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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고전도서-시카고플랜] 플라톤의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
‘검토 없는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자신의 말처럼 살다 간 철학자. 그러나 저작을 남기지 않았기에 소크라테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가 전하는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열람할 수 있지만, 세 사람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누구의 주장이 실제에 가까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플라톤은 스스로 점하고 있는 인문사적 지위로 스승의 모습까지 독점하고 말았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노모이(Nomio, 법률)>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변론>은 <크리톤>, <파이돈>과 더불어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최후 삼부작’이라 일컬어지는데, <변론>에서는 고발당한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아테네 민중들에게 행한 연설을, <크리톤>과 <파이돈>에서는 사형을 언도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다루고 있다.
<변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기득권층으로부터 고발 된 죄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첫째, 사람들에게 약한 논변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 둘째,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망치고,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두 가지 고발 내용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관한 것이며, 그 논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피력한다. 일관된 주제는 ‘인간은 어째서 반성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라 생각했으며, 개인적인 반성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아테네 시민들을 반성하게 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럼 추방을 제안할까요? 어쩌면 여러분이 나에게 이 형벌을 부과하게 될지도 모르겠기에 하는 말입니다……아테네인 여러분! 그럼 이 나이 먹은 인간이 밖으로 쫓겨나 이 나라 저 나라로 계속 추방되어 전전하는 삶을 산다면, 그런 내 삶이 퍽이나 멋있겠네요.
다서 과격한 화법에 실린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아테네 시민들의 미움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기소를 당하고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실상 아테네 법에 따라 스스로의 형량을 결정할 수 있었기에, 추방 정도의 선에서 살 길을 모색하는 일도 가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아주 적은 벌금을 내는 형을 배심원들에게 제안한다.
은화 1므나 정도는 아마 여러분에게 물 능력이 될 거 같네요. 그러니 그 액수의 벌금을 제안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언사에 모욕감을 느낀 배심원들은 결국 원고 측의 구형에 많은 표를 던졌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형이 확정되기 전보다 더 강경한 어조로 변론을 이어간다.
앞에서도 위험 때문에 자유인답지 않은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듯, 지금도 이런 식으로 항변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런 식으로 사느니보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항변하고 죽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크리톤>과 <파이돈>에서는 죽음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자세를 초연하게 그리고 있으나, <변론>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판결을 내린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못 격양된 감정을 쏟아 내고 있다.
나를 죽인 ㅇ러분, 나는 여러분이 나를 죽일 때의 앙갚음보다, 제우스에 맹세코 훨씬 더 혹독한 앙갚음이, 내 죽음 이후에 곧바로 여러분에게 닥칠 거라고 단언하는 바입니다.
자신에게 사용을 선고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은, 그 기백이 너무도 당당하여 도리어 더 슬픈 삶과의 이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 벌써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나는 죽으로 여러분은 살러 갈 시간이…….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습니다.
메논
영혼이 배우지 않은 것은 없다네. 그래서 탁월함에 관해서든 다른 것들에 관해서든, 영혼이 어쨌든 전에 인식한 것들을 상기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닌네. …..탐구와 배움은 결국 모두 상기니까 말일세.
플라톤 철학의 일관된 주제는, 지식은 경험을 통한 습득이 아닌 선험으로부터의 ‘상기’라는 사실이다. 이는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다’라는 전제에 기댄 결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딛고 있는 현상계는 감각에 왜곡된 인식이 이루어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진실은 오로지 이데아로 지어진 시공간이다. 그 이데아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도구가 바로 ‘이성’과 ‘철학’이다. 그러나 결국 감각의 방해를 받지 않는 순수 인식은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가능하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플라톤은 죽음을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순간으로 간주했고, 인간은 죽어서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하고 난 뒤, 다시 현세로 건너온다고 믿었다. 엄밀히 말해 인도철학은 서양으로 분류가 되는 사유 방식이며, 윤회의 담론도 인도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진리란 이미 내세를 통해 내재화된 ‘기억’이다. 그러나 영혼이 다시 현세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망각의 강을 지나기 때문에, 내세에서 경험한 이데아를 모두 잊게 된다.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란 그 잃어버린 이데아를 ‘상기’해 내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실제로는 플라톤의 페르소나)는 메논이 거느리고 있는 노예 아이에게 기하학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아이가 누구에게도 수학에 관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사례를 통해, ‘지식은 상기’라는 전제를 입증하려 한다.
그래서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또한 언제나 알았을 걸세. 하지만 언젠가 획득했다면, 그는 적어도 이승에서 획득하지는 않았을 걸세. 아니면 이 아이에게 누가 기하학 하는 걸 가르친 적이 있나? ….그런데 이승에서 획득하여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다른 어떤 때에 가지고 있었고 배웠었다는 것이 이제 분명하지 않은가?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기하학은 경험보단 합리적 직관에 가까운 지식이다. 기하학은 그 원리나 증명 방식이 객관적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추론의 힘을 길러 주는 유용한 학문이며, 이를 통해 현실의 삶에서 이데아를 보는 혜안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입장이다.
바로 이 모든 이유로 이 교과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되거니와, 성향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이 교과에 있어서 교육을 받아야만 하네. …..기하학의 많은 부분이 그리고 그 고급 단계가 ‘좋음의 이데아’를 쉽게 보도록 만드는 데 어떤 점에서 기여하는 면이 있는가 하는 것일세. <국가> 중
플라톤이 기하학의 ‘탁월함’을 언급한 일화는 영혼의 ‘앎’의 상관을 피력하기 위함이다.
탁월함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우리가 함께 탐구해 보길 자넨 원하겠지? …..탁월함은 확실히 유익한 것이지? …..건강과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물론 부(富)도 말이야. 이것들과 이런 유의 것들을 우리는 유익한 것들로 말하네. 그렇지 않은가? …탁월함이 영혼 속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고 필연적으로 유익하다면, 그것은 앎이어야만 하네. 왜냐하면 영혼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지만, 앎이 더해지느냐 무지가 더해지느냐에 따라 유익하게도 유애하게도 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이 논의에 따르면, 어쨌든 탁월함은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앎의 일종이어야만 하는 것이네.
탁월함은 앎이고, 앎은 영혼에 속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탐구하는데 정성을 기울여야 하지만, 이런 형이상(形而上)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항상 신체의 감각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현명함의 획득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것이 몸과 함께 무언가를 탐구하려 할 때는 분명 그것에 의해 완전히 속게 되거든. ….철학자의 영혼은 몸을 최대한 하찮게 여기고 그것으로부터달아나 그 자체로 있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영혼은 아마도 이럴 때 가장 훌륭하게 추론하게 될 걸세. ….영혼이 몸과 작별한 채 최대한 그 자체로 된 채, 가능한 몸과 함께 지내지도 접촉하지도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을 갈망할 때 말일세……몸과 함께하면 그것이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고, 영혼이 진리와 현명함을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에서 말이지.
<파이돈> 중
오늘날의 상식으로 다소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일 수도 있지만, 신체와 정신에 관한 이런 이원론은 그대의 데카르트까지 이어진 주류의 담론이었다. 물론 데카르트의 경우엔 플라톤처럼 육체의 무용론으로까지는 나가지 않고, 정신이 체질 및 신체의 기관들에 의존하므로 어느 정도 쓸모 있음을 변호하기도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은 플라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체의 해방은 다음 제네레이션인 스피노자에 의해 이루어지며, 서양철학사는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이어지는 감성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니체주의와 플라톤주의로 구분될 정도로, 니체는 플라톤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한편으론 일말의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신체를 평가절하하고 오로지 정신의 이데아만을 떠받들며 죽음까지 긍정하는 철학이, 결국엔 현세에서의 삶은 가치가 없다는 경멸로 귀결된다는, 니체의 지적이다.
향연
<향연>에서 다루는 주제는 사랑이다.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아가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벌였는데, 이 자리에서 사랑에 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아가톤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 중 파우사니아스는 전날의 과음을 이유로 오늘의 연회는 다른 방식으로 즐겼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처럼 전날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았던 다른 손님들도, 술은 각자가 원하는 만큼만 마시면서 한 가지 주제를 정해 놓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의 일치를 본다.
이때 에뤽시마코스가 그토록 오래되고 그토록 위대한 신 에로스에게 어느 한 사람도 그를 기리는 노래 하나 지어 놓은 게 없다고 탄식하면서,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사랑의 신을 찬미해 보자는 제안을 한다. 첫 주자는 파이드로스였다. 파이드로스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를 인용하며, 하늘의 신과 대지의 신 다음으로 오래된 에로스가 ‘우리에게 있는 최대로 좋은 것들의 원인’이라며 추앙한다.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에 대한 전폭적인 찬사로만 일관한 파이드로스를 반박하는 말로 운을 뗀다. 에로스는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로 둘로 나뉘며, 천상의 에로스만이 찬미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천상의 에로스만 찬미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감정을 법의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의 에로스관의 기저에는 육체와 영혼의 가치를 나누는, 육체의 에로스는 저속한 것이니 감정을 억눌러야 하고 천상의 에로스는 고귀한 것이니 고양할 필요가 있다는, 전형적인 플라톤의 이분법적 인식이 투영되어 있다.
에뤽시마코스는 앞서 두 사람의 논의를 보다 큰 범주로 확대하는데, 그에게 에로스는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닌 만물에 걸친 우주적 질서이다. 또한 훗날 스토아학파의 토대가 되는 절제의 에로스에 관한 신념으로 본인의 발언을 마무리 짓는다.
좋은 것들과 관련하여 절제와 정의를 갖고 일을 이루어 내는 에로스, 바로 이 에로스야말로 가장 큰 능력을 갖고 있고 우리에게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 주며 우리가 서로서로와 그리고 우리보다 더 뛰어난 이들인 신들과 사귀고 친구가 될 능력을 갖게 해주네.
가장 많이 회자되는 발언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옛날에는 인간에게 3종의 성별이 있었다. 남자와 남자가 붙어 있는 성, 여자와 여자가 붙어 있는 성,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는 성. 제우스는 신의 제사에 점점 게을러지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 둘씩 붙어 있었던 것을 절반으로 잘라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각각 자기의 반쪽을 항상 그리워하는 것이란다.
그렇듯 그리스 문화는 이성 간의 사랑은 물론 동성애의 기원도 밝히고 있으며, 동성애를 어떤 도착의 증세로 보지 않았다. 결국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여성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년과의 동성애 코드를 향유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름다움에 관한 의미를 탐구하는 정신의 작용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육체적인 교접이라기보다 멘토와 멘티로서의 지성적 교감이었다는 철학자들의 변호, 즉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해명이 되어 주는 대화편이 이 <향연>이기도 하다.
연회의 주인공이었던 아가톤은 앞서 말한 사람들이 에로스를 찬양하기보다는 ‘그 신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좋을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가톤은 신들 가운데에서도 에로스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기 때문에 그가 가장 행복한 존재라고 말한다. 또한 인간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고, 쾌락과 욕망을 지배하는 절제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다 용기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에로스야말로 진정 위대한 신이라는 아가톤의 결론이다.
온갖 수사적 기교를 동원해 에로스를 찬미한 아가톤의 연설에 참석자들 모두가 환호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우려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다. 앞서 언급한 에로스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판이 제기된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지향성이며, 영구적인 소유욕이다. 이 욕망의 충족 방법으로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잉태와 출산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출산의 동기가 불멸을 얻는 데 있음을, 그리고 불멸을 얻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서의 정신적인 출산을 말한다. 즉 플라톤주의가 추구했던 지성주의 관점에서 정의한 사랑이다. 그렇듯 플라토닉 러브란, 지혜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에로스적 지향성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