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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박 경 리
서(序)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물들인 옷감으로지은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이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 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요놈의 새떼들아!”
극성스럽게 새를 쫓던 할망구는 와삭와삭 풀발이 선 출입옷으로 갈아입고 타작마당에서 굿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추석은 마을의 남녀노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 보다.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 퍼지는 징 소리는 타작마당과 거리가 먼 최 참판 댁 사랑에서는 흐느낌같이 슬프게 들려온다. 농부들은 지금 꽃 달린 고깔을 흔들면서 신명을 내고 괴롭고 한스러운 일상을 잊으며 굿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최 참판 댁에서 섭섭잖게 전곡(돈과 곡식)이 나갔고, 풍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실한 평작임엔 틀림이 없을 것인즉 모처럼 허리끈을 풀어놓고 쌀밥에 식구들은 배를 두드렸을 테니 하루의 근심은 잊을 만했을 것이다.
이날은 수수개비를 꺾어도 아이들은 매를 맞지 않는다. 여러 달 만에 소증(素症:오랫동안 채식을 하여 고기가 먹고 싶어지는 중세) 풀었다고 느긋해 하던 늙은이들은 뒷간 출입이 잦아진다. 힘 좋은 젊은이들은 벌써 읍내에 가고 없었다. 황소 한 마리 끌고 돌아오는 꿈을 꾸며 읍내 씨름판례 몰려간 것이다.
최 참판댁 사랑은 무인지경처럼 적막하다. 햇빛은 맑게 뜰을 비춰 주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 버렸을까. 새로 바른 방문 장지(壯紙:조선종이의 한가지. 두껍고 질기며 질이 썩 좋음)가 낯설다.
한동안 타작마당에서는 굿놀이가 멎은 것 같더니 별안간 경풍 들린 것처럼 꽹과리가 악을 쓴다. 빠르게 드높게, 꽹과리를 따라 징 소리도 빨라진다. 깨깽 깨애갱! 더어웅응음― 깨깽 깨애갱! 더어웅응음―장구와 북이 사이사이에 끼여서 들려온다. 신나는 타악 소리는 푸른 하늘을 빙글빙글 돌게하고 단풍든 나무를 우쭐우쭐 춤추게 한다. 웃지 않아도 초생달 같은 눈의 서금돌이 앞장서서 놀고 있을 것이다. 50 고개를 바라보는 주름살을 잊고 이팔청춘으로 돌아간 듯이, 몸은 늙었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는 그 구성진 목청만은 늙지 않았으니까. 웃기고 울리는 천성의 광대기는 여전히 구경꾼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리. 아직도 구슬픈 가락에 반하여 추파 던지는 과부가 있는지도 모른다.
“쯔쯔…… 저 좋은 목청도 흙 속에서 썩을랑가?”
“서저 서방이 죽으문 자지러지는 상두(‘상여’를 속되게 부르는 말)가 못 들어서 서분을(서운함)기요.”
“할망구 들을라? 들으믄 지랄할 기다.”
"세상에 저리 신이 많으믄서 자게 마누라밖에 없는 줄 아니 그것이 보통 드문 일가?”
“신주 단지를 그리 위하까? 천생연분이지 머.”
“소나아로 태이나 가지고 남으 제집 한 분 모르고 지내는 것도 뱅신은 뱅신이제?’
나이듬 직한 아낙들은 그런 말을 주고받는지 모른다.
목수가 본업이요 섬진강의 강태공인 곰보 홀아비(정확히는 총각) 윤보는
“이 사람들아! 사랑도 품앗이라 안 하더나?.
“머라 카노? 자다 봉창 뚜디리네.”
“타작마당에서만 이럴 기이 앙이라 강가에도 가서 한마당 굴리자!”
“그는 또 와?’
“용왕님네 심사도 풀어 주어야 안 하겄나? 그래야 개기도 풍년이 들제.”
“젯상에도 못 오르는 민물개기가 어디 개기가! 당산(堂山:토지나 부락의 수호신이 있다는 마을 근처의 산이나 언덕)에 가자! 당산에 !”
누군가가 팔팔하게 반대하고 나서며 너희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두만아비는 느릿느릿 징을 칠 것이다. 봉기는 헤죽헤죽 웃으며, 구경하는 아낙들 보고 부끄러워하며 고깔을 흔들 것이다. 이들은 한창 일할 나이, 살림의 기틀을 잡고 있는 30대 중간쯤의 장정들이었고 나이 좀 처지는 축으로는 장구 멘, 하얀 베 수건 어깨에 걸고 싱긋이 웃으며 큰 키를 점잖게 가누어 맴을 도는 이용(李龍)이다. 그는 누구니 누구니 해도 마을에선 제일 풍신(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외모) 좋고 인물 잘난 사나이, 마음의 응어리를 웃음으로 풀며 장단을 치고, 칠성이 북을 더덩덩! 뚜드리면 무같이 미쭉한 영팔이는 욱욱 헛힘을 주어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아낙들은 노인들 아이들 틈새에서 제 남편 노는 꼴을 반쯤은 부끄럽고 반쯤은 자랑스러워 콧물을 홀짝일 것이다. 타작마당에서 한마당 벌이고 나면 시장기가 든 농부들은 강가도 당산도 아닌 마을 길을 누비다가 삽짝 큰집에 밀고 들어 한바탕 지신(地神:지신 밟기는 영남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풍습. 농악대를 앞세우고 집집을 돌며 땅을 다스리는 지신에게 1년 동안의 무사 행복을 빈다)을 밟고 그러고 나면 갈고리 같은 손으로 땀을 닦으며 술과 밥을 먹게 될 것이다.
8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매끄럽지 못하고 깔깔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고 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8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 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 놓고 쓰러진 잔해가 굴러 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 있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檢屍:변사체나 변사의 의심이 있는 시체를 조사하여 범죄에 의한 것인가의 여부를 가리는 일)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 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현악기에 맨 줄)을 건드려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草根木皮:풀뿌리와 나무껍질. 양식이 부족할 때의 험한 음식을 비유하는 말)를 감당 못하고 죽어 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 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 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
“저승에나 가서 잘사는가.”
사람들은 익어 가는 들판의 곡식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판의 익어 가는 곡식은 쓰라린 마음에 못을 박기도 한다. 가난하게 굶주리며 살다 간 사람들 때문에……….“
“이만하몬 묵을 긴데……….“
풍요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쓸쓸하고 가슴 아픈 축제, 한산 세모시 같은 한가위가 지나고 나면 산기슭에서 먼, 먼 지평선까지 텅 비어 버린 들판은 놀을 받고 허무하게 누워 있을 것이다. 마을 뒷산 잡목 숲과 오도마니 홀로 솟은 묏등이 누릿누릿 시들 것이다. 이러고저러고 해서 세운 송덕비며 이끼가 낀 열녀비며 또는 장승(마을이나 절 입구, 또는 길가에 수호신이나 이정표로서 세우는, 기둥과 같은 나무 윗부분에 사람 얼굴 모양올 새긴 상. 아래쪽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을 쓰거나 이수(里數)와 지명 등을 표시했음) 옆에 한두 그루씩 서 있는 백일홍나무에는 물기 잃은 바람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겨울의 긴 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부터 더욱 흐느끼는 듯 꽹과리 소리는 여전히 마을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밤을 지샐 모양이다. 하기는 마을 처녀들의 놀이는 이제부터, 달 뜨기를 기다려 강가 모래밭에서 호작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시작될 것이다.
“진지상 올릴까요.”
방문 앞에 계집종 귀녀가 와서 묻는다. 벌써 두 번이나 물어보는 말이다. 방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등잔에 불을 켜야겠습니다.”
하며 귀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최 참판댁 당주(堂主:현재의 집주인을 가리킴)인 최치수(崔致修)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오래 묵은 한지 같은 저녁 빛깔이 방 안에 밀려들고 있다. 등잔불이 흔들리면서 밝아 온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정말 글을 읽고 있었는지. 최치수 콧날에 금실 같은 한 줄기 불빛이 미끄러진다. 수그러진 그의 콧날이 날카롭다. 이 세상 온갖 신경질과 우수가 감도는 옆모습,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서서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칠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방 안 가득히 맴돈다.
“자리나 깔아.”
“예.”
거들떠보는 것도 아니었건만 귀녀는 눈웃음치며 도토롬한 입술을 오므린다.
병약한 치수로서는 번거로웠던 명절날 집안 행사에 어지간히 시달리어 피곤했던 것 같다.
“저녁은 안 드시겠습니까?’
아랫목에 자리를 깔아놓고 다시 확인하려 했으나 귀녀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방에서 물러난다. 대청을 지나 건너편 방으로 해서 그 방에 잇달린 골방으로 들어간 귀녀는 품속의 면경을 꺼내어 얼굴을 비춰 본다. 치수 방에 들어가기 전에도 이 방에서 면경을 보았었는데. 머리를 쓰다듬고 한 번 더 꺼무꺼무한 자기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 면경을 품속에 넣는다. 뒤뜰로 향해 난 장지문에서는 아직 짧은 빛이 스며들고 있다. 골방 문을 열고 뒤뜰 신돌 위의 신발을 신으려다 말고 귀녀의 눈이 맞은켠으로 쏠린다. 사랑 뒤뜰을 둘러찬 것은 야트막한 탱자나무의 울타리다. 울타리 건너편은 대숲이었고 대숲을 등지고 있는 기와집에 안팎 일을 다 맡는 김서방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울타리와 기와집 사이는 채마밭이다. 그 채마밭을 질러서 머슴 구천이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냉담한 귀녀의 눈이 구천이의 옆모습을 따라가다가 눈길을 거두며 실뱀이 꼬리를 치는 것 같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는다. 귀녀는 신발을 신고 치맛자락을 걷으며 안채를 향해 돌아 나간다.
무 배추를 심은 채마밭이 아슴아슴한 저녁 안개에 싸여 들어가고 있고 부스스한 옷매무새의 김 서방댁이 부엌을 들락거리며 부산을 떨고 있다. 닭장에 들어갈 때가 되었는데 닭들은 배춧잎을 쪼아먹고 있었다.
땅바닥에 눈을 떨구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당산 누각 앞에까지 올라간 구천이는 자신의 발부리를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다시 느릿한 보조로 누각에 올라간 그는 난간을 짚으며 걸터앉는다. 달 뜨기를 기다리는가. 마을엔 아직 불빛이 보이지 않았고 최 참판댁 기둥귀에 내걸어 놓은 육각등이 뿌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달은 솟을 것이다. 낙엽이 날아 내린 별당 연못에, 박이 드러누운 부드러운 초가지붕에, 하얀 가리마 같은 소나무 사이 오솔길에 달이 비칠 것이다. 지상의 삼라만상은 그 청청한 천상의 여인을 환상하고 추적하고 포용하려 하나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달은 영원한 외로움이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검은 명부(冥府:저승)의 길손이다.
구천이는 눈을 반쯤 감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정월 대보름날에는 당산에 달집(음력 정월 보름 달맞이 때, 불을 질러 밝게 하기 위하여 생솔 가지 따위를 묶어 집채처럼 쌓은 무더기)을 지었었다.
“워어이이―달 나왔다아!”
아이들이 달을 향해 소리치면 강아지도 덩달아서 짖어 대었다. 저마다 한 가지씩 소망을 품었을 마을 사람들이 달집 둘레에 모여들면서 불을 질렀었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아낙들은 손을 모아 수없이 절을 했었다. 불빛을 받은 사내들 얼굴은 짙붉게 번들거렸으며 눈은 숯덩이처럼 짙게 빛났었다. 순박하고 경건한 소방의 기원이 끝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장날에 모여든 장꾼처럼 떠들기를 시작했었다. 사내들은 곰방대를 꺼내 들며, 아낙들은 코를 풀고 치맛자락을 걷어 불빛에 윤이 나는 콧등을 닦으며 새삼스럽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친지들의 소식을 물어보고, 씨 받은 암소 얘기며 떡이 설어서 애를 먹었다는 얘기며 노친네 수의(장례 치를 때 시체에 입히는 옷) 걱정이며, 이유고 달집은 불길 속에 무너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불길마저 사그라지면 끝없이 어디까지나 펼쳐진 은빛의 장막, 그 장막 속에서 노니는 그림자 같이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던 것이다. 달이 떠오른다. 강이 굽이쳐 돌아간 산마루에서 달이 얼굴을 내비친다. 까맣게 찢겨진 나뭇잎들의 흔들리는 모양이 뚜렷해지고 빗빗한 나뭇가지는 잿빛, 아니 갈빛을 띠기 시작한다. 꽹과리 징 소리가 먼 곳에서 흐느껴 울고 강가에서 부르는 처녀아이들의 노랫소리는 좀 더 가깝게 들려온다.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켠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사도 땅,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은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뜨는 광경을 지켜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1장. 서희(西姬)
김 서방이 떠들어 댔다.
“해마다 애를 믹이는 사람들은 딱 정해져 있다 말이다!”
“누가 애를 믹이고 싶어서 믹이는 기요.”
“말 마라. 소가 죽었심다. 다리를 뿌라서 일 못했심다. 혼사가 있어 장리빚을 냈심다. 나중에는 무슨 핑계를 댈 기든고?”
그러나 김 서방을 넘보고 있는 상대는
“내가 핑계를 댄다믄 벼락을 맞일 기요. 그런 애맨 소리는 안 하는 기이 좋겼구마.”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이래 가지고는 못해 묵는다 못해 묵어. 양새 낀 나무맨치로 어디 사람이 할 짓이가.”
저마다 이러고저러고 통사정해 오는 작인(作人:‘소작인’의 준말)들을 상대하다 보면 유순한 김 서방도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최 참판댁은 안팎이 시끄러웠다. 늘비하게 이어진 고빙(광)에는 끊임없이 볏섬이 들어갔다. 한편 읍내로 곡식을 실어 내는 바람에 하인들도 지치지만 근력 좋은 마구간의 말과 외양간의 살찐 황소도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행랑은 행랑대로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모여 온 마름(地主를 대리하여 소작지를 관리하는 람)과 작인들이 득실득실 판을 치고 있었으며 그들을 위해 큰 가마솥은 쉴새 없이 밥을 삶아 야만 했다.
“여보시오.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께!”
“들으나마나 뻔하지 머. 축이 난 것만은 틀림이 없인께.”
“아 그러매 하는 말 아니요.”
“만분 해바야 그 말이 그 말이지 머.”
“이런 딱할 데가 있나. 돌 하나라도 들어가는가 싶어서 올빼미겉이 눈
을 크게 뜨고.”
“크게 뜨문 소용 있소? 눈이 봐야 말이지.”
“그래. 그라믄 우리자 거부지기(검불)를 쑤셔 넣었겄소? 축이 날 리가 없
단 말이오!”
담장 밖에서 다투는데 막걸리 사발이나 들이켠 걸걸한 목소리였다.
“봉순아 흐흐흐……흐, 나 여기이 있다아!”
볏섬을 져 나르는 구천의 다리 뒤에 숨어서 살금살금 걸어오던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앙증스럽고 건강해 보이는 아이의 나이는 다섯 살. 장차는 어찌 될지, 현재로서는 최치수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서회는 어머니인 별당아씨를 닮았다고들 했으며 할머니 모습도 있다 했다. 안존(얌전하고 조용한 것)하지 못한 것은 나이 탓이라 하고 기상이 강한 것은 할머니 편의기질이라 했다.(서희의 성격. 앞날을 추리해 볼 수 있는 표현이 세 가지 있다. ① ‘기상이 강한 할머니(윤씨 부인)’ 쪽 기질을 닮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할머니처럼 강력한 리더십으로 최씨 가문을 이끌어 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고 ② ‘앙증스럽고 건강해 보인다’ 는 것은 강인한 심성의 소유자임을 암시하며 ③ ‘최치수의 하나뿐인 혈육 에서는 최씨 집안의 유일한 후손으로서 앞으로 최씨 가문의 운명을 쥐게 될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서희를 찾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봉순이 건너오려 하는데 서희는 맴돌아 구천이 앞으로 달아나며 끼룩끼룩 웃는다.
“넘어지믄 큰일난다 캤는데, 애기씨 !”
봉순이 울상을 지었으나 날갯짓을 배우기 시작한 새 새끼처럼 서희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좀체 봉순이에게 잡히려 하지 않는다. 유록빛에 꽃 자주선을 두른 조그마한 꽃신은 퍽이나 날렵하다.
“애기씨 !”
일꾼들 발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이 광경을 마님한테 들키면 큰일나겠다 하며 조마조마하는 봉순이를 곯려 주려고 서희는 다시 구천이 다리를 방패 삼아 뒤에 숨는다.
“애기씨, 이러심 안 됩니다.”
이번에는 걸음을 멈춘 구천이가 말했다.
“넘어지지 않아!”
깡충 뛰며 구천이의 뺨땀에 젖은 잠방이 뒷자락을 심술꽃게 잡아당긴다.
“이러심 안 됩니다.”
나지막한 소리로 타이른 구천이는 볏섬을 진 채 몸을 돌리며 봉순이에게
“애기씨 뫼시고 별당,”
한참 만에 다시
“별당에 가서 놀아라.”
하고 말을 끝맺었다. 서희는 구천이의 잠방이를 잡고 늘어지며 오도가도 못 하게 방해를 한다.
“애기씨, 가서 사깜(소꿉장난)사입시다.”
꾀듯이 봉순이 손을 잡는데 뿌리치고
“나 여기서 놀 테야.”
“일질에 넘어지십니다.”
구천이의 목소리는 역시 나직했다.
“싫어. 안 갈 테야!”
“마님께서 보시면 꾸중하시지요.”
“나 할머니 무섭지 않다!”
잠방이자락을 겨우 놓아 준 서희는 구천이를 노려보면서 제 주장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으로
“구천이는 바보 덩신! 중놈!”
”욕을 하며 달아난다. 봉순이 그 뒤를 쫓아 뛰어간다. 짧은 저고리 도련 밑에 늘어진 빨강 댕기가 할랑할랑 그네를 뛰더니, 아이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볏섬을 짊어진 채 아이들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구천이는 고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으윽!”
힘주는 소리와 함께 볏은 고방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장골(기운이 세고 큼직하게 생긴 골격의 사람)이 나락 한 섬을 지고 맥을 못 추니 우찌 된 일고.”
들여다 주는 볏섬을 돌이와 함께 맞잡아서 고방에 쌓아 올리던 삼수는 갈고리를 볏섬에 걸며 말했다.
“땀 좀 닦아라.”
이번에는 돌이가 딱해 하며 말한다. 구천이는 지푸라기가 엉겨붙은 잠방이 소매를 끌어당겨 땀을 닦는다. 얼굴빛이 푸르고 눈은 움푹 패어 있었다.
갈고리를 걸어 놓기는 했으나 돌이는 땀 닦는 구천이를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었으므로 삼수는 코를 힝 푼다. 콧물 묻은 손을 옷에 문지르며
“니 그라다가 몸 베릴라?’
땀을 닦다 말고 구천이는 삼수의 입매를 쳐다본다. 삼수는 다시
“무슨 짓을 하는가 우리도 좀 알고 싶구마.”
멀리서 무슨 소리가 나는구나 하듯 서 있던 구천이의 눈이 다음 순간 거칠게 빛났다.
삼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돌이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치기 !”
볏섬을 들어 올린다. 그러고는 날씨 이야기며 부춘서 벼 싣고 온 박 서방의 혹이 금년에는 더 커졌다는 둥 하며 삼수보다 돌이가 무관심한 척하려고 애를 쓴다. 삼수는 곁눈질로 구천이의 기색을 살피면서
“어서 가서 나락 져 오라고. 아무도 해를 잡아매 놓지 안 했인께.”
했다. 등받이로 쓰는 마대를 고방 바닥에서 주워 어깨에 걸치고 구천이는 긴 팔을 늘어뜨리며 돌아서 나간다.
“싫대두, 싫어! 아버지가 싫단 말야.”
서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침모 봉순어미는 옷고름을 여며 주며 달래고 있다. 구천이는 눈을 내리깔며 그들 옆을 지나간다.
“마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으리께 문안드리라고.”
중년으로 접어든 봉순네는 살빛이 희고 좀 비대한 편이었는데 서희는 봉순네 치맛자락을 잡으며
“두만네 집에 강아지 보러 갈 테야.”
“마님께서 아시문 큰일나지요. 꾸중하십니다. 봉순아, 어서 애기씨 뫼시고 사랑에 가거라.”
서희 등을 도닥거리며 봉순네는 딸에게 이른다.
“아버진 싫다는데두, 고홈! 고홈! 하고.”
목을 뽑고 기침하는 치수의 시늉까지 낸다. 봉순네는 웃음을 참는다.
“큰일날 소리, 봉순아, 어서.”
“애기씨, 가입시다.”
봉순이도 싫은지 부스스 말했다.
그라믄 사랑마당에까지 지가 데리다 디리지요.”
봉순네는 병아리를 몰 듯 뒤에서 아이들을 몰아낸다. 서희는 민적민적하면서도 가기는 간다.
“이제 가시지요?”
고개를 끄덕이고 봉순네를 올려다보는 서희 눈에 겁이 잔뜩 실린다.
사랑의 앞뜰에는 햇빛이 화사하게 비치고 있었다. 돌담 용마루 높이만큼 키를 지닌 옥매화, 매초롬한 회색가지를 뻗은 목련, 삼화에 석류나무, 치자나무는 마치 봄날의 햇빛을 받아 노곤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미 순환은 멈추어졌을 것이며 메말라 버린 나뭇잎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잎을 추려 버린 파초 역시 누릿누릿 시들고 있는 것 같았다.
긴장하여 땀이 나는 손을 잡고 마주 보고만 있던 아이들은 결심을 하고 치수가 기거하는 방 앞에까지 간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봉순이
“나으리마님. 애기씨께서 문안 오섰습니다. 마님께서 문안드리라 하시어 오셨습니다.”
몇 번이나 입속으로 굴려 보았던지 줄줄 외듯 나왔다. 방 안에서 밭은 기침 소리가 났다. 기침이 맺은 뒤
“들어오너라.”
음산하게 울리었다.
신돌 위에 작은 신발을 나란히 벗어 놓고 서희는 마루로 올라간다. 서희의 얼굴은 해쓱해져 있었다. 봉순이 열어 주는 방문에서 서희가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금 일어나 마주했는지 치수는 서안(書案:책을 얹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부자리는 반쯤 걷혀져 있었으며 벼룻집의 벼루랑 연적, 붓, 두루마리에 먼지가 뿌떻게 암아 있었다. 문갑 위의 상감청자(자개 장식을 박은무늬를 넣은 청자)향로와 아무렇게나 쌓아 올려놓은 서책 위에도 먼지는 뿌열게 앉아있었다.
“비깥 날씨가 차냐?”
길게 찢어진 눈이 서희를 응시하며 물었다. 서희는 그 말이 귀에 닿지도 않았던 것처럼 붉은 치마를 활짝 펴면서 나붓이 절을 한다.
“요즘에는 아버님 병환에 차도가 있으신지 문안드리옵니다.”
봉순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목청을 가다듬고 외는 투의 억양 없는 소리를 질렀다.
“괜찮다. 서희도 밥 잘 먹고 감기는 안 들었느냐?”
갈기갈기 갈라진 여러 개의 쇠가 서로 부딪칠 때 나는 것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음산했다. 그는 서희의 공포심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풀어 주려는 노력이 없는 싸늘하고 비정한 눈이 서희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서희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만 하면 당장에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질 것처럼 애처롭게 그를 마주 본 채 고개를 저었다. 치수는 웃었다. 그 웃음은 도리어 서희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서희로부터 시선을 돌린 치수는 서안 위에 펼쳐 놓은 책의 갈피를 넘긴다. 허약한 체질에 비하면 뼈마디는 굵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없을 만큼 여위고 창백한 그의 손이 책갈피를 누르면서 눈은 글자를 더듬어 내려간다. 손뿐인가, 뜰 아래 물기 잃은 목련의 앙상한 가지처럼, 그러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비참한 느낌이기보다는 도리어 상대에게 견딜 수 없는, 숨 막혀서 견딜 수 없어 결국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강한 분위기를 그는 내어 뿜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거부하는 눈빛, 눈빛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뼈만 남은 몸 전체가 거부로써 남을 학대하는 분위기의 응결(凝結:엉겨서 맺히는 것)이었다.
일단 방에 들어온 뒤에는 나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은 이상 서희는 일어설 수 없다. 숨소리를 죽이며, 그래서 가냘픈 가슴이 더 뛰고 양어깨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는데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어린것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가.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길상아!”
별안간 귀청을 찢는 것 같은 고함에 서희는 용수철같이 앉은 자리에서 튀었다.
“길상아!”
“예에 !”
대답과 함께 급히 뛰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뜰 아래서
“나으리마님 부르셨습니까.”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방이 왜 이리 차냐!”
“곧 불을 지피겠습니다.”
“내가 지금, 방이 왜 이리 차냐고 묻지 않았느냐!”
푸른 정맥이 이마빼기에서 부풀어 올랐다. 서희의 얼굴이 질린다.
“예, 지금 곧, 곧 불 지피겠습니다.”
“이놈! 방이 왜 이리 차냐고 물었겠다! 고얀 놈!”
“잘못했습니다, 나으리마님.”
소년은 겁을 먹은 소리를 냈으나 매양 당하기 때문인지 길들은 사냥개처럼 뒤쪽으로 달려가서 장작 한아름을 안고 뛰어온다.
“으흐 컥!”
신경질은 심한 기침을 유발했다. 치수는 수건을 꺼내어 입을 막았으나 기침은 멎지 않았다. 눈이 활짝 벌어지면서 붉은 눈알이 불거져 나온다. 기침은 잠시의 틈도 용납치 않고 그에게 달겨든다. 입을 막고 상체를 흔든다.
고독한 모습이었다.
“나, 나, 나가거라.”
질식하는가 싶더니 기침은 맺고 가래가 끓어 분간하기 어려운 목소리로 간신히 치수는 말했다.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왔을 때 서희는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했다.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봉순이는
“애기씨.”
감싸듯이 서희를 안았다. 헛구역질은 딸꾹질로 변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돌았다.
“애기씨.”
치마를 걷어서 봉순이는 서희의 눈물을 닦아준다.
2장. 추적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던 하루 해가 저물었다. 오늘이 고비였던가. 행랑에 묵고 있던 마름들은 해 떨어지기 전에 나귀를 타고 대부분 돌아갔다. 절간의 주방만큼 넓은 최 참판댁 부엌은 한산해졌다. 간조(하루에 두 번 조수가 빠져 수면이 가장 낮아진 상태)의 바닷가처럼 집안은 휑댕그렁했다. 어젯밤만 해도 행랑과 부엌 쪽은 밤늦게까지 붐비었다. 상전의 성미도 성미려니와 가족이 적은 적적한 집안이어서 많은 하인들의 행동거지는 조용하게 길들여져 있었으나 워낙 어수선하여 객식구들이 떠난 뒤에도 밤늦게까지 일은 끝나질 않았다. 겨우 고방 문들이 닫혀지고, 쇠통이 채워지고, 열쇠꾸러미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이리하여 하루 일이 끝난 것이다. 부엌일은 다소 더디었다. 몸살이 난 찬모들는 먼저 방에 들어가고 연이가 혼자서 달그락거리며 뒷설거지를 하더니 한참 후 달그락거리던 소리는 맺고 부엌의 불이 꺼졌다. 다음은 계집종들 방의 불이 꺼졌다. 마지막에 윤씨가 거처하는 안방, 봉순네 방에서 거의 동시에 불이 꺼졌다. 집 안은 쥐죽은 듯 괴괴해졌다. 10월 중순의 달은 한쪽이 조금 이지러져서 뎅그렇게 떠 있었다. 그늘이 짙은 집채 모퉁이마다 무섬증 나는 냉기가 돈다. 행랑 구석진 방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은 종 바우의 앓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그러면 역시 늙어서 꼬부라진 간난 할멈이 남편 곁에서 슬퍼하는 넋두리가 들리곤 했다.
불 꺼진 지 오래된 머슴 방에 불이 켜졌다.
“불은 와 키노.”
누워 었던 돌이 머리를 쳐들며 화난 소리로 물었다.
“담배 한 대 꾸울라고.”
삼수가 대답했다.
“또 나갔나?”
“나갔구마.”
담배 한 대 굽겠다던 삼수는 어중간한 자세로 그냥 앉아 있었다.
“돌아!”
“와.”
“구천이가 어디 가는가 우리 한분 따라가 보까?’
“보나마나 어디 가씨나하고 눈이 맞아 나갔일 긴데 머한다고 싱겁이같
이 따라가노.”
“그렇게만 생각할 기이 아니라고. 아무래도 구천이 지 말마따나 산에 가는 눈친데 산에는 머하로 가는지 모르겄다. 한분 따라가 보자.”
“산신(호랑이)올 만나문 우짤라꼬.”
“호식(호랑이에게 잡아먹힘)으로 태이났다믄 방구석에 앉아 있다고 성하까.”
“잡아묵힐 때는 잡아묵히더라 캐도 내사 내 발로 걸어가서 잡아묵히는 건 싫구마.”
“그라믄 니는 그만두라모. 정상감사도 지 하기 싫으믄 그만이지, 나 혼자가 볼라누만.”
“가리늦기(그렇게늦게) 나가봐야 헛일이다.”
삼수는 방문을 열고 툇마루 밑의 짚세기를 찾아 신는다. 돌이는 벌떡 일어났다.
“못 가라 카믄 가보고 싶은 기이 사람으 심사라. 갔음 벌써 많이 갔을 간데 허탕할 셈 치고.”
“갈라 카믄 등잔불이나 꺼라.”
돌이는 툇마루에 바싹 다가서며 방 안으로 몸을 뻗쳐 불을 불어 끈다.
땅땅한 몸이 이때만은 늘어나는 것 같았다.
“저눔으 늙은이, 자갈을 물리든지 해야겄다. 머 얻어묵을라고 안 죽노.”
“병을 인력으로 하는가.”
돌이 톡 쏘아준다.
그들은 별당의 높은 담을 따라간다. 발소리에 마음을 쓰며 간다. 별당의 사잇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짝에 박힌 쇠붙이가 꺼무꺼무하게 떠 보인다. 고방 앞을 지나 사랑의 뒤뜰로 나온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말뚝을 박아서 만들어진 쪽문은 열려진 채였다.
무슨 까닭이 있는지 요즘 구천이는 한밤이 되기만 하면 당산 숲속을 헤매다 돌아오곤 했다. 어떤 때는 멀리 고소성을 거쳐 신성봉을 넘나들며 아주 깊은 산속까지 다녀오는 일도 있었다. 지리산에서 기어 내려온 산짐승들의 울부짖음이 숲속을 흔드는 그런 험한 골짜기를 미친 듯이 헤매다가 새벽녘에 지쳐서 돌아오는 구천이를, 그러나 머슴방에서는 아무도 그가 산을 쏘다녔다고 생각하질 않았다. 실신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야밤에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산속을 헤매어 다닐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최 참판댁 하인들은 바람이 났을 거라고 생각들 했다. 이웃 마을의 어느 행실 나쁜 과부가 아니면 읍내 근방 어느 양반댁 계집종과 눈이 맞아 만나러 다닐 거라 생각했다.
“간밤에 어디 갔다 왔노.”
하고 물으면
“산에.”
구천이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거짓말한다 싶으면서도
“그러다가 호랭이 밥 될라.”
하면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구천이 니 여시한테 흘린 것 아니가. 큰일났구마, 큰일나아. 뼈도 못 추릴라.”
그 정도로 이야기는 겉돌았지 여자 집에 가지 않았느냐고 다그쳐 물어보지는 못했다.
객인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하인들이 몰려서 새우잠을 자던 그저께 밤, 그날 밤에도 구천이는 나가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것 같더니만 끝내 일어나 앉고야 말았다.
“잠이 와야지…….”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속에 가둔 짐승같이 그는 괴로운 것 같았다.
“무슨 심화가 나서 잠을 못 자노.”
잠든 줄 알았던 수동이 어둠 속에서 물었다.
“심화는…… 무슨 심화…….”
혼자 중얼거렸을 때와는 달리 구천이는 냉랭하게 말했다.
“공연한 생각이지 공연한 생각”
“…….”
“우리네 같은 신세는 그저 일이나 꿍꿍 하고 배 안 곯고 잠이나 자면 그만 아니가.”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 마라. 사람이란 지 분복대로 살아야지 안 그러믄 맹대로 못 산다. 못 살고말고. 될 법이나 한 일이건데? 어서 잠이나 자거라.”
사연을 조금 알고 있는 모양으로 나잇살이나 먹은 수동이 타일렀던 것이다. 구천이는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육신이 쇠약해지는 대신 정신력은 강해 가는지 그의 태도는 전보다 더 가라앉고 걸음걸이는 오히려 확실해 보였으며 핏발 섰던 눈은 맑게 개어져 갔다. 다만 아무도 없는 호젓한 고방 뒤에서, 혹은 우물가에서 경련하는 것 같은 미소를 혼자 띠곤 했다..
3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의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최 참판댁에 괴나라봇짐을 든 남루한 차림의 젊은 사내가 찾아왔다. 스물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는 차림이 누추하고 허기진 것 같았으나 준수한 용모였으며 알맞은 몸집이 어딘지 슬기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저녁 한 상을 대접받은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도 베푸는 음식을 생각 깊은 자세로 천천히 들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던 그는 하룻밤의 잠자리를 청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머슴살이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막일이 몸에 밴 것 같지 않은데 머슴살이를 할라고?”
딱하다는 시늉으로 김 서방은 고개를 저었다.
“몸은 실합니다.”
젊은이는 짤막하게 말했다. 타관 사람을 붙이려 하지 않는 마님 윤씨의 성미도 성미려니와 더 이상 일손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김 서방은 거절하려 했으나 이상스럽게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어딘지 깊은 곳에 영혼의 불길을 밝히고 있는 듯한 젊은이에게 동정 이상의 감정이 움직여 윤씨한테 말을 건네 보았는데 한마디로 거절할 줄 알았던 김 서방은 뜻밖에 그 젊은이를 한번 보자는 분부를 받았다. 윤씨는 젊은이를,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무 소리 없이 눈을 감았다. 젊은이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지 윤씨는 한참 만에 있고 싶으면 있어 보라 하고 젊은이의 이력이나 근본 같은 것은 묻지를 않았다. 그가 바로 지금의 구천이다. 그러니까 구천이는 문서에 있는 종이 아니었으므로(고종31년,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이미 공사노비의 제도를 없이 함으로써 오랜 노예의 멍에로부터 노비들은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끈질기게 내려온 제도가 빚은 기습(풍습)이 일조일석에 없어질 리는 없고, 특히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사실상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어느 곳으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사랑의 최치수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길상에게 남몰래 글을 가르치다가 알려져 버린 일이었다.
그의 학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면서 삼수를 제외한 하인들은 모두 그를 썩 유식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그런 면에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말수가 적은 사내였다. 힘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머리를 써서 일을 하기 때문에 남에게 뒤지지는 않았고 그 자신 머슴의 신분임을 똑똑히 자각하여 책임의 한계를 명백하게 지키어 나갔다.
드물게, 어쩌다가 싱긋이 웃는데 그것이 감정 표시의 전부인 듯, 그러나 미소는 따스하고 다정스러웠으며 때론 천진한 동심이 상기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구천이에게 최 참판댁 계집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내끼리인 동료까지 이상하게 애정 같은 것을 느끼었다. 하인이라는 같은 신분이면서 구천이의 귀한 풍모나 인품이나 유식하다는 점이 자랑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누가 발설을 했는지, 아마 추측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근거가 될 만한 것이라고는 무주 구천동에서 왔다는 구천이의 말뿐이었는데, 그래서 그를 구천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지만, 그 구천동에서 절머슴을 살았느니 구천동 골짜기 어느 암자에서 글공부를 했느니 따위의 뒷공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절머슴도 글공부도 다 부정했으며 다만 성이 김가라는 말 이 내력이나 부모 형제에 관해서 일체 말이 없었다. 주착없고 비위 좋고 신경이 무디면서 남의 열 배 호기심은 강한 김 서방의 마누라가
“고향이 어디고?”
하며 물었을 때 구천이는 싱긋이 웃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서 낳노 말이다.”
김 서방댁이 바짝바짝 다가서며 캐듯 다시 물었었다.
구천이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사람으로 났으믄 그래 안티(태반을 가르킴) 버린 곳이 있을 거 아니가. 안티 버린 곳도 모르나?”
“참 별일일세? 샐인(살인)죄인도 아닐 긴데 와 고향을 숨길꼬?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가배?”
구천이 얼굴에서 미소는 걷혀졌다. 눈에 칼날 같은 것이 번득 섰다. 그 쯤 해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까막까치도 고향이 있는 법인데, 아 그러지 않았던가배? 객리에 가문 내 땅 까마귀만 봐도 반갑더라고, 고향이 어디고?”
하며 다그쳤다.
“그걸 낸들 알겠소!”
구천이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하였다. 그는 입을 헤벌리고 올려다보는 김 서방댁 앞에서 돌아섰다. 우물가로 간 그는 물을 길어 얼굴을 씻는데 목덜미에서 귀뿌리까지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돌이하고 삼수는 채마밭을 질러 누각으로 가는 길에 나섰다.
그림자도 안 뵈는데 어디 가서 찾노. 그만 돌아가자.”
허릿말기(차마나 바지의 허리에 방 둘러 댄 부분)를 추키며 돌이 말했다. 낮에는 햇볕이 포근했었지만 밤 바람은 덜미에 써늘했다. 말라 버린 덤불이 바람에 소리내어 흔들렸다. 사람이나 짐승이 숨어 있기라도 하듯.
“기왕지사 찬바람 씌고 나온 거니께 당산에나 한분 올라가보자.”
삼수는 앞장서 걸었다. 긴 그림자가 앞서서 먼저 간다.
“춥네. 가을도 끝장인가배.”
돌이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가을이 인지 있어?”
“그러기 세월 참 빠르다카이.”
“저, 저, 저기 간다!”
삼수가 낮게 외쳤다. 그새 구천이는 어디를 싸돌아다녔는지, 흰 무명 옷자락을 너풀거리며 누각을 향한 오르막길을 가고 있었다.
“허 참, 정말 산으로 가구마. 산에는 머하러 가는고? 내사 마 한기가 들어서 턱이 덜덜 까불린다.”
삼수는 지껄이는 돌이를 내버려 두고 급히 구천이를 쫓아 달려간다.
돌이도 뒤따라서 달려가기는 한다. 누각 앞에까지 간 구천이는 누각 옆에 좀내려앉은 곳, 그러니까 누각 앞의 펑퍼짐한 공지에서 돌계단 세 층으로 내리막이 된 곳인데 그곳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달빛이 밝아서 선명치 않으나 그곳 초당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늘에 들어가자. 보일라.”
삼수를 따라 그늘진 곳에 몸을 숨기며 돌이는
“나으리가 기신 모양 아니가?”
했다.
“불이 켜져 있구마.”
“아직 몸이 성하시지 않을 긴데 초당에는 머하로 올라오싰을꼬?”
“언제 그 양반이 하고 싶은 대로 안 하는 일이 있었으까?’
구천이의 동태를 지켜보면서 삼수는 시큰둥하게 되었다. 초당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구천이는 이켠에서 옆모습으로 보였다. 옷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는데 구천이의 몸뚱어리는 돌부처가 되었는가 끄떡도 않는 것같이 느껴졌다.
“우짤라꼬 저기 서 있는고? 내사 영문 모리겄네.”
“소리가 크다.”
삼수는 팔꿈치로 돌이를 쥐어박았다. 구천이는 목을 이켠으로 돌렸다.
“들킸나?”
“아가리 좀 다물고 있거라!”
천천히 물러난 구천이는 누각 정면에 가서 층계 한가운데 이쪽을 향해 우뚝 섰다. 달빛을 바로 받은 구천이의 얼굴은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도 은색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하게 보였다. 누각의 현판을 등지고, 양 켠으로 치올라간 처마끝, 그 중심에 있는 구천이의 입상(立像)은 누각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하나의 지주(支柱)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다음 순간 구천이는 몸을 날렸다. 삼수는
“따라가 보자, 간다!”
흰옷은 당산숲을 향해 움직여 갔다. 바람이 찬 데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지 돌이는 덜덜 떨었다.
숲 속으로 접어든 구천이의 걸음은 빨라졌다. 바람을 탄 솔잎들이 넋들린 것같이 소리를 냈다. 그늘과 빛이 요란하게 움직이며 스쳐 간다. 술렁거리는산의 기척 사이사이로 부엉이 울음이 끊겼다가 이어진다.
“무작정 이리 가믄 우짤 것꼬.”
숨을 헐떡이며 돌이 물었다.
뒤쫓던 삼수의 걸음이 멎었다. 나무가 엉성한 곳이었다. 개울을 건너뛰어 바위 위로 구천이 쫓아 올라갔다. 물소리는 간지럽게 들린다. 삼수는 돌이를 끌고 둥치가 큰 참나무 뒤에 몸을 붙인다. 눈앞에 마른 덤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덤불 사이에서 바위에 앉은 구천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누각에서처럼 구천이는 나무 뒤에 숨은 두 사내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숲 속에는 가려 주는 것들이 많아 거리가 가까웠지만 들킬 위험은 오히려 적었고 얼굴은 한층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폭 파인 눈의 깊이까지 보일 것만 같았다.
이제는 부엉이 울음이 끊기지 않고 말할 수 없는 적막 속에 계속되고 있었다. 바람이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부엉이는 무척 가까운 곳에 있나보다.
구천이의 고개가 아래로 꺾이어졌다. 두 팔을 뻗어 바위를 짚는다. 참으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으으으흐흐……흐……흑!”
울음소리였다. 심장을 찢어 내는 것 같은 울음소리였다. 세상에 사나이가 저리 울 수 있는지.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구천이의 통곡은 참나무 뒤에 숨은 두 사나이를 망연자실케 했다. 그들은 전율을 느꼈다.
사방을 둘러싼 시커먼 산봉우리 중천에 뜬 달은 얼음조각같이 싸늘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갔을까. 울음이 뚝 끊기고 흰 옷자락이 그들 눈앞에 알른하고 지나갔을 때 넋을 잃었던 두 사나이는 제정신을 찾았다. 구천이는 미친 듯 산길을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삼수, 돌이 뒤쫓는다.
‘이거 도깨비한테 흘린 것 아니가? 내가 꿈을 꾸는가.’
무조건 뛰는 돌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지나갔다. 구천이는 날 듯 달리고 있었다. 산길은 끊어지고, 길 아닌 길을 달리면서 방해가 되는 나뭇가지를 우지끈우지끈 꺾으며, 그래도 힘이 남아나서 천 길 낭떠러지에라도 뛰어내릴것 같은 기세로, 구천이는 완전히 무엇에 들린 사람 같았다.
“허흑! 허흑! 아이고 허흑 헉! 숨차 죽겄다!”
이미 그들 시야에서 구천이의 모습은 빠져나가고 없었다. 허둥거렸으나 방향조차 잡올 수 없게 되었다.
“제기럴!”
“허허, 기막힐 노릇이네. 세상에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야, 날아갔지 걸어갔다 할 수 있나.”
땅바닥에 주질러 앉아 가쁜 숨을 쉬며 돌이는 감탄해 마지않는다.
“빌어묵을 자식, 니 Eoa에 놓쳤다! 따라옴서 내내 방정을 떨더마는.”
혀를 두들기며 삼수는 화를 낸다.
“장사 났네 장사 났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을꼬? 보기는 깔락깔락해서 힘쓸 것 같지 않더니만.”
화를 내거나 말거나 돌이는 감동해서 지껄였다. 멀리서 여우 우는 소리가 났다.
“할 수 없다! 내리가자!”
"숨 좀 돌리고.”
“네놈 Eoa에 놓쳤다! 도모지 발길에 걸거적거리서 뛸 수가 있나. 돼지 같이 살이 쩌 가지고 이놈아? 제발 배때기 좀 줄이라! 제에기 !”
삼수는 오던 길을 행하니 되돌아간다.
“지랄하네. 이봐라! 혼자 가나! 같이 가자!”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돌이 뒤쫓아 간다. 누각까지 왔을 때
“아무래도, 아무래도…….”
삼수는 고개를 저었다.
“한이 많은 기다.”
“한?”
업신여기듯 되물었다.
“골수에 맺힌 한이 없고서야 사내자식이 그리 울 수 있겄나?”
“우는 거사 머 그렇다 하고, 구천이 그놈, 아무래도 동학당 이…….”
“생사람 잡지 마라!”
돌이는 언성을 높였다.
“도망쳐 댕기 본 놈 아slams 그리 산을 잘 탈 수 없을 긴데?’
“절머슴 살았다 칸께 산이사 잘 타겄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그런 말이 사람 때리잡는 기라.”
“동학당이믄 어떻노? 윤보도 동학당 했는데. 다 생각는 일이 있인께, 아마 내 생각이 틀림없을 거로?”
“틀림이 없어? 머 가지고 그리 도장을 찍노.”
“이상 안 하나? 와 구천이는 지 근본을 말 안 하노.”
3장. 골짜기의 초롱불
읍내에 가까운 화심리에서 세상을 등지고 사는 장암선생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는 기별을 받은 최치수는 반나절이 조금 지났을 무렵 수동이를 거느리고 집을 나섰다. 근 반 년 만에 처음 나들이였다. 몸이 완쾌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암선생은 최치수가 다만 한 사람 존경하는 스승이었으므로 몸에 무리하다는 것쯤 헤아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날씨는 꽤 쌀쌀하였다. 섬진강을 건너서 불어온 바람은 잡목 숲을 흔들어 놓고 지나간다. 평사리에서 강을 따라 30리가 넘는 읍내 길을 달구지가 가고 나무꾼이 간다. 나무꾼과 농부는 뒤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인사를 했다. 쏘는 듯한 치수의 그 눈을 어물어물 피하면서.
강 위에는 화개장을 향해 장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우중충하게 짙푸른 강물에 하늘이 나직이 내려오고 투박한 갯빛 구름은 약한 빛을 던져 주는 해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흰 도포자락을 나부끼며, 전(테두리)이 넓은 갓의 갓끈을 나부끼며 말에 흔들리는 최치수의 모습이 마을을 벗어나 두 마장이나 갔을까? 이 무렵 최참판댁에서는 윤씨가 침모 봉순네를 불렀다.
저고리 섶에 바늘을 꽂으며
“부르섰습니까.”
방문 앞에서 봉순네는 허리를 굽힌다.
“서희는 어디 있느냐? 、
“아씨 곁에 기시는 갑십니다.”
한참 말이 없다가
“서희를 어디 데리고 나갔으면 좋겠는데…….”
“예?’
“별당에서 데리고 나갔으면 좋겠는데…….”
허리를 굽히고 있는 봉순네 낯빛이 변한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어?’
“예. 날씨가 차서, 감기라도 드시문…….”
옷섶에 꽂은 바늘을 뽑아 얹은머리에 옮겨 꽂는데 봉순네 손이 부들부들 떤다.
“감기쯤…… 그러면 봉순이를 불러서 서희를 사랑에 데려가게 하여라. 별당에 들여보내서는 안 되느니라.”
“예.”
물러난 봉순네는 봉순이를 찾는다기보다 발이 제자리에 놓이질 않아서 허둥대는 것 같았다. 머리에 꽂은 바늘을 옷짚으로 옮기고 가슴 밑에 처지는 치맛말기를 끌어 올리고 하며 침착을 잃은 그는 집 밖에 나가 봉순이를 부르다가 되돌아온다.
“큰일났고나. 일이사 언제 벌어져도 벌어질 기다마는 사대부댁에서 이 무슨 변인고? 사주는 속이도 팔자는 못 속인다 카더니 부치(부처)가 까꾸로 섰지, 까꾸로, 어이 불쌍해라. 그 나이가 아깝다!”
미음 그릇을 받쳐 들고 오던 삼월이가 시부렁거리는 봉순네를 보았다.
“멋을 혼자서 시부리고 있소?”
“내가 멋을 시부맀다고?”
“혼자 중얼중얼하더마는.”
“간난 할매는 어떻노?”
“간난 할매사 괜찮겼소만 바우 할배가 큰일이네요. 이자는 사람도 못 알아보고, 미음을 떠 넣어도 보굴보굴 궤내어 버리네요.”
“노뱅인께. 우리 봉순이 못 보았나?”
“못 봤소. 무슨 일이 있소? 얼굴이 쌍글하요.”
“무슨일.”
하다가 봉순네는 간다 온다 말없이 헛간 쪽으로 행하니 가 버린다.
복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봉순이 못 보았나?”
“못 봤소.”
헉! 하고 장작을 찍고 나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구천이는 어디 갔노?”
갈라진 장작을 집어던지려다 말고 복이는 고개를 비틀 듯하며 긴장한 눈초리로 봉순네를 돌아본다. 헛간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던 돌이 움찔하며 얼굴을 내밀고 봉순네를 쳐다본다. 세 사람 사이에는 꽤 긴 침묵이 흘렀다. 침묵하는 동안 그들 얼굴에는 다 같이 동정과 할 수 없다는 체념의 빛이 돌았다.
“구천이도 어디 갔는지 내사 모르겼구마요. 퉤!”
복이는 손바닥에 침을 뱉고 도끼를 고쳐 들었다.
“제엔장! 까마귀 떼가 와 저리 지랄을 하노!”
헛간 속으로 얼굴을 접어넣으며 돌이 내뱉었다.
“날이 궃을라 카누마.”
복이 대꾸했다. 잿빛 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에 갈가마귀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외양간에서 황소의 여물 씹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온다.
“이 가찌나가 어디 갔노.”
봉순네가 별당 쪽으로 걸어간다.
“옴마!”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봉순이가 뒤에서 뛰어온다.
“와 날 찾노? 응? 복이가 찾는다고 가 보라 카대.”
“어디 갔더노?”
“뒷집에, 김 서방댁이 오라 캐서.”
“너 봉순아, 이리 오니라.”
아이의 팔을 덥석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간다.
“멋꼬?”
긴장한 어미 얼굴을 본 봉순이 겁을 먹으면서 잡힌 팔을 뿌리친다.
“나 김 서방댁에 안 가께 다시는 안가께.”
지레 빈다.
“애기씨 어디 기시노 별당에 기시제?”
표정과는 무관한 말에 봉순이 어리둥절한다.
“아까 별당아씨 옆에 기싰는데.”
“가서 뫼시고 나오니라.”
“와.”
안심하고 되묻는다.
“사랑에 가서 놀아야한다.”
“나으리께서 벼락 내리시믄 우짤라꼬.”
“안기시다 애기씨 뫼시고 어 가거라”
“안 기시어?”
“사랑골방에 가서 사깜 살고 놀아.”
“그라믄 가께.”
“그런데 말이다? 옴마가 오니라 할 때까지 오믄 안 된다. 알겄제?”
“와 그래야 하노.”
“시키는 대로하믄 된다.”
“얘기씨가 가자고 울믄 우짜꼬?”
‘음…… 그래도 안 되지. 별당에…… 별당에 말이다. 으음음, 그, 그래 별당 연못에 구렁이가 있어서, 그거 잡을라카거든.”
말을 꾸며 대다가
“내 말 알아들었나!”
봉순네는 버럭 역정을 냈다.
방으로 돌아온 봉순네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일이 손에 잡히야제…….”
팔짱을 풀고 인두로 화롯불을 쑤신다.
밖에서는 삼월이 김 서방을 찾고 있었다. 화롯불을 쑤시다가 인두로 도닥거려 놓고 봉순네는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어릴 적의 일이었다. 운봉에 살았을 때 본 일을, 40이 다 된 지금까지 봉순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보리가 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이 뒷산으로 몰려가기에 봉순네도 따라갔었는데 구경거리는 염 진사댁 종의 시체였다. 거적을 씌워서 보이지 않았으나 거적은 피에 젖어 있었고 땅바닥에도 선지피가 흥건히 괴어 있었다.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디민 봉순네 눈에 거적 귀퉁이에서 불거진 송장의 발이 보였다. 짚세기를 신은 큰 발이었다. 피 묻은 거적에 쉬파리가 닝닝거리고 있었다. 무슨 죄를 졌는지 맞아 죽었다고 했다. 푸르탱탱하고 큰 그 발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맛이 떨어진다.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면서 봉순네는 그 큰 발의 환상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어 댄다.
“마님 부르샀습니까.”
윤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예, 예, 하고 대답하는 김 서방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한참 후 허둥거리는 김 서방의 발소리가 봉순네 방 앞을 지나갔다. 행랑 쪽이 술렁거렸다. 오랫동안 술렁거렸다. 고방 문이 닫히고 쇠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난 뒤 담장 안에 담장이 있고 또 마당이 있는 크고 넓은 집 안에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빙 둘러썼다.
별당 담장 밖에까지 달래어 데리고 나오기는 했는데 서희는 여느 때와 달리 시무룩하더니 별당에 도로 가서 소꼽질을 하자고 졸랐다.
“나으리는 안 기시요. 안 기시다고 아까 말 안 했습니까.”
“거짓말!”
“아입니다. 울 옴마가 그캤십니다.”
소꿈 광주리를 든 봉순이하고 서희가 옥신각신하는데
“봉순아,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아이 둘이 동시에 돌아본다. 윤씨의 가라앉은 눈이 서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 키였다. 상체는 곧았으며 양 어깨의 뼈대가 무명 겹저고리 밑에서 솟은 듯했다. 55세의 나이보다 겉늙은 것 같았으나 긴 눈매가 아름다웠다. 여자답기보다 선비 같은 모습이다.
“어서 사랑에 가서 놀아라.”
아이들은 예! 대답하고 두말 없이 손목을 잡으며 띈다. 사랑의 뒤뜰로 나가서 아이들은 골방으로 들어갔다.
“봉순아, 방 따시나!”
밖에서 길상이 소리지르며 물었다.
“따시다!”
봉순이도 소리질러 대답했다.
화심리에서 하루 묵고 오리라 했으나 언제 어떻게 변경이 될지 모르는 일이어서 최치수 방에 군불을 지피고 있던 길상은 아이들이 소꼽 광주리를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길상이 오동나무를 깎아서 만들어 준 살림살이를 광주리 속에서 꺼내어 차리고 있는 동안 길상이 소꼽 양식을 얻어 왔다. 분명 무슨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을 터인데 길상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밤은 굽어다 다오.”
봉순이는 안방마님같이 의젓한 투로 길상에게 명령한다.
“그래라.”
길상이는 밤이 든 함지박을 가지고 아궁이 쪽으로 갔다. 바가지 속에든 잣이랑 대추, 꽂감을 꺼내어 장도로 잘게 썰어서 봉순이는 음식상을 차리는데 서희는 오종종한 꼴을 하고 구경만 하고 있다. 이 아이에게만은 어떤 불안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봉순아, 어머니한테 가자.”
하고 조른다.
“안 됩니다. 연못에 이만한 구렁이가.”
일손을 멈추고 봉순이는 팔을 벌리며 구렁이의 크기를 설명한다. 서희는 잠자코 있었다. 아버지는 싫고 무서웠고, 할머니는 싫지 않지만 무서웠고,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구렁인가 보다. 길상이는 장작불이 타는 아궁이 앞에서 함지박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주머니칼로 밤눈을 따고 있었다.
“객구(客鬼: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혼)부터 물리겼소. 애기씨는 아야 아야 하고 누워 기시오.”
봉순이는 서희를 모로 뉘고 나서 바가지를 들고, 장도를 휘두르며 ‘정주구신도 아니고, 부리제석도 아니고, 가다 오다 배고파 죽은 구신아! 다섯 살 묵은 최씨 방성한테 눈을 거들떠봤거든 함박에 밥 받고 쪽박에 짠물 받아 가지고 썩 물러가라! 어허! 썩 ! 물러 안 기는 날이은 장내 국내도 못 맡는 대동강에다 무쇠가마 씌우고 띄울 것이니…….”
밖에서, 그러니까 골방 왼편 벽 쪽인 듯하다.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물론 방에서는 봉순이 떠드는 바람에 아이들 귀에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이 터졌다.”
흥분을 나타내는 일이 없는 나직하고 부드러운 귀녀의 목소리였다.
“머가 터졌다 말고.”
뾰로통한 삼월이의 반문이다.
“구천이를 도장에 가두었거든.”
“…….”
“어떻노. 삼월이 니 마음이? 고소하나? 씨원하나? 아slams 가슴이 아프 나?’
“신둥껑둥 그 말투가 멋꼬? 어디서 경사났나?’
"경사라 칼 수는 없지만 니 마음이 어떨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 아니가.”
“흥 고맙고나. 파리가 말꼬리에 붙어서 천 리 간다 하기는 하더라마는 마음보 고치라, 고쳐.”
“귀도 안 먹었는데 말귀 못 알아듣겄다. 머라 겠노.”
“칭찬할 일은 아니다마는 남은 죽고 살고 사생결단이 날 판인데 니는 와 그리 좋노? 함박같이 벌어진 입, 그놈의 입 찢어질라.”
“흥!”
객귀 물린다고 방바닥에 쏟아 놓은 잣이랑 대추를 봉순이 주워 담는다.
“애기씨, 이제는 머리 안 아프지요? 구신이 달아났소.”
서희는 선하품을 하며 또다시 별당에 가자고 졸랐다. 봉순이는 구렁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믄 지 눈에도 눈물 날 일이 생기는 법이니, 내가 다 알지. 니가 구천이를 꾀어서 이씨하고 면대 안 시켰나. 아씨 위하는 척하믄서 말이다.”
“벼락 맞을 소리 !”
“말 마라. 그래 놓고 마님한테 일러바치는 거는 무신 심본고?’
“사람 잡네, 사람 잡아. 내가 일러바칠 것도 없이 마님께서는 해경같이 환하게 다 알고 기시더라. 그뿐인 줄 아나? 삼수가 먼지 알고서 동네방네 소문 내고 댕갔는데 내가 이르고 자시고 할 것 머 있노.”
장작이 타는 아궁이 앞에서 길상이는 부지갱이로 불 속의 밤을 뒤적이고 있었다.
“삼월이 니 썰개가 있나?”
“빌리도라 안 할 기니 걱정 마라.”
“설마 소나무 죽은 구신은 아니겄지? 구천이 땜에 잠도 못 자고 속을 태우더마는 이 마작(이쯤)해서 그 사람들 편역을 들어?”
“내 걱정은 마라 안 카나. 남이사 속이 타든 말든 와 니 등이 타노 말이다. 병 주고 약 주고, 네넘 심보 누가 몰라서.”
“내사 아무것도 모르구만. 맥이나 묵고 구갱이나 하고…… 본시부터 잠충이가 돼서 해만 지문 업어가도 모르누만.”
“그렇기도 하겼다. 커다란 올빼미눈깔, 그건 밤에만 보인다 카더라.”
골방 밖의 대화도 맹랑하지만 골방 안의 풍경도 맹랑하다.
“배고파 죽은 혼신아! 손님에 죽은 혼신아! 임병(염병:梁病의 사투리. 전염하는 병. 특히 장티푸스의 속칭. ‘엠병’ 이라고도 함)에 죽은 혼신아! 괴정에 죽은 혼신아! 칼 맞아 죽은 혼신아! 목매어 죽은 혼신아! 가다 오다 죽은 혼신아!”
거리굿이라 하며 음식을 차려 놓고 수없이 혼신을 불러 대는 봉순이, 정말 영신이 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낭랑한 목소리며, 흥분에 번쩍번쩍 빛나는 눈이며, 손짓 몸짓이 단순한 아이들 소꼽놀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너무 진박하여 처연(凄然:외롭고 쓸쓸하고 구슬퍼서)한 귀기마저 느끼게 한다.
봉순이의 이런 장난은 어미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무당놀이뿐만 아니라 광대놀음도 혀를 내두를 만큼. 봉순이는 서희보다 두 살 위인 일곱 살이다. 가널가널하게 생긴 모습이나 성미도 안존한 편인데 어떤 내부의 소리가 있었던지 광대놀음, 무당놀음이라면 들린 것 같은, 한 번 들은 것이면 총기 있게 외는 것도 그러려니와 목소리도 매우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것은 숙명적인 천부의 자질인 성싶고 슬픈 여정의 약속인 듯도 하다.
“이년아! 사당 될라고 이러나! 무당 될라고 이러나!”
봉순네가 머리를 쥐어박고 등을 치면
“와 그라노. 그것도 한 가지 재준데 아아를 와 때리노.”
하며 김 서방댁은 언제나 역성을 들고 나왔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면
“어데 우리 봉순이 노래 한 판 안 할라나? 우리 명창 소리 한분 들어보자.”
추켜 주는데 그러면 봉순이는 반짝반쩍 눈을 빛내고
“몹쓸 년의 팔자로다. 이팔청춘 젊은것이 님 이별이 웬일이냐아.”
목청을 뽑았다. 이럴 때 어미에게 들키면
“다 늙어 감서 철부지 아아하고 장단이 잘 맞소. 이년아! 용천지랄 그만 못하겼나.”
봉순이는 매도 맞고 야단도 듣는다.
지금도 봉순이는 연신 선하품을 하는 서희를 뒷전으로 하고 제 넉살에 도취되어
“오구님(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관할하는 귀신)아 본을 받자 오구님아 앉절 받자 오구님아 기 어디가 본일런고.”
하고 있는데
“또 지랄하네. 니 그러다가 정말 무당 되겄다.”
밤을 구워 온 길상이 나무란다. 봉순이는 뚝 그치며
“니 울 옴마한테 일러 주믄 직일 기다.”
“일러 줄란다. 와.”
봉순이는 함지박을 들여다보며
“밤을 다 까 왔고나. 와 갔노.”
“묵기 좋으라고.”
“싫어!”
마침 짜증 부릴 일이 생겼다 싶었는지 서희가 돼 소리를 질렀다.
길상이 의아해 하며
“왜 그럽니까, 애기씨.”
“껍질 왜 벗겼어!”
“손버리실까하고.”
“더러워. 난 싫어. 안 먹을 테야!”
“깨끗이 했는데.”
“길상이 손이 더럽단 말이야!”
두 손을 펴 보면서 길상이는
“안 더러운데…….”
낭패한 듯 슬픈 듯 눈을 들어 서희를 쳐다본다.
“애기씨, 그러시문 이제 길상이가 업어 드리지 않을랍니다.”
“그럼 내가 때려 주지. 이놈! 종아리 걷어, 하구 말이야.”
서희는 졸음도 오고 찌증도 나는 눈으로 길상이를 노려본다.
“잘못했십니다. 또 얻어 가지고 굽어 오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따스한 아랫목에서 잠이 들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밤을 구워 오겠다던 길상이는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아이들을 찾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봉순네가 방에 들어와 아이들이 깨지 않게 살그머니 이불자락을 덮어 주고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삼경이 넘었을 때 최 참판댁에 초상이 났다. 바우 힐아범이 죽은 것이다.
“제기럴! 새는 날에 송장 무더기 나겄다.”
삼수가 내뱉었다. 그러나 초상이 나서 집 안에 불이 온통 켜졌을 무렵 고소성 골짜기를 지나가는 초롱불이 있었다.
(이하 줄임)
1969년 (현대문학)
박 경 리
1926년 경상남도통영에서 출생하다.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다.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과 〈혹흑백백〉을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다. 1957년 〈전도〉, 〈불신 시대〉, 〈암흑 시대〉 등의 역작을 발표하다. 〈불신 시대〉로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하다. 1959년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인을 그린 장편 〈표류도〉를 발표하여 ‘내성문학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장편소설 집필에 주력하다. 1969년~1989년 대하 역사소설 〈토지〉를 쓰다. 〈시장과 전장〉으로 ‘한국여류문학상’올, 〈토지〉로 ‘월탄문학상’을 받다. 1988년 〈토지〉 전4부가 완간되다.
미리보기
〈토지〉는 모두 5부 16권으로 되어 있는 대하소설이다. 작가 박경리가 25년 동안혼신의 힘으로 집필한, 한국 현대문학 100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소설로 손꼽히는 위대한 작품이다. 구한말에서 8 ·15까지 경남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4대에 걸친 비극을 다루고 있는, 그야말로 이 시기 한국의 개인사 · 가족사 · 생활사 · 풍속사 · 역사 · 사회사 등을 모두 수용하고 있는 종합소설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지〉 제1부, 2부에는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다루고 있다. 한일합병과 같은 국권 상실, 봉건 가부장 체제와 신분 질서의 붕괴, 농업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의 전환 등이 작품의 밑그림이 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제1부(1897년~1908년)는 평사리, 2부는 용정으로 국한되다시피 하던 소설의 공간 배경이 제3부, 4부에서는 서울 · 부산 · 진주 · 평사리, 그리고 외국 땅 간도 일대와 일본까지 확대된다. 여기에 민족주의 · 공산주의 · 무정부주의 등 독립운동의 여러 노선이 등장하며, 당대 지식인들이 시국에 대처하는 사상적 경향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시도된다. 이런 가운데 제1부, 2부의 주역들은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난다. 용이와 그의 아내 임이네는 병으로 죽고 기생으로 전락한 끝에 이상현의 씨를 낳고 아편중독자가 되고 만 봉순(기화)은 서희의 보호와 정석의 애끓는 사랑을 뿌리치고 끝내 투신 자살한다. 동학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려던 김환(구천이)도 고문 끝에 스스로 목숨을끊고, 용정 공 노인의 부인과 조준구의 부인 홍씨도 세상을 뜬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제3부, 4부에서는 이들의 후손들이 점차 주역으로 등장한다. 즉 서희의 두 아들 윤국과 환국, 용이의 아들 홍이, 조준구의 아들 꼽추 병수 등이 그들이다. 이와 함께 3, 4부에 오면 새로운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대부분 지식인으로, 작가는 이들을 통해 희망 없는 식민지 상황의 암울함을 표현한다. 임 역관의 딸 명빈과 명희, 귀족 계층의 조용하,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가 서의돈, 극작가 권오송, 성악가 홍성숙, 조선을 동정하는 일본인 오가다, 유인실, 강선혜, 황태수 등이 이 부류이다.
〈토지〉 제3부, 4부는 1, 2부와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시대 · 배경 .
중심 인물이 대거 바뀐다. 시간적 배경인 1920년대~1930년대의 한국사회의 격변이 이야기의 주요한 중심축이 되고 있다. 특히 3 ·1운동이 실패하고 일제의 총독 정치가 가혹해지기 시작한 때의 식민지 상황이 암울한 분위기로 인물들을 무겁게 누르는 것이 느껴진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은 제대로 발붙이고 살 정착지가 없어 자연히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공간적 배경의 무대가 여러 곳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토지〉 제5부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파국으로 치닫는 1940년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8·15 해방까지 다루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송관수의 죽음,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 단체의 해체, 길상의 관음 탱화 완성, 오가다와 유인실의 해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예비 검속에 의한 길상의 구속과 양현, 영광, 윤국의 어긋난 사랑 등이 이어지면서 대하역사소설 〈토지〉는 거대한 마침표를 향하여 숨가쁘게 이어진다.
<구조분석>
· 갈래 : 대하소설. 가족사소설.
· 주제 : 한국근대사의 인물들이 겪는 식민지적 고통과 운명을 통한, 끈질긴 생명력과 한.
· 배경 : 시간은 조선왕조 말 (1887년)부터 해방(1945년) 직후까지 공간은 경상남도 하동 군평사리 일대와 만주 간도 지방.
·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등장인물>
· 최서희 : 이 작품의 주요공. 가문을 이어 가는 굳은 의지의 여인. 최치수와 별당아씨의 외동딸이자 윤씨 부인의 손녀딸. 조춘구에게 재산을 빼앗겼으나 간도에서 모은 돈으로 빼앗긴 토지를 회수하고 감누 의 재건과 복수에 성공한다.
· 김길상 : 하인 출신므로 서희와 결혼하는 독립 운동가. 서희에 대한 동정 과 연모의 정을 품고 최 참판댁 몰락 과정에서 서희를 끝까지 보호한다. 간도로 함께 이주하여 서희가 부를 축적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 구천이 : 최 참판댁 머슴. 출생의 비밀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인물. 나중에 동학당의 일원이 된다.
· 최치수 : 최 참판댁의 당주. 병약하고 냉소적이며 신경질적이다. 부인인 별 당아씨가 구천이와 도망하자 더욱 폐쇄적인 생활을 한다.
· 봉순이 : 침모 봉순네 딸. 길상을 사모하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기생이 되는 비련의 여인.
· 조준구 : 최치수의 이종형으로 최 참판댁의 재물을 가로채는 욕심 많은 인 물.
· 이상현 : 서희와의 사랑에 실패하여 방황하는 지식인.
· 윤씨 부인 : 최 참판댁의 안주인. 동학당의 우두머리인 김개주에게 강제로 겁탈당하여 구천이를 낳는다.
· 별당아씨 : 최치수의 부인이자 서희의 생모 냉소적인 남편과 시어머니 때 문에 집안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하인 구천이와 사랑에 빠지 게 된다.
· 귀녀 : 최 참판댁 하녀. 최치수를 살해하는 음모를 꾸민다.
<소설의 무대>
<토지〉의 무대는 평사리(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구례를 지나 섬진강이 하동 포구로 흘러들기 바로 전 강의 북동쪽에 펼쳐진 악양들은 내다보며 자리 잡은 마을이다. 악양들은 김제 · 만경 평야 같은 광활함은 없지만 그래도 지리산 자락에 이 같은 평야지대가 있다는 것은 신기하다. 이 평사리가 무대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1960년대 어느 날 화개에 사는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작가는 악양들을 보게 되었으며 그때 구상하고 있던 장편소설 〈토지〉의 이미지와 맞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평사리를 직접 답사하지는 않았다. 소설 속의 마을 구조와 실제의 평사리가 같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악양들의 문전옥답과는 달리 지리산 쪽으로 들어가면 유난히 돌이 흔하다. 집 담들이 거의 돌로 되어 있음은 물론 마을 뒤편의 다락논 역시 돌을 쌓아 논둑을 만들어 놓았다. 마을 한가운데는 소설 속 아낙들이 시름을 털어놓거나 신세를 한탄했음직한 공동 우물과 빨래터가 남아 있다. 이곳 주민들도 〈토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평사리는 이미 문학사적 지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평사리에는 여관이나 여인숙 식당은 물론 민박집 하나도 변변한 것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것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하소설’이란 어떤 소설>
‘대하소설’은 시간적 배경도 길고, 등장인물도 많고, 복잡한 갈등 구조를 다룬, 분량이 상당히 긴 장편소설을 가리킨다. 대하소설은 무엇보다 분량이 많기 때문에, 긴 시간 또는 넓은 공간에 포진하고 있는 다수의 인물이 일으키는 복잡한 사건을 보여 준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으로는 가족사소설 연대기소설 역사소설 등이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등이 대표적 대하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구 작품으로는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 등이 있다. 대하소설에서는 한 인간의 삶을 시대와 역사같은 거시적 범주와 연결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줄거리 따라잡기>
조선왕조 말 1897년, 경상도 하동 땅 평사리에는 지주 최 참판댁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다. 최씨댁의 유일한 혈육인 서희는, 인정 많은 할머니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하녀 봉순이를 동무하며 자라고 있고, 무엇인가 고뇌와 비밀을 간직한 듯한 구천이가 머슴으로 들어온다. 구천이는 윤씨 부인이, 훗날 동학당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들이다. 동학당에 참가했던 그는 구천이란 가명으로 몸을 숨기기 위하여 최 참판댁에 찾아온 것이다. 그는 이복형의 부인 별당아씨와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별당아씨를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최치수는 이종형 조준구와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성적 무능력자가 된다.
하녀 신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녀는 최 참판댁 씨를 받으려고 최치수에게 접근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자 그녀는 음모를 꾸며 칠성이와 강 포수에게 몸을 허락하여 씨를 받는다. 최치수가 성불구자임을 모르는 귀녀는 일이 틀어지자 김평산에게 최치수를 살해하게 하고 집안의 대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최치수의 죽음에 의혹을 가진 윤씨 부인은 침모 봉순네의 귀띔으로 귀녀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여 김평산과 칠성은 함께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른다. 집안의 기둥을 잃어버린 최 참판댁에 조준구가 찾아들어 재산을 노린다. 그러던 중 마을을 휩쓴 전염병과 흉년으로 윤씨 부인과 봉순네 등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조준구 일당은 마침내 최 참판댁을 차지하게 된다.
고아 신세가 된 서희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강하고 이기적인 여인으로 자란다. 그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조준구 일당과 맞선다. 그러나 주위 상황 사람들은 목수 윤보를 선봉으로 의병을 일으켜 마침내 최 참판댁에 들이닥친다. 그들은 재물을 탈취하고 조준구 내외를 찾아죽이려 하지만 실패한다. 서희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펀다. 서회는 할머니 윤씨 부인이 남겨 준 재물을 지나고 길상과 함께 고향을 버리고 간도로 떠난다.(제1부)
서희는 간도에 정착한다. 가문을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두류(豆類)와 토지 거래에 성공하여 거부가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서희는 아버지의 친구인 독립군 이동진의 군자금 요청을 거부하고 친일파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등 공공연한 친일 행위도 불사한다. 그녀는 이동진의 아들 상현과의 사랑을 포기하고 길상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는다. 서희와 길상이 결혼한 데 충격을 받은 상현은 서울로 돌아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사랑의 패배감,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 무력감 때문에 방황을 계속한다. 한편 기생이 된 봉순은 빼어난 목소리로 유명해진다. 월선, 임이네, 홍이와 함께 용정에 정착한 용이는 월선과 함께 잠시 국밥집올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장사에 맞지 않는다는 것올 깨닫는다. 임이네는 월선 몰래 가로챈 많은 돈을 용정의 큰불로 잃게 된다. 월선은 용이가 떠난 후 홍이와 함께 살지만 암으로 죽는다. 김평산의 아들 기복은 김두수로 이름을 바꾸고 간도 땅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활약한다.
그는 달아난 금녀를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대신 길을올 짝사랑하던 송애를 농락한다. 달아난 금녀는 독립 운동을 하던 장인걸의 도움을 얻어 차츰 안정을 찾게된다. 귀녀의 아들을 데리고 사라졌던 강 포수는 그 아들에게 두메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가 성장하자 송장환에게 교육을 부탁한다.
조준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는 송관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고 조준구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하인으로 가장하여 조준구의 집에 잠입한다. 서희는 광산에 투자하여 큰 실패를 본 조준구에게 접근하여 빼앗긴 재산과 토지 문서를 되찾고는 월선의 장례식을 치른 후 영팔이네와 용이네를 귀향시키고, 독립 운동에 투산하기 위하여 구천이와 함께 떠난 길상과 헤어져 두 아들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제2부)
진주에 정착한 서희는 평사리의 본가를 되찾는다. 서희의 복수는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서희는 상실감에 시달린다. 용이는 평사리 서희의 본가를 지키며 안정된 말년을 보낸다. 월선의 죽음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홍이는 생모 임이네 때문에 성격이 나빠진다. 그는 의병 혐의를 받고 잡혀갔다 온 후 운전 기술을 배워 김 훈장의 손녀 보연과 결혼한다.
윤도집과 운봉이 죽자 동학 세력은 와해된다. 중국에서 귀국한 구천이는 지삼만의 밀고로 일경에 잡히지만 조직을 지키기 위하여 자결한다. 김두수는 마침내 금녀를 붙잡아, 독립군 정보를 빼내려고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금녀는 침묵으로 맞서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한다.
한편, 길상이 ‘계명회’ 사건에 연루되어 2년형을 받고 복역하게 되자 서회는 길상의 옥바라지를 한다. 아들 환국은 아버지 길상의 자질을 이어받아 그림에 소질이 있으나 어머니 서희의 뜻을 쫓아 와세다 대학 법과를 지원한다. 상현은 일본 유학 후 서울에서 기화(봉순)를 모델로 소설을 쓰기도 하지만 3 ·1운동와 실패로 인한 무력감 때문에 방황한다. 기화는 상현을 사랑하지만 끝내 버림받고 상현의 딸 양현을 낳는다. 아버지 이동진이 죽고 여러 가지 문제로 갈등을 겪던 상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중국행을 감행한다.
홀로 양현을 키우던 기화는 아편중독자가 되어 서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게 되지만 상현과의 관계에 대한 죄책감으로 서희의 곁을 떠난다. 그러나 기화는 그녀를 사모하는 정석의 설득으로 평사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결국 기화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섬진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기화의 자살 소식을 알게 된 상현은 긴 방황을 청산하고 소설을 써서, 그 고료를 양현을 위하여 써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명희에게 보낸다. 명희는 양현을 양딸로 데려가길 원하지만 서희는 이를 거부하고 양현을 맡아 키운다. (제3부)
구천이가 죽고 길상이 수감된 후 판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독립 운동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길상의 출옥 후를 생각하며 관수는 서울 출신의 소지감을 운동에 끌어들이고, 지감은 그를 통해 지리산의 강쇠, 해도사를 알게 된다.
어느새 청년이 된 환국과 윤국은 자신들의 풍족한 처지와 사회 현실 사이의 괴리감으로 인해 고민이 깊어 간다. 윤국은 학생 시위에 참가했다가 투옥당하여 무기 정학 처분을 받는다. 서희는 아들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집안의 재산을 부담스러워하는 두 이들을 보며 공허감이 더욱 커진다.
한편, 길상은 어느새 중요진 자신의 위치가 자주 낯설어지고, 사랑이 넘치는 집안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 그는 최씨 집안에서 꽃 같은 존재인 양현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를 바란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오가다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던 유인실은 오가다에게 몸을 허락하고, 결국 아무도 몰래 일본에서 아이를 낳아 조찬하에게 부탁하고, 독립 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녀는 송장환을 찾아가고 그를 통하여 윤광오를 만난다.
찬하는 고민 끝에 인실의 아이를 자식처럼 기른다. 인실이 떠난 후 상실감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오가다는 만주로 와서 떠돌아다니다가 토건 회사에 취직하여 여행을 하던 중 하얼빈에서 우연히 인실의 흔적을 발견한다.
(제4부)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일본은 전쟁 물자마저 고갈되어 간다. 호열자로 죽은 아버지 관수의 유해를 모시고 진주를 찾은 영광은, 자살한 어머니 기화를 생각하며 그 강에 꽃을 던지는 양현을 보게 되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백정의 자손과 기생의 딸― 비슷한 운명의 두 사람은, 영광이 만주로 도피하면서 헤어진다. 양현을 아들 윤국의 배필로 삼으려던 서희의 계획은 양현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상심한 윤국은 학병에 나간 후 소식이 끊어진다. 의학전문학교를 나와 취직한 양현을 서희는 귀향하도록 설득한다. 가산을 탕진한 조준구는 중풍에 걸려 누워 있으면서도 갖은 행악을 부리다가 죽는다.
‘계명회’ 사건으로 복역하던 길상은 출옥한 후 도솔암에서 관음보살 탱화 제작을 결심한다. 보연의 금붙이 밀매 사건으로 진주로 송환된 홍이는, 이를 계기로 김두수와 불편한 관계를 끝내고 하얼빈에서 극장을 운영하며 조직의 일을 계속한다. 여행 길에 하얼빈에 들러 우연히 인실을 본 조찬하는 오가다에게 아들의 존재를 알릴 것을 인실에게 권한다.
조찬하의 아들 쇼지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된 오가다는 찬하에게 감사하며 인실과의 관계가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인실은 ‘일본이 망하는 날이면’ 하고 약속한다. 이상현은 석이와 함께 기거하며 활동을 계속한다. 민족주의의 경향이 차츰 약해지고 사회주의 성향이 짙어 가는 때, 강 포수가 내력을 숨기고 기른 귀녀의 아들 강두메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로 자란다. 그는 상현 같은 인물은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반동분자로 생각한다. 조용하가 자살한 후 그의 재산을 상당 부분 상속받은 임명희가 희사한 돈 5천 원의 사용처를 의논하던 중, 산(山)의 조직을 독립 후에 사회주의 운동 조직으로 키울 야심을 가지고 입산한 과격한 사회주의자 이범호와 산 사람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 산 사람들은 이범호를 경계한다.
그때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희는 길상이 사상범 예비 검거령에 의해 다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서울로 온 가족이 올라갈 것을 결심한다. 서희의 상심은 깊어진다. 양현은 장 보러 가던 길에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제5부)
<생각하기>
1. 〈토지〉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2. 〈토지〉에는 ‘서장’ 이 있다. ‘서장’ 은 이 책 맨 앞에 실려 있는 내용이 다. 작가가 ‘서장’ 에서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해 보자.
3. 제1장에서 ‘서희’ 와 그 주변 인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무엇인 지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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