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프란스시 코폴라 감독의 딸 소피아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잘 살려낸 영화로 평가 받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기간이면 마취학 역사에서는 여명기이기도 합니다.‘남군’ 지역인 버지니아로 전선의 포성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숲에 버섯을 따러 갔던 소녀는 부상을 입은 채 신음 중인 ‘북군’ 병사를 발견합니다. 소녀는 얼떨결에 여자 신학생을 위한 기숙학교로 부상병을 데려갑니다. 자신이 사는 곳인 이 학교에는 미처 피난 길에 오르지 못한 학생 다섯 명과 그들을 보살피는 교장 선생님과 교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금남(禁男)의 집에 남자를, 더구나 적군인 북군 부상병의 출현은 모두에게 큰 충격이 됩니다. 당장 남군에 신고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부상병을 남군에게 넘기는 것은 죽으라고 내팽개쳐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 일곱 여인은 부상병이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신고를 유예합니다. 나중에는 부상병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스스로 힘든 정원일을 맡겠다며 자청하는 바람에 북군 부상병은 여인들의 보호를 계속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이 남자의 존재는 일곱 여인들의 마음에 아슬아슬한 갈등 요인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억눌러졌던 갈등이 폭발되면서 영화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치닫습니다.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 남자가 다시 다리에 심한 부상을 당한 후 교장이 내린 결정입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다리를 절단하기로 하는 것이지요. 남자의 다리를 잘라, 남자의 배신을 응징하고, 영원히 그곳에서 달아날 수 없도록 만들겠다는 처절한 복수를 합니다. 그녀는 어떻게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아버지가 의사였을까요?), 당장 클로로포름과, 해부학 책과 도끼를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머리칼이 쭈뼛 서는 장면입니다. 이 즈음에서 마취제 클로로포름에 대해 알아 볼까요?
앞서 <무기여 잘 있거라(제 11화)>, <마스트 앤 커맨더(제15화)>, <폴 뉴먼의 심판(제 93화)>에서 마취제 이야기를 조금 했습니다. <매혹당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클로로포름(chloroform)은 웃음가스(아산화질소, N2O), 에테르(ether)에 이어 세 번째로 발견된 흡입 마취제입니다.
웃음 가스가 영국 브리스톨에서 발견되었고, 에테르도 웃음 가스와 비슷한 성질이 알려지면서 두 가스는 마취제 보다는 오락용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846년에 보스턴에서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에게 처음으로 무통 외과 수술에 성공합니다. 에테르의 성공은 미국인이 처음으로 의학사에 남긴 굵직한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이 성공은 빠른 속도로 대서양 넘어 영국으로 전해집니다. 마취제가 개발됨과 동시에 대서양을 넘나드는 형국이지요?
런던의 외과 의사 리스턴은 에테르 마취 수술에 성공했고, 에딘버러의 심슨(Sir James Young Simpson, 1st Baronet; 1811~1870)도 에테르를 이용해 분만 여성들의 산고(産苦)를 없애는 시도를 합니다. 그리고 1847년 1월에 무통(無痛) 분만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심슨 ⓒ 위키백과
‘양키’의 발명품인 에테르는 완벽한 마취가스는 아니었습니다. 에테르는 역한 냄새가 나서 산모들이 들이마시는데 거북스러웠고, 종종 수술실에서 폭발 사고를 일으키는 까다로운 마취제였습니다. 심슨은 좀 더 나은 마취제를 찾는 연구를 시작해 이런저런 화학물질을 검색합니다. 그러던 중, 16년 전인 1831년에 발견된 클로로포름을 후보 물질로 올려봅니다.
일설에는 심슨과 동료들이 클로로포름을 아주 우연히 발견했다고 전합니다. 실험실에서 누군가 클로로포름을 담은 병을 엎질렀고 그 바람에 연구자들이 집단으로 클로로포름을 마시고 정신을 잃었고, 시간이 한참 지나 실험실을 찾아왔던 심슨의 아내가 한꺼번에 잠든 남편과 연구자들을 발견했다는, 훈훈한 미담이 전해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좀 더 믿을만한 기록에 의하면 1847년 11월 4일, 심슨은 동료들과 함께 의도적으로 클로로포름을 들이 마셨다고 합니다. 서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말이 많아졌고, 신나게 떠든 다음(웃음 가스의 효과가 나오네요), 잠이 듭니다. 그리고 한 잠 자고 깬 후에 각자의 경험을 토론하여 검증 작업을 거듭하여 나누고 마침내, 에테르보다 더 나은 마취 가스를 발견합니다.
심슨은 1847년 11월부터 에테르를 대신해 클로로포름을 무통 분만에 썼고, 그 해가 가기 전에 팔 절단 수술에도 사용해 효과를 봅니다. 이제 산과는 물론이고 외과에서도 클로로포름 마취가 대세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심슨은 뜻밖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힙니다. 근본주의적인 종교계와 보수층이 무통 분만이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며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심슨은 이 반발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갔으며, 아울러 통치자인 빅토리아 여왕이 스스로 무통 분만으로 출산을 하자 논란은 수그러듭니다(제 18화 <영 빅토리아> 참고). 이후로 클로로포름 마취는 제자리를 잡았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1857년 가족 사진. 여왕과 남편 알버트 공, 그리고 아홉 자녀가 있다. 가장 어린 레오폴트 왕자(1853년)와 갓난아기인 베아트리체 공주(1857년)는 무통 분만으로 출생했고, 사진 우측의 장성한 빅토리아 공주는 프러시아로 시집가서 나중에 카이저 빌헬름2세가 될 왕자를 무통분만으로 출산한다(1859년). ⓒ 위키백과
1870년에 심슨이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의 모든 대학이 휴교를 하고, 증권거래소와 모든 상가들이 철시하여 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성대한 장례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을 통증에서 해방시킨 인물에 대한 예우를 해주었습니다.
이후로도 흡입 마취제 연구는 이어졌지만, 큰 진전은 없습니다. 1923년에 에틸렌(ethylene)의 마취 효과가 확인됩니다. 에틸렌은 식물이 내뿜은 호르몬이기도 합니다. 과일이 성숙할 때 분출되는데, 썩은 과일이 하나 생기면 주변 과일도 금세 물러지게 만드는 원인이지요.
에틸렌의 발견 또한 흥미롭습니다. 1908년에 온실에서 키우는 카네이션이 꽃을 피우지 않는 이유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식물이 내뿜는 에틸렌 가스가 식물에 미치는 효과를 발견합니다. 온실 속에 만연한 에틸렌 가스가 식물의 개화를 억제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온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해롭지 않을까? 학자들은 먼저 동물 실험을 해봅니다. 그러자 동물에게는 마취 효과가 있는 것이 확인되지요. 이것을 이용해 사람에게 쓸 마취 가스로 개발하는데 5년이 걸립니다. 마침내 1923년에 임상 시험에 성공해 마취제로 널리 쓰입니다. 에틸렌 가스는 1950년대 초까지 수술실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폭발 위험성 때문에 지금은 흡입 마취제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른 안정한 흡입 마취제들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의사들이 에틸렌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고 식물학자나 농부들의 관심 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에틸렌은 모든 식물들이 다 내뿜지만 바나나, 망고 같은 열대 과일들과 사과에서 특히 많이 내뿜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에틸렌 가스는 종간 장벽 없이 효과를 내므로 사과 하나를 놔두면 주변이 과일들이 빨리 성숙되거나 물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틸렌이 많이 나오는 과일은 다른 과일을 분리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에 이런 성질을 이용해 딱딱한 참다래를 무르게 하고, 홍시 감을 빨리 만드는 데 쓰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마취제, 식물에게는 성숙 촉진제. 에틸렌의 용도는 끝이 없네요. 그러고 보면 최초에 발견된 마취제들도 엉뚱한 용도로 쓰다가 마취제로 전용되었네요. 새로운 마취제들도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곳에서 뚱딴지 같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 자연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는 섬세한 눈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겐 우연한 발견의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번 105회를 끝으로 <박지욱의 메디시네마> 연재를 마칩니다. 그 동안 글을 읽고 성원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