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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한인이민사:국사편찬위원회
2015. 11. 16. 19:30
캐나다의 한인 이민사
문 영 석
강남대학교 국제학부 캐나다학 전공 주임교수
제1부 초기 이민 역사와 이민사회의 형성(1965-1990)
이민자들에 의해 건국된 캐나다는 국가적 정체성으로 본다면 아직도 형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다. 캐나다는 건국 이래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과 분야에서 몰려든 가장 다양한 인종과 문화로 이루어진 사회를 형성하였다. 캐나다는 그동안 미국이라는 그늘에 가려 한국인 들의 시선을 주목시키지 못하였지만 1960년대 절대빈곤의 상태에 있던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던 한인들의 욕구와 때마침 캐나다도 그간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을 철폐하고 이민문호를 대폭 개방하였던 시기였다. 이처럼 상호의 이해가 부합하여 한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이래 지난 40여 년간 캐나다에로 향하는 한인 이민 대열은 꾸준히 증가해왔으며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폭발적인 성장을 하여왔다.
제1장 캐나다의 이민정책과 소수민족
캐나다는 1867년1) 출발부터 영국계와 프랑스계 이민자들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으며 오늘날도 국외에서 태어난 외국 이민자들의 비율이 캐나다 전체 인구의 18.4%를 점유하고 있다. 비록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북미 원주민이 아닌 한 기껏 거슬러 올라가봐야 대부분은 몇 십 년에서 불과 백여 년에 불과한 이민자들의 후손일 뿐이다.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 에겐 풍부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땅으로 다가왔으며 이 가능성을 재빨리 간파한 유럽 각국들은 신대륙 진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1534년에 프랑스인 탐험가 자끄 까르티에(Jacques Cartie)가 처음으로 세인트로렌스 강을 발견하였고 사무엘 드 샴플랜(Samuel de Champlain)1608년 오늘날 퀘벡시인 세인트로렌스 강을 굽어보는 절벽위에 프랑스 요새를 구축하였다. 16-17세기 프랑스인들이 북미에 진출한 주된 이유는 원주민들과의 모피거래 같은 상업적 이유였지만 유럽 각국의 신대륙 진출 바람을 타고 프랑스도 세인트로렌스 (St. Lawrence)강 유역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세우고 “신 프랑스”(La Nouvelle-France)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점점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17세기부터 자국의 이민들을 불러와 북미 여기저기에 식민지 경영을 위한 전초기지와 정착촌을 만들어 상호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인 개척자들은 캐나다의 내륙을 관통하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점점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미주리 지역과 오하이오 강 유역으로부터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부 멕시코 만에 이르렀다. 잘못 기획된 팽창주의는 결국 영. 불간의 대결을 가져왔으며 1759년 9월18일 프랑스군이 영국군에게 참패한 결과 1763년 2월10일 파리조약(Treaty of Paris)에 의해 정식으로 북미에 있던 프랑스의 식민지는 영국에 할양 되었다.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캐나다는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명백하게 순수한 “백인 정착 식민지” (white settler colony)를 건설하기 위해 매우 인종차별적인 이민정책을 역사적으로 계승해왔다. 새로운 식민지의 주인이 된 영국은 다수의 프랑스계를 제압하고 광대한 캐나다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 다수의 영국계 이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870년대부터는 좀 더 이민 문호를 개방하여 영국 인근지역의 독일, 네덜란드, 스캔디나비아 국가들로부터 이민들을 받아들여 텅 빈 북서부 지역에 이민을 추진함으로써 이 지역의 풍부한 자연 자원이 동부로 운반되고 역으로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공산품들이 북서부 지역으로 되돌려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대륙을 횡단하는 태평양 철도 건설은 서부의 주민을 다독거리기 위해서 뿐 아니라 연방정부의 주요 경제 전략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도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철도건설을 위해 노동자가 필요해진 캐나다는 최초로 아시아인들 특히 중국인 노동자들을 캐나다에 들여왔으나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거부감이 인종차별로 발전된 소위 “황인종에 대한 공포감”(黃禍, Yellow Peril)이 백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갔다. 결국 이들은 중국인들의 이민을 차단하고자 악명 높은 인두세(head tax)부과하여 중국인 노동자들은 처자를 데려올 수가 없었고 많은 중국인 남성들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했다.
1896년부터 미국은 더 이상 이민자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북미로 왔던 농업이민들은 미국에서 비옥한 땅을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북부에 있던 캐나다 대평원지대까지 올라 갈 이유가 없었지만 이때부터 갑자기 이지역이 “서부에 마지막으로 남은 최고지역”2)으로 떠올랐다. 캐나다로서도 당시 곡물과 천연자연에 대한 급증하는 수요를 채우기 위해 중. 서부의 평원지대를 개발하고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인력이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결국 캐나다 정부는 배타적인 이민정책을 완화시켜 유럽 동부나 남부의 유럽인들에게도 이민문호를 확대시켰다. 다만 혹독한 캐나다의 기후적 조건을 견뎌낼 수 있는 “양피 옷을 걸친 건강하고 근면한 농민”3)들을 환영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미국의 서부 팽창정책이 북부지역인 캐나다 서부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종차별정책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영. 불 계통이 아닌 여타 동부 및 남부 유럽계 이민들과 유색인종 특히 아시아인들에 대해서는 갖가지 차별이 자행되었고 이민선발과정에서도 매우 제한적이고 선별적인 이민정책을 고수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 영 연합국 등이 캐나다 지역에 군수기지 공장을 많이 건설하였는데 전후 이 공장시설이 산업시설로 전환되면서 일약 캐나다는 농업국가에서 근대 공업국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속한 경제적 성장으로 인해 노동력부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파악한 캐나다 정부는 그간의 폐쇄적인 이민정책을 개방하여 이민문호를 확대하고 대폭 신규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을 비롯한 서부 유럽계 이민을 선호하였지만 점점 문호를 개방하여 남부유럽 및 소련에 의해 위성국가들이 되어버린 동구권 유럽 국가들로부터 이민들이 들어왔다. 특히 1956년의 헝가리 사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및 1982-85년의 폴란드 사태들은 수많은 정치적 망명자 및 피난민들을 양산했으며 캐나다는 이들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의 이민들이 주로 농장이나 벌목지대 혹은 외딴 광산지대에 정착했던 반면 이때부터 신규이민들은 주로 대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민자들의 출신성분도 과거와는 달리 잘 교육을 받았거나 여러 가지 전문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막대한 숫자의 이민자들이 똑같은 신생국인 미국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캐나다는 옆에서 이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유인책을 쓰지 않아도 전 세계에서 고급두뇌들과 이민들이 몰려오는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는 언제나 능동적인 이민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0년대 심각한 노동력 부족과 더불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고급 기술 인력의 부족은 캐나다로 하여금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백인선호의 인종차별적인 이민정책을 근본적으로 탈피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정책의 폐기는 1960년 전 세계적으로 번졌던 인권운동과 갖가지 해방운동들이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캐나다는 1961년까지 인구의 97%가 유럽계 백인들이었으며 유색인종이라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 있던 50,000명 정도의 중국인과 일본인들뿐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의 이민정책은 드디어 1967년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는다. 이때부터 캐나다는 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을 철폐하고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colour-blind) 객관적인 평가기준을 마련하였다. 캐나다는 이민점수제를 도입하여 기존의 인종차별적이며 폐쇄적이었던 이민정책을 전폭적으로 개혁하고 대외적으로는 인종차별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다문화주의 정책4)을 표방함으로서 전 세계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이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966년 자유당 정부는 노동시장의 수요에 맞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연방정부안에 이민과 노동을 동일부서에 설치함으로서 이민과 노동정책을 병합하였고5) 1967년에는 유럽이나 미국지역의 백인들에게 특혜를 주었던 종래의 지역별 할당제를 수정하여 모든 지역의 이민자들이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자신들의 학력, 언어구사능력 그리고 기술 등이 캐나다의 노동력 시장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느냐를 점수로 평가하는 “점수제”(Point System)로 바뀌었다. 또한 1960년대부터 캐나다는 전 세계에 자국의 이민관들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이민유치작전을 폈으며 이민심사를 간소화하고 다문화 정책수립과 인권옹호를 대외정책의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대외적으로 캐나다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하였다.6)
산업사회에서 후기 산업사회에로 전이되면서 선진각국의 노동시장 수요도 과거처럼 단순 노동력이 아니라 고급기술 인력의 확보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캐나다는 지난 40년간 역사상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이민정책에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 왔다7). 점수제 도입을 통해 자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준을 강화하여 숙련 기술자들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고자 하였으며 장기적 안목에서 본 노동시장의 수급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특히 20세기 들어 천연자원과 개발에 치중되었던 일차산업 위주의 산업구조가 제조업과 각종 첨단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산업구조 재편에 따른 숙련기술자, 자영업자 및 전문직 종사자들이 더욱 필요해졌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이후 유럽경제가 호황을 이루자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은 현격하게 저하되었고 그 대신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도약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해진 고급기술 인력을 주로 아시아에서 유입할 수 있었다.
제2장 이민 전사(前史) : 1893-1965
캐나다는 최근에야 한국인들에게 급격하게 부상된 나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양국 간 교류역사는 100년을 넘게 이어왔다. 특히 한국은 근대화과정에서 서구 각국에서 온 그리스도교8) 선교사들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 민족의 독립과 자결권, 민주주의의 개념 등 근대화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을 배웠던 것처럼 캐나다인 선교사들도 한국의 근대화와 의식의 계몽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캐나다인 선교사들은 선교사업 이외에도 의료, 교육, 농업의 개량, 사회봉사활동을 전개하였고 자연스럽게 이들을 통해 한국인들은 캐나다로 유학을 가거나 이주를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1) 캐나다 선교사들의 내한과 활동
캐나다인으로서 한국에 제일 처음 도착한 사람은 캐나다인 선교사 제임스 스캇 게일(James Scarth Gale, 寄一, 1863-1937)이다. 그는 1888년 12월12일 부산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고 한국의 그리스도교 선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을 서양세계에 소개한 제1인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게일은 1893년에 펴낸 한국어 문법서인 Korean Grammatical Forms, 1897년 3만 5천 여 자가 수록된 방대한 한, 영 사전, 신, 구약 성경번역, 최초의 기독교 잡지 등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 및 그 유명한 천로 역정(Pilgrim's Progress)등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또한 한국의 구운몽과 춘향전을 영역(英譯)하는 등 50여 가지의 다종다양한 저작 및 번역활동을 하였다.9) 지난 200년간 수많은 서구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헌신하였지만 그 어느 누구도 게일만큼 한국 언어와 문학, 그리고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세계에 한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한 이는 없었다.10)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은 근대 사학의 요람이자 명문인 오늘의 연세대학교를 있게 한 실질적 창설자로서 기억될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의 근대식 서양의학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의 창설자이자 한국 최초의 의학교육기관인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를 창설하여 후일 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오늘의 연세대학교를 있게 한 주춧돌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의료사역을 통해 한국 근대 의약과 의학교육을 최초로 한국에서 시작한 사람으로 한국 의학사에서 신기원을 이룩한 사람이기도 하다.11) 대부분의 캐나다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문화와 의료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업적들을 남겼다면 스코필드 박사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다. 프랜시스 윌리엄 스코필드(Francis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石虎弼), 1889-1970)박사는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해외와 연락관계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스코필드 박사는 배후에서 갖가지 해외 정보를 국내 지도자들에게 전달해주었고 국. 내외의 연락망을 담당하였다. 이런 공적이 인정되어 그는 후일 삼일 만세운동의 거사를 도모하였던 33인에 덧붙여 34인이라 불리어졌다. 그는 학생들에게 민족의 자결권과 민주주의를 기회가 닿는 데마다 설파했으며 이러한 그의 신념과 활동은 이내 일본인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비춰졌고 결국은 일제의 압력으로 한국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1955년 그는 한국에 다시 돌아왔고 갖가지 사회봉사 활동을 하다가 1970년 4월12일 한국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유해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2)
통계에 의하면 1888년부터 1941년 사이에 한국에 파견된 캐나다인 선교사 총수는 185명이며 이들이 한국에 헌신한 햇수를 따진다면 총 3,073년이나 된다.13) 당시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 대부분은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 교육, 의료, 농업, 사회복지 사업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에 공헌하였으며 그들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함경도와 간도지방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들과 친분관계를 갖게 된 많은 한국학생들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유학을 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 일부는 현지에 정착하여 캐나다 한인 이민사회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또한 6.25 전쟁 이후 캐나다인 선교사들이 사역하였던 북한지역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왔던 기독교 신자들 역시 1960년대 후반 본격적인 캐나다 이민 대열이 시작되었을 때 선두주자들이 되었다.
2) 초창기 한인 유학생들과 현지 정착
한국인으로서 캐나다 땅을 최초로 밟은 이는 윤치호(1865-1945)이다. 그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1893년 10월13일 밴쿠버에 들러 2일을 머물렀다.14) 1895년 7월에는 캐나다인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을 따라서 그녀의 의료조무사였던 김점동(후일 박에스더로 불림)과 그녀의 남편 박유산이 온타리오 주 글렌 부엘(Glen Buell)에 다녀갔으며 1896년 4월 18일에는 대한제국 황제를 대표하는 특명대사 민영환(1861-1905) 일행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캐나다를 경유하여 갔으며 역시 황제 특명대사 이재각 일행이 영국 왕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1902년 밴쿠버에 도착하여 기차 편으로 대륙을 횡단한 후 퀘벡시티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15) 이후 캐나다에 유학을 오거나 유학 후 현지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거의 전부가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캐나다인 선교사들의 소개나 후원으로 캐나다에 도착하였다.
유학생으로서 제일 먼저 캐나다에 입국하였던 사람은 1905년 7월8일(음력)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빅토리아 항에 도착한 김일환이었다. 그는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왔으며 후일 온타리오 주 베를린으로 옮겼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 YMCA에서 캐나다인 선교사들과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그들의 소개로 캐나다에 유학을 온 것처럼 보인다.16) 1906년에는 정인표 그리고 뒤이어 1915년 조희렴, 1919년 강용흘17), 1922년 김관식, 1928년 문재린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정인표는 1906년 혹은 1907년 캐나다 서부해안 빅토리아 항에 도착하여 경찰관의 주선으로 잡화점에 취업이 되어 일하면서 5년을 지낸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고 전해진다.18) 유학생은 아니었지만 함경도 출신인 변사라 (본명 변영실)도 1913년 가을 맥레이(MacRae) 목사의 부인과 함께 캐나다 동부 연안지방인 노바스코시아 주 케이프 브리튼 부근 베덱(Bedeck)에 와서 맥레이 선교사의 세 자녀를 돌보다 4년 후에 귀국하였다.19)
일제말기 캐나다가 적성국가로 구분됨에 따라 잠시 유학생이 끊어졌다가 육이오 전쟁 후 특히 토론토 대학교 안에 있던 연합교회 교단 소속 임마누엘 칼리지(Emmanuel College)에 많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던 문재린20) 목사는 후일 그 자제 중에 민주화운동의 거성이 되었던 문익환, 문동환 목사를 배출했다. 문재린 목사는 1971년 캐나다로 이민하여 10년간 토론토에 거주하다가 1981년 귀국하여 한국에서 사망하였다. 정대위 (David Chong) 목사는 1917년 간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가 캐나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의 선생이었다. 이런 연유로 그는 1947년 캐나다인 선교사들에게 발탁이 되어 토론토 대학교의 임마누엘 칼리지에 유학을 오게 되었으며 2년 동안 신학을 전공하였다.21) 그는 박사학위를 얻고자 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22) 귀국 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초대총장 및 건국대학교와 한신대학교 총장을 엮임 하였으며 국내에 최초로 토인비 사상과 종교학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1968년 다시 캐나다에 돌아와 오타와에 있는 칼튼 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다년간 가르치다가 2003년 밴쿠버에서 영면하였다.
1950년대에도 역시 캐나다 선교부의 장학금으로 많은 목사들이 캐나다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1956년 이영찬, 조향록, 1957년 김익선, 이영민, 서남동, 김정준 목사 등이 유학을 왔다. 특히 서남동은 제3세계 신학의 모델이 되었던 민중 신학을 창시하여 한국 신학계에 토착화 신학이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51년에는 유신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과 한국 여성노동운동계의 대모로 불렸던 이우정과 후일 한국에서 정무 제2장관과 1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김영정은 같은 배를 타고 캐나다에 도착하여 모두 토론토 대학교 빅토리아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53년에는 이임학이 밴쿠버로 조정원은 토론토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정원은 박사 학위 후 캐나다에 정착하여 뉴펀들랜드 주의 세인트존스에 있는 메모리얼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봉직하였고 동부 연안 지방의 교민사회의 기틀을 쌓았으며 1989년 세인트존스 한인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54년에는 정희수가 토론토로 유학을 왔고 그 후 몬트리얼에 정착하여 퀘벡대학교(UQAM)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상철 목사는 192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7세 때 만주 간도지방으로 이주하여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용정 은진 중학교를 다녔다. 이후 남하하여 한국 신학대학 재학 중에도 캐나다인 선교사 교수들에게서 영어회화를 익혔고 1961년 밴쿠버 유니온 신학교로 유학을 왔다. 1969년 토론토로 이주하여 토론토 연합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1988년 캐나다 최대의 개신교단인 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캐나다의 복합문화주의 정책이 단순한 구호가 아님을 캐나다 사회에 각인시켰다.23) 이외에도 매니토바 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던 개신교계의 지도자인 강원용 목사(1962)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후일 한국의 기독교계, 학계, 정계, 여성계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캐나다와 한국 간에 많은 교량 역할을 하였다.
캐나다는 개인의 사생활 보호법(Freedom of Information and Protection of Privacy Act)에 의해 개인의 이민기록을 공개하지 않으며 일정기간이 지나면 파기시키기 때문에 과연 누가 최초의 한인 이민자인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아직 논란24)이 있지만 캐나다에 정착한 최초의 한인이민으로 황대연 박사 (1914-1999)25)는 그동안 알려져 왔다. 그는 캐나다에서는 최초의 한인 가정 의사이자 첫 번째 시민권자 이기도 하였다. 황대연은 1914년 함경남도 안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캐나다인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플로렌스 머레이(Florence Murray)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후 1947년 앨버타 주 라먼트 병원에서 인턴수련을 마쳤다. 그 후 1950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4년간 체류한 후 1955년 다시 캐나다에 돌아와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1957년부터 온타리오 주 블라인드 리버에 정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5년간 주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였으며 지역주민들은 그를 매우 존경하여 아예 한 거리의 이름을 왕 스트릿(Wang Street)으로 명명하였을 정도였다. 그는 특히 모국으로부터의 이민초청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농업이민에 대한 구상을 마련하고 당시 캐나다 수상이던 레스터 피어슨(Lester Pearson)에게 서신을 보낼 정도로 정렬을 기울였지만 유색인종에게 문호를 개방했던 연방정부 이민정책이 아직 실현되기 전이라 그의 이런 계획은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후 인근지역에 농장을 매입하여 1964년 노윤거. 장영만 가족 등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1977년 토론토로 이주하여 1999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토론토에 있는 로얄 온타리오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에 한국문화 예술 상설 전시실을 개설하고 이를 후원하는 한국예술진흥협회의 초대회장으로서 다대한 기여를 하였다.
1948년에는 당시 천주교 프란치스꼬 수도회 수사이었던 김영기가 입국하였으며 그 후 현지에서 환속한 후 도서관학을 공부하였고 사서로 일하기 위해 뉴 브런스윅 주로 이주하였다. 서종욱(William So, 1917~)은 1953년 5월31일에 밴쿠버에 입항하였으며 최초로 토론토에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초대 대법원장 이었던 서병규의 아들로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1년 일본계 캐나다인을 만나 결혼하였다. 해방 후 서울로 와서 48년부터 이민 올 때까지 서울주재 미국계 무역회사에 근무했다. 6.25 당시 유엔 참전국인 캐나다 21사단에서 J. M. 로킹햄(Rockingham) 장군의 정보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이와 같은 경력이 후일 그의 캐나다 이민을 도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온타리오 주정부 환경청에서 25년간 엔지니어로 근무했지만 한인사회와 거의 왕래가 없어 행적이 묘연하였고 1999년 캐나다 한국일보에 드디어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26)
<사진 1> 황대연 <사진 2> 서종욱
황대연이 북한에서 캐나다인 선교사들의 소개로 캐나다에 왔다면, 그의 뒤를 이어 박하규, 김희섭, 이복규 등은 남한에서 캐나다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유학을 왔으며 이들 또한 모두 토론토 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현지에 정착하여 대학교수가 되거나 혹은 목사로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들이 모두 처음 유학생으로 캐나다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정착하였다면, 1962년 전충림은 그의 가족을 이끌고 처음으로 캐나다에 이민을 왔다. 그는 입국 당시에는 이민비자가 없이 방문비자만으로 입국하였지만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왔던 캐나다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쉽게 취업허가를 얻었으며 2년 후에는 영주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전충림은 자신이 정식 이민비자없이 캐나다에 입국하여 영주권을 얻게 되었던 성공 비결을 한국의 동료들에게 알려주어 그의 친지들이 그 이후 캐나다에 줄이어 입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까지 캐나다 전국에 약 70여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주로 몬트리얼이나 토론토 지역에 정착하였다.27)
제3장, 이민사회의 형성과 발전: 1965-1990
본격적 의미의 한인이민 시작은 1967년 캐나다의 이민정책이 획기적인 변혁을 한 이후부터이며 국내에서도 해외이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시기였다. 캐나다 이민 문호 개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당시 서울의 천우사 사장 전택보였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전택보는 어린 시절부터 캐나다인 선교사들과 밀접한 친교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후일 남하하여 천우사 사장과 상공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1964년 오타와를 방문하여 당시 연방정부 이민부 차관을 만나 한국인들의 이민승인을 내락 받고 귀국하여 자신의 회사에 캐나다 이민 사무실을 개설하고 적극적으로 이민을 추진하였다. 1966년 YMCA에 캐나다 이민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민업무를 이관했으며 민간외교차원에서 한. 카 문화협회를 결성하였고 “캐나다의 밤”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캐나다에 대한 한국인들의 흥미와 관심을 고취시켰다. 캐나다 이민위원회의 안내로 1965년에는 93명이 캐나다로 이주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당시만 해도 양국은 아직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이라 홍콩에 있던 캐나다 이민국 외교관들이 서울로 출장하여 면접을 하였으며 1966년부터 1972년 까지 약 4,000여명이 캐나다로 이민을 하게 되었다.
1) 초창기 이주와 공동체의 형성
1960년대 한인 이민들의 동기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고국에서 어떻게든 타국에서라도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소위 “생계형 이민들”이었으며 그리하여 북미. 남미로 이민을 가던 시절이었다. 초창기 캐나다 한인 이민들은 모국에서 직접 오는 경우보다는 이미 해외에 진출해있던 한인들이 캐나다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1960년대 서독으로 파견되었던 광부들이 당시 캐나다가 이민문호를 개방하여 영주권을 준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보다는 캐나다 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이들은 당시 파독 간호원으로 와있던 한인 여성들과 결혼하여 함께 이주를 하기도 하였다. 서독 광부출신 한인들이 도착한 것은 1966년부터였으며 67년부터 71년 사이에 최고조를 이루었다. 이들은 1976년 동우회를 조직하였고 초창기 한인 이민 선구자들로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한인사회를 형성하는데 초석을 놓았다.
이때부터 서독 광부, 간호사 출신 한인들뿐만 아니라 덴마크로 농업연수생으로 갔던 사람들, 파월 기술자들, 남미로 농업이민을 갔다가 다시 북미로 이민 온 이들 등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는 한인들이 캐나다 이민문호의 개방을 이용하여 줄줄이 입국하였으며 초기에는 몬트리얼에 한인 거주 숫자가 더 많았으나 점점 절대 다수가 영어권 캐나다의 중심지이자 최대 상업도시인 토론토를 중심으로 한인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1965년 12월18일 토론토 스카브로에 있는 클리프크레스트(Cliffcrest) 연합교회에서 최초로 교민회가 발족되었는데 90여명이 참석하였으며 초대회장으로 윤여화씨가 선출되었다. 1966년 100여명의 한인들이 토론토에 정착을 하였으며 당시 신설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이 효율적인 영사업무를 위해 「재외국민등록법」에 의거 교포등록을 실시한 결과 전체 캐나다 교민 수는 약 250세대로 밝혀졌다.28) 1967년 4월23일 토론토에 최초로 한인연합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한인장로교회도 설립되어 두개의 개신교회가 설립되었고 1968년 7월14일에는 한인천주교회도 설립되었다. 1969년에는 토론토에 교민 수가 2000여명으로 늘어나 기하급수적 성장세를 보였다.
한인 교회들이 연이어 생기기 시작했으며 특히 토론토 한인 연합교회는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갔고 소수민족 연례 축제기간 중에는 “서울관”을 열었고 한글학교도 생겨났다. 이때부터 한인들의 정보소식통이 되어준 갖가지 언론매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민사회의 최초신문은 『한가주보』(Korea Canada Times)로 정태훈이 1971년 3월26일 창간하였으나 경제난으로 1년도 안되어 폐간되었다. 이후 유영빈이 Korean Journal(1972년 11월29
<사진3> 1973년 발행한 한인주소록과 일) 그리고 김명규는 1971년부터 시카고판『한
1974년 발행한 한인회보 국일보』를 캐나다 지역에 보급해오다 1975년
Canada News를 주 2회 발행하였으며 1984년
6월 일간지 『캐나다 한국일보』로 발전되었다. 이외에도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신문들이 창간되었다. 특히 전충림은 유신체제하인 1973년 10월 24일 주간지 『뉴코리아 타임스』(New Korea Times) 창간하여 초기에는 반독재 반유신 투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79년 평양을 방문한 이후부터는 친북성향으로 돌아섰고 신문논조도 친북일색이어서 “사실상의 북한대사”29)로 불리면서 북미교포들의 대북창구 역할을 하였고 신문을 통해 해외동포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벌였다.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민중신문』(정철기 1979년 2월23일)과 교민사회의 잡다한 일화들을 많이 다루어 인기도 끌었지만 그만큼 많은 필화(筆禍)사건도 일으켰던 Korean Digest (김원동 1984년 11월 8일), 그리고 『토론토 동아일보』(김상석 1984년1월1일), 『캐나다 조선』 (이춘호 1987년 4월15일)등이 연이어 발간되었다. 활자매체뿐만 아니라 1970년 12월5일부터 CHIN FM 101을 통해 일주일에 30분씩이나마 라디오에 「희망의 소리」(Voice of Hope)란 방송이 시작되었다. 1973년 12월 초부터는 로저스 케이블 채널을 통해서 「Korean Celebration」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1988년에는 토론토 한국방송국(이장성)과 세계복음화 TV방송(이종문) 등 두 개의 방송국이 토론토에 개국했다. 1979년에는 박재훈 목사가 이끄는 한인합창단 (Toronto Korean-Canadian Choir)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매해 정기 연주회도 열어갔다.30)
주로 생계형 이민들은 취업이나 사업하기에 용이한 대도시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기에 캐나다 최대 도시인 토론토와 그 인근으로 한인이민들의 정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전문 직종을 가진 이들은 직장 때문에 캐나다 전역으로 흩어졌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후일 교민사회가 캐나다 전역에 걸쳐 발전되어갔다. 동부 연안 지방은 조정원 교수가 그리고 1961년 캐나다에 입국했던 김원겸 박사는 매니토바대학교에서 오랫동안 봉직하면서 캐나다 중부지방의 중심지인 위니펙 교민사회의 형성에 큰 공헌을 했으며 두 차례나 한인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위니펙 한글학교를 설립하고 이 학교를 기부자들에게 면세영수증 발행이 가능할 수 있도록 비영리단체와 자선단체 등록을 동시에 마쳤다. 특히 이 학교는 캐나다 최초의 한글학교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입국한 권오율 박사는 해밀턴의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중부지방의 또 하나의 거점도시인 사스카추완의 리자이나 대학교에서 봉직하면서 해밀턴과 리자이나에서 교민회장도 역임하였다. 치과의사였던 원영수는 캐나다에 정착한 최초의 한인치과의사였으며 에드먼턴에서 한인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하면서 현지교민사회의 기틀을 쌓았다. 캐나다의 세 번째 대도시이자 태평양 연안의 관문인 밴쿠버는 1961년에 입국한 의사 심선식 박사가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에 조교수로 부임하면서 1966년 이상철 목사를 초빙하고 밴쿠버 한인연합교회를 창설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그해 8월에는 밴쿠버 한인회가 창설되었고 초대회장에는 이상철 목사, 총무는 심선식박사가 맡았으며 2대 회장직은 심선식이 맡았다.
한인인구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3년간 9,499명으로 급증했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300여명의 여성 봉재사들이 매니토바 패션회사협회(Manitoba Fashion Institute)의 초청으로 집단 이민이 이루어졌다. 그 후 1980년대에는 매년 1천명여명 정도였으나 1986년부터 사업이민을 강화하고 1987년부터 순수투자이민을 증설하면서 2천여명대를 넘어섰다. 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주로 가족이민으로 이루어졌으나 87년부터 사업이민자가 가족이민자를 앞서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총 이민자 2,664명중 반이 넘는 1,355명이 사업이민자들이었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캐나다에 이민 온 한인수는 20,000명에 이르렀으며 대부분이 토론토와 그 인근지역에 정착했다.31) 아시아 인종들에 대한 이민문호가 대폭 확대된 개정이민법이 캐나다나 미국에서 발효되었던 1960-1970년대에 한인 이민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지만 그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이 호조를 보이던 1980년대 말부터 이민자수는 줄기 시작해 1990년대 초반에는 대폭 줄어들었다. 캐나다도 역대 이민정책의 변화는 언제나 경제적인 목적이 그 주된 동기가 되어왔다. 예를 들면 1973년 경제가 활황이었을 때는 230,000명을 받아들였지만 1984년 경제가 불황이었을 때는 겨우 84,000명만을 받아들였다가 1992-93년에는 다시 254,000명으로 늘어나는 등 자국의 경제 상태에 따라 신축성을 보였고 이민선별과정에서도 먼저 사업이민 허용치를 우선 선발하고 나서 그 다음에 가족초청 케이스와 난민 케이스를 다루어왔다.
2) 초기 이민사회의 특성과 발전
직업을 얻는다는 것은 이민정착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캐나다는 실로 광대한 나라여서 고용시장만 해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신규이민자들은 특히 한인들은 언어장벽 외에도 학맥, 인맥, 취약한 시장정보, 현지에서의 경험부족 등이 취업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걸림돌로 작용했다. 과거에는 신규이민들은 주로 단순 노동자나 농민들 출신이어서 입국하자마자 농업이나 광산, 도로건설 같은 일차산업에 주로 종사했다. 그러나 산업구조가 복잡해지고 지식경제사회로 전이되면서 단순노동자들은 청소부나 경비원 같은 단순노역이나 “코너 스토어”같은 조그만 규모의 자영업 이외는 취업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생계형 이민들이 대도시에 정착한 후 주로 취업을 한곳은 대부분 공장이었지만 많은 신규이민자들은 캐나다 현지 노동시장에서 자신들이 과거에 쌓았던 학력이나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평가절하나 무시를 당했다. 예를 들면 교육경력의 경우 많은 신규이민자들은 현지인들에 비해 거의 절반정도 수준으로 평가절하를 당하며 고용이나 승진에 있어서도 역시 현지인들이 이민자들에 비해 훨씬 더 나은 대우와 평가를 받는다고 보고되고 있다32). 물론 이런 무시와 차별은 고용주의 인종과 문화에 대한 편견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인들은 승진의 가망성이 낮고 수입도 변변찮은 공장노동자에서 이내 자영업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가장 수입이 좋은 취업으로 통했던 “지렁이 잡이”등을 하여 얼마간의 현금이 모이면 그 후는 소위 “코너, 버라이어티, 혹은 컨비니언스 스토어” (Corner, Variety or Convenience Store)라 불리는 소규모 편의점 가게를 열어가는 것이 초기 이민들의 일반적인 정착과정이었다. 이들은 이내 공동이익의 결집을 위해 프랜차이즈 잡화가게인 베커스 경영자 15명이 모여 「한인 베커스 프랜차이즈 경영인협회」가 설립되었다. 베커tm 협회 발족 2년 후인 1975년 7월경 온타리오주 101개 베커스 프랜차이즈 중 88%인 89개가 한인경영이었다. 70년대 초기의 한인들은 맥스(Mac's)와 베커스(Becker's) 양대 연쇄점을 통해 캐나다 사회에서의 사업에 눈을 떴고 점차 프랜차이즈에서 경험을 쌓은 교민들이 이를 벗어나 개인상점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73년 발족된 것이 「토론토한인상인협회」이며 이 단체는 한인들이 단결하여 도매상들과 단체협상을 통해 “리베이트”등을 조정했고 1974년 단체 이름을 “한인실업인협회”로 바꾸었다. 이후 1976년에는 “온타리오 한인실업인협회”로 개명하고 법인체로 등록을 하였고 1978년부터 자체소식지인 “실협뉴스”를 창간했으며 이사회를 조직했다.
1974년 토론토 한인회가 실시한 교민사회 실태조사에 의하면 전체 세대주의 15%가 편의점 경영인데 반해 10년 후인 1983년에 역시 토론토 한인회가 실시한 조사를 보면 35.8%가 편의점 종사자로 나타나 편의점이 점점 교민들의 주요직종으로 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33) 코너스토어 외에 교민을 상대로 식품점과 식당들이 늘어갔지만 늘어가는 교민 숫자보다 상대적으로 교민상대 식품점과 식당들이 너무 많이 생겨 개업과 폐업이 빈번하게 교차되었다.
교민사회도 점점 다양한 발전을 거듭하여갔다. 1976년 10월23일에는 최초의 교민 금융단체인 토론토한인신용조합이 탄생했다. 1974년에는 삼우스님이 토론토에 한인 최초의 불교사찰을 열었고 1977년에는 모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캐나다에서는 최초로 한인회 자체회관(20 Mobile Dr., Toronto)
을 갖게 되었다. 1977년 1월15일에는 토론토에서 캐나다한국
<사진4> 1974년 재토론토 문인협회가 창설되어 매년 신춘문예 현상공모와 『이민문
한인상인협회의 광고문 학』을 발간하여 타국에서 잊어지기 쉬운 한국말과 얼을 지키
려고 하였다. 1984년에는 한국에서 생산된 현대자동차가 진출했으며 특히 포니 승용차는 출발부터 판매고에서 비슷한 소형차인 소련제 「라다」를 앞지르며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시판 2년 만에 10 만대 판매를 기록했다. 이후 기아 (85년), 대우 (87년) 자동차 등도 캐나다에 진출하였다.
본격적인 한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후 10여년이 지난 80년대 중반부터는 캐나다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용기는 1987년 뉴펀들랜드 의사협회로부터 올해의 가정 의사(Family Physician of the Year)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인 1988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인 전국의 「올해의 가정의」로 전국가정의협회에 의해 선정되었다. 그는 전문의 수련을 마친 후 1966년부터 캐나다에서 가장 빈한한 지역인 뉴펀들랜드 동쪽 끝 보나비스타 베이(Bonavista Bay)에 있는 브룩필드 병원(Brookfield Hospital)에서 30년 이상 가난한 어민들을 상대로 인술을 펴 “동양에서 온 슈바이처”로 불렸다. 이종구박사는 1958년 몬트리얼에 도착하여 왕립의학원에서 심장병 전문의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두 번째는 이재락박사가 받았다. 구상회박사는 캐나다에서 가장 귄위있는 병원중의 하나인 토론토 아동병원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의 소아과 수석전문의였고 과학계에선 식품공학의 이병훈, 바이러스학의 강칠용 등이 크게 해당분야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 후반부터 한인들은 캐나다 정치계 진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1986년 온타리오 한인 자유당 연합회 (회장 김병권)가 창설되었는데 캐나다 정치역사상 소수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창설된 정치적 후원기구가 되었고 이를 본받아 다른 여타 소수민족들도 같은 단체들을 만들어나갔다. 후일 모든 소수민족들이 연합하여 온타리오 소수민족 자유당 총연맹(Federation of Ontario Liberal Satellite)이 발족되었고 초대회장은 김병권이 맡았으며 그간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소수민족들도 주류사회의 정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이민자들의 참정권 행사가 이전에는 겨우 10% 미만이었던 것이 1987년 선거에는 60%로 치솟았다. 같은 해인 7월에는 캐나다 제 3당인 신민당 한인 자문위원회가 창설되어 소수민족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제도적 기구가 탄생되었다. 이어 한인보수당 후원회도 결성되어 캐나다 주요정당들의 후원기구들이 모두 발족되었으며 2세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리고 조성준이 1991년 매트로 토론토 시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유일하게 캐나다 정계에 진출했다.
토론토대 한국학과는 73년 한국통이었던 로스 맥도날드(Ross McDonald) 교수가 종교학과에서 한국종교를 강의하고 당시 토론토한인교회 담임목사였던 유재신 박사가 77년에 한국문화사 강의를 개설하면서 출발했다. 그 후 한국학 프로그램은 맥길(McGill), 유비씨(UBC), 워털루(Waterloo)등 전국의 주요대학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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