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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소설작법
좋은 소설을 쓴다는 것, 시대 흐름의 수용과 새로운 방법의 글쓰기
허만욱
소설의 본질적 속성은 삶에 대한 이해를 나누는 것,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 조망과 통찰을 다른 사람과 대화하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현대소설의 역사와 미학을 다룬 에세이집 『커튼』에서 정치나 사회 묘사, 이념 등에서 벗어났을 때 ‘소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훌륭한 소설 작품은 세상 앞에 드리운 커튼을 찢어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소설론을 개진하였고, ‘왜 인간은 소설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스스로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답했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을 잘 이해해야 하고, 삶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삶이란 나와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세계와 대립하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고 판단하며, 궁극적으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른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시도다. 즉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 삶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소설을 쓰는 이유가 소통을 위해서라면, 그 소통의 도구는 바로 언어다. 명료하고 적절한 소통을 위해 작가는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디지털 매체의 새로운 시대에서도 여전한 기본은 투철한 언어의식과 진지하고 투철한 글쓰기다. 따라서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표현하는 올바른 단어는 하나뿐이며, 그것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동사도 하나이고, 그것을 한정하는 형용사도 하나입니다. 당신은 그 단어, 그 동사, 그 형용사를 찾아야 합니다”라고 했던 플로베르의 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좋은 사전을 옆에 두고 장황하고 진부한 용어를 피하고 오용된 단어를 예리하게 간파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쓴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은 언어에 대한 감각을 훈련하는 방법이 된다. 그리고 문장에서는 리듬이 느껴져야 한다. 산문에도 글의 의미와 활력을 더해주는 리듬이 있다.
한편 감각이 살아있는 유연한 문장도 중요하지만 문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단은 문장 다음에 오는 구성의 한 형식으로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지도다. 소설의 문단 구조는 한결 자유로운 편이다. 선율보다 장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많은 소설을 읽고 써보면 문단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글을 쓸 때는 문단을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맺을지 너무 많이 의도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요령이다.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다시 고쳐도 된다.
문단이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다. 글이 생명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문단의 단계다. 문단이라는 것은 대단히 놀랍고 융통성이 많은 도구다. 때로는 낱말 하나로 끝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몇 페이지에 걸쳐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 글을 잘 쓰려면 문단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장단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 변하지 않는 기본 작법, 폭넓고 꾸준한 독서와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글쓰기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특히 독서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을 통하여 창작의 과정에 친숙해지고 또한 그 과정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언젠가는 자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남들이 얘기한 것이 무엇이고 아직 쓰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진부한 것이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효과적인 것이 무엇이고 지면에서 사라져 가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하여 알게 된다.
아울러 독서를 통하여 훌륭한 작품과 위대한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점검하거나 창작 의욕에 독려를 얻게 된다. 그리고 독서를 통하여 무엇보다 다양한 문체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특별히 멋있어 보이는 문체를 모방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여러 문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만의 문체를 개발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폭넓은 독서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을 가다듬어야 한다.
분명히 여러분이 선택한 모든 책에는 반드시 가르침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특히 한창 배움의 길을 걷는 작가들에게 문체와 우아한 서술과 짜임새 있는 플롯을 가르쳐 주며, 언제나 생생한 등장인물들을 창조하고 진실만을 말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빼어난 스토리와 빼어난 문장력에 매료되어 압도당하는 일은 모든 작가의 성장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한 번쯤 남의 글을 읽고 매료되었던 적이 없는 작가는 그러한 자기 글로 남들을 매료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묘사, 이야기 속으로 독자 끌어들이기
소설은 시간의 흐름을 중요시 여기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문학 양식이지만, 반드시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설에서의 문학적 향기는 이야기 도중에 삽입되어 있는 묘사에 의해 생성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인생 삶의 지침이 되는 구구절절한 이야기에서보다 더 많은 독자는 대상에서 느낀 인상을 문자로 재현한 묘사에서 감동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생한 현실감을 전달하는 좋은 묘사는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렇지만 탁월한 묘사력은 후천적인 능력이므로 많이 읽고 많이 쓰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다. 많이 읽으면 적절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고, 많이 써보면 묘사하는 요령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묘사력은 직접 해보면서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여러분이 독자에게 어떤 경험을 보여주고 싶은지를 떠올려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터득해야 한다. 그것도 독자들이 금방 알아듣고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묘사가 빈약하면 독자들은 어리둥절해하고 근시안이 된다. 반대로 묘사가 지나치면 온갖 자질구레한 설명과 이미지 속에 파묻히고 만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어떤 것을 묘사하고 어떤 것을 그냥 건너뛰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여러분의 주된 소임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등장인물의 신체적 모습이나 옷차림 따위는 시시콜콜하게 묘사하지 말고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좋다. 묘사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시작되어 독자의 상상력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 점에선 작가가 영화 제작자보다 훨씬 유리하다. 영화 제작자는 필요한 부분에서는 많은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만들려면 등장인물의 겉모습보다는 장소와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탁월한 묘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해주는 몇 개의 엄선된 사실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흔히 머리에 처음 떠오르는 사실들이며, 적어도 출발점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중에 바꾸거나 덧붙이거나 빼고 싶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바로 수정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처음에 떠올렸던 사실들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 좋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묘사는 흔히 부족해지기도 쉽지만 또한 지나치게 많아지기도 쉽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마 모자랄 때보다 넘칠 때가 더 많을 것이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어느 식당을 배경으로 어떤 장면을 쓰려고 한다면, 자주 가보았으니까 당연히 그곳에 대하여 아는 것들을 묘사할 것이다. 우선 기억을 바탕으로 그곳의 이미지를 떠올려 볼 것이다. 이때 이러한 마음의 눈은 쓰면 쓸수록 발달한다. 기억을 되살리는 이 과정은 비록 짧지만 매우 강렬한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모든 감각을 열어놓는 일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배경이 아니라 스토리라는 점이다. 독자가 소설책을 사는 것은 스토리를 읽기 위해서다. 그런데 잘 아는 곳이라 해서 식당에 대한 묘사가 길어지면 자연히 스토리의 진행 속도가 느려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좋은 소설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힘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소설이 지루해져서 독자들이 책읽기를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지루함은 작가가 자신의 묘사력에 스스로 도취한 나머지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하는 작가의 최우선 과제를 망각한 탓일 때가 많다. 자기도취에 빠진 글을 읽으려고 책을 사는 독자는 결코 없다. 그러므로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리기 쉽다는 이유로 기나긴 묘사에 매달려 하염없이 방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 잘 듣고 진실하게 말하기
대화의 기능은 사건 전개와 성격 구현에 있다. 그러므로 대화는 이야기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고, 말하는 사람의 성격과 일치해야 한다. 그렇다면 되도록 자연스럽고 참신하여 실감나는 대화를 써야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쓴 대화문과 잘못 쓴 대화문 모두 누구든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잘못 쓴 대화문은 조율하지 않은 악기처럼 귀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작품은 독자를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여 함께 대화하는 것이다. 대화문을 잘 쓰는 작가들은 대개 남들과 어울려 말하고 듣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때 듣기는 매우 중요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억양이나 리듬이나 사투리나 속어 따위를 포착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대화문을 쓰는 작가들은 흔히 타고난 잘 듣는 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일부 연주자나 가수들이 완벽하거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음감을 가지고 타고난 것처럼 말이다.
한편 소설의 다른 요소들이 모두 그렇듯이, 좋은 대화문의 비결 역시 진실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실적이고 공감을 일으키는 대화문을 쓰려면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한다. 간혹 진실을 듣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말은 아름답든 추하든 성격의 지표다. 그리고 때로는 답답한 방 안에 스며드는 한 가닥 신선한 바람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소설 속에 나오는 말이 점잖으냐, 아니면 상스러우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들리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자신의 작품이 진실하게 들리기를 바란다면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입을 다물고 남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이다.
■ 명작의 배경, 왜 잊혀지지 않는가
소설에서의 배경은 결코 우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설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실제 삶이 우리의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처럼, 소설에서도 인물들은 배경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 세계에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배경들뿐만 아니라, 사이언스 픽션이나 판타지 소설을 고려해 본다면 소설의 배경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가들은 왜 소설 속에서 특별한 배경을 선택하고 조합하는 것일까. 소설을 쓰는 사람은 한 번 더 심사숙고하여 자기 소설의 배경을 설정하도록 해야 한다.
소설에서의 배경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행위가 독자의 신뢰감을 얻을 만큼 생생해야하고,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체로 소설 속에 등장한 어떤 인물에 대한 인상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독자를 사로잡을 만한 매력을 지닌 그런 인물(혹은 성격)로서 작가가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그 매력이란 만나보지 못했던 낯선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소설의 인물이 오래 기억에 남듯, 그 인물의 활동 무대인 배경 또한 독자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작가가 그 배경을 설정할 때 독자의 기억에 새겨질 인상적인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 혹은 신비감을 일으키는 어떤 분위기, 또는 어떤 현장에서의 사건의 얽힘과 풀림을 통한 극적인 장면이 독자를 긴장시켜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심사숙고했던 것이다.
이때 그 장소와 분위기, 사건 현장이 흔해빠진 곳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한 낯선 곳일수록 긴장과 흥분이 따른다. 비록 우리가 늘 생활하는 집안을 무대로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도 작가가 그것을 색다른 각도에서 포착하여 그려내게 되면 그것은 전혀 낯선 세계로 보여질 수 있다. 그 낯선 장소, 혹은 선택된 어떤 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없었던, 작가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어느 현장의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치밀한 의도에 의해 배경은 선택된다.
비록 그 장면이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작품을 머리에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조계산의 한 자락을 잇는 제석산을 머리에 받치고 순천만의 한 편을 끼고 펼쳐진 넓은 분지의 포구 벌교가 배경이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 하동군 악양들 평사리의 한가위 풍경을 묘사하며 시작하던 박경리의 『토지』, 헤밍웨이의 조용한 아침의 해상 풍경이 인상적으로 그려졌던 『노인과 바다』, 산정에 표범의 사체가 누워 있던 그 상징성의 『킬리만자로의 눈』, 안내 노인을 따라 철교 폭파 지점을 답사하는 조단의 눈에 비쳐진 계곡을 묘사하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고래 생태 및 그 포획기술을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했던 멜빌의 『백경白鯨』, 절대적인 율법으로 성城에 복종하고 있는 그 마을의 여관 묘사를 끈질기게 보여주던 카프카의 『성城』, 접경의 긴 터널을 통과하자 나타난 눈 내리는 고장의 자연을 아름답게 그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비둘기도 나무도 공원도 없는 살벌한 공간 보여주기로 서두를 시작하던 까뮈의 『페스트』, 포로수용소의 절박한 극한 상황을 그려낸 게오르규의 『25시』 등의 경우를 보자. 이 작품들을 머리에 떠올리는 동안, 특히 좋은 소설에서 그 배경이 갖는 비중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좋고 훌륭한 소설,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방법의 글쓰기
물은 스스로 길을 만든다. 땅 속의 물줄기가 위로 솟은 샘물은 웅덩이를 채웠다가 넘쳐흐르면서 골을 이루고 다시 시내를 이루며 강줄기를 만든다. 이때 물의 양이나 그 흐름의 세기에 의해 강줄기가 바뀌기도 한다. 물길이 처음부터 있었고 그 길로 물이 흘러간 것이 아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 그리고 자신이 뚫기 좋은 그런 지층을 골라 흐른다. 물이 스스로 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만들어 흐르는 물이다. 소설 쓰기도 마찬가지다. 소설 쓰는 어떤 방법이 따로 있고, 그 방법에 의해서 소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소설은 모두 그 하나하나가 방법이며, 소설은 어떤 방법이 아니고 그 어떤 방법을 필요로 하는 이야깃거리와 그 이야기에 감춰져 있는 작가의식이다. 할 말과 쓸 말이 많아 그것이 저절로 흘러 물줄기를 이루면 그것이 바로 새로 뚫린 길과 새로운 방법인 것이다. 좋은 소설은 그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던 소설쓰기의 새로운 방법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소설은 창조되는 세계다. 창조는 이미 있는 것을 흉내내지 않는다. 사람이 모두 다른 얼굴과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듯, 우리가 쓰려는 소설은 모두 우리 나름의 방법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편 작품을 쓰면서 완고하거나 보수적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굳이 줄거리도 없이 오락가락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쓸 의무도 없다. 전통적인 방식도 좋고 현대적인 방식도 좋다. 그러나 어떤 방식을 택하든 반드시 자기가 쓴 것을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읽기에 큰 불편이 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면, 그 작품은 절대로 밖으로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아니 일부의 독자도 언제나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일부 독자라도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한번 읽고 던져버리는 문학작품은 가치가 없다. 읽고 나면 또 읽고 싶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소설이야말로 우리가 쓰고 싶고 읽고 싶은 소설, 바로 가치 있고 뜻이 깊은 좋은 소설인 것이다.
허만욱 / 196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1999년 『조선문학』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공룡의 땅』, 『가을예감』이 있고 저서로 『문학과 비평의 이해』, 『문예창작의 이해』, 『현대소설의 이해와 비평적 감상』 외 다수. 현재 남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