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58) -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 결혼’
이 그림은 마리 드 메디치와 양리 4세의 결혼을 다룬 24점의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마리와 앙리 4세는 모두 프랑스 사에서 한번은 언급하는 인물들이다. 아니 종교 전쟁으로 소용돌이 치던 시절의 프랑스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프랑스 역사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1500년 대는 종교개혁으로 신교와 카톨릭 사이에 분쟁이 끈이지 않던 시기였다. 로마 교황청은 피렌체의 명분 메디치 家가 장악하고 있었다. 앙리 3세의 어머니이고, 앙리 4세의 장모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프랑스 조정에서 카톨릭을 방어하고,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하던 중에 신교도를 대학살하는 사건을 일으켜 (파리에서 신교도 3-4 천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신, 구교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위그노 전쟁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카트린느늘 ‘그년’이라고 부를 만큼 싫어한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조의를 표해 왔다.카톨릭 왕국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나의 생애 중에 가장 기쁜 일 중의 하나이다.’ 종교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앙리 4세는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어머니를 따라서 신교도가 되었다. 앙리 3세가 죽자 뒤를 이어서 앙리 4세가 되었다.(첫째 부인이 앙리 3세의 누이이고,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딸이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앙리 4세는 카톨릭으로 다시 개종하고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 전쟁(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선정을 베폴어서 국민 사이에는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앙리 대왕이라고도 한다.
카톨릭에서는 앙리 4세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마침내 1610년에 암살을 당했다.(암살 당하기 까지 20여회의 암살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암살 당했을 때에 배후 인물로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를 거론했으나. 의심으로 끝났다. 겨우 8세인 아들 루이 13세가 왕이 되었다. 마리는 섭정이 되어서 권력을 휘둘렸다. 메디치 가문의 딸로서 앙리 4세의 신하를 몰아내고, 자신의 측근으로 조정을 꾸렸다.
심지어는 앙리 4세의 동생(오를레앙 공)과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불루아 성에 유폐 당했다. 이후에 사면과, 다시 음모를 꾸미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적 생애를 계속했다. 루이 13세는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과 손을 잡고 마리를 국외로 추방했다(1631). 마리는 다시는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1642년에 쾰른에서 죽었다.
(뒤마의 삼총사는 루이 13세의 궁정이 배경이다.)
앙리 4세가 죽고 루이 13세가 통치한 지도 10여년이 흘렀다. 프랑스는 파리에 새로 지은 뤽상브르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서 루벤스를 초치했다. 루이 13세의 모후인 마리 드 메디치는 두 개의 연작화를 통해서 자신의 삶과 죽은 남편 앙리 4세의 생애를 기리고자 했다. 루벤스는 곧 계약을 맺었다.
마리 드 매디치의 파란 많은 과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는 루벤스에게 하나의 숙제였다. 마리를 도덕적 미덕을 실천한 강인한 여인으로 묘사해야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리의 삶에 찬양해야할 만한 미덕을 찾을 수 없었다. 마리의 삶은 수많은 스캔들로 얼룩져 있다. 앙리 4세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아들인 루이 13세와도 권력 다툼을 벌이느라 나쁜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루벤스는 작품에다 고전에 나오는 우화적인 인물을 등장시켜서 그림의 내용에 모호함을 유지했다. 미모한 사안은 슬쩍 피해갔다. 이로서 24점으로 구성된 연작은 1625년에 완성했다. 앙리 4세의 삶을 다룬 두 번 째 연작은 마리가 국외로 추방되던 1631년까지도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첫 번 째 연작만으로도 후대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