군, 신계군, 수안군, 장연군), 10월 21일(평산군, 금천군, 재령군), 10월 22일(황주군, 신천군), 10월 23일(옹진군, 송화군)에도 가졌다. 그리하여 해당하는 날 시민 및 군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면서 그동안 소재를 알 수 없었던 이산가족을 자연스레 찾은 것이다. 한국방송공사 제1라디오 역시 <만남의 광장에서 만납시다>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41일 동안이나 진행해 광장에서의 이산가족 찾기 열기를 확대시켰다. 가수와 코미디언 등도 출연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자원봉사자 및 각계의 성원과 온정도 큰 몫을 했다.
『이산가족』에는 이북 5도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대구, 충남 공주, 경남 하동, 강원도 철원, 경기도 성남, 경기도 안양 등의 지명이 적힌 벽보나 플래카드나 메모판이 즐비하다. 제주와 춘천, 서울과 대구, 대전과 부산, 청주와 춘천, 서울과 광주, 대전과 대구 등의 두 지명이 이산가족의 얼굴과 함께 텔레비전의 화면에 나오기도 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첫 방송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자 한국방송공사는 방송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해 텔레비전의 연주시설을 갖춘 9개 지방 방송국에서도 이산가족을 출연시켰다.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다원방송의 메커니즘과 컬러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생동감과 생방송의 현장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헤어진 뒤 32년 만에 상봉했으나 서로 알아보지 못해 고향의 집에서 함께했던 시간을 더듬으며 혈육을 확인한 모녀,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의형제를 맺었던 한국인을 방송국에 찾아와 만난 캐나다 기자, 대전역 피난민 수용소에서 헤어진 뒤 대구에서 살다가 어머니와 상봉한 딸, 5살과 7살의 전쟁고아로 흩어져 살다가 33년 만에 만남 남매, 매일 여의도 광장을 뒤지며 다니다가 사망한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상복을 입고 광장에 나온 아들…… 바라보는 이의 가슴에 푼크툼으로 날아와 박힌다.
이처럼 『이산가족』은 지명이라는 공간(space)을 친밀한 장소(place)로 바꾸었다. “무차별적인 공간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공간을 더 잘 알게 되고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됨에 따라 공간은 장소가 된다”는 원리를 실제화한 것이다. 육명심이 7년 동안 장승을 찾아 전국을 다닌 결과 “밟고 있는 땅과 내가 하나라는 구체적인 실감이 온몸으로 왔다”라고 토로한 데서도 확인된다. 육명심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정서를 육화시켜 장소와 일체를 이룬 것이다.
『이산가족』은 이산가족의 얼굴들을 장소와 결합시켜 정체성을 확립하고 역사성을 심화시켰다. 이산가족의 생생한 아픔과 기쁨을 통해 임의적인 공간을 고유한 장소의 혼(genuius loci)으로 살려낸 것이다. 그리하여 먹잇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전쟁터와 다름없고 인간 소외가 심한 무장소(placeless)를 인간 가치가 실현되는 장소로 만들었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그리고 특정한 어딘가에 의미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 애착을 가지”는 것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고 적응한 것이다.
적응은 인간 가치를 이루어가는 행동이다.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르네 듀보(Rene' Dubos)는 현대인들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해서 문제라고 진단했다. “별이 빛나지 않는 하늘, 가로수 없는 길, 모양이 없는 건물, 맛이 없는 빵, 즐거움이 없는 축하행사, 정신이 없는 희열― 즉 과거에 대한 동경, 현재에 대한 애정,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생활”에 아무런 문제없이 적응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자동차의 증대로 인해 공기가 오염되고 소음이 높아지고 교통 체증이 심해지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편안하고 풍요롭게 지낸다. 살인을 비롯한 끔찍한 사건과 사고가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적당히 분노하고 슬퍼하고 망각하면서 잘 살아간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탁한 하늘, 치열한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된 회사, 거짓말로 꾸며진 광고들, 손님 대접을 받지 못하는 행사들, 악취, 혼잡, 스트레스, 소외, 상대적 박탈감, 왜곡, 몰인정 등에도 상처받지 않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삶의 자세는 인간 가치를 파괴하는 환경에 몸을 맞추는 것이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병들어가는 환경에 순응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적응이다. 따라서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분단 극복은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4. 얼굴들의 기록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 한다
두 동강 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
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
아―
그 말만 생각하자
그 말만 믿자 그리고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이 밤에도
죽음을 살자
― 문익환, 「마지막 시」 전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1983년 11월 14일 밤 12시 15분부터 새벽 3시까지 진행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지막 상봉 가족은 새벽 2시 15분 평북 서면이 고향인 고모 윤숙찬 씨(69)가 조카 윤금영 씨(64. 충남 부여읍 구이리)를 만난 것으로 10,189번째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민족의 핏줄을 뜨겁게 이은 이산가족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이산가족』의 얼굴들은 쉴렌버그(T. S. Schellenberg)가 제시한 기록의 이차적 가치를 지닌다. 기록의 일차적 가치는 작성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기에 당사자나 당사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조직의 법률 실무나 재무 등에 한정되는 내재적 가치인 것이다. 이에 비해 기록의 이차적 가치는 당사자 간에는 소멸되었으나 제삼자에게 폭넓은 이용을 위해 제공된다. 사건의 사실 확인을 증빙하는 실물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적 가치나 기록의 내용이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기타 참고용으로 활용되는 정보적 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산가족』의 얼굴들은 이산가족의 시간과 장소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분단 극복의 필요성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어느덧 “통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늦게 되어도 좋고 등 통일에 대한 대명제가 사람들 마음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요.”라고 진단할 수 있는 상황이다. 통일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체념이 만연한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평화통일연구원이 2017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통일에 대해 ‘매우 필요하다’와 ‘약간 필요하다’고 응답한 경우는 각각 16.5%와 37.9%였다. 2007년부터 조사한 이래 통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항상 절반을 넘고 있지만 ‘매우 필요하다’는 응답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은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의지가 줄어들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같은 민족이니까’(40.3%),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10.5%)라고 응답했듯이 당위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남북 간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32.5%), ‘한국이 보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12.5%), ‘북한 주민도 잘 살 수 있도록’(4.0%) 등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접근도 상당하지만, 민족적인 차원에서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역사성, 한국 사회의 문제 해결과 국제 환경에 대응하려는 현재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미래 지향성 등을 통일의 당위성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8·15해방 이후 남북한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군사적 차원에서 대립과 갈등을 지속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북한을 적대적인 대상이나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협력과 지원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반복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민족의 과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남북한 통일은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제재나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지원보다는 협력과 교류가 필요하다. 또한 분단 상황을 주변국과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극복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분단의 비극이 남한과 북한의 이념 차이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략에 의해 발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대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개인적인 구상은 1943년부터 국제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영국의 이든(Anthony Eden) 외상을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의 국제적 신탁통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영국의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 장개석 총통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점령했던 영토를 본래대로 반환하고 한국은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독립할 것을 선언했다.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란의 테헤란에서 가진 회담에서도 처칠 총리,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과 함께 한국의 탁치에 관해 논의했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의 얄타에서 가진 회담에서도 처칠 총리, 스탈린 서기장과 함께 종전 뒤의 패전국과 해방국의 처리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렇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때까지도 한국의 통일에 대해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지 못했다. 오히려 소련의 참전이 결정되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소련이 한반도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자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세부적인 합의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독일이 항복한 뒤 일본의 항복을 권고하기 위해 1945년 7월 17에서 8월 2일까지 독일의 포츠담에서 가진 회담에서도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 처칠 수상, 장개석 총통, 스탈린 서기장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 시기나 탁치의 성격 등에 논의하지 않은 것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즉시 항복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아무런 장애 없이 한반도에 진군할 수 있었다. 소련의 동유럽 점령이 의미하는 바를 인식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 신속히 개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만 미군이 한국에 진군하기 전인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반도에 소련군이 진주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점령하려고 38선을 중심으로 북쪽은 소련군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남쪽은 미군이 담당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듯 종전 뒤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는 군사적 점령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이 모인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구체적으로 결정되었다. 한국의 독립 국가 재건을 위한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 구성을 보조하는 미·소공동위원회 설립 등이 합의된 것이다. 미국은 탁치라는 자국의 의도에 영국과 중국 등 비교적 친미적 국가를 포함시켜 소련의 독점을 방어할 수 있었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 조항을 첨가함으로써 국내 정치 세력의 참여를 보장받았다. 소련은 한국 국민들이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크고 항일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 조직이 우세한데다가 자국에 있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귀국하면 한반도의 점령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신탁통치는 식민지였던 지역에 적용되는 새로운 지배 형태로 즉시 독립과 식민 정책 연장의 중간적인 것이다. 일정 기간 탁치가 실행된 뒤 독립이 보장되므로 식민지화인 위임 통치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렇지만 위임 통치가 갖고 있는 열강들의 이권 확보라는 식민지적 요소가 탁치에 남아 있다. 강대국들은 식민지에 정치적이며 형식적인 독립은 부여하되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이익을 보장받는 것이다. 따라서 탁치는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서 외면적으로는 한국의 독립이 목적이고 탁치가 수단이었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소련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여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했고, 소련은 한국의 국내 정치 세력을 끌어들여 미국과 같은 의도를 달성했다.
남북통일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과 주변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주체성을 가지고 추구해야만 가능하다. 한 번의 이벤트나 도둑통일론, 통일대박론 같은 정치 구호로는 이룰 수 없다.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구체적인 교류를 통해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좌충우돌하다가 내빼는 망령의 벽 위에/자기기만이고 자기 환상일 뿐/있지도 않은 제3의 벽 위에/체념의 벽 의문의 벽 거부의 벽 위에 쓰리라/조국은 하나다”라는 민족의식을 노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이 외세에 의한 민족 분단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극복은 당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산가족』의 얼굴들과 함께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이산가족 찾기에 동참했던 얼굴들의 시간과 장소를 품고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국가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덧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소외되고 있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 인간의 자유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노동 생산물로부터도, 노동 생산 활동 자체로부터도, 유적(類的) 존재로부터도,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소외된다고 보았는데,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이익 창출을 위한 수단적인 존재로 전락해 주체성이며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고 있다. 공동체 가치를 희생시켜 개인주의를 성장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개인 소유와 이익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으므로 능력 있는 개인이나 경쟁력이 강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상대를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 결과 성수대교 붕괴(1994), 삼품백화점 붕괴(1995), 용산 참사(2009), 세월호 침몰(2014) 등이 일어났다. 지배 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한 결과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만 것이다. 해운법 시행규칙에 진수일로부터 20년으로 제한된 여객선 선령을 30년으로 늘려 개정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국가조차 자본주의 체제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고 동업자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비정규직 선원으로 운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후한 세월호에 갇힌 304명의 승객은 탈출할 수 없었다.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휴머니즘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휴머니즘은 현실과 동떨어지거나 추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대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어느 시대나 인간을 억압하는 상황이 있기 마련이어서 고대사회에서는 주인이 노예를, 중세사회에서는 소수의 종교 지도자와 귀족이 다수의 민중을, 근대사회에서는 소수의 부르주아 계급이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억압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는 자본가 계급과 결탁한 소수의 전문가 계급이 다수의 가난한 비전문가 계급을 억압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의 회복을 위해 물화된 자본주의와 결탁한 전문가 계급에 맞서야 한다. 육명심이 『이산가족』에서 분단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이산가족을 껴안은 것이 그 한 모습이다.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위협하는 전쟁과 분단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통일을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내보이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경제적인 면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을 지원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의 삶의 형편이 악화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한 근시안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남북한 통일이 한국 경제의 성장을 둔화시키고 생활수준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판단이다. 독일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지만 통일은 결코 경제를 둔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 성장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더 근원적인 문제들도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면을 들어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지키려고 하는 명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분단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했던 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분단 체제에 익숙해 있는 안일한 인식을 우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산가족』에는 헤어진 가족을 찾는 10만 명의 얼굴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미흡하기만 하다. “가슴 아픈 일은 지금까지도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 채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한 이산가족의 토로에서 보듯이 이산가족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분단의 비극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명칭이자 상징이 되고 있는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식과 행동이 필요하다.
육명심은 『이산가족』에서 그 의무를 나름대로 수행했다. 방송국에서, 여의도 광장에서,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이산가족의 얼굴들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것이다. 그리하여 헤어진 가족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이산가족은 현재에도 움직인다. 그들의 얼굴에 든 시간(하늘)과 장소(땅)에서 들려오는 울음과 웃음은 과거로 함몰되지 않고 역사성을 띠고 통일을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2018년_04월 10일(육명심 사진집 해설)최종수정.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