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천산 품에 포근히 안긴 작은 고찰 ~ 강천사(剛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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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들어서면 수해(樹海)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강천사의 조촐한 산문이 조금씩 모습을 비추 기 시작한다. 2층짜리 누각을 비롯하여 현대식으로 지어진 해우소(解憂所)와 세심당, 염화실 등 이 차례대로 나타나며, 그 다음에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이 이곳의 오랜 보물인 5층석탑과 나란 히 나타난다.
강천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강천사는 강천산 유일의 절집으로 887년 도선국사(道詵 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1316년 덕현(德賢)이 중창하면서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하 며, 강천산이란 이름은 이 절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482년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강천사모연문(募緣文)'을 작성했는데, 바로 그 해 설씨 부인의 지원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신말주는 세조 때 공신(功臣)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으로 1470년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하며, 모연문에 따르면 옛날에 신령(信靈)이 광덕산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草庵)을 짓고 지낸 것에서 강천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계곡처럼 흘러 절이 폐허의 지경에 이르자 중조(中照)가 서원을 내어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데, 부근에 부도(浮屠)가 있으므로 절 이름을 임시로 부도암(浮屠庵)으로 갈았으며, 이 때 절은 비록 소소한 규모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허나 절이 다시 쇠락에 빠 지자, 증조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했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1604년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으며, 1760년(영조 36년)에 출판된 '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용대암, 연대암, 왕주암, 적지암 등 5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나와있어 지금과 달리 왕년에 꽤나 잘나갔음을 보여준다. 1855년 금용(金容)이 중창했으며, 6.25전쟁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된 것을 김장엽 주지가 1959년 첨성각을 짓고, 1977년 관음전, 1978년 보광전을 새로 지었다.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이 름을 갈았고,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심우당과 염화실, 세심당 등 6~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5층석탑과 모과나무가 있다. 그외에 파괴된 석등과 석주의 일부가 대웅전 뜨락에 있으며, 용소 근처에 조선시대 부도 4기가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 산골이 깊고 물이 맑으며, 병풍처럼 들어선 숲이 고요한 바다를 이루 고 있어 그야말로 금강산이 부럽지 않은 곳이다. 비록 옛날의 영화는 거진 다 사라지고 말았지 만 새소리와 솔바람,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하고 호젓한 산사로 심술쟁이 번뇌가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로, 산새도 넘어오다 날개가 마비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 있다.
강천사는 대웅전과 그 뜨락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고, 절이 조그 만하기 때문에 대웅전 뜨락에서도 계곡길과 나란히 한 담장 너머에서도 훤히 바라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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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내 동쪽에 새로 지은 2층 문루 |
▲ 염화실과 세심당 |
▲ 강천사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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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꼭 하나씩은 있는 약수터, 강천사도 예외는 아니다. 강천산이 베푼 청정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준다. 빨간 바가지에 가득 담아 한 모금의 신세를 지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른다. |
▲ 대웅전 뜨락에 놓인 아픈 상처들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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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곱게 입혀지고 아름드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대웅전 뜨락에는 5층석탑과 근래에 심은 석등(石燈) 외에 석주와 6.25때 파괴되어 일부만 남은 부도와 석등 등이 초췌하게 자리를 지킨 다. 왼쪽은 조그만 부도탑으로 여겨지는데, 지붕돌과 상륜부(相輪部), 바닥돌과 탑신(塔身)의 일부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바닥돌 위에 잎이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섬세하게 남아 초라해진 자신을 위로한다. 그 동쪽에는 석주(石柱)로 보이는 기둥이 서로의 고된 몸을 기대고 있고, 그 곁에 맷돌처럼 보 이는 동그란 돌이 놓여져 있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 대웅전과 대웅전 뜨락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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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에 지어졌다. 불 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시왕탱, 산신탱, 칠성탱, 신중탱 등의 탱 화가 걸려있어 칠성각과 산신각 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 강천사5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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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뜨락에는 보기에도 정말 안쓰러운 5층석탑이 보호철책에 둘러싸여 상처투성이의 고단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이 탑은 강천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316년에 덕현이 세웠다고 한다. 1중의 기단 위에 5층 의 탑신을 세웠는데, 1층과 2층, 3층 옥개석(屋蓋石)이 크게 깨져나갔고, 4층과 5층 탑신도 그 리 성하지가 못하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자연의 괴롭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6.25 때문이다. 그 전쟁은 이 땅의 민중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까지도 불구를 만든 것 이다.
탑신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에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1층에 비해 2층 이상 이 급격히 줄어드는 점에서 신라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이 반영된 고 려 석탑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노반(露盤)이 사라진 채, 복발과 보륜(寶輪)이 남아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가 3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乾隆八歲十五(건륭8세15 )'라고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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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우당(尋牛堂) 대웅전 서쪽 높다란 곳에 터를 닦고 자리한 심 우당은 선방이다. 심우당이란 이름은 선종(禪宗) 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
▲ 삼인대(三印臺)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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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사 남쪽 계곡 너머에 삼인대 비석을 품은 1칸짜리 기와집이 있다. 계곡 건너에 자리한 탓에 그의 존재와 사연을 모르는 무심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 가기 일쑤인데, 삼인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고 그의 아우인 중종이 익선관(翼善冠) 을 쓴 채 왕위에 올랐다. 박원종(朴元宗)을 비롯한 반정파(反正派)들은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 愼守勤)을 죽이고, 왕을 협박하여 그의 딸이자 중종의 왕비인 신씨<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위 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게 했다.
1515년 장경왕후가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 현감 유옥(柳沃) 등 3명이 비밀리에 강천산에 모여 당시로써는 큰일 날 소리인 신씨의 복위(復 位)를 주장하며, 각자의 관인(官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 의를 했다. 그때 그들이 관인을 걸고 맹세한 곳을 3개의 관인을 걸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 르게 되었다. 허나 그들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떨친 문 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비어있는 국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744년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순창 선비들이 삼인대의 사연 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웠고, 대학자 이재(李縡, 1680∼1746)가 비문(碑文)을,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썼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으로 비석의 높이는 157cm, 너비 80cm, 두께 23cm이다.
삼인대는 1963년부터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며, 1978년 삼인대 비석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여 옆에 검은 피부의 비석을 만들었다. 또한 1994년 지역 사람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결성 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
▲ 삼인대 절의탑(節義塔) 삼인대 3인방의 절의를 기리고자 근래에 쌓은 탑으로 탑 꼭대기에 하얀 돌을 심어 그 피부에 절의탑이라 새겼다.
▲ 비각 안에 소중히 담긴 삼인대 비석
▲ '삼인대비'로 시작되는 비석의 좌측 글씨가 근래 새겨진 듯 매우 또렷하고 정정한 모습이다.
▲ 강천사 모과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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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대입구에는 강천사의 또 다른 오랜 보물인 모과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 으로 높이 20m, 둘레 3.1m의 노거수(老巨樹)이다. 강천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관상용 으로 인기가 좋아 5월에 홍색 꽃을 피운다. 또한 9월에는 황색의 열매가 피어 속세에 모과를 제 공한다.
나무를 살피니 녹음(綠陰)에 젖은 잎파리만 보일 뿐, 열매는 어디 숨었는지 눈에 들어오질 않는 다. 나무 주변으로 붉은 백일홍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그의 주변을 화사하게 맴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