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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와 싸운 방위병
증 언 자 : 신만식(남)
생년월일 : 1956. 4. 6 (당시 나이 23세)
직 업 : 방위병(현재 부동산 중개업)
조사일시 : 1989. 4
개 요
1980년 당시 방위병으로 5월 21일부터 항쟁에 참여, 화순광업소 무기고 탈취를 주동하고 이후 도청 조사과에서 일했다. 5월 27일 도청 담 옆의 하수구에 숨어 있다 자수했다.
상무대로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하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돼 1981년 3월 3일에 석방되었다.
건달세계의 대장으로
나의 아버지는 사별한 부인에게서 2남 1녀를 두고 나의 어머니는 사별한 남편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 그리고 나는 두 분 사이에서 1956년에 태어났다. 화순 우리집은 전답과 개인소유의 산이 많았고, 아버지가 중개소업을 하셨기 때문에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에도 불구하고 가족관계의 복잡함에서 오는 갈등을 풀지 못하고 중학교 1학년 때 집을 뛰쳐나와버렸다. 무작정 광주로 올라와 임동에 있는 직업학교(BBS)에 들어갔다. 그곳은 고아나 집을 뛰쳐나온 청소년들이 많이 모여 낮에는 주로 구두를 닦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곳 생활도 오래 하지 못하고 집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돈을 훔쳐 서울로 올라갔다. 이렇게 시작한 서울 생활의 대부분을 나는 건달 세계에서 보냈다. 내가 일했던 곳은 남산 밑에 있는 '한진고속'을 무대로 인근 사창가의 기둥서방이나 소매치기 등이 70-80여 명 정도 있었다. 체격도 좋은 나는 건달 생활 1년 만에 두각을 나타내 '한철석'이라는 가명까지 쓰면서 행동대장을 했다. 이후로는 종로까지 진출해 뉴서울관광호텔 부근에서 구두도 닦으며 종로 부근의 건달들과도 어울렸다.
종로에서 살다가 마음을 잡으려고 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렇다고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면 항상 시내를 나돌아다녔다.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도 받았지만 저축은 생각도 못 하고 주로 시내에 나가 다 써버렸다. 이런 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로 내려와서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공과기술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이것도 적성에 맞지 않아 별로 흥미를 못 느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나의 일을 부탁하곤 하셨다. 그 덕분에 '아세아자동차'에서도 근무했고, 다른 회사에도 나갈 수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밤이면 광주시내로 나가 시내를 배회하는 여러 사람을 나의 조직으로 꾸려 내가 대장을 했다. 처음에는 제일다방을 중심으로 한 제일파를 조직하고, 이후에는 조직이 커지자 시내의 큰 조직인 OB파의 새끼조직으로까지 부상했다. 언젠가는 OB를 완전히 잡을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한철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화물차를 사서 양동 주위에서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양동의 건달 세계에도 몸담게 되었다.
1979년도에 군대영장이 나왔다. 나는 방위로 떨어져 화순예비군 중대본부로 배치받아 집에서 출퇴근했다. 방위생활을 하면서도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며 근무가 끝나면 광주시내를 나와 그동안 조직해 두었던 조직원들을 관리했다. 나는 방위생활에서도 아주 편안한 전령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여유를 부리며 살았다.
1980년 5월 3일 조선대 총장인 박철웅 씨를 학생들이 감금한 사건이 일어났다.
박철웅 씨측에서는 광주시내의 건달들에게 박철웅 씨를 구출해 주면 그만큼의 보상을 해준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우리의 조직을 동원하여 그 일에 가담했다.
탈영병인 내가
1980년 5월 당시는 군제대 날짜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였다.
5월 18일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무장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두들겨패는 것을 보았다. 19-20일도 잠깐씩 광주로 와서 본 상황은 18일과 마찬가지였다. 같은 군인의 신분으로 무분별한 군인들의 행패를 보니 기운도 없고 몸이 아파 곧바로 화순으로 왔다. 때문에 내 기억에 특별나게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어느 날인가 노동청 부근의 어느 차고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집안 식구들은 내가 얘기한 광주의 상황을 하나도 믿어주지 않았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나는 중대본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친구인 동료에게만 연락하라고 했다.
군인 신분으로 보고도 없이 근무를 며칠씩 빠진 것은 곧 탈영과 같은 의미였다. 나는 걱정만 하고 별다른 대책도 없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오늘은 집안의 시제가 있으니 함께 모시고 내일 중대장을 찾아가 얘기하고 뜻대로 안 된다면 법대로 처벌을 받자"고 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시제를 모시지 않고 집에만 있다가 광주로 가려고 내 차를 살펴보니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동네의 선배가 '광주가 시끄러우면 내가 광주로 갈 것'이라고 짐작해 차의 부속품을 제거해 버렸다. 부속을 찾아 차를 고친 후 5월 21일 오전 11시경에 광주로 향했다.
차를 몰고 화순 동면 백룡마을에 왔을 때이다. 화순읍과 화순광업소의 중간지점에 있는 백룡마을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시위트럭과 버스들이 많았다. 그곳을 통과하는 차량도 있었고 멈춰 있는 차량도 있었다. 시위버스는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고, 버스 옆면에는 빨간색 페인트로 '김대중을 석방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씌어 있었다. 그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각목을 든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위차량이 많아 도로는 차의 왕래가 어려웠다. 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시위대원 한 사람이 "지금 광주에서는 군인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 당신도 함께 참여합시다"라고 했다. 나는 시위대를 보는 순간 굉장히 신이 났고 차도 빠질 수 없는 상황이라 시위대를 따라 화순읍으로 들어왔다.
화순으로 들어온 시위대는 경찰서를 찾았다. 나는 화순경찰서와 동면 파출소의 위치를 알려주고, 한편으로 내 일이 걱정되어 중대본부로 갔다. 중대본부에서는 이날이 석가탄신일이라 휴일이었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비상근무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본 동료 한 명이 "너는 근무이탈로 되어 헌병이 잡으러 왔다"고 했다. 걱정을 했지만 실제로 닥치고 보니 무덤덤해졌다.
중대본부에서 나와 내 차에 광주에서 온 몇 명의 시위대를 태우고 광주로 향했다. 내 차에 탄 사람들은 광주에서 일어났던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탈영병이라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차안에 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온통 그쪽으로만 신경을 집중시켰다.
화순광업소 무기고를 탈취하고
광주로 와 지원동 부근에서 다른 동료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도 나에게 탈영보고가 되어 있어 큰일났으니 아예 화순으로 오지 말라고 했다. 시위대와 함께 한 나는 동료의 말에도 별로 동요되지 않았다. 우리 시위대는 지원동 다리를 거쳐 시내를 통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향했다. 시내 곳곳은 온통 사람들로 가득 했다.
광주소방서 부근에서는 방석모를 쓴 군인들이 광주역 쪽에 진을 치고 있는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차를 가지고 있던 나는 시위가 격렬해지자 서둘러 시외 버스공용터미널 광장 부근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얼마 후 내 차가 화염병에 맞았는지 불에 타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빠져나와 시위대 버스를 타고 가던중 지원동다리 부근에 버려져 있는 군용 덤프트럭을 발견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 차를 운전하고 지원동으로 갔다. 그곳에는 지역방위를 해야 한다며 모인 지원동 사람들과, 다른 곳에서 온 시위대들로 매우 복잡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카빈이나 M1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주동자로 보이는 사람이 외쳤다.
"오늘 낮에 도청 앞에서 많은 광주시민이 공수부대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완전무장을 해야 하니 총을 잘 쏘는 사람과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모두 앞으로 나오시오."
그 사람의 말에 완전히 동감한 나는 재빨리 지원했다. 방위병이라 총기는 말할 것도 없고, 운전면허증까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다른 몇 사람도 지원했다. 그 주동자는 지원한 우리들에게 화순광업소로 가자며 화순 지리를 잘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화순에 살기 때문에 잘 안다고 대답했더니 나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탈영보고가 되어 있는 방위병이라고 했더니 그는 "우리가 이길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거기에 모인 시위대는 트럭 3대와 다른 차 몇 대(?)에 분승하여 3시 반경에 화순으로 향했다. 내가 운전한 차는 선발대로 화순광업소에 도착하고 다른 차들은 화순읍을 돌며 광주의 상황을 전하기로 했다.
20-30명의 사람들이 선발대로 화순광업소에 도착해 보니 화순광업소 직원들로 보이는 7, 8명의 사람이 8톤 트럭에 화약을 싣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무기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들은 순순히 물러서며 우리에게 도리어 사정했다.
"지금 싣고 있는 차에다 가져가시오. 제발 불만 지르지 마시오."
우리는 광업소의 지하실에 보관된 나무박스를 4대의 트럭에 나누어 실었다. 이때부터 나는 거의 시위차를 지휘하다시피 하면서 트럭의 선두차에서 운전을 했다. 지원동을 통해 광주로 들어왔는데 별다른 제약 없이 해질 무렵 도청에 도착했다. 화순에서 올 때는 4대의 트럭이었는데 도청에 도착해 보니 한 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3대만 도착했다.
도청 앞 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는 곧바로 도청 정문을 통과하여 도청 지하실 옆에 정차했다. 그런 후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함께 지하실로 물건을 옮겼다. 우리가 싣고 온 것은 거의가 화약류였다.
학강국민학교 옥상에서 지역방위를 하고
짐을 푼 후 도청 안에 있던 몇몇 사람들로부터 낮에 벌어진 공수부대의 무차별한 총격사건을 들었다. 흥분한 나는 이러한 사실을 광주 전역에 알려야 한다며 몇 사람을 트럭에 태우고 도청을 빠져나왔다. 학동 쪽으로 가면서 보니 시민들이 지프차 본넷(앞부분) 위에 얼룩무늬 옷을 입은 공수부대원의 시체를 싣고 다녔다. 그 공수부대원은 다리가 축 쳐져 있었는데 흥분한 시민들은 도로가의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다.
"이놈이 우리 광주시민, 학생들을 많이 죽인 놈이다."
광주시민의 공수부대에 대한 분노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내 차에 탄 사람들과 거리의 다른 시위대들은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구호는 다 함께 외쳤지만 같은 성을 가진 '신현확이 물러나라'는 말은 외칠 수가 없었다.
학동에 도착하니 거리에 나와 있던 아주머니들은 우리들에게 수고한다며 김밥과 음료수 등 요기할 수 있는 것을 차 위로 올려주었다. 그때 학동시장 부근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네의 형님을 봤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형님, 혹시 우리 부모님을 뵙거든 내가 광주에 있었다고 전해 주시오. 우리 성공하면 다시 만납시다."
시위대와 함께 데모를 한 나는 저녁 무렵 그 트럭을 몰고 학동다리로 갔다. 그 곳에는 부근의 젊은 청년들이 동네를 군인들로부터 지켜야 한다며 각각 M1이나 카빈 등을 가지고 있었다. 트럭을 그 주위에 놔두고 나는 그쪽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학강국민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대략 70-80명 가량 되었다. 대부분이 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나는 욕심도 많아 총알을 허리 가득히 두르고 군인들이 밤에 쳐들어온다는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한참을 지키고 있는데 누군가 군인들이 온다고 했다. 동시에 우리 쪽에서는 도로에 총을 갈겨댔다. 총소리를 듣자 갑자기 겁이 덜컥났다. 같이 있던 몇 명과 함께 옥상에서 물통을 타고 밑으로 내려왔다.
건물에서 내려와 우리는 학강다리 건너편에 있는 가정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어른들은 없었고 여학생들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그런 후 고생한다며 밥과 술을 주고 양담배 KENT(켄트)까지 주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교대로 보초를 서기로 했다. 나는 먼저 잠을 자고 내 차례가 되어 일어났다. 밖에서는 간간이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밖의 상황을 살펴본다며 그 집을 나와버렸다.
도청 조사과에서 일하다
그곳을 벗어나 시내로 향했다. 구시청 사거리를 지날 무렵 평소 알던 술집에 들렀다. 그곳에서는 총을 멘 시민군 몇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동지, 어서 오시오."
나도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 후 그 중의 몇 명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우리는 군인이 아니면 거의 우리 편으로 간주하고 통성명도 없이 일했다. 그러나 박남선, 김화성, 윤석루 씨 등은 당시에도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다녔기 때문에 도청 안에 있으면서 그들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22일부터 도청 점령 직전까지 조사과에서 일을 했다. 조사과에서는 시민들이 수상하다고 신고한 사람들을 조사했다. 또한 궐기대회시 모금된 돈을 정리하고 식량운반이나 쓰레기 처리 등도 했다. 나는 주로 차를 가지고 도청 안 사람들의 식사해결을 위해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운반했다. 차를 운전하고 가면 동네 어귀마다 아주머니들이 수고한다며 음식물을 많이 주었고, 때로는 도청으로 직접 전화를 해 먹을 것을 가져가라고 했다. 양동시장의 상인들은 과일 등을 올려주기도 했다.
5월 24일 광주시 외곽지역인 효천에서 군인들의 오인사격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기동순찰대인 김화성 등과 지프차를 타고 백운동 부근까지 갔다. 그러나 외곽지역이 위험하다는 그곳 시민들의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그후로는 도청 안에서만 생활했다.
조사과에서 일한 사람은 6,7명으로 여자들도 한두 명 있었다. 궐기대회가 열리면 우리는 모금함을 분수대 위에 올려놓곤 했는데, 그때마다 모금함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돈이 가득 차곤 했다. 이렇게 모아진 돈이나 기타 기부금으로 들어온 돈은 장례식 준비나 기타 수습을 위해 필요한 부분에 쓰여졌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조사과 반장을 하던 사람이 같은 조사과에서 일하던 여자 한 명과 함께 시민들의 성금을 상무관으로 가져다준다며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어디론가 달아난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나는 그 사람을 보면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그 사람은 지금까지 한번도 볼 수가 없다.
독침사건
5월 25일 오후 3-4시쯤 조사과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던 장계범이가 갑자기 독침을 맞았다며 왼쪽 어깨를 틀어잡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내가 깜짝 놀라,
"아니! 왜 그러십니까?"
"도청 안에 불순분자가 있다. 독침에 맞았어. 내 어깨를 빨아주라."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그의 옷을 벗기고 독침을 맞았다는 부위를 입으로 빨아주었다. 상처부위에서 하얀 거품이 일어났고 비누냄새 같은 것이 났다. 이러기를 몇 차례 하자 장계범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나는 물론 입을 몇 번인가 흔들어내고 같이 있던 정향규와 함께 장계범을 지프차에 태워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갔다.
장계범을 병원에 데려다준 후 나는 지프차를 타고 곧바로 도청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전남대병원 응급실에 가보라고 했다. 장계범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급히 서둘러 몇 명과 함께 병원에 와보니 장계범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명 '독침사건'이다. 이후로는 조사과가 상황실 안으로 옮겨 업무를 보았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면서 어지간히 친한 사람이 아니면 가까이 못 오게 했다. 조사과에는 반장이 도망간 후로 김준봉 씨가 부반장을 하고 나는 반장이라고 명명은 안 됐지만 거의 반장격으로 모든 일을 보았다.
25일 후에야 예전에 나의 휘하에 있던 시내의 조직원들을 도청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형님, 몸조심하십시오.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우리는 밖에서 뛸랍니다."
라고 했다. 그중의 두서너 명은 적십자병원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5월 26일 도청 안에는 계엄군이 오늘 저녁에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내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으나 이날도 역시 조사과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녁 8시경 군인들이 도청을 장악한다는 소리가 거의 확실시되자 도청 안의 사람들은 새로운 각오로 '담배-연기'라는 암호도 정했다. 도청 안에는 이미 빠져나갈 사람은 나간 상태고 갱생원 사람들이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려는 사람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대략 4백-5백 명 가량 되었다.
도청 함락 전까지 조사를 하고
5월 27일 새벽이 되었다. 나는 그때도 시민들의 신고로 잡혀온 여러 사람을 조사하고 있었다. 대충 30명 가량이 잡혀와 있었다. 도청 함락 직전에는 간첩혐의로 잡혀온 박인숙과 배00 부부를 조사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이 간첩혐의로 잡혀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 어디서 살아?"
"화순 못 미처 1유판리에 삽니다."
"그럼 000 알아?"
내가 아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름을 댔더니 여자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내 발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분을 잘 압니다."
독침사건 등으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나는 다시 박인숙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 부부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며 이제는 안심하라고 했다. 조사를 마치고 조금 쉬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여기 00동인데 지금 군인들이 총을 쏘며 시내로 가고 있으니 우리 000 좀 바꿔주시오."
"군인들이 지금 도청으로 가고 있습니다. 빨리 피하십시오."
시민들의 제보였다.
나도 마지막으로 내가 도청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동네 형 집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그런데 잘못 돌렸던지 학동에 있는 친구(상호) 누나 집으로 전화가 걸렸다.
"여보세요."
"상호냐?"
"저 만식입니다."
"이런 호랭이 물어갈 놈아, 거기가 어디냐?"
"여기 도청입니다."
"오메, 잡놈 빨리 나오너라. 살아만 나오너라."
"세상이 더럽습니다. 이렇게 군인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되겠습니까?"
밖에서는 계속 헬리콥터 소리가 나고 총소리도 들려왔다. 통화를 하고 있는 중 군인들이 도청 안까지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도청 안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나고 사람들은 도망을 치는지 우탕탕 소리가 들려왔다.
"팡."
"팡."
"꼼짝 마!"
군인들이 내가 있던 상황실로 들이닥쳤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놓고 잽싸게 책상 밑으로 엎드렸다. 이미 도청 안은 정전이 된 상태라 캄캄했다. 그런 후 곧바로 예전 조사과 반장을 하다 도망간 사람으로부터 받은 M16 총을 들고 유리창을 깨고 상황실 뒤편으로 뛰어내렸다. 내 앞에서는 사람들이 총에 맞아 푹푹 고꾸라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눈앞이 캄캄했다. 5월 항쟁 동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전쟁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직접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시체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 벽 쪽으로 시체를 밀었다. 시체는 순간적으로 벽 쪽으로 넘어갔다. 시체 밑에라도 숨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군인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시체 밑에 숨는 것을 포기하고 재빨리 본관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2층에서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들 있었다. 총소리, 총에 맞아 신음하는 소리 등 말로는 형언할 수 없었다.
시체를 다시 한 번 대검으로 찌르는 군인들
나는 본관 2층 복도에 서서 상무관 쪽을 향해 M16 총을 있는 힘껏 드르륵 드르륵 긁어댔다. 그랬더니 상무관 쪽에서 대번에 내가 있는 곳으로 총알이 날아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숨기려고 다시 나무 밑 시체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처음에 치워놓은 시체들 사이에 누운 다음 내 위로 시체를 올렸다.
시체 밑에 누워 있는데 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죽여라. 죽은 놈은 확인 사살하라."
곧바로 군인이 다가와 시체들을 대검으로 푹푹 쑤셔댔다. 내 위에 있는 시체를 대검으로 쑤셔 그 밑에 있던 내 오른쪽 장단지까지 대검에 찔렸다.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아픔도 모른 채 그대로 누워서 버티고 있었다. 시체를 대검으로 쑤신 군인은 총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경황이 없었던 지 다행히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시체 밑에 누워있는데 점차 정신이 아물거렸다. 나는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되씹으며 다시 본관 2층으로 올라왔다. 나도 군인의 신분이지만 이렇게도 무참하게 시민을 죽이는 군인들은 이제 확실한 적이었다. 아픈 몸을 질질 끌고 본관 2층으로 올라온 나는 끝까지 싸우고 죽으리라는 결심을 하며 상무관 쪽으로 다시 한번 있는 힘껏 총을 긁어댔다. 나의 머리 위로 야광탄이 터졌다.
상무관 쪽에서는 군인들이 방송을 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목숨만은 살려준다."
'정말 자수하면 살려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계속해서 날아드는 총알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간은 먼동이 틀 무렵, 도청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나는 죽은 것처럼 푹 쓰러졌다. 가까이 다가온 군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나를 밟고 지나갔다. 군인들은 누워있는 사람들 중 살았다고 판단되면 다리를 질질 끌고 데려갔다. 군지휘관은 시체도 밑으로 끌어내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군인들이 사람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는 순간 그곳을 벗어나 1층으로 내려왔다. 가까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상자들이 지하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지하실 입구 쪽에 있는 몇 명의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길은 도청 담벼락을 밀어버리고 도망가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워 나는 그들과 함께 보이스카웃 건물 바로 옆으로 갔다. 방금 전까지 있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는데, 도청 담벼락에 왔을 때는 나와 다른 한사람뿐이었다. 우리는 도청 담벼락에 바짝 달라붙어 최대한 은신하려고 애를 썼다. 변전소 부근이었다.
쓰레기로 변한 사람들
담벼락에 숨어서 보니 불도저 모양의 차가 시체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와 시체를 끌어올려 트럭에 실었다.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쓰레기였다. 나도 저런 신세가 될 것 같아 완전히 기가 질려버렸다. 이 작업은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르지만 함께 있던 사람은 간데 없고 나 혼자 도청 담을 넘어 노동청 가는 길목의 하수구 뚜껑을 열고 들어갔다. 대검으로 찔린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급한 대로 메리야스를 벗어 찢은 다음 상처난 부위를 묶었다. 상처 부위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피도 나지 않았다.
하수구 속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밖의 도로에서 빵빵거리는 차 소리와 방송이 들려왔다.
"광주시민 여러분! 정상업무로 들어가십시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되어가는지 의심도 나고 죽어도 더러운 하수구 밑에서 죽을 수는 없어 하수구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옆에 우연히 지나가던 시민들은 나의 모습을 보고 얘기했다.
"오메, 학생이 살아서 나오네."
내가 학생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곧바로 부근을 지키고 섰던 공수부대원 몇 명이 다가오더니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나를 걷어차버렸다. 나머지 대원들은 쓰러진 나를 질질 끌고 도청으로 데리고 갔다. 분명히 나는 자수 의사를 밝혔는데 그들은 자수한 사람의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나는 '도청체포'라고 되어 있다.
도청으로 끌려간 나는 이미 도청에 잡혀 있는 사람들과 부상자들과 함께 묶여 버스에 태워졌다. 버스에는 커튼이 모두 쳐져 있었는데 버스에 실리자마자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개만 조금 들어도 여지없이 후려쳤다.
어딜 가는 지도 모른 채 차가 멈춘 곳에서 내렸다.
헌병과 군인들이 빽빽이 서 있고 잡혀온 사람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떠서 보니 내가 끌려온 곳은 상무대 연병장 안이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똑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
독침사건의 주범 장계범을 만나다
이때 독침사건의 장본인인 장계범을 만났다. 장계범은 평범한 잠바 차림으로 수갑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잡혀온 사람들을 분류해 내는 군인들의 앞잡이였다. 잡혀온 사람들의 등 뒤에는 빨간 매직으로 '실탄 몇 발, 총기소지' 등이 적혀 있었다. 내 등 뒤에도 뭐라고 썼는데 알 수는 없었고 지금에 와서 보니 도청 체포로 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잡혀온 사람들의 고개를 들게 한 후 장계범과 대면시켰다. 장계범은 잡혀온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 사람이 했던 활동을 군인들에게 얘기했다. 웬일인지 장계범은 나를 보더니 도청 안에서 자기와 함께 일했던 것을 감춰주었다. 단지 내가 도청 안에서 식사하는 것과 심부름하는 것만 보았다고 했다. 그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헌병대 영창생활이 시작되었다. 영창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먼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을 잠도 자지 못하게 하고 밥도 주지 않았다. 나는 헌병대 영창 안에서 6소대 3연대 소대장을 맡았다. 헌병대 안에 박몽구 중사가 있었는데, 그는 건달 겸 군인이었기 때문에 나와 안면이 있어 다른사람들보다 대접도 더 잘해주고 소대장도 시켜주었다.
우리가 먹는 식사는 군용 식기에 개밥보다 더 형편없이 더럽고 적은 양이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수감자들은 식사 때만 되면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이 자기의 양을 채우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도청에서 대검에 찔린 나의 상처는 치료를 하지 못했으나 쉽게 아물었다. 그런데 5월 27일 도청 안에서 무언가에 맞아 다리에 오밀조밀하게 생긴 작은 반점은 조금만 만져도 열이 나고 고름이 생겼다. 지금도 여전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형편이다. 평소에는 전혀 반응이 없다가 겨울만 되면 다시 도지곤 한다.
처음에는 한 방에 1백50명 정도나 있었는데 도중에 훈방되어 나가는 사람도 있어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사람이 많을 때는 냄새가 많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인간이 아닌 짐승 취급을 받았다.
내가 있는 방에는 후에 송기숙, 박남선, 정동년씨 등이 들어와 함께 있었다.
수감자들은 잡힌 상황이나 장소별로 분류해 수사를 받았다. 나는 합동수사본부단에서 나온 김중권 상사에게 조사를 받았다. 조사받는 과정에서도 수없이 두들겨 맞았다.
헌병대에서 풀려나려고 꾀를 쓰다
합동수사본부단에서 나온 사람 중에 김중권 외에 신재호 상사가 있었는데, 그는 김중권과 같은 방에서 다른 사람을 수사했다. 신재호 상사는 나를 자기와 같은 성씨라며 김중권 상사에게, "중권아! 족보로 따지면 우리 삼촌이다. 잘 좀 봐주라."고 했다.
수사받는 과정에서 나는 모든 사실을 숨겼다.
"나는 군인 신분으로 데모한 적이 없다. 어찌 군인이 데모를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며 김중권 상사를 꼬셨다. 어떻게 밖에서라도 돈을 써 보면 일이 잘 해결될 것도 같았다.
그래서 영창 안에 근무하는 허병장에게 쪽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형수님에게 김중권 상사를 잘 부탁한다고 쓴 내용의 쪽지였다.
"우리 집이 아주 부자인데 이것만 잘 전달해 주면 넉넉히 보답하겠소. 정말 내가 살 길은 이 길밖에 없는 것 같소."
하고 덧붙여 말했더니 그도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다. 일이 생각대로 척척 진행되어 휴일날 김중권 상사는 내 형수와 선배가 운영하는 충장로파출소 옆 '세아'라는 룸살롱에서 융슝한 대접을 받고 왔는지 나에게 아주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한편 집에서는 내가 죽은 줄 알고 가족들이 여기저기 내 시체를 찾으러 다니다가 시체도 찾지 못하자 부모님들은 홧병으로 몸져누우셨다. 27일 새벽 도청에서 전화를 했던 내 시체를 못 찾으니 몸져 누우신 것이다. 더욱 확실하게 내가 죽었다고 이야기한 사람은 도청 함락 직전 간첩혐의를 받고 내가 조사한 박인숙이라는 여자였다. 다행히 그 부부는 살았던지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내가 신원파악을 하려고 얘기했던 동네 아저씨를 찾아간 모양이다. 그들이 나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도청에서 총 맞아 죽었다고 얘기해 가족들은 모두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김중권 상사가 내가 살아서 상무대에 있다고 말하자, 어안이 벙벙한 식구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점차로 김중권 상사에게 잘해줬던 모양이다.
훈방조치로 풀려났다, 다시 화순광업소 무기고 탈취 주범으로
나는 이런 분위기를 한껏 활용해 김중권 상사에게 말했다.
"나는 5월 21일 병무청 앞을 지나 오는데 지프차를 타고 가던 학생들이 느닷없이 손을 들어라고 하더니 도청으로 데리고 왔다. 학생들은 군인인 나에게 시민들을 염탐하러 왔다며 도청 조사과에 27일까지 잡아두었다."
다행이도 내 말은 상황과 척척 맞아떨어졌다. 같이 조사과에 있던 장계범이도 나를 모른 척 해주었고, 조사과 부반장인 김중봉 씨도 나를 모른다고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7월 21일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다른 석방자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리나케 버스에서 내려보니 덩치가 매우 큰 사람과 몇몇과 화순에서 온 형사들이 있었다. 화순의 형사들이 나를 가리키며,
"저놈이 바로 화순광업소 무기탈취 주범이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그 지굿지긋한 헌병대 영창 안으로 끌려갔다. 나를 본 김중권 상사는 거짓말을 했다며 나를 초죽음 상태로 만들었다.
영창 안의 동료들은 열심히 싸우다 잡혔으니 사실대로 밝히라며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나는 다시 영창 안의 소대장을 맡았다.
내가 다시 들어온 지 얼마 후 양강섭씨가 얼마나 맞았는지 거의 초죽음이 되어 들어왔다. 비록 내 몸이 불편했지만 나보다 더 심한 사람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소대장의 자격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양강섭 씨의 상처부위에 습포를 해 주었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헌병 말단 졸병에게 들켜 불려나갔다. 하필 안면이 있는 군인들이 없어 나는 그 헌병에게 팬티 차림으로 3일 동안이나 두들겨맞았다. 이 외에도 주로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을 돌봐주거나 담배를 나눠피다가 군인들에게 들켜 맞곤했다.
7월 말경 나는 다시 조사를 받았는데,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근무이탈', '살인', '포고령 위반 및 소요죄' 등의 죄목으로 군사재판 때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번째 재판 땐 무기를 선고받았다.
81년 3월 3일 석방
한편 가족들은 친척이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서울의 박장군을 찾아가 나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처음에는 박장군 부인이 "우리 남편을 죽이려고 한 사람을 어떻게 살려주겠느냐"며 버티다가 조카와 아버지의 정성으로 뜻이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가족들과 면회도 되고 그동안의 나의 죄목도 없어지고 나는 새로이 조사를 받았다. 죄목은 간단하게 '근무이탈' 과 '소요죄 및 계엄령 위반'으로 구형 7년, 실형 3년을 선고받았다.
실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었다. 나는 4사 하층 10방에 수감되었다.
여기서도 먹는 것은 헌병대와 마찬가지로 엉망이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도소에서는 식사개선을 위해 일명 '식기짝 데모'도 했다.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데모를 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직계가족의 면회가 되고 누군가로부터 영치금도 들어왔다. 한빛교회 윤기석 목사로부터 성경책이 들어왔다.
그러나 교도소 안에서는 학생들이 나를 조선대 '5.3 사건'의 진압 주범으로 생각했다. 내가 관여를 했지만 한꺼번에 나를 주범으로 간주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차츰 학생들의 오해가 풀려갔지만 조선대 학생이던 곽재구씨 등은 여전했다.
1981년 3월 교도소내에는 일반인들이 석방된다는 소문이 퍼졌다. 군인 신분은 출감하기 어렵고 다른 곳으로 이감된다고 했다. 또 어디로 끌려갈 것인지 겁이 났다.
1981년 3월 2일 저녁 교도관이 각 방을 돌며 이름을 불렀다. 우리 방으로 온 교도관이 당시 내 수번 1007번을 불렀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이름을 불렀다.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짐을 챙겼다.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며 작별했다.
"몸조심하십시오."
"고생들 하십시오."
호출한 사람들과 함께 방을 나와 걸어가는데 고향 선배인 교도관이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주었다. 이것을 받은 나는 직감적으로 석방되는 줄 알았다. 호출된 우리들은 교도소 2층에서 그날 저녁을 보냈다. 2층에서 보니 순천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보였다. 얼마나 감격했던지 담배 한 갑을 다 태우고 그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3월 3일 아침 교도소에서 주는 아침식사를 우리들은 더럽다며 먹지 않고 교도소 운동장으로 집결했다. 5·18 관련자는 별로 없고 일반 잡범들이 많았다. 교도소 운동장에서 교회로 들어간 후 곧바로 석방되었다. 교도소 문을 나올 때 누군가 나를 대열의 제일 앞쪽에 세웠다.
교도소 앞에는 환영인파가 많았고 여기저기서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나에게 다가온 기자가 질문을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이름을 대며 맞는지 묻기도 했다. 나를 본 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입고 자식을 살려준 대통령에게 감사한다며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우리는 3월 3일 특사로 석방된 것이었다. 교도소 앞에서 광주항쟁 관련자는 환영회를 한다는 말을 듣고 한빛교회로 갔다. 나는 환영회에 참석한 다음 가족들과 화순으로 갔다.
부산에서 구두를 닦고
화순에 도착해 나를 7월 2일 붙들어맨 화순의 한형사 집을 찾아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잘 나왔다며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단지 화순광업소에 있는 무기고 탈취의 주범으로 나를 몰아세웠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얘기를 했다. 왜냐하면 화순에 광업소가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모든 것을 나에게 얽어씌웠기 때문이다.
이후 몸이 아파 집에서만 쉬고 있었다. 삼성교통 택시 운전을 2개월 동안 했으나 몸이 아파 그만두었다. 화순 동네에서는 내가 감옥에를 갔다오니까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경찰에서는 마을 이장을 통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그동안 나를 보살피느라 몸이 쇠약해져 있는데, 내가 감옥에서 나와서도 사람 대접을 못 받자 술만 드셔 건강이 더욱더 악화되어 갔다.
1982년 7월 견디다 못한 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의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나를 마치 죽을 죄나 지은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다행이 집안 삼촌의 도움으로 부산 북부산세무서 앞에서 구두를 닦았다. 세무서 근방을 무대로 구두 닦는 일은 벌이가 좋았다. 세무서 직원들은 한 달간 계약을 해놓고 구두를 닦았다. 그리고 운전을 했던 나는 세무서 직원을 상대로 운전도 교습해 주었다.
이곳에서 상당히 돈을 모아 1983년 구정때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죽음
그런데 정월 초사흗날 12시에 64세의 나이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나의 뒷바라지만 하다가 눈을 감으신 아버님을 생각하니 세상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화순에 사는 5·18 관련 동지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례식 후 곧바로 어머님만 시골에 놔둔 채 다시 부산으로 가서 그 생활을 계속하다 1986년 8월에 광주로 왔다. 부산에 내려갈 땐 단돈 8천 원을 가지고 갔는데 꽤 많은 돈을 모아 광주로 오게 됐다.
광주에서 광주항쟁 때 알게 된 김창길 씨의 친구와 순천에서 아파트 공사를 하다가 말다툼 끝에 순천 건달들하고 싸우다 폭력으로 광주교도소에서 10개월을 복역했다.
1987년 6월 출감 후 광주에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무대로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구두도 닦고, 차를 사서 '나라시'도 했다. 8월경 몇몇 사람과 함께 광천동사거리에 '부광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차렸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는 처의 친정인 무안 일로에 가서 김대중 씨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다. 국회의원 선거 때는 아내가 정상용 씨 선거운동을 많이 했다. 나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방 동지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부추기기도 하고 직접 참여도 시켰다.
지금도 오월 단체에 한 군데도 가입하지 않고 뒤에서만 지켜보는 입장에 있다.
기왕에 단체를 만들었으면 서로 힘을 합해 뭔가 한 가지로 통일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재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여 어느 정도 형편도 넉넉한 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5·18 당시에 고생했던 동료들 중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과, 현재 알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조사.정리 김정기)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