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돌아온 뒤에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우선 몸 상태가 빨리 회복되지 않았고 편두통이 심해서 불안했다. 며칠 전에 소몰이 축제를 치른 팜플로나에서 지난 4월 20일 기절했던 일과 계단에 머리를 부딪친 일로 인해서 머릿속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찜찜하고 불안했다. 물론 이미 두 달이나 지난 시점이니 큰 문제가 있을 양이면 진작 조짐이 있었을 거라는 위안은 있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일단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몸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리면서 '서사중독증' 환자로서의 생활에 나름대로 충실할 수가 있었다. 6월 하순에 이르러 결국 확실하게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차 진료기관을 거쳐 정밀 검사를 해보는 것으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드디어 뇌촬영을 하고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그동안의 찜찜함을 훌훌 털어버릴 수가 있었다.
이탈리아 신학자인 바티스타 몬딘 신부님의 ‘신학사 4’를 짬짬이 읽었다. 프랑스혁명 이후의 철학과 신학의 역사에 대해서 개관하는 책으로 분량이 무려 1,340여 쪽에 달한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대하고 다기한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밑천도 딸리고 물리적으로 온전히 정신을 모아 책에 집중하기도 어렵지만 조금씩 조금씩 욕심 내지 않고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그렇게 오래오래 읽었다. 다 읽은 지금 생각해 보건대 이 또한 지적인 면에서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풍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그런 긴 여정에 비유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여행으로 치자면 홀로 떠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가야 하는 자유 여행이 아니라 경험이 많은 안내자와 함께 떠나는 패키지여행이라고 하겠다.
독서의 세계에서는 혼자 길을 떠났다가 종종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믿음직한 길라잡이가 필요하다. 특히 이와 같이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의 영역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비오 10세회 문제를 생각하면서 또 윤 율리아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가톨릭 교도권과 신학적 사유들이 빚어낸 다양한 갈등 등을 돌아볼 때 더욱 그러하다. 사실 나의 읽기는 파편적이어서 체계가 없는 편이다. 철학과 신학의 흐름에 대해서 요점을 제시해 주고 논평을 곁들여 주는 안내자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칫 잘못된 편견을 갖고 언급된 사람과 그들의 저서에 대해 바라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독서 여정의 길라잡이인 바티스타 몬딘은 왠지 믿음이 간다. 물론 이것은 책을 다 읽은 후에 하는 말이다. 그의 언어는 조심성이 있어서 단언하거나 일면적이지 않으면서도 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저서의 내용적 한계라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는 정곡을 찌르는 모습을 보인다. 좋은 음식으로 가득한 뷔페에 가서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고 돌아온 그런 기분이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의 단계에서 끝날 수 없는 삶이라는 실천적 영역을 필요로 하기에 문제는 여전히 눈앞에 있다. 그렇지만 동의할 수 있다.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전제 조건은 그 과정에서 신앙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기본적인 사항으로 돌아가서 살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자는 믿음이 이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수많은 좌초의 흔적들은 그것을 잊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증언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책이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나의 역량이 부족하니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다만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쳐서 생각하고 쓰고 믿고 살아낸 모든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간을 살아낸 모든 인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니 그 이전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갈 모든 인류를 향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