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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이루어지기 까지 !
나는 시대상으로 볼 때 일제 식민지하에서 일본식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또 소위 그들이 말하는 대동아 전쟁을 겪었고 우리나라가
일제하에서 해방되는 것과 남북이 분단되는 것도 직접 보았다.
고향이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다사도이기 때문에 분단의 아픔을 직접 맛본 실향민이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건국과 6.25전쟁 4,19 5.16같은 일련의 사태를
직접 겪었으니 뒤돌아보면 장수시대를 만나서 참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얘기한것과 같이 나의 고향은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다사도라고 하는 압록강 하류에 속하는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족은 부모님과 조모님 오빠 이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실정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골
에서는 전반적으로 볼 때 여자를 학교에 보내는 집이 거의
없었고 학교도 일개 면에 하나씩 그러니까 면소재지만 하나씩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닌 것이었다.
오빠는 다섯 살 때부터 동네 서당에 보내서 천자문, 명심보감 등 한문을 배우다가 취학
적령기가 되어서 집에서 10리 떨어진 면소재지에 있는 불이 공립 보통학교에 취학시켰다.
오빠와 세 살 터울인 나는 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으
시는 것 같았는데 그 당시에는 농촌에서 농한기를 통해서 문맹
퇴치의 일환으로 소위 야학을 설날 전까지 실시하는 것이 거의 연중 행사
였고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야학만 시작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배웠다.
그 당시 한글 독본이라는 책에 의해서 한글을 배웠고, 산술은 가감법을 배웠고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편지쓰는 방법 글 짓기와 주판 놓는 방법 가르쳐 주었
기에 지금도 단위가 높은 숫자를 계산하려면 그때 배운 그실력으로 주판을 활용한다.
취학 전에 오빠 교과서 중에 조선어 독본을 막힘없이 읽었고 비교적
암산도 빨랐으며 그런 것을 지켜보시던 부모님은 감탄하시면서 우리
원희도 학교에 보내야지 하시면서 10살 때 여름에 학교에 입학시켜 주셨다.
집에서 농사일과, 길쌈 등 집안일에 바쁘신 어머니가 어떻게
아셨는지 꽤 거리가 먼 시장터에 운향시라는 곳에 천주교학교인
영신학원에 보내주신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지금은 학원하면 수업료가 비싸지만 그 당시에는 보통 학교의 절반 수준
이었고 그 이튿날부터 검은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매고 다니는 것 만 해도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 것 같으나 학원시설이 열악한 것은 말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두 분이셨는데 한분은 소위 신학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산술[수학] 수신[도덕] 창가[음악]를 가르차셨고 일본어가 국어였다.
또 한분 선생님은 조선어 한문을 가르치셨다.
야학에서 배운 기초가 있기 때문에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3학년
신학기가 시작되려는데 우리 동네 천주교건물에 6년제 보통학교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빠가 다니던 불이공립보통학교의 분교가 생겼고
학생모집을 한다고 해서 나도 그 학교 3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도 분교이기 때문에 열악한 것은 영신학원이나 거의 같았다.
수업 방식이 복식이라고 하여 한 교실에 두 반씩 놓고 선생님
혼자서 이쪽에서 수업하시고 저쪽에서 복습을 시키는 그런 식이였다.
그래도 6학년까지 교육과정이 있고 불이 공립보통 학교와 똑같다니까 학교
생활이 너무 즐거웠고 남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안다고 생각하니까 무척 행복했다.
또 마음속에는 요새는 장학생이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6년
동안 우등생으로 졸업하면 국가에서 무료로 중학교에 보내준다는
풍문이 있어서 나는 우등생으로 졸업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3학년까지는 과목이 단출했고 야학에서 배운 그 기초가
있어 성적이 우수했고, 그래서 나도 희망을 가졌었는데
4학년이 되니까 과목도 늘어나면서 생각같이 되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중에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은 서울수학여행이었다.
1939년 6월, 지나사변이 치열했을 때인데 우리학교가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기전 어느 날 선생님 만면에 웃음을 띠시면서 6월에 수학여행을 서울로
간다고 발표 하시는데 선생님의 발표에 마치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자동차나 기차를 본 적 조차도 없는 시골 학생들이니 오죽 했겠는가!
또 서울에 가서 2박 3일 동안 여관생활에 대해서 주의사항을
말씀하실 때 우리들은 교실이 떠나갈 것 같은 박수와 고함을 질렀다.
그 발표를 할 때가 5월 중순정도 였는데 6월이라고만
하셨지 어느 날이라고는 정확히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날짜가 잡히기 전에 얼마나 궁금하고 애가 탔는지 등교하면
서로 무슨 정보나 들었는가 하고 서로 물어보며 궁금해 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일인데 변함없이 날짜는
하루하루 지나서 드디어 6월 하순 어느 날 출발하게 되었다.
학교에 모여서 단체로 버스정류장 까지 걸어갔고 그곳까지
10리 정도였으니 4km정도 였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40리를 가야
남시역이라는 기차역이 있었으니 그시절 교통시설의 열악함을 볼수 있겠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못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 당시에 비용은 5원 50전이었다.
다른 물가는 생각이 나지 않아도 당시 학교 수업료는 한 달에
70전이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나고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이다.
서울 간다는 기분에 차내에서는 잠이 안 오고 거의 날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너무 재미 있었고 남시역에서 오후 4시에 완행
열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 7시 지나서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에 내렸다.
15시간의 긴 여행, 지금 같으면 셋째아들 살고있는
미국 푸로리다에 가는 시간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 중에 멀미하는 친구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아파 했는데 경성역에 내려서 곧장 예약한 여관에 가서 짐을 풀고 서울 시내를
구경하는데 멀미하던 친구도 나도 우리모두 보는 것마다 신기하고 황홀해했다.
여관은 그 당시 내선일체를 강조하기 위해서 일본사람이
직접 경영하는 일본여관 일명 와까바료깡이었고 고궁과 백화점을
구경하고 조선총독부 5층 건물인데 3층까지만 올라가서 구경했다.
정말 꿈꾸는 것 같았다.
2박 3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서울구경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나보다 3살 위인 오빠는 본교 였음에도 평양까지밖에 못 갔다.
그렇게 재미있는 학교생활도 끝나고 1940년
3월 25일에 다사도 심상소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여학교에 우등생으로 가는 꿈은 접었지만 어떤 방법으로라도 여학교에
가야한다는 생각만은 버리지 않았는데 무심한 세월은 덧없이 4년이 지나갔다.
그 당시 20세가 가까워오니까 엄마는 빨리 시집을 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마다 우리 딸 중매 좀 서달라고 부탁했다 .
그러다가 잘 아는 사람의 중매로 44년도 5월 18일에 6남매의 맏며느리로 2년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했고 시어머니는 내가 시집 간지 보름 만에 시누이를 또 출산했다.
그 당시에는 신혼생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법으로 맺어졌다는
것만으로 시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시동생들 시중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다 다음 해인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해방되었고 며칠
지나 8월 24일에 첫딸을 낳았는데 너무 순해서 이름을 순화라고 지었다.
그 당시에 일본역사를 배운 나는 한국역사에 대해서는 캄캄했다.
그들은 한참 전쟁이 치열했을 때 교회 종탑에 걸린 종은 물론 일반
가정의 밥숟가락까지 다 뺏어가면서까지 승리에 전념하였고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한사람까지’ 라고 외치면서 승리를 장담했기 때문에 그 당시 정보가 어두운
나로서는 그들이 패전하거나 또 우리나라가 해방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곳곳에서 해방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고 태극기 물결이 넘쳤다.
돌이켜 보면 함석헌 선생님 말씀처럼 해방은 도둑처럼 우리에게 왔던것이다.
그리고 8,15 그 해 가을에는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표제를 걸고
3.7제를 실시하여 지주에게는 3, 소작인에게는 7의 혜택을 주었다.
지주들은 못마땅해 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여기저기서 여성해방운동을 부르짖고 갑작스런 변화와 남녀평등권을 외치면서
주부들이 가정에 대해서 반항이 일어났으며 이제 우리도 권리행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남편동무 밥해요.”
“시아버지동무 요강 부셔요.”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더말해 무엇하랴!
청년동맹, 여성동맹, 농민동맹, 그 밖에도 무슨 동맹이 그렇게 많은 지 상부에서 무슨 공문이 내려왔다고 동맹원들이 회의를 하면 토론을 하고 자아비판을 하고 이런 모든 것이 표면으로 볼 때는
국민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실질 적으로는 절량농가가(양식이 떨어진농가) 속출되고 초근목피로 옥수수를 조금 갈아 넣고 죽을 쑤어서 연명 하기 때문에 김일성 장군을 죽장군이라고 불렀다.
앞산에 소나무가 허옅게 되는었데 이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다 속살을
식량으로 썼기 때문이며 소나무 껍질을 벗길때 빙그르르 돌려 베끼지
말고 지그재그 형태로 베껴야 소나무가 죽지 않는다는 교욱까지 시킬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1946년이 거의 지나는 12월에 할아버지 댁이 숙청을 당했다.
영하 30도에 가까이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 농지는 물론 가재도구, 농기구
까지 몰수당하고 숙청 당해 쫒겨났는데 이유는 5정보 이상의 부자라고 해서다.
또 1947년도 초에 그들이 흑함, 백함을 놓고 선거를 했는데 우리 동네에
흑함표에 표가 많이 나왔다고 평소 숙청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남편을 반동분자
라고 노동당원들이 그들의 소위 사무실이 라는 데에 데려다 놓고 마구 폭행을 저질렀다.
남편은 너무 억울해서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미수에
그치고 1947년 6월에 정처 없이 38선으로 출발했고 월남했다.
그렇게 지지고 볶는 동안에도 순화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하게
잘 자라고 고모들 읽는 국어책을 따라 읽고 따라서 노래도 하고 아주
재롱둥이로 잘 자랐으며 그런대로 47년 여름 많은 변화 속에 고달프게 지나갔다.
그리고 겨울이 닥쳐왔는데 홍역이 그 동네에 들어왔다.
전염성이 강한 홍역은 시동생들에게 먼저, 그리고 순화에게도 덮쳤다.
고열로 시달리던 순화는 결국은 할머니 생신 밤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버렸다.
지금 우리 애들은 홍역으로 사람을 죽게 할수 있느냐고
하지만 그런 세월을 살았으며 나만 격은 고통이 아니었다.
어른들 밑에 층층시하에서 엄마의 역할이나 사랑표현 한 번 제대로 못한 이
엄마의 슬픔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고 월남한 남편은 6개월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었다.
그런대로 시어머니는 6남매를 키운 어머니여서 인지 아들에 대한 걱정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순화를 보내고 나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지고 약해진 것
같았고 그 바쁜 시골 살림에 방 한구석에서 눈물 훔치는모습도 가끔 보였다.
나는 고독과 슬픔을 참으면서 별 다른 일 없이 지내고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겨울이 지나고 1948년 3월이 왔다.
그 시절에 남편을 찾아 나서겠다고 시어머니께
말씀드린다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힘든 일이었다.
죽이면 죽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시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두 달만 시간을 달라고,
월남을 해서 소식 모르는 남편을 찾겠다고 했더니 시어머니는 망설이시다가
그럼 날짜를 잡으라는 허락이 떨어졌고 그런대로 모든 준비를 갖추어 38선을 넘어왔다.
그시절 시어머님 시아버님 시동생들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삼팔선을 넘어오면서 겪었던 고통스러운 일이야
정말로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었으니까 생략하고,
정처도 없이 그 당시에 무작정 서울에 가서 서북청년단본부에 가면
도별로 수용되어 있다는 풍문을 듣고 겁 없이 출발했지만 실지 당해보니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고 정말 난처한 지경에 빠졌으며 서울에 있지도 않았다.
결국 충남 서산읍 동문리에 있다는 수소문 끝에 정말 하나님의
도움으로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지만 극적으로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남편은 아내인 내가 찾아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한편 반갑기도 하지만 난처한
모습 이었는데 충청남도 본토민들의 인심 좋고 또 먼저와서 자리
잡은 고향사람들의 많은 도움으로 방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은 서산에 있는 성냥 공장에서 일을 하고 나도 포장
성냥개비 꼽는 일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남편은 직장을 구했다.
당진군 고대면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에 그리로 이사 가서 1949년
1월 24일에 지금의 첫아들을 낳았는데 출산을 하고 만감이 교차되었다.
처음에 결혼했을 때 용천군에서 철산군으로 시집가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서 집 생각이 간절 했는데 언제 갈지도 모르는 고향! 너무 멀리 느껴졌다.
통일이 되어 고향에 가기까지 임시로 첫애 이름을 충남이라고 짓기로 했다.
길어야 3년 아주 멀다해도 5년내에는 통일이 될거라 굳게 믿었고
그당시 사회분위기도 그랬던것인데 이제는 평생 이름이 되고 말았다.
첫아들 이름을 충남으로 지었기 때문에 충자가 돌림자가 되어서
5남매의 이름이 무두 충(忠)자 돌림이며 그 밑에 딸 충연, 둘째아들
충인 셋째아들 충일, 막내 충배로 지었고 결국 4남 1녀가 모두 충자였다.
남편이 직장생활에 충실하여 비록 풍부하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살아
가면서 통일되어서 고향에 갈 날만 기다리면서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는데 1950년 여름 어느 날 남편이 직장에서 들어와 38선에서 남북
간에 전쟁이 났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의 큰 비극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그때 생각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굉장히 국력이 우수한 줄
알았기에 단순한 생각으로 그러면 통일이 되겠구나 했었다.
그시절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이런식으로 큰소리 칠때였으니 통일될거라는 생각은 많은사람들이 갖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정보가 어두웠고 전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가 없었는데 며칠 지나니까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
으며 조금은 걱정이 되었는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피난 갈 줄은 몰랐다.
그러던중 한 20일이 지나니까 우리도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것이
월남인 이기 때문이었고 그때 충남이는 돌을 지나서 막 걸어 다닐 때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18일 정도 그곳에서 버티다가 7월 13일 피난길을 보덕포라는
포구에서 배를 타고 피난을 떠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모른다.
정처도 없이 가다가 어떤 섬에 배를 대놓고 선장이 그 동네에
들어가서 전황을 알아보면 인민군이 곧 그곳까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가고 또 가다가 8월 7일에 부산 영도부두에 배를 기착시켰다.
우리는 그 배에 16가족이 탔는데 물론 쌀과 새우젓은 넉넉히
가지고 갖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배에서 50일 정도를 생활했다.
8월 30일에 하선해서 부산 수용소에서 30일정도 살다가 10월초에 제 2의 고향과도
같은 당진군 고대면으로 가서 그럭저럭 2년 정도 지내다가 1952년 8월에 서울로 이사 왔다.
서울에 와서도 남편이 6, 7년 정도 직장 생활하다가 1959년도
부터 남편은 자영업을 시작했고 나도 내조차원에서 함께 했으며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렇게 30년 동안 장사하는 동안에 자녀들 모두
학교를 마치고 혼인도 다 시키게 되었으며 1989년 10월말일로 장사를 끝냈다.
그래서 못 다 이룬 꿈, 그렇게 가고 싶던 중학교 가는 꿈을 65세의 나이에 이제
라도 이루어 본다는 생각을 하고 남편에게 말을 했더니 생각이 의외로 반대가 심했는데,
그 이유가 ‘아니 어린학생들도 공부하기 어려워 힘들어
하는데 늙은이가 편안하게 살 것이지 이제 무슨 중학교냐’며
완강하게 반대 하셨지만 ‘나도 한번 결심했으니까 이번에 실천하지 못하면
내 꿈은 영원히 무산된다’는 생각에 1989년 11월 9일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을 마쳤다.
교과서는 자습서, 그러니까 완전정복 9개 과목의 교과서를 받아 집에 왔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9시에서 1시 45분까지 하루하루 5시간씩 월화수목금
까지 매일 수업을 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어려운 과목은 영어, 수학, 물상이었다.
담당 선생님의 피나는 노력과 사생결단하고 공부한 결과 만 3년 만에
대검까지 마쳤으며 선생님들이 너무 고맙고 학원에 온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했던것이 영어간판 하나라도 읽어지면 너무 마음이 뿌듯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인것이 일요일날 오후 7시에 도전 골든벨 이라는 시간에 몇
문제라도 아는 문제가 나오면 애들보고 ‘내가 공부를 더 안했다면 저 문제 어떻게 맞히겠니?’
하면서 내 자신이 너무 학원에 감사하고, 죽을 때까지 배우면서 즐기려고 한다.
1993년도에 방송통신대학 교육과에 입학해서 독학
으로 공부하는데 졸업은 10년 만에 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지금도 누가 교육이 무엇이냐고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답변은
힘들겠지만 나름대로 공부는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고 일 년에 2회씩
시험 볼 때마다 모든 과목의 리포트도 많이 쓰고 졸업논문도 40페이지나 썼다.
그래서 방송통신대 졸업장을 받고 제일 먼저 자랑
하러 온 곳이 수도학원 원장님이신 이재식 선생님이다.
집에서 자녀들에게는 자자손손이 가보로 간직해서 혹시 후대에 공부하기
싫어하는 후손이 나오면 할머니의 졸업장을 증거로 보여주라고 당부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꿈이 있으면 언젠가는 실현이 된다고 누군가가 말했드시 어릴때
작은 꿈이 노년이 되어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학원 원장선생님의
배려도, 일생을 장학생의 혜택을 주신 것과 그 외에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를 보낸다.
세상이 좋아지니 많은 말들을 한다.
화투가 치매예방에 좋다고도 하고 많은 방법을 얘기 하지만 공부보다 더
좋은 예방은 없을거라 굳게 믿으며 지금도 학원 한귀퉁이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
계단을 오르 내리면서 학원으로 향할 때 그때가 가장 즐겁다.
또한 같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여러 젊은 친구들에게 감사 하면서 지금이라도 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으면 절대 포기하지 말고 도전 하자고 당부하면서 말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5남매의 엄마이고 12남매의 손자손녀의
할머니, 지난 4월에 외증손자도 본 증조할머니이기도 하다. |
첫댓글 오늘 삼오제 치루고 왔습니다 ,..
솔나무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 가람님 ...
항상 열심히 사시는 분을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슴아프네요. 부디 좋은 세상에서 편히 쉬시길 빕니다.
차세빈님 고맙습니다 ...
이글을 이제서야 봅니다. 그분이 눈에 선합니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에 명복을빕니다.
카페모임이면 참석하시여 좋은인상을 주신분이니시고 2차 노래방까지 오셔서 독도는우리땅이라는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정말좋으신분이시었는데
눈에 선하군요. 그분을 보면서 배움의 용기를 낸분들이많았을겁니다. 저역시도 그러했구요. 그분의 일대기를 넘잘 봡습니다. 좋은곳에서 편히 계시니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런인연으로 카페서라두 자주 뵜으면 합니다. 항상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귀하의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자세야 말로 현재 진형학교는 물론, 수도어학학원에서 학업에 열중하시는 모든 학우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부디 건강하시어 또 다른 목표를 향한 멋진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화이팅!!
저도. 까페모임에서. 몇번. 보았습니다. 2차. 노래방에서도. 독도는. 우리땅을. 가사도. 안보시고. 노래들불렀어요. 하늘나라. 가셔서도. 공부하고. 계실거예요.
이글 올리고 10년만에 다시 봅니다 ... 감회도 새롭구요 ... 우리 어머니를 기억해주시는 모든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