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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기독교 제자도의 핵심을 설명하며 현대 기독교에서 인기 있는 자기 중심적 거짓 복음에 도전한다.
본문은 하나님을 신자들의 모든 변덕을 만족시켜주는 분으로 여기는 복음에 대해 어떤 틈도 주지 않는다.
본문은 신자가 건강하고 잘 살지 않는다면 충분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강과 부의 복음에 문을 닫는다.
본문은 자기 연민과 자기 사랑과 자기 생각에 빠져 십자가의 복음을 나타내는 겸손과 회개의 영을 물리치는 복음을 평가 절하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구원을 얻고 영원히 받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사역과 사도들을 통해 면류관 이전에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영광을 얻기 전에 고난이 있고 보상을 받기 전에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풀이해 확실히 하고 있다.
기독교 제자도의 핵심은 얻기 전에 주는 것이요 승리하기 전에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의 도는 이율배반적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도의 값비싼 대가에 대해 처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 10:37-39에서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가지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였고
마가복음 10:21에서 부자 청년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12:24-25에서 자기를 만나러 왔던 그리스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들은 예수님 당시 인기 많았던 유대주의와 반대되며 오늘날 인기 가 좋은 유사 기독교와는 반대 된다.
대부분 동료 유대인처럼 열 두 제자들은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며 헤롯의 왕위를 빼앗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러므로 겸손과 희생과 자기를 주는데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로 행동하지 않았고 제자들이 그와 같은 메시아의 대리자로 행동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적과 가르침이 인간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종래에는 예수님이 참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말에 대한 베드로의 응답처럼 제자들은 메시아가 거부 당하고 고난 당하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자의 도가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를 그들도 져야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러 번 여러 형태로 그 교훈을 되풀이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고 타락한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에 관심하지 않고 인간의 일에 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신자들의 삶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회에서 적대적이 되고 비난 받으며 억압 당한다는 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룩함이 비 거룩함을 만날 때 폭력적인 반동은 피할 수 없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12에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24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제자들은 의심 없이 예수님이 그들을 한 사람씩 불렀던 그 때를 상기했다.
약 2년 반 전에 그들은 가족과 친구와 직업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좇았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출생에 대한 일차적 항복을 말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올 때 옛날의 죄 된 생활은 의의 새로운 생활로 바뀌어진다.
뿐만 아니라 그 말은 매일 생활에서 그리스도께 복종하라는 부르심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구원하는 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항복했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포기하고 버렸던 것을 되돌아 보는 것은 계속적인 하나의 유혹이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위에 두고 예수께 포기했던 권리를 되찾아 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별히 그 대가가 클 때 우리의 헌신을 타협해 보려는 유혹은 언제나 있게 된다.
그러나 때로 신자들이 불순종에 굴복한다는 사실이 “참된 제자의 성격은 복종에서 나타난다”는 진리를 바꾸지는 못한다.
불완전한 복종이 구속 받지 못한 육체 때문에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참된 기독교인의 기본 열망과 삶의 방향은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제자의 도는 하나님의 용어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도의 기본 원리가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과 충실한 복종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제자도의 첫 번째 요구는 자기 부인이다.
스스로를 즐겨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부인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 이 말을 사용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분리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신자의 부인이다.
그는 전적으로 자기를 버리고 옛 사람의 자아를 인정하기를 거절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은 “너 스스로와의 연대를 거절하라” 는 뜻이다.
자기 부인은 구원 하는 신앙으로 예수님께 온 사람의 특징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실한 제자로서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자아는 구별된 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독특한 피조물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그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낱낱이 다 아신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생래적이고 죄 많고 반역적이며 구속 받지 못한 타락한 자아를 말한다.
에베소서 4:22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라고 하였고 그 육체는 구속 받아야 할 존재다.
그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 7:18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한 것처럼 고백하는 것이다.
그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의 인간성 안에 하나님 앞에 내세울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께 드릴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없다고 진지하게 확신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의와 거룩으로 창조되어 새로운 자아를 덧입고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 용납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선언한 것처럼 구원 후에도 신자는 자기 안에 어떤 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육체를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육체 안에 어떤 만족도 두지 않는 것이다.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스스로를 복종하여 자기 뜻과 자기 만족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요구가 자기 자신에게는 선이나 의나 가치나 공로가 전적으로 없다는 정신인, 영적으로 가난하게 되는 것이라고 마태복음 5:3에서 선포했다.
그것은 겸손히 자신의 영적 운명을 인정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죄 많고 저주 받을 자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편 34:18에는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라고 하였고
시편 51:17에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 의나 자기 만족이 아니라 회개하고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크게 생각하는 교만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상한 심령의 세리 모습이다.
전체 구약의 목적은 어떻게 인간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가난하며 힘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도록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원 받는다는 것은 죄인이 자아를 부인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골로새서 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나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고 하였고
에베소서 4:22-24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라” 고 하였다.
제자도의 두 번째 요구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개념은 마땅히 이해해야 하는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종교적 엘리트만이 성취할 수 있는 깊은 영적 생활의 신비적 수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때로 생에서 경험하는 일반적 어려움과 시험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구원 받지 않은 남편도 아니요 잔소리하는 아내나 주장하는 시어머니도 아니다.
십자가는 육체적 장애나 고칠 수 없는 치명적 병에서 오는 고난도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기를 즐겨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부끄러움과 수치와 비난과 거부와 박해와 심지어 순교를 즐겨 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매우 구체적이고 명백한 실재였다.
그것은 로마의 가장 악질적인 적에 대한 처형 수단이었다.
그것은 로마 당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고문과 죽음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샤라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에서 백 명이 십자가에 달렸다.
1세기 전 알렉산더 제누스는 예루살렘에서 800명의 유대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대헤롯의 죽음 후에 일어났던 혁명에서 2000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총독 바루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적은 규모의 십자가 처형은 일반적이었고 예수님의 생애 동안 로마 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사람은 대략 3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제자들과 무리들이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에는 어떤 신비적인 요소도 없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도로를 걸으며 마지막에 처형되는 불쌍하고 정죄 받은 영혼을 생각하였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자신이 달릴 나무를 운반하면서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의 행진을 즐겨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즐겨 고통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명백히 고난과 핍박의 정도는 때를 따라 곳곳마다 신자들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모든 사도들이 순교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는 순교하기를 기쁘게 여겼다.
모든 제자들이 순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제자들이 즐겨 순교하도록 명령 받았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2-14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동료신자들에게 썼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오는 것은 손을 드는 것도 입회 카드에 사인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오는 것은 자아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34-36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말했고
마태복음 10:24-25에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도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새불이라 하였거늘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고 하였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의 주인, 자신이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면 어떻게 그들이 같은 취급을 받는 데서 도피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우리가 받는 고난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나아갔을 때 그 곳은 사형의 장소였지만 가야만 한다고 말했고 세상 죄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진 것이다.
그 후 수 많은 제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비난을 받으며 그 길을 갔다.
예수님은 결코 쉽고 번영하는 삶을 살도록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열매 맺는 자가 되도록 그들을 부르신다.
자기 십자가를 즐겨 지는 것은 참된 제자의 표시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어려움과 핍박을 거절하는 것은 깊지 않는 돌 짝 밭과 같이 열매 없고 거짓된 밭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대가 없는 제자 도를 원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제자 도를 말하지 않았다.
제자도에 대한 세 번째 요구는 충실한 복종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예수님은 말했다.
참된 제자 도는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2:6에는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라고 하였고
마태복음 7:21에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1:5과 16:26에서 구원을 믿음의 복종이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2에서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사역을 서술했다.
명백히 복종은 구원에서 현저한 특징이며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사역과 아들의 희생적 구원 사역으로 나타나는 신자의 특징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5:32에서 성령이 하나님을 복종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말했다.
모든 신자는 성령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께 복종한다.
요한복음 12:26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라고 하였다.
25-26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라고 말했다.
여기서 목숨은 “자아”와 동의어다.
목숨과 자아는 진실한 내면적 인간을 나타낸다.
여기서 복잡하고 모순되는 개념으로 생각되는 것이 실제로는 매우 단순하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땅의 육체적 생명과 이 세상의 평안을 구하기 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잃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땅의 생명과 세상의 삶을 자발적으로 버리고 고난 받고 죽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선택권을 갖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역시 복음을 따라 시작했지만 세상을 따라 나가는 거짓 신자를 가시떨기로 가득 찬 나쁜 땅과 일치시켰다.
참된 제자는 그 대가가 무엇이든 예수님께 성실하여 즐겨 그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다.
그 대가는 바울이 한 것처럼 고통 받는 순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신자가 지는 십자가가 무엇이든 그것은 안정과 건강과 친구와 직업과 생명까지도 즐겨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라는 말을 더함으로 제자도의 이율배반을 재강화했다.
세상을 얻기 위해 영혼과 목숨을 파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지만 지옥에서 영원히 머물 사람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소유를 얻지만 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영원히 파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영원히 부하게 되는 것이다.
27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사람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상기시켰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모든 신자를 맡기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성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아들은 그 행위를 따라 모든 사람을 심판할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예수님의 심판을 위한 도구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그 천사들은 예수님과 함께 와서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을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을 심판의 부활로 일으킬 것이다.
시편 62:12에는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라고 하였고 로마서 2:5-8에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라고 하였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은 민족의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님이 이제까지 살았던 각 사람들의 삶을 살펴볼 때 “여기 신자가 있다 나는 그 행위를 따라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 불신자가 있다 내가 역시 그의 행위를 따라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하지만 행위는 구원의 산물이다.
야고보는 구원 얻는 신앙이 올바른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구원하는 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를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모든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자기의 소망과 신뢰를 두는 행위를 한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과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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