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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1파) 13세 안순필(安舜弼, 1477~1514)과 평양조씨(平壤趙氏) 부인의 묘비명(墓碑銘)
1571년 간행된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양곡집(陽谷集)』12권에 순흥안씨(1파) 13세 안순필(安舜弼, 1477~1514)과 평양조씨(平壤趙氏, 1474~1536) 부인의 묘비명(墓碑銘)이 있는데, 이 분들은 순흥안씨 최초 족보였다고 알려져 있는 병오보(1546)를 편찬했던 안위(安瑋, 1491∼1563), 안현(安玹, 1501∼1560) 형제의 부모이다. 1536년 평양조씨 부인은 사망 후 남편 안순필(安舜弼)의 묘에 부장(祔葬)되었고, 둘째아들 좌의정 안현(安玹, 1501∼1560)이 행장을 작성해서 큰아들 안위(安瑋, 1491∼1563)가 전라도관찰사로 내려갔을때 1598년 소세양(蘇世讓)에게 묘비명을 청해 작성된 글로 짐작된다. 안순필(安舜弼)이 영의정에 증직된 것은 둘째아들 안현(安玹)이 좌의정이 됨에 따라 부조증 3대의 관직을 높힐때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령 경연관상감사(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로 증직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묘비명의 가계도를 정리해보면
순흥대성(順興大姓) 원조(遠祖) 안부(安孚) + 예빈시 동정(禮賓寺同正) 우윤성(禹允成) 女 → 안향(安珦) + 동궁 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 김록연(金祿延) 女 → 안우기(安于器) + 교서랑(校書郞) 최충약(崔沖若) 女 → 안목(安牧) + 중찬(中贊) 김태현(金台鉉) 女 → 안원숭(安元崇) + 중찬(中贊) 원선지(元善之) 女 → 안원(安瑗) + 정승(政丞) 남휘주(南暉珠) 女 → 안종약(安從約) + 봉원군(蓬原君) 정량생(鄭良生) 女 → 안경(安璟) + 개국공신(開國功臣) 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 女 → 안인후(安仁厚) + 진의부위(進義副尉) 김의(金義) 女 → 안성(安珹) +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황석(黃石) 女 → 안순필(安舜弼, 1477~1514)
고려 때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조영(趙瑩) → 평양백(平壤伯) 조인규(趙仁規) → 조서(趙瑞) → 조천사(趙千祀) → 조문신(趙文信) → 조진(趙瑨) → 조승(趙乘) → 조득인(趙得仁) → 문천군수(文川郡守) 조강문(趙康門) → 평양조씨(平壤趙氏, 1474~1536) 부인
장남 안위(安瑋)는 전라도관찰사, 둘째아들 안현(安玹)은 좌의정, 셋째아들 안상(安瑺)은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있으며, 장녀는 신보상(辛輔商), 둘째딸은 이원개(李元凱)에게 시집갔다. 장남 안위는 창성군(昌城君) 성희옹(成希雍)의 따님과 혼인을 했고, 둘째아들 안현은 현감 박문로(朴文璐) 따님과 3남1녀를 두었는데, 안계선(安繼善), 안광선(安光善), 안종선(安宗善)이고, 셋째아들 안상(安瑺)은 화녕부수(化寧副守)의 따님과 1남3녀를 두었다.
贈領議政安公墓碑銘 幷序 a_023_480a
左議政安公。自述其先考妣行狀。因伯氏按節而南也。徵銘於某曰。吾考妣歿已久矣。墓道之石。尙未樹立。今欲勒銘幽墟。第念。吾父不幸早世。無官位履歷。故備敍兩門世系。以爲子孫永慕之地。不忘追遠之情。請爲文記實而詔後。余居止比隣。朝夕從遊。稔知其賢。不敢以不文辭。謹按。公諱某。字某。順興大姓。世襲貂蟬。金紫相望。遠祖諱孚。高麗時。守太師門下侍中。娶禮賓寺同正禹允成女。生宣授中書省左右司郞中,海東儒學提擧,行僉議中贊文成公珦。從祀文廟。娶東宮侍讀學士金祿延女。生門下贊成事順平君于器。娶校書郞崔沖若女。生進賢館大提學順興君文淑公牧。娶中贊金台鉉女。生藝文館大提學文惠公元崇。娶中贊元善之女。生刑曹典書景質公瑗。娶政丞南暉珠女。生通政海州牧使贈禮曹參議從約。娶蓬原君鄭良生女。生檢校漢城尹璟。以五子登科。贈戶曹參判。卽公之曾祖考也。自文成至參議。皆由科第出身。致位宰相。參判娶開國功臣復興君趙胖女。生仁厚。登武科。忠淸道兵馬節度使。贈兵曹判書。公之祖考也。娶進義副尉金義女。生珹。天文習讀。贈議政府左贊成。公之考也。妣之父曰平安道兵馬節度使黃石生。以成化丁酉七月二十二日。生公。公性度寬裕。與物無競。平居謹愼自守。不事生產作業。與人交。信而有義。不苟然諾。至於孝友淳篤。撫諸弟。極其恩愛。雖不資學問。而通敏之才。無適不宜。人皆以遠到期之。勸之仕則曰。人之顯晦有時。不可妄求。年近不惑。始以蔭補忠順衛。階承義副尉。忽遘疾不起。甲戌二月初二日也。葬于白川郡虎山洞先塋之側乾坐巽向之原。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三世贈官。皆以左相公貴也。配趙氏。亦平壤望族。視公秩。贈貞敬夫人。高麗時。有中樞院副使趙瑩。娶侍中李文幹女。生都僉議司事平壤伯仁規。娶司宰卿趙溫呂女。生宣授懷遠大將軍高麗國副元帥,檢校贊成瑞。娶僉議中贊韓康女。生密直提學千祀。娶興寧君金子昌女。生工部典書文信。娶左諫議大夫金漢龍女。生生員瑨。娶判校李贇女。生工曹佐郞乘。娶都摠制,大提學卞季良女。生僉知中樞院事得仁。登文科。娶領中樞大提學安止女。生文川郡守康門。卽夫人之考也。娶判司宰監事禹元老女。以成化甲午十二月二日。生夫人。及笄。擇配歸于公。治內甚嚴。動遵禮法。睦姻䣊遇隣里。下逮婢使。俱得其歡心。敎子以義方。勸課讀書。夜以繼日。左相公與其兄觀察。克承敎戒。攻苦力學。年踰弱冠。同捷辛巳科。經閤諫署。出入回翔。備極榮養。季子瑺。年及志學。兩兄訓督甚勤。夫人輒止之曰。爾等同登大科。已致身雲路。心常悚懼。況望三子之俱顯耶。觀察爲養丐外。又止之曰。我本固窮。但保家業。不願享專城之奉。以招滿溢之災也。丙申六月十五日。無疾而逝。祔葬于議政公之墓。生三男二女。男長瑋。今爲全羅道觀察使。次卽左相公玹。次瑺。榮川郡守。女長適瑞興府使辛輔商。次適忠義衛李元凱。觀察娶贈昌城君成希雍女。左相娶縣監朴文璐女。生三男一女。男曰繼善,光善,宗善。瑺娶化寧副守女。生一男三女。元凱生一男一女。曾孫男女幾人。噫。公有抱負。不試于世。而卒顯於兩胤。左相公淸忠重厚。位極台鼎。翊輔大平。群生繫望。觀察公文武全才。撫綏南服。公孤之擢。不朝卽夕。安氏累世衣冠之盛。至是大振。公雖不霑一命。而高官大爵之贈。終始榮耀。古有脩德於身而食報于後者。今於公見之矣。銘曰。 猗歟安氏。系出順興。趾美聯休。繼繼繩繩。逮公兩世。名位暫虧。珠潛玉韞。有蘊不施。篤生賢哲。允也大成。端委廟堂。濟川和羹。推恩追爵。三代有榮。王家植槐。于氏高門。我究其由。種德源源。瞻彼虎山。佳城鬱鬱。旣安且固。永保終吉。
안위(安瑋, 1491∼1563) : 장남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진(伯珍). 안순필(安順弼)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낸 안현(安玹)의 형이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동생과 함께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벼슬이 올라서 예조좌랑·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539년 사헌부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윤임(尹任)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에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근검절약하며 당시 기근으로 어려워진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고자 구황에 힘써 그 실적이 뛰어났다. 명종이 즉위하여 윤임 일파가 몰려나면서 발탁되어 1554년(명종 9) 청홍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내직으로 옮겨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서 승정원으로 옮겨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하였으며, 1558년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주관하였다. 그뒤 형조참판을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특채되어 이후 오랫동안 국방을 주관하면서 병학(兵學)의 재능을 보였다. 양계(兩界)에 대한 국방을 강화하고자 진보(鎭堡)의 설치를 장려하였고, 남방왜변에도 유의하여 대책을 수립하였다. 그뒤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가, 병사하였다. 사람됨이 근면성실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안현(安玹, 1501∼1560) : 차남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진(仲珍), 호는 설강(雪江). 아버지는 안순필(安舜弼), 어머니는 군수 조강문(趙康門)의 딸이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승정원주서·병조정랑을 거쳐, 1533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이로부터 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민정을 순행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의 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면서 사필(史筆)을 공정히 할 것과 사료보관의 신중성을 주장하였고, 또한 당시의 사치풍조를 엄히 단속하고 경비의 절감을 꾀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하였다. 1541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승지가 되고 중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고생할 때, 승지로서 의약에 밝아 항상 시종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항시 검약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아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났다. 그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을사사화 때는 윤원형(尹元衡) 등에 협조하여 그의 추천으로 1548년(명종 3)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곧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어 의정부우참찬·호조판서를 거쳐 1553년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였는데, 인사청탁을 들어주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계속 승진하여 다음해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서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이어 좌찬성·판돈령부사를 지내고, 윤원형의 추천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판중추부사를 거쳐 1558년에 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하여 형을 마치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여러 차례 당상문신정시(堂上文臣庭試)에서 문명을 떨쳤고, 경연(經筵)에서의 강설은 세밀하고도 분명하였다. 중후하고 단정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일을 맡으면 성심껏 수행하였다. 특히, 의술에 정통하여 내외 의국(醫局)을 관리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안상(安瑺, 1511~1573) : 셋째아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문관출신으로 1561년(명종 16)장악원의 첨정으로 음악행정을 맡았을 당시, 악사 홍선종(洪善終)과 악공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의 도움으로 《금합자보 琴合字譜》(일명 安瑺琴譜)라는 거문고악보의 편찬을 1572년(선조 5)에 완성하였다. 1573년 덕원부사로 일하였다. 합자보(合字譜)·육보(肉譜)·적보(笛譜)·장고보(杖鼓譜)·고보(鼓譜)로 기보된 거문고의 여러 악곡과, 합자보로 기보된 비파보(琵琶譜)를 담은 《금합자보》는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소세양(蘇世讓, 1486∼156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의빈부도사 자파(自坡)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후에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으며,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고,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고, 이해 명종이 즉위한 후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 陽谷集》이 있으며, 글씨는 양주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