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목사인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에서 4남 1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바로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 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1975년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장준하의 <돌베개>를 읽고 - 익사이팅 <펌>
처음에 독후감 과제로 <돌베개>라는 책을 받았을 때는
그냥 단순히 ´지루한 역사소설이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점에 가서 <돌베개>라는 책을 보는 순간
장준하라는 이름 석자가 내 눈에 드러왔다.
장준하... 내가 이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작년 겨울에 TV의 어느 한 다큐멘터리에서였다.
그 다큐멘터리는 장준하 선생의 등산 도중 의문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도했었다.
그 때 장준하라는 이름을 들은 이후로
그 분의 업적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었지만 이내 잊었었다.
그러나 이번에 독후감 과제로 <돌베개>를 받으면서
업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돌베개는 그가 죽기 4년 전 펴낸
자서전적 소설로
1944년 7월 7일부터 1945년까지 2년간의 파란만장한 나날들을 그린 것이다.
그는 학도병으로서
중국 서주에 있는 일본 군영에 있다가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과 함께 탈영을 시도한다.
그들은 당시 중경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안전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마침내 그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中京행을 결심한 것이다.
탈영 직전,
그는 고국의 집에 편지를 보냈다.
편지 도중에는
´앞으로 베어야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 줄 것이다´라고 해
그의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탈영 도중 굶주리고,
목이 말라 썩은 물을 먹기도 하는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운 좋게도 그는 중국의 진영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 곳에서 한 때 일본 진영의 포로 교환 요구에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한 사령관의 배려로 그들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중국 진영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다.
중국의 <팔로군>의 기습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중국 진여에서 나와 다시 중경으로 향한다.
중경을 가던 도중
광복군에 들어간 그는
광복군에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취사를 책임지고,
´등불´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
광복군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여 광복군을 이끌어가게 된다.
광복군 졸업식이 있는 날.
그는 연예회를 열어 많은 공연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다시 중경으로 향한다.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결국 1945년 1월 31일,
그는 중경의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꿈에도 그리던 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만났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그를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여러 당이 결합하여 결성한 임시정부인지라
내부 분열이 심각했던 것이다.
부패한 임시정부에 실망을 느끼던 장준하와
그를 따라 임시정부로 온 많은 젊은이들은
결국 이범석 장군을 만나게 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을 받고
미군 OSS의 대원이 되어
미군과 함께 국내 침투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그 해 8월, 광복이 되고 만다.
마침내 1945년 11월 23일
그는 김구를 중심으로한 임시정부 요원 중 한명으로 고국에 발을 내딛었다.
그는 고국에서 김구 선생을 보좌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돌베개>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장준하...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는 오직 자신보다는 조국을 위해서 살았고,
심지어는 가족보다도 조국을 더 소중히 여겼다.
또 많은 사람의 존중을 받으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굳은 신념을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가,
그 당시 군사정권으로 대통령 자리에 있던 ´박정희의 천적´이라고까지 불렸겠는가.
이렇게 박정희의 군사정권에 반발하던 그는
등산을 하던 도중 의문의 추락사로 사망하고 만다.
민족의 등불 중 하나가 꺼진 것이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의 사인이라기 보다는
그가 죽기까지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이다.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따라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조국의 안녕을 위해 노력한 장준하 선생...
우리는 그의 열정, 장렬한 넋을 가슴에 영원히 간직하여
그가 이룩한 이 조국을 지키도록,
아니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