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고려의 의미
한민족의 척추(등뼈)격인 고구려(高句麗)의 국호는 구려(句麗)에서 나왔다. 이곳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의 고향이다. 句麗(구려)는 성(城) · 고을 · 골을 의미하며 홀 · 골 · 구루 등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주몽은 졸본부여에서 건국하고 아버지가 다스리던 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고자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구려의 앞에 높을 고(高)를 붙여 자신이 천제의 후손임을 상징했다고 한다. 역사상 한민족의 뿌리인 삼성조(三聖祖)의 통칭과 배달국 때 치우천왕이 중국 산동반도에 세운 나라의 이름도 구려(九黎 · 句麗)였는데 이것들도 고구려 국호 결정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환인(桓仁), 이곳 서남쪽에는 현재 본계시(本溪市) 소속으로 ‘쌀 창고 마을’이란 뜻의 미창구촌(米倉溝村)이 있는데 마을 북쪽에 현지에서 장군묘라 부르는 높이 8m, 둘레 150m의 왕릉급 무덤이 있다. 중국 쪽에서는 부인하지만 환인에 있는 왕릉이라면 추모왕릉이 분명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광개토태왕릉비>는 “추모왕은 왕위를 즐기지 않아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보내 맞이하니,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라고 전한다. 또『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재위 19년(서기전 19년) 9월에 승하했으니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냈다”라고 전한다.
주몽의 호칭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 나와 있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이다(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했다).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했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에도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동명왕을 부르는 호칭이 많은데 이는 당시에는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다른 한자로도 같은 이름이나 지명 따위를 표기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한어(漢語)로 읽은 것이다. 이두문자로는 가우리, 지나식 발음으로는 까우리라고 읽는다. 몽고의 유목민들은 고구려를 매크리, 모크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를 한자로는 貊句麗(맥구려)로 표기하는데 고구려가 맥(貊)족에 속했으므로 나중의 句麗와 합쳐서 부른 것이다.
高句麗의 정확한 음가(音價)는 무엇인가. 한자로 표기된 高句麗를 그 시대에 어떻게 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麗자는 려가 아닌 리로 읽었음이 여러모로 드러난다. 한자사전을 보면 麗자는 그 음과 뜻이 ① 부딪칠 리, ② 나라이름 리, ③ 고울 려, ④ 빛날 려, ⑤ 걸릴 려, ⑥ 베풀 려, ⑦ 짝 려 등으로 나온다. 『응제시집주(應製詩集註)』에서는 麗의 음은 离(리)라고 했다. 또한 돌궐제국에서는 고구려를 Bokli라 표기했고 펠리오(Pelliot)가 발견한 <돈황 문서>에도 “그의 동방을 보면 Drug(투르크계 주민)인이 Mug-lig로, 중국인이 Keu-li라 부르는 나라가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리음이 옳다는 것이 드러난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에 편찬한『범어잡명(梵語雜名)』에서도 실담(悉曇)문자로 기술된 한 단어의 음을 한자로 무구리(畝俱理)로 표기하고 그 뜻을 고려(高麗)라 했다.
중국문헌에는 高句麗라는 표기가 기원전부터 나온다. 또한 句麗 또는 貊句麗라고도 표기했다. 기록을 보면 고구려라는 이름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한서지리지』로 고구려현으로 나온다. 이것이『후한서』에는 나라이름으로 나오고 구려(句麗)라는 국호로도 나온다. 나라이름이 격하된 것은『한서 왕망전』에 의하면 후한의 왕망이 고구려를 책동해 흉노를 치려했는데 이를 거부하자 왕망이 고구려 국호에 높을 고(高)를 대신 아래 하(下)를 써서 하구려(下句麗)라고 격하시켜 불렸다고 한다. 이를 보면 구려라는 말에 고 자를 붙여서 고구려란 말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돈황 문서>에 나오는 Mug-lig라는 표기는 한자 표기 貊句麗와 통한다. 이렇듯 高句麗는 당대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와 고려라는 국호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나라 역사상 고려는 대략 5번 존재했다.
첫 번째 고려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라는 본래 명칭은 장수왕때까지만 사용했다. 그 이후에는 외교적으로나 대내적으로 고려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로 표기돼 있다. 고려와 구분하기 위한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역사학자와 우리들도 고구려로 인식한다. 중국 『사서』에는 장수왕 이후 모두 고려라고 기록돼 있다.
두 번째 고려는 발해이다. 진이라는 명칭도 있었으나 고려라고 칭했다. 일본에 보낸 발해의 국서에는 고려국왕으로 돼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고구려라고 생각해 고려라고 불렀다.
세번째 고려는 태봉이다. 궁예가 세운 태봉은 본래 정식명칭이 고려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고려, 고구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 부른다. 후에 마진, 태봉으로 바뀌었다.
네 번째 고려는 우리가 고려라고 부르는 고려이다. 바로 왕건이 세운 고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 편집자 등은 신라를 이은 것으로 조명했다. 왕권은 고구려를 계승, 국명을 고려라고 했다. 현재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와 후고구려와의 구분을 위해 그냥 고려라고 부른다.
다섯 번째 고려는 굳이 명칭을 붙인다면 탐라고려이다. 고려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서 따로 왕을 세운 다음 고려라고 칭하고 진도, 탐라로 옮겨 다녔다. 일본에도 그러한 사신을 파견한 흔적이 있다. 이밖에 고구려, 즉 고려와 관련된 나라도 많다. 우선 동명왕이 세운 고리국(고주몽과는 다른 사람),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평로치청이라고도 함), 묘청이 세운 대위국(정식명칭은 대위), 그리고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공화국도 있다.
상기와 같이 고구려와 고려라는 국호는 같은 의미로 세계적으로 우리를 대표하는 영문국호 C(K)orea는 고려라는 말에서 유래됐지만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