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준신(權俊臣)
[본관] 안동권씨(安東 權氏)
[생졸년] 1561년(명종 16)~1642년(인조 20) / 壽 81歲
[생원] 선조(宣祖) 15년(158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生員) 3등(三等) 64위(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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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성균 생원 권공 묘갈명 병서(成均生員權公墓碣銘幷序)
화산(花山,안동)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 중에 현명한 상사(上舍) 권준신(權俊臣)은 자가 사영(士英)이다. 증조 권침(權琛)과 조부권기수(權期壽)는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권인(權寅)은 봉사(奉事)를 지냈고, 모친 유인(孺人) 김씨(金氏)는 김숙연(金叔淵)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신유년(辛酉年,1561, 명종 1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근신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다. 횡역(橫逆)을 만나면 번번이 받고 되갚지 않아 고을에 거처한 지 70년이 되었지만 사람들이 흠잡는 말이 없었다. 어려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나이 22세에 백씨(伯氏) 참봉공(參奉公) 권호신(權虎臣)과 함께 같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는데, 바로만력(萬曆) 임오년(壬午年,1582, 선조 15)이었다.
얼마 뒤에 임진년의 큰 난리를 만나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고서 산림(山林)에 자취를 감추고 농사지으며 스스로 즐기다가 나이 82세에 죽으니 바로 숭정(崇禎) 임오년( 壬午年,1642, 인조 20)이었다. 호문단(好文丹) 오향(午向)의 산에 장사 지내니 바로 공의 부인 의인(宜人) 권씨(權氏)의 무덤 아래이다. 의인은 권용(權鎔)의 따님으로 어진 덕이 있었으나 공보다 7년 먼저 죽었다.
3남 3녀를 낳았는데, 세 아들은 정오(定吾)ㆍ심오(審吾)ㆍ수오(守吾)이고, 세 딸은 이오(李墺)ㆍ이성재(李成材)ㆍ유광진(柳光震)에게 시집갔다. 장남 정오(定吾)의 첫째 부인은 참봉 곽진(郭𡺽)의 따님으로 딸 하나를 낳았고, 딸은 이필달(李必達)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황윤리(黃胤李)의 따님으로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평(是平)과 시중(是中)이고 세 딸은 어리다. 차남 심오(審吾)의 첫째 부인은 주부(主簿) 황언주(黃彥柱)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익(是翼)이고 딸은 서욱(徐頊)에게 시집갔고, 둘째 부인은 구사철(具思哲)의 따님으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 삼남 수오(守吾)는 김수선(金首善)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첫째 사위 이오(李墺)는 외아들 성필(成泌)을 낳았고, 둘째 사위 이성재(李成材)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소(熽)ㆍ집()ㆍ격(𤌦)ㆍ잡(煠)이고 딸들은 강전(姜腆)과 권휘(權徽)에게 시집갔다. 셋째 사위 유광진(柳光震)은 후사가 없다. 내외의 손자와 손녀 및 첩의 자녀가 또 30여 명이 된다.
아, 속담에서 복(福)을 거론할 때 반드시 ‘수(壽)ㆍ부(富)ㆍ귀(貴)’를 말하는데 공은 이미 그중에 두 가지를 가졌다. 그렇지 않다면 장차 그중에 하나를 남겨서 후손을 넉넉하게 하려는 것인가? 명은 다음과 같다.
임오년 그해에 / 黑馬之歲
공이 연꽃을 꺾었으니/ 公實折蓮
젊은 나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 妙齡美譽
짧은 시간에 날아올랐네 / 朝暮騰鶱
매우 급박한 때를 만나 / 遭時孔棘
임천에 높이 누웠고 / 高臥林泉
시렁 위의 시서를 읽으며 / 架上詩書
술동이 속의 성현을 마주했네 / 樽中聖賢
시시비비는 여관이고/ 是非蘧廬
은혜와 원망은덫과 통발이라/ 恩怨蹄筌
공은 부유해도 교만함이 없던 것이 / 公富無驕
또한 이미 여러 해였고 / 亦旣有年
홀로 공경이 되지 못한 것이 / 獨不公卿
운명의 어긋남 때문이 아니었네 / 非命之邅
수많은 후손들에게 / 螽斯瓜瓞
남은 경사가 면면히 이어짐이 / 餘慶綿綿
필연의 이치이니 / 理有必然
청컨대 저 하늘에 물어보라 / 請質彼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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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만력(萬曆):
원문에는 ‘가정(嘉靖)’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므로 ‘만력’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02] 임오년 …… 꺾었으니:
이 구절은 권준신(權俊臣)이 임오년(1582, 선조15)에 21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3등 64위로 합격한 것을 말한다. 흑마(黑馬)는 간
지로 임오(壬午)를 뜻한다. ‘연꽃을 꺾었다.[절연(折蓮)]’라는 말은 소과(小科)의 합격자 명부를 연방(蓮榜)이라 하기 때문에 소과
에 합격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주03] 술동이 속의 성현(聖賢):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를 가리킨다. 삼국 시대 위(魏)의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은 술을 몹시 좋아하였는데, 한 번은 금주령
(禁酒令)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하였다.
교위(校尉) 조달(趙達)이 가서 조사(曹事)를 묻자 “내가 성인에게 맞았다.[中聖人.]”라 하므로, 조달이 그 사실을 조조(曹操)에게
아뢰니 조조가 매우 진노하자, 장군(將軍) 선우보(鮮于輔)가 조조에게 아뢰기를 “평일에 취객들이 청주를 성인이라 하고 탁주를 현
인이라 합니다.
서막은 성품이 신중한 사람인데, 우연히 취해서 한 말일 뿐입니다.[平日醉客謂酒淸者爲聖人, 濁者爲賢人. 邈性修愼, 偶醉言
耳.]”라고 해명했던 데서 온 말이다.《三國志 卷27 魏書 徐邈傳》
[주04] 시시비비는 여관이고:
원문의 ‘거려(蘧廬)’는 여관이나 주막으로,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을 말한다. 세상에 시비를 따지는 것이 부질없음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 시비는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과 같을 뿐이니, 시비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오래가지 않아 저절로 사라짐을 말한 것이다.
[주05] 덫과 통발이라:
원문 ‘제전(蹄筌)’의 제는 토끼를 잡는 올가미를 말하며, 전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을 말하는데,《장자》〈외물(外物)〉에 “통발은
고기를 잡는 것인데 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고, 올가미는 토끼를 잡는 것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어버리는 것
이다.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兔, 得兔而忘蹄.]”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올가미나 통발은 곧 어떤 목적을 달성하
기 위한 도구 또는 방편의 뜻으로서, 즉 도를 얻은 다음에는 형식 따위는 잊어야 한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여기에서는 은혜와 원망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원용한 것이다.
[주06] 수많은 후손들:
원문 ‘종사과질(螽斯瓜瓞)’의 종사는 메뚜기로, 자손들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시경》〈종사〉에 “수많은 베짱이들 화목하게 모
여들 듯, 그대의 자손 또한 번성하리라.[螽斯羽詵詵兮, 宜爾子孫振振兮.]”하였는데, 집주(集註)에 “메뚜기는 한 번에 새끼를 99
마리나 낳는다.”라고 하였다.
과질은 오이 넝쿨이란 뜻인데, 오이 넝쿨이 끝없이 뻗어나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자손(子孫)의 번영(繁榮)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대아(大雅) 면(綿)〉에 “면면히 이어진 오이넝쿨이여, 백성의 처음 삶이 저수와 칠수에 자리 잡은 데서 시작되었네.[緜緜
瓜瓞, 民之初生, 自土沮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희(朱熹)의 주에 의하면, 주(周)나라 왕실이 처음에는 칠저(漆沮)에서 미약하게 살다가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 번성하였는데,
이를 오이 덩굴이 조금 뻗어 나갔을 때는 열매가 작다가 덩굴이 뻗어 나갈수록 커지는 것에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