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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
1. 머리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까? ‘과학은 유교가 진실임을 입증합니다. 유교의 경전인 《주역(周易)》에는 만물의 근원이 음과 양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분자생물학자들은 DNA가 두 가닥의 사슬이 꼬여 있는 이중나선임을 밝혀냈거든요!’ 다른 사람은 이렇게 응수한다. ‘과학은 기독교가 진실임을 입증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혼돈으로부터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고 나와 있는데요. 물리학자들은 우주 전체가 단순하고 보편적인 물리 법칙에 의해 작동함을 밝혀냈거든요!’
불교에 호의적인 독자 여러분은 물론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수천 년 전에 성립된 기성 종교의 교리 가운데 일부가 현대 과학이 발견한 사실과 우연히 부합한다고 해서 그 종교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대다수 저명한 과학자가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자연법칙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기독교의 창조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에는 어떠한 논리적 모순도 없다.(몇몇 기독교 신자는 ‘아니, 어떻게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설계가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통해 드러남을 한사코 외면하는 거지?’ 하고 답답해하겠지만, 다행히 이 글은 그런 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흥미롭게도, 불교의 핵심 사상이 현대 과학에 의해 뒷받침되므로 불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최근 들어 서구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지식인은 《불교는 왜 진실인가》(2017)를 쓴 과학저술가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 《나는 착각일 뿐이다》(2015)를 쓴 신경과학자이자 철학자 샘 해리스(Sam Harris), 《불교 이후》(2015)를 쓴 불교학자 스티븐 배철러(Stephen Batchelor) 등이다. ‘불교 예외주의(Buddhist exceptionalism)’를 주장하는 이들에 따르면, 불교는 그 본성이 합리적이고 실증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 불교는 만물을 창조한 신을 무조건 따르는 종교라기보다는, 각자의 마음에 대한 실증적 관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치료법, 생활 방식, 혹은 ‘마음 과학’이다. 해리스는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 의식의 본성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결과를 탐구자가 상세히 적은 보고서나 실험실 매뉴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했다. 불교 예외주의는 속 편하고 경솔한 믿음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해리스는 몇몇 동양 전통은 예외적으로 실증적이고 예외적으로 현명하므로,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예외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맞선다.
특히 라이트의 저서 《불교는 왜 진실인가》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불교는 왜 진실인가? 라이트(2017)에 의하면, 불교의 자연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중심 사상이 진화심리학, 신경과학 같은 현대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로 탄탄하게 확증되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윤회와 환생을 강조하는 불교의 초자연적, 신비적인 측면이 아니라,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하는 불교의 자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자연적 불교의 핵심은 이렇다. 인생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 까닭은 우리가 세상을 명료하게 보지 못해서 갈망과 집착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세상을 더 명료하게 봄으로써, 주인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이 핵심 사상은 인간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생물학의 통찰과 겹친다. 개체의 건강, 수명, 혹은 행복을 감소시키더라도,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사고와 정서가 자연선택되었다. 왜 마음이 미망(迷妄)과 괴로움에 시달리기 쉽도록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진화심리학의 진단은 어떻게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그러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일깨우는 불교의 처방과 잘 맞물린다고 라이트는 역설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어느 특정한 기성 종교의 가르침이 현대 과학이 이룩한 연구 성과와 어쩌다 부합한다고 해서 그 종교의 위엄(?)이 더해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불교에 문외한인 필자가 불교가 정말로 합리적이고 실증적이어서 불교 예외주의가 정당화되는지 엄밀히 검토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이 글의 목표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진화심리학이라는 경험 과학에 의해 확증된다는 라이트의 주장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우선, 마음을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게끔 전문화된 다수의 심리적 적응(모듈, module)의 집합으로 보는 진화적 관점을 알아본다. 다음으로, 인간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살도록 진화한 이유를 살펴본다. 그 다음으로, 나를 다스리는 주인으로서의 자아가 애초에 진화할 수 없는 이유를 알아본다.
2. 마음의 모듈성 이론
1) 오직 자연선택만이 인간의 마음과 같은 복잡한 적응을 만든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첫 회에는 자폐증 환자인 주인공 우영우가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는 아빠의 얼굴 사진 수십 장을 벽에 붙여 놓고 정서를 학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컨대, 두 눈썹이 올라가고 눈이 커진 표정은 ‘놀람’이다. 윗입술이 올라가고 코를 찡그린 표정은 ‘역겨움’이다. 공부해야 하는 표정은 그 외에도 많다.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다는 우영우가 왜 저렇게 쉬운 걸 열심히 공부할까? 누군가의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의 내면 정서를 짐작하는 일은 어린이에게도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유기체를 둘러싼 환경에는 정보가 가득 들어 있고, 유기체는 정보를 그냥 다 받아들이면 된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틀렸다! 특정한 유형의 정보를 잘 탐지하도록 ‘설계된’ 기구가 미리 내장되어 있어야만 그 정보는 유기체에 비로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누군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고 하자. 그가 놀랐다는 정보는 보통의 일반인에게만 입력된다. 바로 옆에 있는 자폐증 환자에게는 입력되지 않는다. 타인의 표정으로부터 정서를 읽어내는 탐지 기구가 결핍된 자폐증 환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악전고투를 겪는 모습을 보면, 표정으로부터 내면의 정서를 추론하는 일을 수행하는 심리 기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얄궂게도, 우리의 마음은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를 너무나 능숙하게 처리해서 적절한 반응을 척척 내놓기 때문에 정작 우리는 마음의 위대한 ‘설계’를, 그 천문학적인 복잡성을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한다. 눈을 뜨면 온 세상이 내 앞에 순식간에 펼쳐진다. 욕구가 생기면 실행 계획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수립된다. 움직이고 싶으면 팔다리가 내 뜻대로 순식간에 움직인다. 어느 날 갑자기 기억력이 흐려지거나, 초록과 빨강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일에 극도의 공포를 경험한다면? 그제야 우리는 마음이 천문학적으로 복잡하게 ‘설계된’ 걸작품임을 실감한다.
인간의 마음만 복잡한 것이 아니다. 동식물의 특성에서도 복잡한 ‘설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광자를 포획하여 외부 세계의 상을 두뇌에 전달하는 눈,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유선형으로 미끈하게 생긴 고래, 나뭇잎을 쏙 빼닮아서 포식자를 피하는 잎사귀 벌레 등은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복잡하다. 생명의 복잡한 ‘설계’는 어떻게 생긴 걸까?
1859년에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복잡한 ‘설계’를 만들었음을 입증했다. 태초에 복제자(replicator), 즉 자신의 복제본을 만들 수 있는 실체가 있었다. 완벽한 복제는 없다. 세대가 이어지면서 복제자들은 서로 조금씩 달라진다. 다음 세대에 복제본을 더 많이 남기는 특성을 지닌 복제자는 그렇지 못한 복제자보다 세대를 거쳐 그 빈도가 높아진다. 이게 전부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각기 다른 복제자 사이의 차등적 번식이다. 어떠한 목표도, 의도도, 계획도 없다. 유전, 변이, 그리고 차등적 번식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면 무조건 자연선택이 일어난다. 덕분에 개체군은 당장 처한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지구 행성에서 번성한 복제자는 오늘날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진화를 일으키는 엔진은 자연선택 외에도 더 있지만, 자연선택은 특별하다. 오직 자연선택만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듯한 복잡한 적응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를 일으키는 다른 과정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댄다. 반면에, 자연선택은 주어진 유전적 변이 가운데 현재 처한 환경에서 복제본을 가장 잘 퍼뜨리는 변이를 일관되게 ‘골라내는’ 유일한 기제다. 자연선택은 무작위적인 변이 사이의 무작위적이지 않은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이 누적됨에 따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조상의 번식 성공도에 영향을 끼쳤던 적응적 문제에 대해 자연선택은 꼭 맞는 해결책을 만든다.
고래의 유선형 몸매를 예로 들어 보자. 포유류지만 바다로 영구 이민을 결심한 고래의 먼 조상들은 물의 저항을 되도록 줄여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고래 몸의 형태에 원래 존재했던 유전적 변이 가운데, 물의 저항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변이가 후대에 복제본을 더 많이 남겼다. 선택이 여러 세대를 거쳐 누적되었다. 결국 앞부분은 매끈하고 뒷부분은 날카로워서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유선형 몸매가 고래에게 장착되었다.
요약하자. 다음 세대에 복제본을 잘 남기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이기적’이라고 은유하는 유전자를 줄기차게, 무덤덤하게 골라내는 맹목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복잡한 적응을 만들었다. 전지전능한 신, 더 높은 질서, 우주적 섭리 같은 초자연적인 설계자는 필요 없다.
2) 마음은 먼 과거의 적응적 문제들의 해결책인 수많은 심리적 적응(모듈)의 집합이다
지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기억하고, 운동을 통제하는 우리의 마음은 눈, 심장, 간, 허파, 팔다리 같은 신체 기관 못지않게 복잡하고 정교하다. 심리적 적응은 어떤 진화적 기능을 잘 수행하게끔 자연선택이 빚어냈을까?
마음의 기능은 정보처리다. 마음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여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조상의 번식에 도움이 된 행동을 산출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석기시대의 조상이 길을 걷다가 뱀과 마주쳤다고 하자. 이때 우리의 조상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한 가지였다. 뱀을 보고 군침을 삼킬 수도, 뱀을 짝사랑할 수도, 뱀을 보고 박장대소할 수도, 뱀을 보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이 중 뱀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편이 번식에 가장 유리했다. 즉, 뱀을 두려워했던 이들이 뱀을 귀여워했던 이들보다 다음 세대에 후손을 더 많이 남겨서 오늘날 우리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뱀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적 적응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수십, 수백만 년 전에 소규모 사회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우리의 먼 조상이 풀어야 했던 적응적 문제는 위험한 동물 피하기 외에도 많았다. 자식을 무사히 낳기, 식물성 음식의 위치를 기억하기, 동물을 사냥하기, 배우자의 바람을 방지하기, 심장 박동 조절하기, 표정으로부터 감정을 읽기, 우정을 지키기, 언어를 습득하기, 자연재해를 피하기, 길을 잃지 않기, 체온 조절하기 등등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이처럼 제각각 다른 적응적 문제에 맞추어 전문화된 다수의 심리적 적응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 즉, 우리의 머릿속에는 무엇이든 잘 해결해 내는 요술 방망이 하나만 덜렁 담겨 있지 않다. 각기 다른 용도에 맞추어 특수하게 제작된 연장들이 수백, 수천 개 빼곡히 담겨 있다. 어느 한 문제에만 특화된 해결책은 다른 문제에는 젬병이기 때문이다.
신체 기관을 떠올려 보자. 우리의 몸 안에는 소화, 순환, 내분비, 면역, 근육, 신경, 번식, 호흡, 배설, 골격 등을 한꺼번에 담당하는 범용 기관 하나만 들어 있지 않다. 각 기능에 특화된 신체 기관이 빽빽하게 들어 있다. 정신 기관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음식 선호와 배우자 선호라는 두 적응적 문제를 생각해 보자. 영양가가 많고 독소와 병원체가 없는 음식을 고르는 데 필요한 심리 기제(예: 역겨운 냄새가 나는가?)는 젊고 건강하고 매력적인 이성을 고르는 데 필요한 심리 기제(예: 피부가 깨끗한가?)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화심리학자는 인간의 마음은 각기 다른 입력 정보에 의해 활성화되는 다수의 전문화된 심리 기제의 집합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진화심리학자는 마음의 적응적 설계를 밝히고자 한다. 아래에서 왜 우리의 삶이 괴로움으로 가득한가에 대한 진화적 설명을 살펴보자.
3. 왜 인생은 괴로움으로 넘치는가
1) 설탕으로 코팅된 도넛의 경우
설탕으로 코팅되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도넛이 눈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절로 군침이 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우리가 도넛에 대해 품는 긍정적인 느낌은, 슬프게도 환영이다. 눈앞에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한다. 의사들은 당류가 넘치는 초가공식품을 너무 많이 먹으면 우울증, 당뇨병, 암에 걸리기 쉽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했듯이 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는 높은 에너지원이 드물었기 때문에 달고 기름진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심리는 조상들의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 현대의 산업사회 환경에서 설탕으로 코팅된 도넛은 우리에게 백해무익하지만, 우리는 설탕으로 코팅된 도넛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환영의 세계에 산다.
도넛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은 돈, 건강, 사회적 지위, 성관계, 고학력, 일류 직장, 해외여행, 명예 등 외부적 조건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들을 성취하면 커다란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 기대한다. 다음번의 도넛, 다음번의 성관계, 다음번의 명품 백, 다음번의 명문대 진학, 다음번의 대기업 입사, 다음번의 승진을 위해 전력투구한다.
그러나 라이트(2017)에 따르면 우리가 구하는 쾌락은 빠르게 사라지며 결국엔 더 큰 쾌락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 붓다가 전하는 메시지다. 실제로 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간절히 바라던 대상을 마침내 얻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불과 2~3주 안에 사라짐을 반복해서 보고했다. 그 무엇을 얻어도 행복감은 쳇바퀴를 돌듯이 원래 수준으로 빠르게 복귀함이 알려져 있다. 말할 필요 없이, 현대의 긍정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경험적 사실은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하며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딴하(tanha), 즉 만족을 모르는 갈애라고 설파한 붓다의 진단과 겹친다.
2) 자연선택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왜 행복은 일시적인가? 왜 우리는 욕망을 채우고도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끊임없이 갈망하면서 불만족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우리는 그 해답을 이미 살펴보았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수백만 명의 낯선 대중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산업사회가 아니라, 백 명이 채 안 되는 가족, 이웃, 친구로 이루어진 협소한 수렵-채집 사회에 맞추어서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선택은 개체의 건강이나 행복을 증진하는 데는 일체 ‘관심’이 없다. 개체가 외부의 실재를 정확히 인식하게 해주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 자연선택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 조상들이 진화한 먼 과거의 환경에서 번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던 유전자를 맹목적으로 골라내는 것이다(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어떠한 의도도 계획도 없는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과정임을 꼭 유의하길 바란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잠시 자연선택을 의인화했을 따름임을 강조하기 위해 따옴표를 쳤다).
일반인들은 종종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건강이나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인류의 먼 조상들은 탐욕도, 근심도, 걱정도, 폭력도 없는 고상한 삶을 살았고, 모든 분란과 갈등은 서구 문명이 뿌린 병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잠시 자연선택이 마치 행위자인 것처럼 가정하여 사고실험을 해 보자. 유전자를 후대에 많이 남기는 개체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음식을 구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이성과 짝짓기하고, 자식을 돌보고, 안전하게 지내고, 질병을 피하고, 배우자의 바람을 방지하고, 부족 간 전쟁에서 승리하고, 사기꾼에게 속지 않는 등의 목표를 잘 달성하는 개체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번식에 도움이 되었던 목표를 성취하면 쾌락을 느끼게끔 뇌를 ‘설계’해야 한다. 반면 번식에 걸림돌이 되었던 사건을 경험하면 불쾌감을 느끼게끔 ‘설계’해야 한다. 애인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외식을 하면, 그리고 그 사진을 SNS에 올려서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큰 행복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둘째, 목표를 달성해 얻는 쾌락이 금세 사라지게끔 뇌를 ‘설계’해야 한다. 가령, 어떤 조상이 성관계했더니 그 쾌락이 몇 달 동안 그대로 지속되었다고 하자. 그는 나무 그늘에서 흐뭇하게 쾌락을 만끽하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반면에, 쾌락이 금방 사라진 다른 경쟁자 조상은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새로운 짝짓기 기회를 찾아 고단한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시달린 끝에 결국 번식에 성공한 조상들의 직계 후손이다.
셋째, 목표를 달성해도 쾌락은 바로 사라짐을 깨닫지 못하고 목표를 달성해서 얻을 쾌락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게끔 뇌를 ‘설계’해야 한다. 신경과학자들은 달콤한 주스 방울을 원숭이 혀에 떨어뜨리고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을 조사하였다. 예상대로, 주스가 혀에 떨어지자마자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다음에는 녹색 불이 켜지면 잠시 후에 주스가 혀에 떨어짐을 원숭이에게 반복해서 학습시켰다. 놀랍게도, 불이 켜진 바로 그 순간에 원숭이의 두뇌에서 더 많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실제로 주스가 떨어진 순간에는 비교적 적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주스가 실제로 혀에 떨어졌을 때보다, 주스가 곧 주어질 것이라 잔뜩 기대하는 바로 그 순간에 원숭이들은 더 큰 쾌락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인터넷 쇼핑몰에서 찜해 둔 신상품을 가격 때문에 망설이다 마침내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을 때의 쾌락이 나중에 그 신상품을 실제로 착용하고 다닐 때의 쾌락보다 더 큰 격이다.
요약하자. 채워지지 않는 갈망 때문에 인생이 괴로움으로 넘치는 까닭은 자연선택은 오직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개체의 행복과 불행은 자연선택에게는 수단일 뿐이다. 목표가 아니다. 자연선택은 개체의 적합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심리 기제라면, 그것이 개체를 행복하게 하건 불행하게 하건 간에 묵묵히 그것을 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성욕, 식욕, 재물욕, 명예욕처럼 끈질긴 욕망이나 질투, 시기심, 분노, 불안, 공포, 혐오, 비탄, 슬픔, 우울 같은 부정적 정서는 우리를 정말로 괴롭히고 할퀴고 쇠약하게 하지만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는 조상들의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
4. 나를 다스리는 주인인 자아는 존재하는가
1) 의식적인 자아와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
진정한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보세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라. 나다운 선택을 해라.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조언이다. 자기 계발, 여행, 심리치료, 체험 등을 다루는 광고, 강연, 서적, 방송에서는 우리의 두뇌 안에 참된 ‘나’가 있다고 하루가 멀다고 외친다.
사실, 우리는 두뇌 안에 우리의 행동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특별한 누군가가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을 종종 경험한다. 가끔은 무분별한 욕망이나 감정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를 꼼꼼히 검토하여 올바른 선택을 항상 일관되게 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의식적 자아(conscious self)’가 두뇌 안에 있다고 믿는다. 2014년의 나와 2024년의 나 사이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이 놓여 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진짜 ‘나’, 영혼, 혹은 의식적 자아 덕분이다. 일반인이 흔히 품는 이러한 믿음에 따르면, 마치 쇼를 총괄하는 총감독이나 국정을 지휘하는 대통령처럼 의식적인 자아가 내 두뇌 안에서 내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붓다는 나를 다스리는 총사령관, 내 모든 선택의 주체, 혹은 의식적인 자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아경》에서 붓다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오온, 五蘊), 즉 색(色, 신체), 수(受, 기본적 감정), 상(想, 지각), 행(行, 정서, 사고, 성향, 습관, 의사결정을 포함하는 선택), 식(識, 의식) 가운데 과연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붓다는 흔히 자아가 지녔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속성인 통제 가능성과 시간적 지속성의 측면에서 오온을 하나씩 검토했다.
먼저 통제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오온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가령, 신체를 크게 다쳤을 때 우리가 고통이 사라지길 간절히 바란다 해도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분노나 두려움 같은 불쾌한 감정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계속 우리를 따라다닌다. 시간적 지속성은 어떨까? 《무아경》에서 붓다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오온 역시 예외가 아님을 비구들에게 설파한다.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신체, 감정, 지각, 선택, 의식이 나의 참된 자아가 아님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신체, 감정, 지각 등의 속박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나를 다스리는 주인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아 사상에도 불구하고, 뇌 안에 작은 뇌가 들어 있다는, 즉 뇌 안에서 특별한 누군가가 우리의 행동을 일관되게 관장하고 통제한다는 믿음은 지금까지도 지식 대중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이채롭게도, 뇌 안에 총사령관 자아가 들어 있다는 시각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실증적 증거가 현대의 자연과학에서 최근 들어 쏟아지고 있다. 바로 살펴보자.
2) 의식적인 자아가 나를 다스리는 주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뇌 안의 통제실을 작은 인간(호문쿨루스, homunculus)이 차지하고 앉아서 합리적인 선택을 일관되게 내린다는 믿음은 논리적인 오류라고 비판했다. 그 호문쿨루스는 어떻게 우리를 통제하는가? 호문쿨루스의 뇌에 더 작은 호문쿨루스가 들어 있어서 호문쿨루스를 통제하는가? 그 더 작은 호문쿨루스는 어떻게 호문쿨루스를 통제하는가? 이 무한 연쇄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뇌 안에는 뇌만큼 똑똑한 작은 뇌가 들어 있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라, 뇌는 뇌보다 덜 똑똑한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뇌 안에 특별한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은 논리적 오류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다수의 실증적인 증거가 인지 신경과학과 사회심리학에서 보고되었다. 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선택을 총괄한다고 잠시 가정해 보자.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했다고 하자. 누군가 다가와서 우리에게 왜 하필 그것을 선택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한 이유를 명시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왜 우리가 특정한 선택지를 택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선택을 총지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로 1977년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과 티머시 윌슨(Timothy Wilson)이 수행한 실험을 들 수 있다. 실험 참여자들에게 일렬로 놓인 스타킹 네 켤레를 잘 살펴본 다음에 그중 가장 품질이 우수한 스타킹을 하나 골라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이 스타킹들은 모두 똑같은 제품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참여자들은 저마다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하는 스타킹을 골랐다. 실험 결과, 맨 오른쪽에 놓인 스타킹이 가장 많이 선택되었다. 즉, 순전히 대상의 위치가 선택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참여자들에게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물었더니, 아무도 ‘이게 가장 오른쪽에 있으니까요.’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참여자들은 ‘이게 감촉이 제일 좋아요’나 ‘이게 빛깔이 가장 선명해요’처럼 스타킹의 원단, 촉감, 색깔 등의 이유를 열심히 주워섬겼다. 요컨대,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한 스타킹을 선택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엉뚱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꾸며서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항상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사람인 양 남들 눈에 보이려 했다.
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선택을 총괄하는 주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이른바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에 관련된 실험이다. 연구진은 실험에 참여한 일반인을 몇몇 사람이 앉아 있는 방으로 안내한 다음, 그들과 함께 옆 방에 있는 누군가와 스피커폰으로 대화하게 했다. 사실 옆 방에 있는 사람은 연구진의 일원이고, 대화 도중에 갑자기 심하게 발작하는 연기를 한다. 연구진은 참여자가 옆 방으로 바로 달려가서 간질 환자를 직접 돕는지, 아니면 남들이 나서 주길 기대하며 가만히 앉아 있는지 관찰했다. 실험 결과, 방 안에 함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참여자가 직접 옆 방으로 뛰어가서 환자를 도울 가능성은 뚜렷이 낮아졌다.
놀라운 대목은 이렇다. 연구진이 참여자들에게 방 안에 다른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간질 환자를 도울지 여부를 결정할 때 영향을 주었냐고 물었을 때, 참여자들은 다소 불쾌해하며 그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참여자들은 ‘발작이 그리 심한 것 같지는 않아서 좀 지켜보려고 했어요.’ ‘옆의 사람들은 무관했어요.’ 등으로 답했다. 요컨대, 간질 환자를 도울지 말지를 실제로 결정한 뇌의 부위는 따로 있고, 우리가 총사령관이라고 믿었던 의식적인 자아는 응급 구조를 남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사람으로 주변에 비치지 않기 위해 그럴듯한 가짜 이유를 적당히 꾸며내는 언론 홍보 담당관처럼 보인다.
의식적인 자아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는 실증 연구는 인지 신경과학자들이 좌뇌와 우뇌가 분리된 환자를 대상으로 수행한 실험을 비롯해서 그 밖에도 많다. 만일 의식적인 자아가 쇼를 총괄하는 총감독이 아니라면, 마음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3) 의식적인 자아는 총사령관 모듈이 아니라 언론 당당관 모듈이다
인간의 마음은 먼 과거의 진화적 조상이 겪었던 수많은 적응적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이 ‘설계’한 다수의 심리 기제(모듈)의 집합임을 상기하자. 마음이 수백, 수천 개의 전문화된 모듈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은 종종 각각의 모듈이 우리의 두뇌에서 공간적으로 구획화되어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렇지 않다. 휴대전화에 있는 수많은 앱을 떠올려 보자. 각각의 앱은 기능적으로 전문화되어 있다. 달력을 표시하거나 음악을 틀어 달라는 특정한 요구에 의해서만 활성화되어 그에 알맞은 반응을 내놓는다. 그러나 각각의 앱이 휴대전화의 기판에서 경계를 지어 나뉘어 있지는 않다. 보드의 어떤 부위를 송곳으로 쑤시면 다른 앱들은 멀쩡하고 달력 앱만 고장 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구성하는 수많은 모듈도 구획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전문화되어 있다.
만약 여러분이 모든 선택을 총괄하는 총사령관 자아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다면, 마음을 구성하는 수많은 모듈 가운데 다른 모듈들로부터 보고를 받아 심사숙고 끝에 의사결정을 내리는 ‘총사령관 모듈’도 있지 않겠냐고 제안할지 모른다. 과학자들은 이 가능성에 대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뇌 안에 작은 뇌가 들어 있다는 발상은 논리적으로 오류임을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계통발생학적인 관점에서 봐도, 마음은 38억 년 전 최초의 생명이 새로운 적응적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에 맞는 해결책을 차곡차곡 서서히 진화시킨 결과로 만들어졌다.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자연선택이 ‘모듈을 총지휘하는 대장 모듈도 있으면 좋겠군!’이라고 생각해서 당장 번식 성공도를 높여 주지도 않는 대장 모듈을 굳이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우리 뇌에는 언제나 수많은 모듈이 활발히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중 아주 일부의 모듈만 의식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눈 뜨자마자 외부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생물과 무생물, 표정과 감정, 색깔과 질감, 밝기와 어둡기, 정지와 동작을 식별하는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의 수준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얻어진 시각적 이미지를 의식할 따름이다. 모듈은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다른 모듈과 상호작용한다. 마음이 수많은 모듈의 집합이고 그중 극히 일부만 우리가 의식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어느 한 모듈을 가리켜 이것이 진짜 나 혹은 진정한 자아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인공지능의 아버지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행위자(agent)들의 공동체이다. 각각의 행위자는 제한된 힘을 가지며 몇몇 특정한 행위자들과만 소통할 수 있다. 행위자 가운데 그 누구도 유의미한 지능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힘은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생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 뇌 안에 쇼를 총괄하는 총감독 ‘나’가 있는 것 같다는 직관을 여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왜 자연선택은 뇌 안에 총사령관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게끔 우리의 뇌를 ‘설계’한 것일까?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커즈번(Robert Kurzban)은 저서 《왜 모든 사람은 (나만 빼고) 위선자인가》에서 우리가 ‘총사령관’이라고 믿어온 자아는 실은 총사령관 모듈이 아니라 남들에게 우리 자신을 유능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홍보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언론 담당관 모듈이라고 설명했다.
백여 명 남짓한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서 평생을 보냈던 우리의 진화적 조상은 자신이 착하고, 유능하고, 믿을 수 있고, 장래가 밝고, 오래 살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광고해야, 실제로 그러한가와 관계없이 높은 평판을 얻어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파트너로 선택받을 수 있었다. 고기 같은 귀중한 음식을 함께 나누거나, 공동 사냥이나 공동 방어에 나서거나, 여생을 함께할 배필을 구하거나, 질병이나 재난이 닥쳐서 도움이 급히 필요한 상황 등에서 사회적 평가나 위신이 낮아서 남들에게 배우자나 동료로 선택받지 못한 조상의 말로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의식적인 자아는 총사령관 모듈이 아니라 내 사회적 평판을 관리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 담당관 모듈이라는 가설은 왜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한 진짜 이유를 종종 알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럴듯하게 꾸며내는지도 잘 설명해 준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끔 결정한 모듈이 그 진짜 이유를 언론 담당관 모듈에게 언제나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알려주지 않는 편이 평판 관리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언론 담당관 모듈로서는 번지르르한 이유를 사후에 꾸며낼 수밖에 없다. 방관자 효과에 대한 실험에서 참여자들이 간질 환자를 도와주러 달려가지 않은 진짜 이유는 ‘자신 말고도 도와줄 사람이 옆에 많이 있음’이었다. 그러나 이를 입 밖에 내면 자기 잇속만 챙기는 비협조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어 자신의 사회적 평판이 하락할 것이기 때문에,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음’이 자신이 도와주러 달려가지 않은 이유라고 진심으로 발언했던 참여자들처럼 말이다.
5. 맺음말
이 글은 불교의 자연적, 실증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핵심 사상이 진화심리학, 인지 신경과학, 사회심리학 같은 현대 과학으로 잘 뒷받침된다는 라이트(2017)의 주장을 요약 설명했다. 붓다는 인생이 괴로움의 연속인 까닭은 우리가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우리의 모든 사고와 감정을 곧 ‘나’의 것으로 동일시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한다면, 나아가 나를 주관하는 주인으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집착에서 벗어나 더 행복하고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이 먼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인류의 조상들이 직면했던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이 ‘설계’한 심리적 적응의 집합이라는 현대 진화과학의 통찰과 겹친다. 우리가 미망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까닭은 개체의 건강, 수명, 혹은 행복을 감소시키더라도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사고와 정서가 자연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다스리는 총사령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총사령관이라 믿었던 모듈은 진화적 환경에서 사회적 평판을 관리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언론 담당관 모듈이다.
불교의 자연적인 측면이 진화생물학과 심리학의 많은 증거에 의해 지지된다는 의미에서 불교는 진실일까? 라이트(2017)는 윤회처럼 불교의 초자연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책에서 논의하지 않는다고 양해를 구했지만, 자연적 불교와 초자연적 불교를 구분하는 라이트의 접근이 과연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철학자 이반 톰슨(Evan Thompson)은 어떤 사건이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우연(偶然)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불교의 교리는 우연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연의 역할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 현대 자연과학과 크게 어긋남을 지적한다.33)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자연적 불교의 가르침이 자연과학에 의해 부정된다는 의미에서, 불교는 진실이 아닌 걸까? 보다 근본적으로, 수천 년 전의 농업 사회라는 시대적 한계라는 틀 안에서 여러 사람이 쓴 종교 경전에 나온 내용 가운데 일부가 현대의 자연과학이 이룩한 발견과 우연히 부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전중환 evopsy@gmail.com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행동생태학 석사를, 텍사스대학교(오스틴) 심리학과에서 진화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족 내의 갈등과 협동, 성적 혐오, 도덕 심리 등의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오래된 연장통》 《본성이 답이다》 《진화한 마음》 옮긴 책으로는 《욕망의 진화》 《적응과 자연선택》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국제캠퍼스) 정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