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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2)3)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개혁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은 없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초대 교부로부터 선언된 신학을 견지해 온 것이며 점차 그것을 더 명료하게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개혁교회의 신학적 견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앙고백서이다. 이 시간에는 개혁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하는 16~17세기의 신앙고백서를 통해 교회와 구원에 대해 논의해 보려고 한다.
I. 개혁교회의 견해
1. 개혁교회 신앙문서에 나타난 교회와 구원
개혁교회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주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교회의 개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로마교회와 동일하게 개혁교회도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비교하는 일이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동일한 신경을 고백하지만, 그 내용과 의미에 있어서 교회에 대한 해석적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교회의 네 가지 속성
(1) 하나의 교회
개혁교회가 교회의 하나 됨을 주장하는 근본적인 근거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비롯된다. 칼빈의 제자였던 존 낙스에 의해 작성된 『제1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년)』는 교회에 대한 진술을 간략하게 하는 것에 반해 하나의 교회가 가지는 특징을 잘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믿으므로 우리는 하나의 교회가 처음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세상 끝 날까지 있으리라고 믿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요, 신부로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며 끌어안는다. 이들에게는 하나님도 하나이시요, 주 예수도 하나이시며,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다. 이 교회 밖에서는 생명도 영원한 복도 없다.”(제1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6조)
『제1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하나의 교회에 대해 고백하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 들 수 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나 나눔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기에 교회는 그분의 속성을 따라 하나의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둘째, 교회가 하나일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몸은 하나의 머리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동시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아주신다(고전 12:12-13; 계 21:9). 이러한 몸과 신부의 유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하나여야만 한다는 강력한 논증이 된다. 다른 어떤 것도 교회의 머리가 되거나 교회의 신랑이 될 수 없다.
셋째,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시는 믿음과 세례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교회의 머리이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이 믿음의 내용은 계시 된 성경의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모든 신자는 하나의 믿음을 고백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세례는 죄 씻음의 표이며, 교회의 회원임을 드러내는 표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세례를 통해 하나인 교회를 고백할 수 있다.
이러한 『제1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비해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1566년)』는 하나의 교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서술하는데, 특별히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머리는 몸에서 탁월한 부분이며, 머리로부터 온몸이 생명을 얻는다. 머리의 정신으로 몸이 모든 면에서 다스림을 받고, 또한 머리로부터 몸이 힘을 얻어 성장한다. 몸의 머리는 하나이며, 그래야 몸에 어울린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밖에 다른 머리를 가지를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영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17장 6절)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머리와 몸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이 머리를 통해 생각하고 활동하듯이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지배를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에 따라서 교회의 지체들은 다스려지고, 성장하며,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이러한 영적인 연합만이 교회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만일 이러한 토대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로부터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는 “다른 영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로마교회 신학의 그릇된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마교회는 “교회가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 한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에 비춰보았을 때 로마교회의 주장은 하나의 몸과 머리에 또 다른 머리를 붙이는 것과 같은 행위로써 “다른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교회”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도 교회의 하나 됨에 있어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선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달리 아무도 없다”(웨신 25장 6항). 따라서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머리가 있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로마의 교황 역시 어떤 의미에서든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다만 교황은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및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에 비하여 자신을 높인다”고 했다(웨신 25장 6항).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교회의 머리가 없다. 로마의 교황은 교회의 머리일 수가 없다.
결국.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교회는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오직 내적이며 영적인 통일성만이 하나인 교회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는 교황이나 성사(성례전)와 같은 외적인 통일성에서 그 근거를 찾는 로마교회와는 뚜렷하게 대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하나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벨직 신앙고백서(1561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으므로 어떤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인물이든지 그 회중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살기 위하여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회중에 들어가서 회중과 하나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교회의 하나임을 유지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권징에 복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고개를 숙이고, 같은 몸의 지체들로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형제들의 건덕을 위하여 서로 섬겨야 한다. 그리고 이를 잘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자들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벨직 신앙고백서. 28조)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는 자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음을 아는 자이다. 교회를 떠난 자는 참 생명의 공급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교회 안에 속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진리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자들을 같은 몸의 지체로 인정하고 섬기는 일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기 위해 행해야 할 선행적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믿음의 열매들인 것이다. 신자는 믿음의 열매들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하나인 교회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거룩한 교회
교회의 안과 밖의 기준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거룩성은 하나의 지표가 된다. 개혁교회는 교회의 속성으로 ‘거룩한 교회’를 고백하는데, 이러한 거룩성의 근거에 대해 『벨직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전적 구원을 바라는 참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하나의 거룩한 회중이며 회합이다.”(벨직 신앙고백서 27조)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역에 기초한다. 첫째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한다 (엡 5:27).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신자는 거룩한 자, 곧 성도라 불리게 된다 (고후 1:1 엡 1:1). 신자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의의 의(義)의 전가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여겨진 것이다. 이로써 성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교회에 속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신자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교회 회원의 거룩함을 추구하게 된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객관적으로 거룩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면 이제는 주관적으로 거룩함을 좇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생긴 것이다. 그 일을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성화의 은혜를 부여하신다. 거룩한 신자에게는 “성결의 영이 내주하시며 다스리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의 속성이 주어지게 되었고” 교회 안에 있는 자의 위치를 성화의 열매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두셨다. 그래서 『벨직 신앙고백서』는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거룩한 교회에 있어서 성령의 은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을 해설한 우르시누스는 54문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대한 해설에서 거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회를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죄의 찌꺼기들에서 점진적으로 구해내셔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순종의 모든 부분을 시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교회는 죄의 찌꺼기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자들이다. 우르시누스는 죄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신자들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구해내시는 일”이라고 명시한다. 결국, 신자가 거룩한 교회 안에 속해 있는지의 여부는 그리스도께 연합이 되어 성령의 은혜를 받는 자인가로 판단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교회 안에 있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교회의 지체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이 다 성도, 즉 살아있는 진정한 교회 지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만 듣고 사람들 보는 데서 성례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같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의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을 베푸는 의무를 수행하며, 불행 중에서 한때는 참음으로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 위선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으로 성령의 참 조명을 받지 못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믿음과 진실함과 끝까지 이르는 견인을 갖지 못하고 있다”(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7장 16절).
교회 안에 신자로 간주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예배와 성례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선한 의무들을 행하는 자들이며, 구원받은 자와 같은 행위를 한다. 그러나 그들 중 구원받은 성도가 아닌 자들도 있다. 그들은 성령의 내적 조명과는 관계없이 위선과 행위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앙 행위가 교회의 지체로 간주될만한 것들이긴 하지만, 실상은 살아있는 진정한 교회의 지체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기관으로서의 교회 안에 속해 있다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구원이 주어지거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가 언급하듯이 성령의 참 조명을 받는 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믿음과 진실함이 있는 자만이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자이며 구원받은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3) 보편적 교회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교회 안에 속하는 대상으로서의 사람이 보편적인 모든 인류를 뜻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이에 대해 개혁교회가 설명하는 교회의 보편성을 살펴보고 보편적 교회에 속하는 대상의 기준을 제시함으로 교회의 안과 기준을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우주적, 세계적 교회라는 뜻을 가진다. 이승구 교수는 보편적이라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거기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이 다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온 세상에 다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 교회라 말할 때 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교회 안에 소속되는 사람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보편적 교회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보편적 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여러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교회는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혹은 어떤 인물들에게 국한되거나 구속되어 있거나 제한받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퍼져 흩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힘으로 같은 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연결되고 연합되어 있다”(벨직 신앙고백서 27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54문을 보면 ‘거룩한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묻고 그 답으로 ‘교회를 그의 영과 말씀으로 세상 시작부터 끝날까지 일치된 참된 신앙으로 모으시고 지키시며 보존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나도 역시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로서 영원히 있을 것을 믿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4문)고 했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7장 1절과 2절에 보면 “···교회는 늘 있어야 했으며, 지금도 있어야 하고, 세상 끝 날까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교회를 공교회(Ecclesia Catholica)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보편적이며, 세계 모든 지역에 흩어져 있으며, 모든 시대로 확장되며, 시간이나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아프리카의 한구석에 국한하려고 한 도나투스파를 정죄한다. 우리는 또한 최근에 로마 교회만을 보편적(catholic)이라고 속여 넘기는 로마의 성직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7장 1, 2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2절에 보면 “보이는 교회 역시 복음 아래 있는 보편적인 교회로서 옛날 율법 아래에서처럼 한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참 종교를 믿고 고백하는 온 세계의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고 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2절).
신앙고백서에서 보편적 교회를 선언할 때 보편성의 성격은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교회는 시간적으로 보편적이다. 교회는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으며, 세상의 끝 날까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들과 함께 교제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이 교회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도 존재했으며(행 7:38), 아합의 때도 보존해 주셨고(왕상 19:18), 현재와 세상 끝날까지 존재하는 시간적 보편성을 가진다.
둘째, 교회는 인종적으로 보편적이다. 구약 시대에는 교회와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제한된 듯 보이지만, 하나님은 구약 역사 속에서도 보편적 교회를 세우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을 염두에 두시는 하나님이시고(창 12:3),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 103:17. 시 47:7-9).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의 모든 것이 진멸될 때도 기생 라합을 구원하셨으며 이방 여인인 룻을 구원하시어 다윗의 혈통을 잇는 자가 되게 하셨다(룻 4:14). 그리고 보편성은 신약교회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갈 3:28).
셋째, 교회는 장소적으로 보편적이다. 위의 신앙고백서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온 세상에 흩어져 있으며, 어떤 장소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인 교회들을 향하여 편지한다. 이러한 장소적 보편성은 교회의 보편성을 동심원적인 원으로 이해하는 현대 천주교회의 주장과는 이해를 달리한다. 현대 천주교회는 “로마 교회와 일치될 때 온전한 보편교회가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개혁교회의 보편성은 어느 한 교회의 우위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든 교회는 보편적이며,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개혁교회가 주장하는 교회의 보편성은 시간적, 인종적. 장소적으로 보편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느 시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말한다면 교회의 안과 밖의 기준은 모호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한 신앙고백서에서 보편적 교회를 고백할 때 함께 기술한 부분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믿음의 힘으로 같은 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연결되어 있다”(27조)라고 고백하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의 영과 말씀으로 일치된 참된 신앙으로 모으시고 지키시며 보존하신다”(54문)라고 기술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가운데 보편적 성격의 교회들을 세우셨지만, 그 안에는 동일한 원리가 있게 하셨다. 즉,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교회는 시간적, 인종적. 장소적으로 보편적인 성격이 있지만, 그것이 곧 모든 인류가 무조건적으로 교회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잘못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열어 놓으셨다는 로마교회의 견해를 배격한다. 그렇게 함으로 보편적 교회라는 주제 아래에서도 교회의 안과 밖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4) 사도적 교회
오늘 본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신앙고백서들은 사도적 교회에 대한 고백을 별도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16~17세기의 신앙고백서들이 사도적 교회라는 교회적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사도적 교회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교회의 안과 밖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고백서에서 사도성과 연결되어 고백되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도성은 성경과 관련한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특별히 배려하셔서 자기의 종들, 즉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자신이 계시하신 말씀을 기록하도록 맡기셨다”라고 선언한다(3조). 또한,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정경들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 한다”(1장 1절).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성경을 주실 때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고, 그들에게 그 내용을 기록하게 하여 성경으로 보전되고 전파되게 하셨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 2:20)고 선언하며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과 관련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옛날 방법들은 중지되었다”라고 고백함으로(1장, 1절) 하나님과 구원에 관련한 계시의 완성이 성경에서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성경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사도성이라는 이름하에 권위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며,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사람의 전통을 거부한다.
“비록 그 전통들이 훌륭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한 것이며, 그것들이 경건하고 사도적이고 사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하여 교회에 전수되었으며, 마치 사도적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그리고 그들의 자리를 계승하는 감독들을 통하여 전수되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 비교하여 성경에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전통을 거부한다. 하기는 그런 불일치가 그러한 전통이 사도적이 아님을 스스로 드러낸다”(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2장 5절).
전통은 그 나름대로 경건과 유익을 위하여 만들어졌을 수 있다. 또한, 사도들이나 그들의 사역을 계승한 자들에 의하여 전수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목표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성경의 사도성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진술은 로마 교황만이 사도로부터 사도성을 부여받은 유일한 교회라고 가르치고 있는 천주교회의 견해를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모두 동일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뿐이며, 그 외에 특별한 지위를 갖는 사도적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과 관련한 사도성’에서 두 번째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둘째, 사도성은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과 관련한다. 성경이 하나님과 구원을 알려주는 정확무오한 계시의 책이며 사도들에 의해 전달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교회는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복음을 전달하시는 중요한 방편이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제자들을 택하셔서 사도로 세우셨으니, 이들이 온 세계로 나아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곳곳에 교회를 모으고,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에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목사와 교사를 세우게 하셨다. 그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에 이르도록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신다”(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8장 4절).
사도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목사와 교사를 통해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이 멈추어지지 않도록 하셨다. 이것이 사도의 역할이었으며 그 역할을 전달받은 교회가 행해야 할 책임이었다. 그래서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교회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참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수된 대로 정당하고 진지하게 전하며, 우리 모두를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교회”이다(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7장).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도적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기준으로 삼는 교회이며, 성경에 계시 된 바에 비추어 진리를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도성을 교회의 전통이나 다른 권위에 기대어 설명하려는 현대 로마교회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 정리 및 평가
개혁교회가 설명하는 교회의 속성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교회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한 공동체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기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어 주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를 해결하셨으며 우리와 한 지체로 연합을 이루어주셨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혁교회의 이러한 교회에 대한 이해는 성사주의와 교황주의로 강조되었던 중세 로마교회의 신학과는 전혀 다르다. 로마교회는 성사와 교황으로 교회의 네 가지 속성을 유효하게 하였지만, 개혁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말씀과 성례로 교회의 속성을 설명한다. 말씀과 성찬이 올바로 실행될수록 하나님의 복음을 선명히 보여주는 교회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말씀과 성찬이 선포되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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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글은 ReturnBible/개혁신앙 사이트에 있는 글을 참고하였다.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