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 10 - 일 칸국 건국 후에 셀주크를 멸망시키고 이집트 맘루크조와 싸우다!
1220년에 징기스칸이 15만 대군으로 중앙아시아와 이란에 있던 호라즘왕국을
침략한 이래 1231년에 최종적으로 멸망시킨후 아들들에게
나라를 분봉하니..... 차카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 킵차크칸국에 일칸국입니다.
칭기즈 칸이 친정하여 정복한 호라즘의 경우는 위세가 절정기였지만 워낙 빠르게
복속이 된 탓에 '제국' 이라고 부를 만한 기반은 전무한 상태였으니,
아프가니스탄이 호라즘에 속한 것은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불과 4년전 이었습니다.
서부 페르시아가 호라즘왕국의 영역이 된 것도 칭기즈 칸이 진군하기 불과 3년 전이었고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는 호라즘에 속한지 10년도 되지 않았으며,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기습과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니 호라즘의 영역이 확정된 것은 1217년의
일로 내부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서 어이없는 짓으로 몽골군이 쳐들어오게 했습니다?
김호동이 지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이란 책에는 몽골은 인종 차별을 했다기 보다는.
몽골 제국이 복속민들의 고유한 풍속 (법규 적용에서 몽골인에게는 자삭을,
중국인에게는 중국 법규를, 색목인들에게는 귀속된 집단의 법규를 적용) 을
인정해주기 위해 분리 정책을 행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와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기존 지배층을 죽이고, 종교 질서도 무느뜨린후 모두 평등하다는 식이어서 토착민들의 입장에서
몽골인 정복자들에 대해 증오심과 혐오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고 게다가 유목민족은 기록을
거의 하지 않는지라 학살당한 피해자 입장에 근거한 기록만 접할수 있으니 나쁜 평이 많은데,
기독교 네스토리우스교가 덕을 많이 봤고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져나가는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계사에서도 역대 최고 스케일로 정복 전쟁을 일으키면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으니
칭기즈 칸의 정복전쟁은 전쟁의 잔혹함의 종합세트라 할 정도로 유래없는 대량살상과
잔혹함이 존재했는데.... 칭기즈 칸에 의해 아예 지구상에서 DNA가 멸절된 민족이 한둘이 아닙니다.
풀 한포기도 남기지 않았다는 표현이 단순히 수사가 아니라, 정말 유사이래 이렇게 잔혹하게
대량학살, 민족 자체를 멸절을 기획한 이는 히틀러와 더불어 유이하다 할 수 있으며,
히틀러는 유대인 멸절에 실패했지만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멸절시켰습니다.
무함마드 2세도 정복군주였으니 서이란, 호라산, 호라즘을 제패하긴 했으나 고르 왕조에게 시달리고
서요에 복속된 상태이던 호라즘에서 무함마드 2세는 서요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고르 왕조를 집어
삼키고 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키는등 정복군주였는데 어머니 테르켄 하툰의 입김이 센게 문제였습니다.
호라즘을 정복한 징기스칸은 그 전에 13익 전투, 카라칼지드 사막전투 외에는 패배를 당한
적이 없는데, 카라 칼지드 사막 전투에서도 케레이트의 군기를 빼앗고 주요 지휘관
중 한명인 옹 칸의 아들 셍굼을 부상 입히는 전과를 올렸으니, 케레이트의 기습에서
벗어나서 얼마 안되는 생존병력을 모아 케레이트와 혈전을 벌일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기후 변화가 승리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쿠이텐 전투에서조차 신속한 기동력을 이용해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는 노련함을 보이고 차키르 마우트 전투에서는 횃불을 이용해 나이만을
속이는등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특히 몽골 통일 이후에 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을
발휘하면서 금나라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등 자기가 지휘한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둡니다.
몽골 제국에 첫 패배를 안겨준 호라즘의 왕자 잘랄 웃 딘도 그 후에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휘해 격파했으며, 그는 문맹인데도 슬로-슬로-퀵-퀵 같은 몽골의 전략
전술을 짜냈고, 성격도 잔혹해 권력에 도전한 자는 가차없이 죽였고 몽골의 전통적인
교육마저 제대로 받지 못해 무시당하기는 했으니 자무카는 그를 진짜 괴물처럼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재능과 괴로운 경험이나 고난을 겪으며 이겨내는 인내, 긍정적인 성향 으로 초원의
여타 지도자들이 제시한바 없던 '공평한 사회' 비전을 지녔고 그것이 그를 승리하게 했으니
이 공동체는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공평할뿐 아니라 전쟁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입니다.
킵차크 칸국은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에게 주어진 나라로 이름은 몽골이 튀르크와 함께 이곳에 오기
이전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중세 튀르크계 민족인 킵차크인에서 따온 것인데... 서양에서는
금장칸국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니 16세기에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의 황금 천막에
붙인 별명으로.... 하지만 몽골인들은 자기 나라를 주치 울루스 (= 주치 씨족의 영지) 라고 불렀습니다.
킵차크 칸국은 백장 칸국과 청장 칸국으로 이루어졌는데, 청장 칸국은 주치의 장남 오르다 칸이 주치가
분봉받았던 지역에 건국했고, 백장 칸국은 주치의 차남 바투 칸이 러시아 공국등 서방 원정을 통해
점령한 지역을 바탕으로 건국한 칸국이었으며..... 주치인 울루스의 대칸은 백장 칸국의 칸이 겸직합니다.
이는 차남 바투가 오고타이 칸 치세때 1235년에 폴란드와 헝가리등 유라시아 서부 초원지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킵차크 칸국의 기틀을 닦았으니..... 서쪽으로는몰도바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북쪽으로는 현재의 러시아, 남 쪽으로는 흑해 연안, 캅카스 까지 이르렀습니다.
바투 칸 이후 칸의 자리에 오른 동생 베르케 칸은 본격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니
이슬람교로 개종해 킵차크 칸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고, 제4대
대칸인 뭉케 칸의 명령을 받들어 인구조사를 실시해 원활한 징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킵차크 칸국이 러시아 남부 스텝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루스인 (러시아인) 들이 몇 세기에 걸쳐 터전을
닦아 놓은 가장 좋은 토지의 대부분을 뺏겼다는 뜻이니, 이후 루스의 인구와
경제 활동, 그리고 정치적 중심은 모스크바와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러시아 북동부로 이동하게 됩니다.
키이우의 전성기가 끝난후 각 대공들 사이의 소모전으로 쇠락한 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몽골인
들이 무거운 징수를 일삼자 루스인들은 큰 부담을 안았는데.... 몽골족이 왕족으로 최고
계급이고, 튀르크계가 관료나 상인 등의 중간 계급으로서 나머지 슬라브인들을 지배하는 구조였습니다.
14세기 초에 우즈베크 칸이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 이후 몽골인들도 이슬람화는데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등.....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 국가들의 전신이 된 나라가 킵차크 칸국이었습니다.
볼가 타타르인의 직계 기원은 킵차크 칸국의 몽골·튀르크계 지배층 남성이 슬라브계 피지배층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얻으면서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점차
슬라브화된 경우인데 이들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는 수백년간 “타타르의 멍에” 라는 압제에 시달립니다.
거기다가 슬라브계 백인 피지배층 남성이 출세를 노리거나 지즈야 (인두세) 를 내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경우, 그리고 킵차크 칸국의 후계 국가들이 러시아에 정복당한후
킵차크 칸국 몽골계·튀르크계 지배층의 후손들이 러시아 치하에서 종교만 빼고 슬라브화된 경우 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몽골군은 아제르바이잔의 무간에 원정 본부를 설치한후 바이주 노얀의
지휘 아래, 1242년에 셀주크조 영내에 진입해 에르주룸을 점령하고
70,000 명의 주민을 대거 학살했으니.... 이로써 몽골군의 셀주크조 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바의 반란으로 인한 내분과 동부 전선의 군대가 내란 평정에 동원된 관계로 셀주크조의 저항은 미미했으니
술탄 케이후스라브 2세는 용병을 포함 50,000에서 80,000에 달하는 군대로 시바스로 향했는데,
몽골군도 약탈을 자행하며 진격해 왔기 때문에 1243년 시바스 동부의 쾨세다으 평원에서 양군이 접전합니다.
이 전투에서 셀주크 술탄은 전통적인 척후-유인-매복-기습이라는 전략을 버리고 평원 대결을 시도함으로써,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에 역습당해 참패한후 주력 부대가 몽골군 몰래 쾨세다으를 철수합니다.
그러자 몽골군은 본격적인 셀주크 공략에 나서 시바스, 카이세리, 에르진잔 등 중부의 주요 도시를 완전
초토화시키고 무간의 본부로 돌아갔으며 이후 터키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은
몽골의 봉신국으로 사실상 공중분해되어 몽골이 임명한 꼭두각시 칸 만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사라집니다.
한편, 1256년에 남정에 나선 징기스칸의 넷째아들인 툴루이의 셋째 아들 훌라구는 1258년 바그다드
를 함락시킴으로써 이슬람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지막 칼리파를 살해했으며
이후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해..... 모술의 아타벡 바드르 앗 딘
울루와 파르스의 아타벡 아부 바크르의 항복을 받고 저항하는 마이야파라킨을 본보기로 약탈합니다.
그리고 이라크의 에데사를 거쳐 알레포를 2주만에 함락시킨후 이에 겁을 먹고 다마스쿠스에서 도망치던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 안 나시르 유수프를 생포했으니.... 자신만만해진 훌라구는
카이로의 술탄에게 복속을 요구했으나 사천지방에서 전사한 몽케 칸 사망소식을 듣고 귀향길에 오릅니다.
몽골군은 유럽을 침략해 폴란드를 유린하고 헝가리군을 대파해 점령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진격을
목전에 두고 1242년에 대칸 오고타이가 죽으면서 쿠릴타이를 위해 철수 했는데 이제 이집트를
거쳐 아프리카로 진격하려는 무렵에 또 몽케칸이 죽어 철수를 하니 세게역사의 흐름이 바뀔뻔 했다는?
훌라구는 투르크족 출신의 부하 키트부카에게 1 ~ 2 투멧의 소규모 병력을 남겨주었으니.....
키트부카는 시리아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나아가
이집트군과 대치하니 이집트는 시리아를 지배하던 맘루크의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습니다.
맘루크는 이슬람 세계의 노예 병사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육성한
군대인데, 주로 중장기병으로 활약했으며 무기로는 창과 칼, 철퇴를 사용했고 궁술
에도 뛰어나 충격 기병 이외에 궁기병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으니.... 구성원의
대부분이 튀르크족 출신이라 기마술에 능했고, 유목 민족의 초원 전술에도 익숙했습니다.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페르시아와 시리아를 정복한 뒤 이집트까지 진출하려 했지만,
몽케 칸이 죽자 훌라구는 후계자 싸움 쿠릴타이에 참여하기 위해 주력을 이끌고
회군하면서 부하 장수 키트부카에게 1~ 2개 투멧 (1만~ 2만명) 정도의 병력만 남겨 둡니다.
몽케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아르크부카가 내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는 병력을 모아 시리아에 남은 소규모 몽골군을 습격하려 출진합니다.
소식을 들은 키트부카도 맘루크군을 상대하러 나왔으니 1260년 6월 양군은 갈릴리 근방 아인 잘루트
에서 맞붙었는데.....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연합했고 바이바르스는 아인잘루트 근처
지리에 훤했으니, 언덕 위에 주력을 숨긴 후 거짓으로 패한척 달아나 몽골군을 유인한 뒤 포위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술탄 쿠투즈의 맹렬한 돌격으로 몽골군은 무느졌으니.... 지휘관인 키트부카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집트군이 폭발성 탄약을 사용하는 대포를
쏘았고...... 이 전투 후 회군하는 길에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죽이고 자신이 이집트 술탄에 오릅니다.
이 전투를 더 이상 몽골군이 이집트를 넘보지 못하게 된 분수령으로 볼수도 있으나, 실제로 이집트
침공에 실패한 이유는 동쪽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니... 몽케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의 분열이라, 이후 몽골은 더 이상 서쪽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여력을 상실했습니다.
아인잘루트 패배에 대해 훌라구는 복수를 다짐했지만 얼마 안가서 병으로 죽었고, 일 칸국도 북쪽 바투의
후손인 킵차크 칸국과 내전 때문에 충분한 병력을 모을수 없었으며,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대칸이
된 쿠빌라이 칸은 제국의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정복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아인잘루트 전투는 훌라구의 후손인 일 칸국과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기나긴 싸움을 알리는 서막
이었으니.... 훌라구의 후예들은 일 칸국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으며,
북쪽의 동족(훌라구와 바투는 4촌) 킵차크 칸국과도 종주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는데, 내전을
종식시키고 승리자가 된 칸들은 맘루크를 재차 공격했으나 한차례 성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패합니다.
이집트 맘루크들이 악명 높은 몽골군을 상대로 승승장구 할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청야
전술과 유능한 지휘관의 유무가 큰데..... 일 칸국의 몽골군 역시 강한 군대였으나
기본적으로 일반 백성들을 무작위로 징발한 징집군이었기 때문에 오직 전투
기술만을 갈고 닦아온 노예 병사인 맘루크들에 비해 전투력면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일 칸국은 몽골 고원에서 자란 유목민 출신이 아니라, 중동 땅에서 자란 현지민들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질적으로 떨어졌으니, 이런 점에 있어 호라즘의 굴람이나 유럽의 기사
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맘루크에게는 그들과 달리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고 병사들도
명령에 따라 전략적으로 움직였으며 또한 몽골은 제국이 분열되어 본토에서 지원도 받지 못합니다.
이집트 맘루크조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수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이지만 적어도 팔레스타인 방면을 지키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시리아에는 대규모 군단이 상주할만한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몽골인들이 보병을 상대할 때 전략은 기동하여 얇고 넓게 포위해 사격전으로 해치우는 것이었고, 기병이
주력인 군대와 싸울때 기본 전략은 기동전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니, 몽골의 말은 페르시아말 보다
작아 순발력이 부족하지만 지구력이 뛰어났고 몽골인들은 다른 군대에 비해 많은 수의 말을 거느렸습니다.
상대가 겨우 보이는 거리에서 깔짝대며 기동전을 벌이다가 적군의 말이 지치면 포위해 보병을 해치우듯이
처리했는데.... 그래서 몽골군의 군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초지가 필요했으니 맘루크는
국경지대의 초지들을 없애버리는 청야전술을 들고나왔고 몽골군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는 예루살렘 왕국의 프랑크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십자군은 이집트의 이슬람 세력과 적대하고 있었으나 키트부카가 아크레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이슬람인 보다 몽골인들을 더 큰 위협으로 여기게 되니, 아인잘루트
전투를 앞두고 쿠투즈 군대는 아크레 근방에서 야영하며 보급을 받았으나 십자군은 묵인했습니다.
1295년 일 칸국 후계자 내전을 끝낸 가잔 칸은 이를 개선하고자 했는데, 제도를 개혁하면서 토지와 군제
에도 손을 댔으니 부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과거 다수의 말을 유지하며 기동력을 활용
하던 경기병 체제에서 말 한 두필에 의지하며 싸우는 전형적인 아랍세계의 기병처럼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봤는지 1299년에는 일시적으로 다마스쿠스를 재점령하기도 했지만 가잔 역시
맘루크에게 패했고 다마스쿠스는 1년만에 이집트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1302년에는 다시
한번 몽골-프랑크 동맹을 맺기 위해 교황에게 친서를 보냈으나 무시당하고, 1303년에 단독
으로 군사행동을 재개했지만 또 패했고 이후로 몽골인들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넘보지 못합니다.
몽골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남아시아로 이동하는 길목 아프가니스탄의 도시들을 함락하고 저항하는 주민
들을 학살했지만 몽골 제국의 아프가니스탄 지배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경우처럼 점과 선 형태로만
이루어졌고, 해당 지역 내에 상당수의 병사들을 반영구적으로 정착시키고 나서야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불안한 보급선의 영향으로 몽골 제국의 인도 침공은 인도아대륙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차가타이 칸국은 몇십년에 걸쳐서 인도 서북부를 뚫기 위해서 공격을 퍼부었으나
델리 술탄 왕조와 노예 왕조, 할지 왕조에 투글루그 왕조가 몽골족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냅니다.
할지 왕조의 경우는 몽골군을 맞아 가장 잘 싸우고 반격에도 성공한 사례인데, 인도 북부는 12세기 말엽
서북쪽인 아프간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족의 군벌들이 세운 나라인 델리 술탄국이
지배하고 있었으니.... 이 델리 술탄국은 노예 왕조와 할지 왕조, 투그락 왕조, 로디 왕조
순으로 권력을 넘겨 받았는데 이들 중에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인도를 지켜낸 세력이 할지 왕조였습니다.
할지 왕조의 두번째 국왕인 알라우딘은 델리 술탄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자로 그는
힌두교를 믿던 인도 남부의 왕국들을 계속 공격해 굴복시켜 영토를 넓혔으며
47만 5천명의 기병을 포함해서 거대한 상비군을 유지할 만큼 국력을 크게 키웠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인해 알라우딘은 그의 치세 기간 동안인 1292년부터 1306년까지 계속 쳐들어온
몽골군을 모조리 격파하였으며, 특히 1299년 차가타이 칸국의 왕자인 쿠틀륵 크와자가 이끈
20만명의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알라우딘은 30만명의 기병과 2,700마리의 전투 코끼리
부대를 동원하여 수도인 델리의 교외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킬리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킬리 전투에서 몽골군의 총사령관인 쿠틀륵 크와자는 심한 부상을 입고 철수하다가 사망하는 등 몽골군이
크게 패하였으니, 이렇게 몽골군을 연이어 격퇴시킨 할지 왕조는 1306년 이후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아프간 지역의 도시 카불과 가즈니와 칸다하르로 쳐들어가 약탈하는 식으로 반격에 성공합니다.
인도로 침입해 다스린 무굴 제국은 몽골에서 이름만 빌린 왕조이며 구성원들의 가계가 칭기스칸
가문과 연결된다고 해도 사실상 튀르크계와 이란계가 혼합되어 몽골적인 요소는 사라진
전혀 다른 국가로, 신성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별 연관성이 없고 러시아 제국
역시 동로마 제국과 별 연관은 없지만 이름만 팔고 다니며 계승국이라고 우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페르시아 역사서에서 칭기즈 칸은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었고, ‘로마제국 쇠망사’ 에서 에드워드 기번
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손들 때문에 전 세계가 떨었다고 쓸 정도로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였으니 이들에게
칭기즈 칸은 히틀러와 비슷한 사악한 침략자이자 학살자, 전범으로 취급되었으며 실제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거기다가 기독교 연대기 Chronicle of Novgorod 에는 몽골군은 신이 내린 징벌이라 불릴 정도의 공포를
보여주었으며 몽골군에게 당했던 국가들은 온갖 나쁜 이미지를 그에게 덮어씌웠고,
나중엔 '자신들의 나라가 못 사는 건 몽골족이 수탈해가서' 란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같은 중동권 나라들에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티무르와 함께 가장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니 ‘론리플래닛’ 지은이 토니 휠러가
이 나라에서 칭기즈 칸 이야기를 했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멱살까지 잡히고 "그놈 이야기는 왜
하는데? 이름만으로도 기분 더러워. 또 그 말 하면 당신 가만 안 둬"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몽골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하자라족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흔한 화풀이 대상이기도 하니 대놓고
괴롭혔다는 목격담이 많고, 아프가니스탄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연을 쫓는 아이’
에 괴롭히는게 잘 묘사되어 있으며 기분 좋게, 긍정적으로 대꾸하는 사람을 도통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튀르키예나 카자흐스탄에선 다른데 굴욕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튀르크인과 같은 유목민으로
서로 싸우긴 했어도 이슬람이라고 탄압한게 아니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푼 점이라든지 유럽 기독교
나라 보단 낫다는 평을 내리곤 하며 일부 범투란주의자들은 칭기즈 칸을 튀르크족 영웅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애초에 튀르키예인 남성 이름 중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젱기즈(Cengiz)'
혹은 '티무친(Timuçin)' 이고 카자흐스탄에서도 '승그스 (Шыңғыс)' 라는 이름이 흔하며
여기에서 파생된 '승그소프(Шыңғысов, 남성형)/ 승그소바(Шыңғысова, 여성형)' 란 성씨도 있습니다.
'젱기즈(Cengiz)' 등 저 이름들 모두 칭기즈 칸을 의미하는 것인데 사실 튀르크인과
몽골인은 원래 같은 생활공간을 공유했고 오랜 유목생활로 제법 많이
섞이기도 했으며 튀르크계인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은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반면 원나라 때 색목인 계급으로 우대받았던 위구르인들의 경우 칭기즈 칸과 원나라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우즈베크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격인 호라즘 왕조가 칭기즈 칸
치세의 몽골 제국에 의해 무너진 것 때문에 위구르인들에 비하면 칭기즈 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인데 그것과 별개로 칭기즈 칸의 후손인 티무르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방글라데시도 자신들이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후신인 것과 몽골 제국의 부마국임을
주창한 무굴제국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가져서인지 몽골에게 점령당한 다른 국가에 비해 칭기즈 칸
에 대해 긍정적이니 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계 무슬림 이름 중 제일 흔한 이름 중 하나가 바로
'Khan' 으로...... 무슬림 국가나 지역 중 이름으로 'Khan' 을 많이 쓰는 나라는 위 세 나라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