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3.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욥 42:12~13
*제목; 새생명전도축제(2) 원인보다는 처방이 중요합니다.
1. 인사
오늘 울산은혜교회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하늘 복이 오늘 오신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2. 지난 주 이야기, 무엇을 붙잡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 행복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조건을 붙잡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먼저는 사람(부모, 부부, 자녀, 등)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붙잡고 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지 못할만하고 악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그래서 이를 붙잡으면 오히려 행복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다음은 돈을 붙잡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은 우리를 편리하게는 할 수 있지만 행복하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는 잘 압니다.
마지막으로는 권력을 붙잡으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력은 오히려 우리는 더욱 더 불행의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까? 지난 주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사 41:10,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고백하며 손 내미는 자들을 붙잡으셔서 온전한 곳으로 세워주십니다(테너 배재철씨 이야기). 아멘.
3. 우리 삶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법
행복하려는 우리가 오히려 삶의 어려움과 고난을 만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보면 “욥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경험하는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의 삶은 왜 이런 것입니까?
첫 번째, 우리는 습성 상 “인과론”에 집중합니다.
삶에서 고난당하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즉, 너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일점일획도 부족함 없이 온전하게 살았습니다(욥 1:1).
“1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욥 1:1, 새번역)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의 삶에 부족함 없이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잘해주시니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욥 1:9~11).
“9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11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욥 1:9~11, 새번역)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에서 주신 부, 건강, 가족 모두를 사탄이 빼앗아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욥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역시 욥은 부도 다 잃고, 건강도 다 잃고, 가족도 다 잃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소리치며 그를 떠납니다(욥 2:9).
“9 그러자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욥 2:9, 새번역)
그러나 욥은 입으로 범죄하지 않습니다(욥 2:10).
“10 그러나 욥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 2:10, 새번역)
이제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이 와서 위로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곧 이 고난의 이유를 밝히는 것으로 바뀌어 집니다. 결국 욥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니, 회개하라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은 항상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판단한 그릇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 판단에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욥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해하시는 고난의 목적(이유가 아닙니다!)은 바로 “창조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시려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정죄와 판단이 난무할 때, 욥은 감정적으로 매우 흔들립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욥 4~38장’(총35장)까지 친구의 비판을 들으니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아픈 친구를 왜 이들은 이토록 정죄 못해서 안달입니까? 그것이 바로 사람의 속성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은 “내가 창조주요 주권자이다!”라는 사실만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 원인이 어떠하든 상관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현재 너희가 고난당할 때,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에 대한 창조자의 이유요 목적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원인을 밝히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정죄하면서 쾌감을 얻습니다. 이러면서 나는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 일의 원인을 밝혀 정죄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욥을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지 너무나 힘들어하고 궁금해 하다가, 이제는 그저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고백합니다(욥 42:1~6).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 42:1~6, 새번역)
그러니 하나님께서 욥의 처음보다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참 뜻이기 때문입니다. ‘욥 42:12~13’을 봅시다.
“12 주님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13 그리고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욥 42:12~13, 새번역)
4 믿음으로의 초청
여러분들 모두가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손을 잡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줄을 잡는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행복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원인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그 원인이 어떠하든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분에게 나아갈 때, 모든 문제에 대한 회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간증 동영상 보기: 김수미 배우 간증,
https://www.youtube.com/watch?v=PCrN5PF1jDg >
오늘 이렇게 되어지길 원하시는 분은 “결신카드”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쓰셔서 제출하시면 그 은혜로 나아가는 길을 잘 안내하겠습니다.
첫댓글 행복은 (내가) 붙잡아서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붙잡혀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려는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원인을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나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녀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