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의 결과로 기존 120만 석에 달하던 방대한 영지를 대부분 몰수당하고, 현재의 야마구치현에 해당하는 나가토(長門)·스오(周防) 2개국(약 36만 석)으로 영지가 대폭 축소되었다. 영지가 3분의 1 이하로 줄어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가문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로 태어나, 아버지 다카모토가 급사한 후 가독(가문의 우두머리 자리)을 승계한 테루모토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격렬한 대립을 견뎌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서는 8개국 120만 석을 영유하는 대다이묘(거대 영주)가 되어 오대노(五大老, 정권의 5대 원로) 중 한 사람으로도 임명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총수)을 맡았던 까닭에, 전쟁 후 나가토·스오 2개국(현재의 야마구치현)으로 영지가 대폭 축소(삭감)되었으나,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패전 후의 엄혹한 재정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거점인) 하기에 성(居城)을 쌓았으며, 고심을 거듭한 끝에 가신단을 통제하는 데에도 성공하여 하기번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다.
초상은 머리에 전통 모자인 관(冠)을 쓰고 검은색의 정식 관복(속대, 束帯)을 갖추어 입은 다이묘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손에 홀(笏) 대신 의례용 부채(접부채)를 쥐고 있는데, 이는 무가(武家) 다이묘 초상화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다. 옷자락 뒤편으로 무인의 상징이 칼자루(脇差)가 살짝 들어나 있어 그가 대다이묘이자 무인(武士)이었음을 은연중에 드러고 있다.
종이가 아닌 비단(絹本)에 색을 입힌 채색(견본착색, 絹本着色) 작품으로, 당시 고위층의 초상화에 주로 사용되던 고급 기법이다. 에도 시대(17세기)에 제작된 초상화로, 인물의 이목구비와 수염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도 신체와 의복은 굵고 대담한 선으로 정형화하여 인물의 권위와 안정감을 강조했다.
이 초상화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해 영지가 크게 줄어든 힘든 시기 속에서도, 끝내 하기번의 기틀을 다져낸 ' 가문의 수호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기보다 약간 비껴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빛은 격동의 센고쿠 시대를 버텨낸 노련한 정치가이자 다이묘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첫댓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는 센고쿠 시대의 유명한 지장인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손자이다. 아버지인 다카모토(隆元)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나이에 가문의 우두머리(가독)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 세력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하로 들어갔다.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서 8개국 120만 석을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로 성장했으며, 정권의 최고 권력 기구인 '오대노(五大老)'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1600년 천하를 분점하는 큰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가 발발했다.
이때 모리 테루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는 서군(西軍)의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하면서 가문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된다.
패전의 결과로 기존 120만 석에 달하던 방대한 영지를 대부분 몰수당하고, 현재의 야마구치현에 해당하는 나가토(長門)·스오(周防) 2개국(약 36만 석)으로 영지가 대폭 축소되었다.
영지가 3분의 1 이하로 줄어들어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가문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테루모토는 새로운 거점인 하기(萩)에 성을 쌓고, 고통 분담 속에서 가신단을 결속시키며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 노력이 결실을 보아 훗날 막말(幕末) 유신지사들을 배출하며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는 '하기번(초슈번)'의 탄생 기틀이 마련되었다.
안내문
모리 테루모토 상 (복제품) 1폭
에도시대 (17세기)
견본착색 (비단에 채색)
하기(초슈)번의 기틀을 다진 모리 테루모토(1553~1625)의 초상화이다.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로 태어나, 아버지 다카모토가 급사한 후 가독(가문의 우두머리 자리)을 승계한 테루모토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격렬한 대립을 견뎌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서는 8개국 120만 석을 영유하는 대다이묘(거대 영주)가 되어 오대노(五大老, 정권의 5대 원로) 중 한 사람으로도 임명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총수)을 맡았던 까닭에, 전쟁 후 나가토·스오 2개국(현재의 야마구치현)으로 영지가 대폭 축소(삭감)되었으나,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패전 후의 엄혹한 재정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거점인) 하기에 성(居城)을 쌓았으며, 고심을 거듭한 끝에 가신단을 통제하는 데에도 성공하여 하기번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다.
초상은 머리에 전통 모자인 관(冠)을 쓰고 검은색의 정식 관복(속대, 束帯)을 갖추어 입은 다이묘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손에 홀(笏) 대신 의례용 부채(접부채)를 쥐고 있는데, 이는 무가(武家) 다이묘 초상화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다.
옷자락 뒤편으로 무인의 상징이 칼자루(脇差)가 살짝 들어나 있어 그가 대다이묘이자 무인(武士)이었음을 은연중에 드러고 있다.
종이가 아닌 비단(絹本)에 색을 입힌 채색(견본착색, 絹本着色) 작품으로, 당시 고위층의 초상화에 주로 사용되던 고급 기법이다.
에도 시대(17세기)에 제작된 초상화로, 인물의 이목구비와 수염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도 신체와 의복은 굵고 대담한 선으로 정형화하여 인물의 권위와 안정감을 강조했다.
인물이 앉아 있는 바닥면은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장식 돗자리(성가리, 繧繝縁)로 마감되어 있어, 그의 높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시각적으로 뒷받침한다.
이 초상화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해 영지가 크게 줄어든 힘든 시기 속에서도, 끝내 하기번의 기틀을 다져낸 ' 가문의 수호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기보다 약간 비껴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빛은 격동의 센고쿠 시대를 버텨낸 노련한 정치가이자 다이묘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