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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환신부 순례이야기
프랑스에 있었을 때의 얘기다. 파리의 본당신부와 함께 벨기에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리에주를 지나 브뤼셀에 갔고, 도중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들고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갔다. 유학올 때 지정환신부가 건넨 지폐를 내밀었다. 점원은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른 일을 했다. 파리의 본당신부도 다른 쇼핑을 하면서 기다렸다. 한참이 흐른 후 맞닥뜨린 건 다름아닌 벨기에 경찰들. 경찰들은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상황이 전개되자, 파리의 본당신부가 경찰들에게 말했다. 누구라는 것부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것이냐고까지. 그제야 경찰들의 시선의 혐의가 온화로 바뀌게 됐다. 그러면서 점원에게도 설명하자, 점원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속 아래쪽에 수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시늉을 했다. 이유인 즉, 건넨 지폐가 고액권이고 게다가 지금은 잘 통용되지 않는 희귀지폐였던 까닭이었다. 낯선 이방인 유학생이 허름한 차림으로 건넸으니, '주웠다' 아니면 '훔쳤다' 정도의 판단이 섰을 것이다. 조폐은행에 갔더니, '점원이 받았으면 횡재했을 것인데. 바꾸지 마시고 잘 가지고 계세요.' 한다. 유학을 서두를 때 지정환신부가 '내가 줄 것은 이것밖에 없네. 미안하구만. 그래도 혹여 벨기에를 가거들랑 식사라도 한 끼.' 하며 건네고 또 무심코 받은 것인데, 자신은 자린고비처럼 살면서도 큰 것을 베푼 지정환신부의 마음을 읽는 순간이었다. 이 얘기로 지정환신부 순례이야기 시작을 하는 것은 실은 그 자체로도 조심스럽다. 당신이 스스로 사제이기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매가 시작될 무렵. 무지개가족들과 더불어 있는 자리에서 어렸을 적부터의 얘기들을 풀어냈고, 무지개가족들은 지정환신부의 이런저런 얘기들 말고 진정한 얘기들을 담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임실성당을 국가문화유산으로 올리려는 일을 추진하면서 브리핑을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무엇을 말할까.' 하다가 떠오른 것이 발이었다. 전동성당을 지은 보두네신부의 급작스런 죽음의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달려온 드망즈주교가 주검에서 언뜻 비친 발을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가.[Quam Speciosi]'라고 했다. 바오로사도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에서 나온 이 말을 떠올리려면, 파리외방전교회에 걸려있는 쿠베르탱작가의 '떠나는 선교사'의 그림을 보면 된다. 이제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선교사에게 부모와 형제와 친지와 친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발에 입맞춤해서 축복하는 것밖에. 떠날 때 입맞춤하던 곱디고운 발이 선교지에서 때로는 들판을 헤매고 때로는 산속을 헤치며 다녔으니 일그러진 발이 된 것은 분명한 일. 드망즈주교의 눈앞에 보인 보두네신부의 발이 그러했으리라. 그리고는 반세기가 흘러 전동성당에 온 지정환신부. 전동성당에서 찍은 어느 세례식의 장면에 눈에 띄는 것은 지정환신부의 검정고무신. 그리고는 부안성당과 임실성당과 무지개가족 등을 거치면서 다닌 지정환신부의 발자취는 분명 보두네신부의 발자취와 판박이였을 것이다. 보두네신부의 주검을 보는 드망즈주교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외팔이화가인 최영면작가는 오랜 구상 끝에 그림을 완성했지만, 조합하지 못하고 파편적인 단면들을 따로따로 그렸기에 지하에 쳐박아놓았었다. 그러다가 김봉술신부가 성당에 걸면 좋겠다고 해서 무심코 건넸다. 어느날 신태인도 국가문화유산을 추진하려고 한다고 해서 갔더니 거기에 걸려있어서 다시 보게 된 그 그림. 그리고 그 발. 무심코 흘렸던 외팔이화가의 말이 맴돌았던 까닭이었다. 발을 찾아헤매다 지정환신부의 발이 가장 들어맞는 발일 것 같아서 청했더니 '푸하하' 하더니만 기꺼이 발모델이 됐던 까닭이다. 발이 거룩하게 와닿는다.
나가사키의 고토열도에 가면 소막[牢室]이 있다. 몰리고 쫒겨서 고토열도까지 왔건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가 싶더니 이내 또 가뒀다. 코딱지만한 소막에 수많은 가쿠레기리스탄[숨은그리스도인]을 잡아넣었지만, 그들은 기도소리로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런 소막들이 여러 곳. 성당 부근들의 소막들은 대체로 그런 형태들을 띠고 있고 바로 옆 울타리에는 검은소 몇 마리가 낯선 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가사키 도처에 후쿠오카 도처에 교토도쿄 도처에 흔히 보는 소얼굴의 비스킷. 그리고 그 안의 까망베르 치즈와 로슈포흐 치즈의 크림. 인기가 좋다. 여기든 저기든. 아마 그 조화를 보면 소를 키우는 백정과 치즈 전달한 선교사 그리고 배에 실려온 비스킷 등이 수세기와 수세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지정환신부의 고향 벨기에에는 호가든이라는 널리 알려진 맥주가 있다. 이 맥주의 로고에는 농부의 지팡이와 주교의 지팡이가 있다. 부임한 주교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맥주인 까닭이다. 걸죽한 이 조화는 많은 이의 입맛을 돋운다. 처음 이름의 디디에신부는 부안성당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간척사업을 하고 땅을 일궜다. 다음 이름의 지정환신부는 임실성당에서 굶주린 이들을 위해 목장사업을 하고 양을 키웠다. 정약종이 백정 황일광과 어울리고 정약용이 백정 김석태와 대화하듯, 천민[賤民]이 천민[天民]이 되는 세상은 이렇게 대를 이었다.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용은 유배되고 지정환도 추방됐다. 이유는 백성을 선동함. 하지만 뿌려놓은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임실의 치즈학교도 부안의 제과학교도 프랑스의 최고학교에 답사한다. 학교들도 마치 지정환신부를 아는듯 정성껏 가르친다. 다리를 놓고 통역을 하는 가운데도 '이 무슨 조화일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리고 후대들이 이런 일화들을 담은 비스킷은 얼마나 또 달콤할지 기대된다.
'그리스도의 평화[Le Paix Du Christ]'. 지금은 천주교마산교구장인 이성효주교가 유학생시절 오를리[Orly] 근처 프랑스본당에 있었고, 한번은 유학생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할 때 이제 갓 온 유학생이 건넨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인 모두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기에, 미사 끝에 물으니 여성형[La Paix]을 남성형[Le Paix]으로 잘못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 문제는 발음상 남성형[Le Pet]은 평화가 아니라 방귀였으니 이상할 수밖에. '그리스도의 평화[La Paix Du Christ]'가 순식간에 '그리스도의 방귀[Le Pet Du Christ]'로 둔갑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프랑스로 보낸 배편의 짐이 도착했다. 프랑스가 담뱃값이 비싸다는 것을 안 유학생은 몇 보루 더 집어넣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됐던지 오를리의 세관에 불려갔다. 갔더니 세관장이 대번에 '너 그 방귀[Le Pet]' 하고 박장대소를 하더니만, 짐을 풀려고 하니까 '뭐하러 그러냐.'며 그냥 가져가란다. 이성효신부가 있던 본당의 신자였던 것이다. 유학생은 방귀[Le Pet] 덕을 본 것이고. 그렇게 어설펐던 유학생은 여전히 지금도 어설프지만,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심체요절을 오픈하게 하고, 프랑스국립기록원이 한지몽골문서를 공개하게 한다. 복본의 허락까지 받아가며. 하기야 미사중 뭣모르고 한 그런 행동으로 들이댔을 것이니 어쩌면 다들 형식과 절차를 거치지 않은 진솔한 편지 한 통에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부안의 제과제빵학교가 르꼬르동블루[Le Cordon Blue]라는 일류학교에서 실습하겠다고 할 때 사람들은 묵묵부답인 그곳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헛수고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신시도에서의 영광호와 승리호를 들먹이며, '드디어 여러분이 은혜를 갚을 시간이 왔다.'고 썼다. 답신은 왔고 오케이. 세계 최고의 셰프들은 정성껏 가르쳤고, 작년에 이어 올해는 르노트르[LeNôtre]에서 청소년들이 실습한다. 바로 그 방귀[Le Pet] 사건이 있던 곳에 있는.
1847년 신시도에 프랑스 구축함과 호위함인 영광호와 승리호가 좌초됐다. 1846년 김대건신부와 더불어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다른 속셈은 문호개방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베트남의 항구를 열게 한 두 함선 모두 기세등등하게 왔건만 부안 앞바다 뻘에 빠지고 선원 오백여명은 옴쭉달싹 못하고 갇힌 셈이 됐다. 다행인 것은 팔월 한여름이어서 얼어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굶주림. 며칠은 비스킷으로 연명했지만 이내 동나자 동요가 일었을 것이다. 더러는 섬을 약탈하자고 했을 것이고 더러는 내륙 가까이까지 갔을 것이다. 남은 무기로 살기 위해서. 하지만 그들은 편지를 썼다. 전라도관찰사 홍희석을 통해 조선조정에. 주절이주절이 쓴 내용의 핵심은 '살려달라.' 답신이 없이 몇 주가 지나자 선원들은 아사 직전에 이르렀고, 그제서야 나타난 조선배에 '소고기' 등을 포함한 식량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프랑스로 무사귀환한 선장들과 선원들은 배를 잃은 것에 대한 진술보다 더 감동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묘사한다. '굶어죽기 일보직전에 나타난 손길'. 조선왕조실록에 한두줄 적힌 사건은 프랑스국방부기록원의 진술내용과 언론보도로 더 구체화됐고, 의원이던 빅토르위고에게는 장편 "바다노동자[Le Travailleur De La Mer]"의 영감을, 청년이던 쥘베른에게는 해양소설들의 감각을 솟구치게 한다. 그리고 몇세기가 지난 이후 당시 선장이던 샤를르리구[CharlesRigout]의 후손은 국제원조로 한반도를 돕고,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에서 지정환신부는 바로 그 부안에서 간척사업을 벌여 신앙인이건 아니건간에 공평하게 땅을 무상으로 선사한다. 방귀[Le Pet]라는 해프닝의 발단은 실은 오랜 평화[La Paix]에 있었고, 부안의 아이들은 양식[Le Pain]을 빚어만드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 아이들은 이태석신부와 원선오신부와 지정환신부의 바람처럼 어쩌면 이제는 아프리카에 눈물겨운 그 빵[Le Pain]을 선사할 것이다.
관상[ConTemplation]. 묵상[QuietTime]이나 명상[MediTation]과는 차원이 다른 관상에 ConTemplation을 붙인 것이 왜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함께[Con]라는 것은 알겠고, 문제는 Templation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였다. 신성한곳[Temple]이 가장 적절하겠지먄. 그것은 다시 Temps[시간/기후/시대]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나눔[Cut[Couper/DéCouper]]의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살핀다면 연결고리는 그럴싸해진다. '거룩한 곳[것]에 함께' 하는 것이 관상이지만, '순간에 함께' 하는 것이 관상이라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누구와 또는 무엇과. 당연히 하늘과. 그런데 하늘은 가장 스스로와 함께하는 것이 세상과 함께하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천명한다. 세계문화유산인 일본 소토메의 시츠구제원에 가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쿠키, 누들, 재봉 등을 가르친 드로신부를 보게 되고, 부안과 임실과 완주에 가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즈 등과 함께 희망을 선사한 지정환[디디에]신부를 보게 된다. 귀족의무[NoblesseOblige]의 표본이 된 지정환[디디에]신부의 행보는 놀랍다. 앞선 언급보다 더한 것은 한센인들을 끌어안고 장애인들을 치유하는 그 모습 안에서이다. 문드러진 손을 부여잡고 곪아떠진 발을 치유하는 것을 본다면 '시대[의 아픔]'와 가장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건 일본이건 우리이건 수용소와 위안소의 가까이에 아주 가까이에 봉쇄수도원이 있는 것도 새삼 이해된다. 그들은 시끄러운 세상을 등지고 떠난 것이 아니라 가장 상처받은 세상에 다가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분철된 '시대'를 헤집고, 그것을 덮고 묻고 나면 하늘을 이고 지고 할 수 없다는 듯이 용서를 청한다. 대속의 의미로. 그래서 그들은 섭리[攝理]의 눈을 가진 것이다. 너머를 보는[ProVidence].
경당문노[耕當問奴]. '밭 가는 것은 당연히 노비에게 물으라.'는 이 말은 정약용이 시대의 흐름을 읽고서도 중농주의를 고수했던 대목을 이해하게끔 한다. 중상주의나 중공주의로 갈아타지 않은 것 또한 근간이 먹고사는 일에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수용소나 사형터에 가면 나무들을 보곤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비록 눈은 없지만 나무는 그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목격자. 뮌헨 다하우에는 플라타너스가 그렇게 서 있다. 해미와 전주의 관청 뜰안에는 호야나무[회하나무]가 딱 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가난한 공소의 마당에 우뚝 솟은 은행나무는 전주향교나 성심학교에 있는 은행나무보다 거룩한 자태로 서 있다. 가난하지만 교육열만은 대단했다는 공소신앙인들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남경리지샹위안소로 가는 길목의 양버즘나무. 남프랑스의 그토록 아름다운 가로수길목보다 와닿는 것은 여인들의 징용에 함께 눈물흘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얼빈에 여러 번 가고, 도로변의 버드나무와 남양나무는 알겠는데, 731부대 여기저기 우뚝 솟은 나무가 도대체 무엇인지 몰라 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답변은 사진을 본 본초학자들과 식물학자들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번에 진안의 아이들과 갈 때 함께 한 어은동공소의 두 어르신. 나이는 구십을 바라보고 있지만 전혀 흐트러짐 없는 걸음과 자세로 731부대를 돌며 혀를 차고 맘을 쓸며 걷더니만, '참드릅내무넝 그광경들모다 속속히봤겄지.' 한다. 그러니 젊은 칠십대의 공소회장이 곁에서 '참드릅나무 뿌리껍질로 상채기를 나사뿔고 고름독얼 빼내넌데 그러헐려구 여기서있나.' 하며 맞받는다. 주고받는 얘기도 그렇지만, 참드릅나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것이다. 지정환신부에게 역시 농민들은 그러했다. 가르쳐야 할 대상들이 아닌, 한 수 배워야 하는. 정약용도 그러했을 것이다. 실학자도 그러했을 것이고.
'미쳤나봐.' 그토록 말수도 적고 진중한 이가 우스개 소리 실없는 소리 하니 누군가가 웃으면서 한 말이다. 그런데 사연은 있다. 농촌의 현장 노동의 현장 등은 떠올리는 순간부터 잿빛이다. 막상 가면 더 그러하고. 그곳에 뭔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때 영상을 만들려고 했더니, '희망을 줘야 할 자리에 너무 더 무겁게만 만들지 마라.'며 울고웃게 하는 영상을 코치한 이가 있다. 그래서 익살스러워지기로 했다. 내가 망가지더라도 누군가가 한 번 박장대소하고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거니까. 지정환신부의 유머. 한국전쟁이 끝나고 가난한 나라에 푸른 눈의 신부가 보이니 보는 사람마다 신기했을 것이다. 어른이나 아이여도 마찬가지. 시골에 가면 더더욱. 그러다 수염이 길게 달린 어르신이 한 번 물었단다. '어디서 왔능가요.' '벨기에에서 왔어요.' 벨기에를 알 턱이 없는 어르신은 '뭐하는 사람이랑가요.' 하고 다시 묻자 '신부입니다.' 하니 신앙인이 아닌 어르신으로서는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신부라고 했는데도, '장개[장가]는 갔시유.' 하니, '장계[무주진안장수 지역의 장계]는 한 서너 번 갔습니다.' 하니 '에끼. 이런 아주 잡놈 같은 이구먼.'이라고 어르신은 말했다. 이러한 얘기를 무거운 분위기일 때 꺼내들면 이내 공기는 따스함으로 바뀐다. 지정환신부가 부안에서 임실에서 전주에서 완주에서 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빛도 볕도 들지 않는 곳에 한 줌 빛과 볕을 선사. 딱 그것이었을 것. 임실성당에 깃든 그 정신을 어떻게 건축과 공간이 말하는지를 준비한다고 하니, 멀리 강원도 정선성당서 거기도 봐달라고 연락이 왔다. 가는 내내 무엇일까 무엇일까 하다 나온 안광훈신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와 평생을 살다간 그는 또 정선성당에서 막장서 울고온 검디검은 얼굴에 난 유난히 드러난 눈물자욱을 쓸어주며 무슨 사연들을 거기에 남겼을까.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고 그 가치를 보전하려고 하는 것을 처음에는 차별화된 희귀성에 뒀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인류 누구나에게 보편성을 띠는 가치로, 즉 인류 누구나라면 공감대를 갖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것에 더 큰 방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보니 유네스코가 무엇을 중시하는지도 보인다. 교육 과학 문화 등에서 지향하는 것은 인류의 공동선임을. 인류가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바들에 있음을. 그런 시각으로 보니 세계문화유산인 여러 유형자산이 무형자산인 정신을 얼마만큼 간직하느냐를 중시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스라엘의 어느 샘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에도 목마름을 해소해준 가치로 받아들여진다든지, 스웨덴의 원형을 복원한 조그마한 교회건축이 왜 더 오래된 교회건축에 비해 가치를 인정받았는지, 일본의 가쿠레기리스탄의 초라한 성당건축이 다른 커다란 성채와도 같은 성당건축을 재치고 등재됐다든지 하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그 안에 정신을 심어준 누군가가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 공통분모는 자린고비와도 상통한다. 자신에게 인색하지만 타인에게 관대했었던. 전동의 보두네. 중앙의 박성운. 둔율의 서정수. 임실의 김후상. 임실의 지정환. 함열의 김영구. 정선의 안광훈. 문화유산이거나 문화유산이려고 하는 모든 곳에 정신적아 지주 역할을 한 이들은 스스로에게 지독하게 구두쇠였다. 옷 한 벌 밥 한 끼 등등이 꼭 그들한테 따라붙었다. 그런 가운데서 공동체를 더불어서 구현한 것이다. 귀족 출신인 지정환신부에게 면세점의 위스키를 사간 적이 있다. 전에 어디선가 한 잔 들이키고 좋아하던 모습을 본 까닭에. 그때 나온 외마디가 '미쳤나봐.'였다. 그라고 왜 마시고 싶고 누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죽기까지도 철저한 시대정신인 그것이, 바로 그것이 문화유산이 문화유산인 까닭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요 이쁜 구더기들". 지정환신부가 중증장애인들의 가족공동체인 무지개가족을 만든 이후의 얘기들이다. 함열에 살던 어느 중증장애인의 사연을 듣고 갔더니, 이미 상황은 심각했다. 사연인 즉, 시골노동자로 일하던 젊은이가 모처럼 주말에 학교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볼을 주우러 가면서 핸드볼대를 철봉삼아 잡고 갔다. 그런데 본인이 넘어지고 바로 뒤이어 핸드볼대도 넘어지면서 뒷목을 내려쳤다. 목의 신경이 끊기고 전신마비가 됐다. 도저히 손쓸 수 없자 시골집에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지정환신부가 상태를 보기 위해 가자, 이미 안방에는 아버지가 앓아누워있고 건넌방에 누이역시 앓아누워있는 형국이었다. 셋을 어머니 홀로 돌보고 있었다. 밭일까지 해가면서. 간호간병이 제대로 됐을리 만무해졌다. 지정환신부가 젊은이를 돌아눕히자 이미 진행된 등창이 심각했다. 심지어는 구더기조차 기어다니고 있었다. 의학계에서는 구더기가 썩은 살을 먹기에 항생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알려져 있었기에, 지정환신부는 "요 이쁜 구더기들" 하며 핀셋으로 구더기를 건져냈다고 한다. "닥터노먼베쑨"이라는 책에서도 비슷한 얘기들이 나온다. 그리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무지개가족으로 데려갔다. 이미 겨우 뼈 위를 살짝 덮은 정도의 살가죽만 남았고, 등창과 욕창을 막으려고 엎어져서 먹고자야 하는 생활을 해야 했지만 젊은이는 살았다. 간척과 가난과 치즈와 조합과 전산과 번역을 떠올리는 지정환신부에게 짙게 남아있는 것은 장애와 더불어 살았다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도저히 홀로 살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중증장애인조차 홀로서기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간호간병시스템 안에서. 젊은이도 무지개가족에서 살다가 독립했다. 독립된 자기만의 공간에서 홀로서기를 한 것이다. 지정환신부의 바램처럼. 이런 일화는 지정환신부와 함께했던 누구나가 적어도 한두 개 갖고 있는 기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