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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곧 보시를 (상에 집착함이 없이) 행하면 곧 머묾(執着)이 없는 것이니 한때(一時)라 앞뒤가 없어서(일체평등) 멀리 유무의 경계를 벗어나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기틀(격외 기틀)에도 앉지 않으니 텅 비어 고요하여(蕭然) 의지함이 없어 그 양이 큰 허공과 같아서, 大覺(佛)의 이름이 여기에 드러나며 한량없이 쌓인 복이 여기에서 이루어 지도다.
청봉착어:비단(반야 지혜)이 무늬가 없고 깨끗한 대로(定) 좋으나
거기에 무늬(무상보시행)를 더하므로
더욱 비단다워(정혜를 갖추니 체와 용이 묘함)지니
본래 남과 북이 둘 아니니라.
須菩提야 於意云何인가 東方虛空을 可思量不하느냐 不也이니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淸峯:사방과 상하를 통틀어 모양이 없고 끝이 없는 허공을 어찌 그 크기를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한 실상의 허공은 동서남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방편으로 동서남북 4, 그 사이 4, 상?하 2를 드신 것은 시방(十方) 허공일체를 비유로 설하신 것이다.
六祖:緣不住相布施하여 所得功德은 不可稱量이라 佛이 以東方虛空을 爲譬喩하여 故問須菩提하시되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인가 不也이니라 世尊者이시여 須菩提가 言東方虛空不可思量이니라
육조:相에 집착하지 않은 보시로 인하여 얻은 그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동쪽 허공을 비유로 삼아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한 것은 수보리가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須菩提야 南西北方과 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하느냐 不也이니다 世尊이시여 須菩提야 菩薩이 無住相布施福德도 亦復如是하여 不可思量이니라
“수보리야! 남서북쪽과 그 사이와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 복덕도 역시 이와 같이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淸峯:이 허공에 가득한 것이 상없이 머무는 법성(일체의 본 성품)인 것이기 때문이며 그 큰 법성의 공적함에 계합된 복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日照萬像不增減 일조만상부증감 이니
佛恩極大亦無量 불은극대역무량 하니
永劫現用不增減 영겁현용부증감 하며
如來不動常如如 여래부동상여여 하니라
태양이 만물을 비추나 늘고 줌이 없으니
부처님 은혜가 크고도 무량하니
무량 겁을 나투어 써도 늘고 줄지 않으며
여래는 움직임도 없이 항상 여여 하니라.
說誼:菩薩萬行이 無念爲宗이니 一得其宗하면 無所施而不可라 其所獲福이 寬廣如空이니라
설의:보살의 만행이 無念으로 종을 삼으니 한번 그 근본을 얻으면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않음이 없어서 그 얻은 복이 관대하고 넓기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니라.
청봉착어:무념으로 종을 삼음은 분별심이 없는 청정자성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니 이를 증득하면 그 자성의 성품 또한 청정하니 그 행이 깨끗하므로 얻은 복덕 또한 한량없는 것이다.
圭峰:初句에 徵者는 論에 云하되 若離施等相想이면 云何能成施福인가하다 若菩薩下는 釋이라 於中에 又三이니 初는 法說이니 爲疑無福이니 故로 云하되 福不可思量으로 以斷之니라 東方下는 喩說을 可知로다 菩薩無住相下는 法合이니라 虛空者는 無着이 云하되 猶如虛空이 有三因緣하니 一은 ?一切處하며 謂於住不住相中福生故이며 二는 寬廣하고 高大殊勝故이고 三은 無盡하여 究竟不窮故라하시다
규봉:처음 구절에 구하는(물음) 것(徵)은 論에 이르되 “만약 베푼다는 등의 생각을 떠나서 어떻게 보시의 복을 이루겠는가?” 했다. 若菩薩... 이하는 해석이다. 그 가운데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法說이니 복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므로 복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하는 것으로 그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東方... 이하는 비유로 설한 것(喩說)임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菩薩 無住相... 이하는 法을 합(比喩)한 것이다.
虛空이란 무착이 이르되 “허공 같다 하는 것은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① 일체처에 두루하여 相에 머물거나 머물지 않는 가운데 복이 나는 까닭이며
② 관대하고 넓어서 높고 크고 수승한 까닭이고
③ 다함이 없어서 마침내는 다하지 않는 까닭이라” 하였다.
六祖:佛言하시되 虛空은 無有邊際하여 不可思度이니 菩薩이 無住相布施하여 所得功德도 亦如虛空하여 不可度量하여 無邊際也하시니라 世界中大者는 莫過虛空이고 一切性中大者에 莫過佛性이니 何以故하면 凡有形相者는 不得名爲大이나 虛空은 無形相故로 得名爲大이니라 一切諸性은 皆有限量이니 不得名爲大이나 佛性은 無限量이니 故名爲大니라 此虛空中에 本無東西南北이니 若見東西南北하면 亦是住相이라 不得解脫하고 佛性은 本無我人衆生壽者이니 若有此四相可見이면 卽是衆生相이니 不名佛性이며 亦所謂住相布施也니라 雖於妄心中에 說有東西南北이나 在理則何有리오 所謂東西不眞이라 東北曷異이랴 自性이 本來空寂하고 混融無分別이니 故로 如來가 深讚不生分別也니라
육조:부처님이 말씀하시되 “허공은 갓이 없어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하여 얻은 공덕도 역시 허공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다” 하시었다. 세계 가운데서 큰 것은 허공만큼 큰 것이 없고 일체 성품 가운데 큰 것은 불성보다 큰 것은 없으니, 무슨 까닭인고하면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크다고 할 수 없으나 허공은 형상이 없으므로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성품은 다 한량이 있어서 크다고 하지 못하거니와 불성은 한량이 없으므로 크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허공 가운데 본래 동서남북이 없으니 만약 동서남북이라 생각한다면 역시 相에 집착하는 것이 되어서 해탈을 얻지 못하고 佛性은 본래 내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것이 없으니 만약 소견에 이 四相이 있으면 곧 이 중생상이니 불성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소위 상에 집착하는 보시가 되는 것이다. 마음 가운데 망념으로 동서남북이 있다고 말하나 이치에 있어서 무엇이 있으리오? 이른바 동서가 참이 아니니 어찌 남북인들 다르겠는가? 自性이 본래 공적하고 혼융하여 분별이 없으므로 如來께서 분별을 내지 않음을 깊이 찬탄하신 것이다.
圭峰:五는 結勸不住라
규봉:⑤는 相에 집착하지 않기를 결론적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須菩提야 菩薩은 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대로 머물러야 할 것이니라.
淸峯:보살은 지금까지 설해서 가르쳐 준 바와 같이 마땅히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는 바 없이 머물고 행하라는 것이다.
상(相-상대적→차별상)은 모습이 있음을 말하나 모습이라는 것이 티끌과 같이 잠시 생겼다 멸하는 6진 경계이니, 진은 곧 환이며 환은 멸진하여 진공이 되므로 일체가 티끌 같아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곧 멸해 공하니 그 허공과 시방세계의 허공과 자성의 공함이 둘이 없고 차별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안주할 것이 없는 빈(空)것은 단멸공은 아니므로 무상주(無相住)라 일러줌으로써 머무름이 없이 머물러 집착할 것이 없음을 일러주고자 하신 것이다.
六祖:應者는 順也이니 但順如上所說之敎하여 住無相布施하면 卽菩薩也니라
육조:應이란 순종한다는 뜻이니, 다만 위와 같이 설한 가르침을 따라서 상이 없는 베풂에 머물면 곧 보살인 것이다.
傅大士:若論無相施라면 功德極難量이니 行悲濟貧乏하되 果報不須望이니라 凡夫情行劣이니 初且略稱揚이니 欲知檀狀貌인가 如空?十方이로다
부대사:만약 무상의 보시를 논한다면
功德이 지극해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자비를 베풀어서 가난을 구제하되
과보를 모름지기 바라지 말지니라
범부의 생각으로 行하는 것은 얕은 것이라
처음엔 간략히 일컬어 드러냈으니
보시의 참 모양을 알고자 하는가?
허공이 시방에 두루한 것과 같음이로다.
冶父:可知禮也니라
說誼:無住者는 萬行之大本也요 萬行者는 無住之大用也라 慈尊이 敎以無住爲住하시니 大本은 已明이나 而大用을 亦不可不知也니라 禮也者는 人間世之大用也라 存亡之所繫며 禍福之所由興也이니 人이 知禮則進退가 可觀하여 擧措得宜하여 無施不可거니와 苟不知禮則雖曰無事於心하나 動輒違規리니 豈有進退升降之可觀乎이랴 由是로 禮也者는 可知而不可不知也니라
야부:可히 禮를 알지니라.
설의:無住란 만행의 큰 근본이요, 만행이란 무주의 큰 작용이라.
자비로운 세존께서 머무름 없이 머무는 것을 가르쳤으니, 큰 근본은 이미 밝혔으나 그 큰 작용을 또한 알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라.
禮란 것은 인간세상의 큰 작용이라서 삶과 죽음이 매여있고 화와 복도 이(禮)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사람이 예를 알면 곧 나가고 물러남을 보게(觀)되어 들고 놓음(온갖 동작)에 마땅함을 얻어서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않음이 없거니와, 진실로 예를 모른다면 비록 마음이 한가하다고 하나 그 행동이 문득 예(規則)를 어기리니 어찌 진퇴와 오르고 내림을 볼 수(可觀) 있으랴.
이로 말미암아 예란 가히 알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청봉착어:예는 곧 바름(예의)이라
바른 행이란 필경 머묾 없이 베푸는 행함이 되나니
집착 없는 보시행으로 인해
한량없는 공덕을 쌓게 되나니라.
冶父:虛空境界를 豈思量이랴 大道淸幽理更長이네 但得五湖風月在하면 春來依舊百花香이리
說誼:無住로 爲住는 廓然之空이로다 雖然如是이나 大道는 不屬有住無住이니 方之海印이고 越彼太虛로다 太虛中에는 不妨有五湖風月이며 無住中에는 亦不妨繁興大用이니라 古人이 道하되 莫把無心云是道하라 無心도 猶隔一重關이라시니 無心이 正是無住之義니라 要向無住中하여 繁興大用하되 圓具萬德하여야 方與大道로 相應去在하리니 到這裏하여는 見聞覺知가 依前受用家風이며 色香味觸이 元是遊戱之場이니라
야부:허공의 경계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심지(大道)가 맑고 깊어 그 이치 또한 크네
다만 五湖에 風月이 있음을 알면
봄이 오니 옛처럼 百花가 향기로우리
설의:머묾 없이 머무는 것은 넓은 텅 빈 것이로다. 비록 이러하나 큰 진리의 바탕(大道:불성)은 머묾이 있거나 머묾이 없는데 속하지 않으니 바다에 도장 찍고(자취가 없음) 저 큰 허공을 넘는 것이로다.
큰 허공 가운데는 五湖의 風月이 있음도 방해롭지 않으며 머묾 없는 가운데(집착 없음으로)는 또한 큰 작용을 어지러이 일으킴도 방해롭지 않으니라.
古人이 말하길 “無心을 가지고 道라고 이르지 말라. 무심에도 오히려 한 관문이 막혀있다”하시니 無心이라 하는 것이 바로 머묾(應無所住)이 없다는 뜻이니라. 무주 가운데를 향하여 더불어 어지러이 큰 작용을 일으키되 원만한 만가지 덕을 갖추어야 바야흐로 大道와 더불어 계합하여 가리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이로부터 수용하는 家風이며 육진 경계(色香味觸)가 본래 즐겁게 놀아온(遊戱) 장소이였음 이니라.
청봉착어:무심에도 관문이 격해 있다 하니 자, 일러라! 어째서 무심에도 관문이 있나? 진정 없음에는 없다 하는 놈도 없느니라.
宗鏡:住相布施는 猶日月之有窮이고 不着六塵은 若虛空之無際로다 自他俱利하는 福德難量이니 豁然運用靈通하고 廓爾縱橫自在로다 且道하라 還有住着處?인가 妙體本來無處所이니 通身何更有?由리오
說誼:住相布施는 徒眩人之耳目이니 違於無住大道니라 但感有漏之報나 失於無邊大利이니 猶彼日月이 但能代明而不能通乎晝夜라 無住行施는 身心이 澹寂하고 內外一如하여 契乎無住大道하여 終獲無邊大利함이 如彼太虛 廓然無際하노라 以之處己함이 推以及人이니 其爲福德은 實爲難量이니라 福德難量은 且置하고 ?生이 是無住底道理인가 豁然運用靈通하고 廓爾縱橫自在니라 且道하라 還有住着處?인가 妙體無處所하니 通身沒?由로다
종경:상에 집착하여 베푸는 것은 해와 달이 끝이 있는 것과 같고, 육진에 집착하지 않음은 허공이 갓이 없는 것과 같다. 自他를 함께 이롭게 하는 복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활연히 움직이고 씀이 신령스럽게 통하고 확 트여 종횡으로 자재하는 것이다. 자, 일러 보아라! 또한 어디에 머무는 곳이 있는가? 묘한 체는 원래 처소가 없으니 온몸이 어찌 다시 자취가 있으리오.
설의:相에 집착해서 베푸는 것은 한갓 부질없이 사람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것이니 머묾 없는 큰 도를 어기는 것이니라. 다만 쌓였다 흩어지는 것(有漏)의 과보는 얻으나 가없는 큰 이익(공덕)을 잃어버리니, 마치 저 해와 달이 능히 교대로 밝으나 능히 주야를 통할 수 없는 것과 같으리라,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행하는 것은 심신이 맑아 고요하여 안과 밖이 한결같아서 머묾 없는 큰 도에 계합하여 마침내 끝없는 큰 이익을 얻는 것이, 저 허공이 넓고 탁 트여 끝이 없는 것과 같노라. 그것은 자기에게 있음이 남에게도 미치게 되니 그 복덕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복덕이 헤아리기 어려움은 그만두고 무엇이 머뭄 없는 도리인가?
활연히 움직이고 씀이 온통 신령스럽고 확트여 가로 세로로 자재하니라. 자, 일러 보라! 도리어 집착하여 머무는 곳이 있는가? 묘한 체는 처소가 없으니 온몸이 자취가 없도다
청봉착어:상에 집착해서 베풀면 복은 짓되 그 짓는 행에 상응하는 과보를 얻어 인과로 인하여 윤회를 받게 되나, 일체 경계에 욕심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 보시 행은 그 대가를 바라지 않으므로 부족함도 없거니와 과보도 끝이 없는 것이다. 어디에 머무는 곳이 있을까? 머물 곳이 없음이 곧 두루 머묾인 것이다.
宗鏡:運力檀度契眞常하니 福等虛空不可量이라 無影樹頭에 花爛慢하니 從他採獻法中王하리
說誼:無住行施는 施契性空하고 性空이 無邊이니 福亦無際로다 因無住而萬行이 俱沈하면 果闕圓常則無住之於行果하여 固有妨矣이나 因無住而萬行이 爰起하면 得福無邊則無住之於行果는 大有益焉하여 而固無妨矣로다 旣無妨矣則行行이 無着하여 福亦不受는 固其宜矣로다 爲甚如此인가 有樹元無影한 生長劫外春이니 靈根이 蜜蜜蟠沙界하니 寒枝無影鳥不棲로다 莫謂栽培何有鄕하라 劫外春風에 花爛?이로다 花爛?이여 從他採獻法中王이리
종경:보시에 힘써서 진실로 항상함에 계합하니
복이 허공과 같이 헤아리기 어려워라
그림자 없는 나무 끝에 꽃이 활짝 피었으니
마음대로 꺾어 일체 가운데의 왕에게 바치리.
설의: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것은 그 보시의 성품이 공한 성품에 계합하고, 공한 성품은 갓이 없고 복도 또한 끝이 없도다. 집착이 없으므로 인하여 만행이 모두 숨으면(행하지 않으면) 그 과보가 항상 원만함을 빠뜨리게 되어 머무름 없이 행하는 과보에 진실로 방해가 되나, 집착함이 없으므로 인한 만행이 일어나면(행하면) 가없는 복을 얻게 되니 곧 집착 없이 행한 과보는 큰 이익이 있어서 진실로 방해됨이 없도다. 이미 방해가 없으므로 행과 행이 집착이 없어 복 또한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진실로 당연 하도다.
어찌하여 이 같은가? 나무가 있으나 원래 그림자가 없는 겁 밖의 봄에 생장하니 신령스런 뿌리가 모래 같은 세계에 꽉 차게 서렸으니 찬 가지에 그림자가 없어 새가 깃들지 못하도다. 어느 곳에서 키운다 하지 말라. 겁 밖의 봄바람에 꽃이 만발 하도다. 꽃이 만발함이여! 꽃을 꺾어 일체 가운데의 왕께 바치리.
청봉착어:그림자 없는 나무(佛)는 갓이 없이 커
활짝 핀 꽃(무상주 보시 복) 또한 한량없어
걸림 없는 행이 임의자재하여
주어도 준바없는 열매 받음 또한 없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