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입시나 입사에 실패 했을때, 그리고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거나 타인에게 무시를 당했을때 우리는 불안과 우울, 수치감과 죄책감 같은 불쾌한 감정을 경험한다. 이러한 감정을 경험할 때 우리는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방어 기제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자면 방어 기제란 원초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자아가 유지하던 힘의 균형(역동 (무의식 참조))이 깨어졌을 때 발생하는 불안을 처리하기 위한 전략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방어 기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대신 방어라는 표현을 정신분석 초창기부터 사용했으며, 수년 동안의 억압(repression)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방어 기제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프로이트의 딸이자 후계자인 안나 프로이트였다. 그녀는 1936년, 『자아와 방어기제(The Ego and the Mechanism of Defense)』에서 자아(자아심리학 참조)가 방어적으로 사용하는 열 가지 기제에 대해 기술했다. 비록 프로이트가 방어 기제를 직접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안나가 책을 펴낸 시점이 프로이트가 죽기 전이었다는 점에서 방어 기제라는 개념을 프로이트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안나에게 시작해 이후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다양한 방어 기제를 제안했는데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억압(repression)
감당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무의식으로 보내기. 정신분석의 대표적인 방어 기제. 억압의 예로는 며느리가 자신을 괴롭히는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나 초등학생 시절 당했던 성폭행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들수 있다. 심인성 기억상실증도 일종의 억압이다.
부정 혹은 부인(denial)
위협적인 현실을 외면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억압이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부인은 의식이나 전의식 수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이들이 망자에게 문자 메시지나 메일을 보내거나 홈페이지나 블로그의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행동이 그 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망자의 방이나 물건을 일정 기간 동안 치우지 않고 때로는 청소를 하면서 마치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전치(displacement) 혹은 치환(substitution)
문제의 초점을 바꾸거나 대상 바꾸기.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하나의 생각을 수용하기 쉬운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전이 역시 전치의 일종이라고 볼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 직원이 작성한 기안문서에서 오탈자를 집중적으로 찾거나 넥타이를 비롯한 옷매무새를 지적한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이 전치의 예로 자주 인용된다.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
불편한 감정과 생각을 정반대로 표현하기. “미운자식 떡하나 더준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종종 불편한 감정이 있는 대상에게 지나치게 친절을 베푼다. 감정을 다루는데 미숙한 어린 아이들은 좋아하는 친구를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성인들에게서도 종종 나타난다. 또한 오염에 대한 강박사고로 과도하게 손을 씻는 행동을 보이는 강박 장애인 결벽증은 그 이면에 오히려 지저분하거나 난잡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본다. 자신이 매우 연약하거나 못났다고 느끼는 사람이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잘난척하는 것도 반동 형성의 전형적인 예다.
합리화(rationalization)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 결과를 정당화하기.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다. 너무 높이 매달려 있어 따먹을 수 없는 포도를 보고 배고픈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저 포도는아직 익지도 않았군. 난 신포도는 필요없어!”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그대로 받아들일 힘이 없는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현실을 왜곡한다.
이지화(intellectualization)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기. 예를 들면 실연으로 실의에 빠진 대학생이 ‘감정이란 신경전달물질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태연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흔히 지식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어 기제로 상담 과정에서는 인지적 통찰로 나타난다.
감정 분리(emotional isolation)
자신의 경험에서 감정과 생각을 분리시키기.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상처받았던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아무런 감정 없이 말하는 것이다. 마치 그런일쯤은 이제 초월했거나 익숙하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분리시켜 놓았을 뿐이다. 이지화도 감정분리의 효과가 있다.
퇴행(regression)
비교적 단순한 초기의 발달 단계로 후퇴하기. 동생을 본 아이들은 이미 뗀 젖을 먹으려고 하거나 응석을 부린다. 성인의 경우에는 교묘하게 나타난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몸져 눕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기 같은 대우, 즉 세밀한 보살핌과 관심을 기대하기 때문일 수 있다.
방어 기제를 무조건 병리적, 비적응적, 역기능적인 대처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아가 힘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는 점에서는 적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곧바로 인정하고 그 다음날 소개팅을 한다든지, 가족의 장례를 치른 후에 집에 오자마자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이상하다. 일정 기간은 마치 그 사람이 떠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애도의 기간이 끝났을 때는 자아가 힘을 회복해 더이상 방어를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제아무리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사실을 받아들일 정도의 힘이 생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방어 기제를 계속 사용 한다면 다양한 신경증(신경증과 정신증 참조)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이상의 방어 기제를 신경증적 방어 기제라고도 한다.
신경증적 방어 기제가 있다면 건강한 방어 기제도 있기 마련이다. 미국 하버드의대 정신의학자 베일런트(George Vaillant)는 건강한 방어기제로 다음의 네 가지를 꼽았다.
억제(suppression)
감당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억압이 무의식적이라면, 억제는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자신을 괴롭히는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명확히 지각하는 며느리는 그 감정을 통제하면서 시어머니를 대한다. 억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아가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한다. 억압은 화병으로 발전할 수 있으나 억제는 그렇지 않다.
이타주의(altruism)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고 타인의 욕구에 관심 갖기. 예를 들어 불편하고 힘든 감정이나 생각이 자신을 장악하려고 할 때마다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타인을 도우면서 자아의 불안을 연소시키는 방법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승화(sublimation)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으로 욕구나 추동 표현하기. 누군가 흠씬 패주고 싶은 욕구를 승화시켜 격투기 선수가 되는 것, 사람을 칼로 찌르고 싶은 욕구를 승화시켜 외과 의사나 주방장이나 정육점 주인이 되는 것, 사람을 향해 총을 쏘고 싶은 욕구를 승화시켜서 군인이 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유머(humor)
난처하고 불편한 상황을 웃음으로 넘기기. 유머는 농담(joke)과는 다르다. 단순한 재미와 즐거움이 목적인 농담은 그 대상이 주로 타인이지만, 유머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과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다. 유머로 유명한 민족은 유대인이다. 이들의 역사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이런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머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도 유머를 즐겼는데, 프랭클(Victor Frankl)은 자신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를 통해 죽음을 앞둔 유대인들을 붙잡아 주었던 것은 유머라고 했다.
방어 기제는 이제 정신분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분석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방어 기제에 대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다. 우리 모두 불편한 상황과 감정을 대처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방어 기제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건강하지 못한 방어 기제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면 자아의 힘을 키워 자신의 감정과 현실에 직면하도록 해보자. 한편으로는 건강한 방어 기제를 사용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