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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기우는 데로 간다
“장마철에 모두들 절 관리 잘 하시고 몸 관리 잘 하십시오.”
하고 큰스님께서 인사오시는 스님들에게 덕담하셨다.
2019년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 첫날이었다.
스님들께 법공양 올린 책들이 모자랄 만큼 많은 분들이 오셨다.
“사람은 다 마음이 가는 데로 가는 거야. 설명 안 해도 다 알잖아. 중처편추(重處偏墜)라고 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지.”
하고 큰스님께서 기도철 열 일을 제치고 참석하신 스님들을 고마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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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고장에서 사시는 스님께서 첫 복숭아 한 상자와 절 마당에서 처음 수확했다는 자두를 가져오셨다. 장호원에서부터 복숭아와 자두를 싣고 운전을 해오신 스님은 지난 번에 큰스님께 눈 건강법도 가르쳐 주신 스님이어서 법명을 여쭤보니 그럴 연(然)자 깨달을 오(悟)자 연오스님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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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학스님도 못오시고 입승스님도 못오셔서 ‘누가 사회를 볼 마땅한 사람이 있나’ 하고 큰스님이 걱정하셨다. 염불 잘 하시는 것이 첫째 기준인 줄 알았는데 좀 나중에 사회볼 스님의 기준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스님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남 앞에 나가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고 모든 분들이 수긍할 수 있게 모든 것을 갖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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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연꽃 사진을 인화해 오셔서 큰스님께도 드리고 자원봉사자들에게도 주신 스님이 계셨다. 절에 오시는 거사님이 이번 여름 네 시간이나 연밭에 나가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찍어오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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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견스님은 화엄경 사경을 열심히 하시는데 지난 번에 들은 것만 해도 네 번이상 사경하셨었다. 큰스님께서는 ‘공부하면서 인터넷에 자료 올리고 하는 사람은 이 사람 뿐이야’하고 늘 볼 때마다 말씀하셨다.
이번에 그림 같은 이층 절을 짓고 새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절 이름을 뭘로 정할지, 왕복사가 있고 묘엄사가 있고 어떤 게 더 나을까요?”
하고 큰스님께 여쭤보셨다.
“이름 두 개를 지어놨어? 화엄경 공부한 결과네. 화엄경 냄새가 나는구만.”
큰스님이 새 절의 위치가 어딘지, 그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풍경인지 여러 사항들을 물으셨다. 묻고 답하시는 동안 무슨 이름이 더 좋을까를 생각하셨다고 나중에 설명해 주셨다.
“스님 정도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겠는데 왕복사. 왕복은 무제나 동정은 일원이라. 왕복이 이 우주법계의 실상이야. 스님 같으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지. 거기 위치도 사람들이 오고가고 오고가고 하는 곳이잖아. 왕복사라고 하세요.”
하시면서 절 현판을 새길 때는 요즘 글씨로 쓰지 말고 오래된 경전 안에서 글자들을 집자해서 쓰라고 하셨다.
“우리 왕복서 책 제목도 집자한 거거든. 목판본에 있는 거라. 옛날 글자는 아무리 봐도 싫증이 안나. 축하합니다.”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화엄경 본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강설 제64권 입법계품 제5를 점안하고 들어가도록 하겠다.
서문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친견하고 나서 그 앞에 나아가 오체(五體)를 땅에 던져 절하고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참다운 선지식을 만났습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문이니
저로 하여금 진실한 도에 들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법이니
저로 하여금 여래의 지위에 이르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배[船]이니
저로 하여금 지혜 보배의 섬에 이르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횃불이니
저로 하여금 열 가지 힘의 빛[十力光]을 내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길이니
저로 하여금 열반의 성에 들어가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등불이니
저로 하여금 평탄하고 험한 길을 보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다리이니
저로 하여금 험난한 곳을 건너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일산이니
저로 하여금 크게 인자한 그늘을 내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눈이니
저로 하여금 법의 성품의 문을 보게 하는 연고입니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바다의 조수이니
저로 하여금 크게 가엾이 여기는 물[大悲水]을
만족하게 하는 연고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선지식은 곧 우리들이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대방광불화엄경이니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黙動靜)에서 한순간도 이 대방광불화엄경을 멀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2017년 7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려고 무려 일백일십성(一白一十城)을 돌고 돌면서 행각을 하는 내용은 불교안에서 너무나도 유명한데 화엄경에 근거한 이야기다.
숱한 난행고행을 거치면서 선지식을 찾아다니던 선재동자가 ‘드디어 참다운 선지식을 만났다’고 스스로 이야기 하면서 그 선지식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문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법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배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횃불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길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등불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다리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일산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눈이다.
선지식은 일체 지혜에 나아가는 바다의 조수다.
저로 하여금 크게 가엾이 여기는 물을 만족하게 하는 연고다.’
하면서 전부 그 까닭을 해석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사람을 인식하고, 또 세상을 어느 정도 인식하면서부터는 많은 선지식을 만난다. 옛날에는 두 살 세 살 무렵 아이들을 서당에 던져놓고 부모들은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하였다. 지금으로 치면 유아원 같이 서당에 아이들을 맡기고 1년에 벼 두 세 가마니나 쌀 한 두 가마니를 가져다준다. 아이가 천자문이라도 한 권 뗐다하면 공부를 했든 안했든 검증해 볼 필요도 없이 떡이라도 한 말 해서 서당에 갖다 주어서 다같이 나누어 먹는 분위기였다. 그 서당에서 형들을 만나고 요즘은 유아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고 초등학교에 가서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데 이런 모든 만남들이 사실은 전부 선지식을 만나는 일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렇게 많은 선지식을 만난다. 그러면서 내 자신을 성숙시켜 가고 성장시켜 간다.
나는 어려서 출가해서 많은 스님들을 친견하고 그 밑에서 공부도 하고 선방에서 몇 철씩 지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는 화엄경에 선지식 낙점을 찍었다. 가장 위대하고 믿을만하고 바른 길을 인도해 주는 선지식이 화엄경이라고 낙점한 것이다
진정한 선지식은 화엄경이다.
여기도 보면 끝에 ‘이와 같이 위대한 선지식은 곧 우리들이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대방광불화엄경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에서 한순간도 이것을 멀리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평소 나의 신념이다.
살아보니까 사람을 선지식이라고 의지하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100퍼센트 완벽한 선지식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오온, 육근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 거기에 많은 문제가 따른다. 자연스럽게 실수도 따르게 되고 온갖 인간적인 문제도 따르게 된다. 그래서 크게 존경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께 오래 살면 살수록 허물만 보일 뿐 별로 믿음이 가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지식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보는 사람의 눈이 잘못이다. 그런 점만 찾아서 보는 못된 습성 때문에 또 그런 점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 이야기를 하다보면 진정한 선지식은 이 화엄경 같은 선지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자들은 팔만대장경이라고 해서 수많은 경전을 접하고 살아간다. 평생동안 연구하고 독송하고 거기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가르침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고 법회도 하고 경산림(經山林)도 하고 강의도 한다. 그런 여러 가지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을 만한 의지할 바의 경전, 세세생생 의지할 바의 경전인 소의경전은 정말 화엄경을 덮을 것이 없다.
어느 종단에서는 혹 금강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고 하지만, 선사들이 많은 경전을 보려니까 귀찮고 또 거기에 어려움도 따르고 하니까 그만 금강경으로 소의경전을 정한 것이다.
어떤 종단에서는 법화경을 가지고 소의경전을 삼는다. 법화경 역시 평생 아니 세세생생 마음을 탁 거기에 붙이고 선지식으로 삼고, 모든 것을 그 경전에서 해결하려고 할 때는 좀 부족한 점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렇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때는 소의경전이 화엄경이었다. 우리나라 곳곳의 지명이 전부 화엄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지어졌고 또 모든 불교인들이 화엄경을 공부했다. 그런 것을 보더라도 신라시대 소의경전은 화엄경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원효스님, 의상스님 같은 성인들은 이 화엄경으로 소의경전을 삼고 살아왔다. 원효, 의상같은 성인이 그렇게 사셨으니 우리가 마음놓고 세세생생 의지해야 할 진정한 선지식은 화엄경 같은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늘 점안한 화엄경강설 64권이 선지식에 대한 내용이라서 부연해서 말씀드린다.
오늘 공부 들어가도록 하겠다. 414페이지(화엄경 제2권 민족사刊)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五
十地品 第二十六之二
正宗分
八, 第二離垢地
6, 重頌
(1) 離垢地의 十心
爾時에 金剛藏菩薩이 欲重宣其義하사 而說頌曰
質直柔軟及堪能과 調伏寂靜與純善과
速出生死廣大意여 以此十心入二地로다
그때에 금강장보살이 그 뜻을 다시 펴려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정직하고 부드럽고 참을성 있고
조복하고 고요하고 순일한 마음과
생사를 뛰어나는 넓고 큰 마음이여
열 가지 마음으로 이구지에 들도다.
*
중송(重頌) : 게송으로 그 뜻을 거듭 설하다
*
이구지의 산문은 끝났고 그 내용을 간추려서 거듭 다시 복습하는 입장으로 게송이 쓰여졌다. 소위 중송부분이다. 이 중송이 산문에서 말하지 못한 것을 좀 더 자세히 부연설명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생략이 많다.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거나 번역도 해보고 설명이나 해설도 붙여보고 사기도 만들어 보려면 앞에 나왔던 산문 부분과 연관시켜서 보면 더 정확하게 공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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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지(離垢地)의 십심(十心) : 이구지에 들어가는 열 가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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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406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刊)에도 열 가지 마음이 나왔었다. 여기 또 소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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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그 때에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 금강장 보살이
욕중선기의(欲重宣其義)하사 : 그 뜻을 거듭 펴시려고
이설송왈(而說頌曰) : 게송을 설해 말씀하셨다.
질직유연급감능(質直柔軟及堪能)과: 질직(質直)은 하나의 낱말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질(質)자 다르고 직(直)자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산문에서 열 가지 마음을 소개했을 때는 처음에 정직심이라고 하였는데 여기는 질직심이라고 하였다. 질직심 유연심 감능심 조복심 적정심 이렇게 나온다.
질직의 질은 순박하다는 뜻이고 직은 정직다는 뜻이다. 순박하다는 질(質)과 정직하다고 할 때의 직(直)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가지 도구들을 많이 갖추고 살게 된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도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나도 컴퓨터부터 해서 여러가지 도구들을 가지고 있고 얼핏 계산해도 수 십종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지난겨울에 방 수리를 하면서 두꺼운 판자로 지팡이 꽂는 통을 하나 만들었다. 큰 폭으로 썬 두꺼운 판자에 대패질도 하지 말고 절대 손을 대지 말아달라고 내가 부탁했다. 그냥 툭툭 자른 나무 그대로 네모로 못질만 딱 해서 우산꽂이도 하고 지팡이 꽂이도 하는데 요즘은 그 나무통이 제일 아름답게 보인다.
나에게 다구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도구들이 많고, 조각하고 대패질을 하고 밀고 매끄럽게 만든 물건들도 많다. 그런 불상도 많다. 불상은 얼마나 깨끗하게 잘 다듬어서 만드는가. 그런데 불상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몰라도 그렇게 다듬은 것 자체가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요즘 나에게 볼수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대패질 한 번 안하고 나무를 툭툭 잘라서 투박하게 만들어놓은 지팡이 꽂이다. 볼수록 정감이 가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이 질박하다고 할 때의 질(質)이다. 그때 박자는 박(朴)씨라고 하는 박자. 소박(素朴)하다고 하는 그 자를 쓰기도 한다. 질(質)은 나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을 전혀 가미하지 않은 상태로 나타내 보이는 것 그런 뜻이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손을 많이 댔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선을 많이 긋고 색칠을 여러 가지로 했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어떤 선심(禪心)에서 우러나는 하나의 동작으로 붓으로 한 번 일필휘지 하는 그림, 그림이랄 것도 없이 그것은 하나의 표현인데 그런 것이 또 세상에 아주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는 것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가 있다.
직(直)은 아주 정직한 마음이고 다음으로 유연하고 부드러운 마음과 감능심 하는 것은 적극적인 마음이다.
조복적정여순선(調伏寂靜與純善)과 : 조복심은 자기 자신을 잘 관리 감독해서 어떤 경계를 대해서도 함부로 마음이 작용하지 않도록 다 수용하고 속으로 소화해냈을 때를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경계를 대하는가. 그때마다 아주 금방 반응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런가,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하는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가’ 0.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반응을 한다. 그것은 못된 성질을 조복 받지 못해서 그렇다.
조복이라는 것은 수용하고 걸러서 확실하게 소화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경계를 대할 때도 함부로 표현하지 않고 함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적정은 그 보다 더 깊은 마음이다. 거기서 또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순선심이다. 아주 순하고 선한 마음이다.
속출생사광대의(速出生死廣大意)여 : 빨리 생사를 벗어난 마음, 광심 대심 넓은 마음 큰 마음이여
이차십심입이지(以此十心入二地)로다: 이 열 가지 마음으로 제2지인 이구지에 들어왔도다. 산문에 있었던 내용인데 시가 되어서 더 근사하다.
섭율의계도 이렇게 게송으로 표현을 했다.
(2) 攝律儀戒
住此成就戒功德하야 遠離殺生不惱害하며
亦離偸盜及邪婬과 妄惡乖離無義語로다
不貪財物常慈愍하며 正道直心無諂僞하며
離險捨慢極調柔하야 依敎而行不放逸이로다
이구지에 머물러 계행 공덕 성취하여
살생과 해치는 일 멀리 여의고
도둑질과 사음과 망어와 악구와
이간질과 뜻 없는 말을 또한 떠나리.
재물을 탐하지 않고 늘 자비로우며
바른 도와 곧은 마음 아첨이 없고
간악함과 교만 떠나 조화롭고 부드러우면
교법(依敎)대로 수행하고 방일하지 않으리.
*
섭율의계(攝律儀戒)
*
주차성취계공덕(住此成就戒功德)하야 : 제2지인 이구지에 머물러서 계의 공덕을 성취한다. 십지를 보시 지계 할 때의 십바라밀에 대비하면 제2지는 계율이다. 계의 공덕을 성취해서
원리살생불뇌해(遠離殺生不惱害)하며: 살생을 멀리해서 뇌해하지 아니하며, 괴롭게 하거나 해치는 일이 없으며
역리투도급사음(亦離偸盜及邪婬)과 : 또한 떠나는데 무엇을 떠나는가? 투도, 사음
망악괴리무의어(妄惡乖離無義語)로다: 망어, 악구, 괴리, 무의어를 떠난다. 괴리는 양설이고 무의어는 의미 없는 말이다. 기어와 같은 뜻이다.
이번에 큰 나라에서 온 친구는 무의어를 많이 해서 입에 발리게 남 칭찬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 미군부대에 가서도 거기 나온 사람들 이름이나 소임도 전부 다 기억하고 그 사람들을 칭찬하는데 ‘수고한다’고 ‘당신들이야 말로 미국의 대표자라고 당신이 미국을 지킨다’고 사병 하나 앉혀놓고 그렇게까지 립서비스를 했다. 요즘은 입으로만 칭찬하는 것을 립서비스라고 한다. 그래놓고 우리 기업인들을 수십 명 오라고 해서는 다른 사람 은 이야기할 기회도 안주고 자기 혼자 다 떠들고 갔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저 전부 립서비스다. 입으로 다해버린다. 무의어, 기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내가 어지간하면 잘 참고 잘 듣는데 ‘비단결 같은 말도 적당히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불탐재물상자민(不貪財物常慈愍)하며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고 항상 자비와 연민으로써 중생을 대한다.
정도직심무첨위(正道直心無諂僞)하며 :정도와 곧은 마음으로써 아첨하거나 거짓을 꾸며서 말하거나 삿되게 말하거나 하는 것이 없으며
이험사만극조유(離險捨慢極調柔)하야 : 험한 모습을 떠나고 교만하고 아주 잘난듯이 거들먹거리는 것도 다 버린다. 이험사만(離險捨慢) 좋은 말이다. 지극히 조화롭고 부드러우며
의교이행불방일(依敎而行不放逸)이로다 : 가르침을 의지해서 게으르지 아니함이로다.
섭율의계의 게송은 두 개인데 상당히 함축이 된 좋은 내용이다.
(3) 攝善法戒
地獄畜生受衆苦와 餓鬼燒然出猛焰이
一切皆由罪所致니 我當離彼住實法이로다
人中隨意得受生과 乃至頂天禪定樂과
獨覺聲聞佛乘道가 皆因十善而成就니
如是思惟不放逸하야 自持淨戒敎他護하며
지옥과 축생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아귀는 불에 타서 불길이 맹렬하고
온갖 것이 모두 다 죄로 생기니
내가 모두 떠나고 진실한 법에 머물리라.
인간에 마음대로 태어나거나
유정천에 태어나는 선정의 낙과
독각이나 성문이나 부처 되는 길이
모두가 십섭(十善)으로 성취되나니
이런 일 생각하고 방일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계행 갖고 남도 권하도다.
*
섭선법계(攝善法戒)
*
선법을 섭하는 계다.
*
지옥축생수중고(地獄畜生受衆苦)와: 지옥과 축생 다음으로 아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여러가지 고통을 받는 것과
아귀소연출맹염(餓鬼燒然出猛焰)이 :아귀는 마음에 늘 부족을 느끼는 사람 늘 허겁지겁 속이 불 타오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귀다. 아귀라고 하는 것이 경전이나 책자에 보면 더러 그림도 있기는 있지만 그림에 있는 아귀, 전설에 있는 아귀는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너무 어떤 물질이나 아니면 어떤 일에 불타는 마음, 목말라 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자세를 가질 때 그것이 아귀다. 출맹염이 맹렬한 불꽃을 뿜어내는 것이
일체개유죄소치(一切皆由罪所致)니 : 그 모습 지옥 아귀 축생 불꽃을 맹렬하게 뿜어내는 듯한 모습들은 전부 죄의 소치다. 세상사 경계나 물질이나 명예에 허덕이고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아당이피주실법(我當離彼住實法)이로다 : 내가 마땅히 그러한 것을 떠나서 다 실답고 진실한 법에 머물게 하는 도다. 죄의 소치, 열 가지 선하지 아니한 죄를 지어서 그러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것을 떠나서 다 실다운 법에 머물게 하는도다.
*
인중수의득수생(人中隨意得受生)과 : 사람 가운데 뜻대로 생을 얻는 것과
내지정천선정락(乃至頂天禪定樂)과 : 내지 유정천 저 가장 높은 하늘에서 태어나서 선정락을 누리는 것과
독각성문불승도(獨覺聲聞佛乘道)가 : 독각과 성문과 불승도가
개인십선이성취(皆因十善而成就)니 : 다 십선을 말미암아서 성취하는 것이다.
여시사유불방일(如是思惟不放逸)하야 : 그런 이치를 다 알아서 이와같이 사유해서 방일하지 아니해서
자지정계교타호(自持淨戒敎他護)하며 : 스스로도 정계를 가지고 그러한 청정한 계율을 다른 사람에게 잘 가르쳐서 스스로 보호하게 한다. 우리나라 스님들 중에 율사스님들이 꽤 있다. 종단 차원에서 계율을 가지고 수계식을 할 때 전부 이 계단에 있는 스님들이 그것을 담당을 한다. 율원이 있어서 그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훈련이나 사람 관리하는 문제를 이론적으로도 공부를 많이 한다. 그분들은 아주 숙련된 분들이어서 나가서 행자들 가르치는 거라든지 사미들 가르치는 것을 참 잘한다. 그것이 교타호다. 다른 사람을 잘 가르쳐서 스스로 보호하게 한다.
(4) 攝衆生戒
復見群生受衆苦하고 轉更增益大悲心이로다
凡愚邪智不正解하야 常懷忿恨多諍訟하며
貪求境界無足期하니 我應令彼除三毒이로다
愚癡大暗所纏覆로 入大險道邪見網하며
生死籠檻怨所拘니 我應令彼摧魔賊이로다
四流漂蕩心沒溺하며 三界焚如苦無量하며
計蘊爲宅我在中하니 爲欲度彼勤行道로다
設求出離心下劣하야 捨於最上佛智慧일새
我欲令彼住大乘하야 發勤精進無厭足이로다
또 중생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는
점점 더 자비한 마음 증장하도다.
범부의 삿된 지혜 정견(正見)이 없어
항상 분노를 품고 싸우고 다투기를 잘해
육진(六塵)경계 탐하느라 만족할 기약 없어
내가 응당 저들에게 삼독을 제거하게 하리라.
어리석음의 큰 어둠에 덮인 바 되어
크고 험한 길과 삿된 소견의 그물에 들어가서
생사의 우리 속에 구속됨을 원망하고 있으니
내가 응당 저들에게 원수의 마군을 부수게 하리.
네 가지 폭류에 표류하며 마음 잠기고
삼계가 불타는 듯 고통이 한량없어
오온으로 집을 삼아 ‘나’를 거기에 두니
그들을 제도하려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도다.
설사 벗어나기를 구하여도 마음이 용렬하여
가장 높은 부처님 지혜를 모두 버릴새
내가 그들을 대승의 법에 머물게 하려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만족을 모르도다.
*
섭중생계(攝衆生戒)
*
부견군생수중고(復見群生受衆苦)하고 : 다시 보니 온갖 군생들이 여러 가지 고통을 받고
전갱증익대비심(轉更增益大悲心)이로다 : 그러한 것을 받는 것을 보고는 크게 어여삐 여기는 마음인 대비심을 더욱더 치성하게 한다.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 꾸짖거나 비방하거나 ‘저 사람은 저래가지고 지옥에나 가지 뭐 어쩌겠나’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대비심이다. 다 불쌍하게 여기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더 증장한다.
자갈치 시장에 간 티벳스님이 ‘살아있는 생선을 자르는데 마치 배추 한 포기를 갖다 놓고 칼로 배추 포기를 자르는 것과 같이 자르더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하였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속이 떨렸다는 그것이 대비심이고 증익대비심 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 뭐 저렇게 해가지고 지옥에나 가지 어쩌겠나’ 이렇게 내몰아 치는 것이 아니고 정말 불쌍하게 여기는 자세다.
*
범우사지부정해(凡愚邪智不正解)하야 : 어리석은 범부가 삿된 지혜로써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상회분한다쟁송(常懷忿恨多諍訟)하며 : 항상 분과 한을 품고 있다. 누가 잘 되면 거기에 대한 질투심, 분심, 한심 이런 것을 품고 있는 것이다. 중생들에게 좋지 아니한 성질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기가 그러한 능력이 없어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그런 복을 받지를 못한다는 생각은 안하고 질투심을 내고 분심을 낸다. 그런 마음들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중생들에게 아주 좋지 아니한 속성인데 그런 것을 품어서 다투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탐구경계무족기(貪求境界無足期)하니 : 경계를 그렇게 탐해서 만족할 기약이 없음이니
아응영피제삼독(我應令彼除三毒)이로다 : 내가 응당 그들로 하여금 삼독을 제하게 하는도다. 탐진치 삼독이 원인이니까 탐진치 삼독을 제하게 하는 것이다.
*
우치대암소전부(愚癡大暗所纏覆)로 : 어리석음의 큰 어둠이 뒤덮인 바로써
입대험도사견망(入大險道邪見網)하며: 큰 험한 길에 들어가서 사견의 그물에 들어간다. 삿된 그물에 들어간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견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를 모르고 진리를 모르고 인과를 모르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제일 가슴에 잘 와 닿는 낱말이 인과를 모른다는 말이다. 인과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 삿된 소견의 그물인 사견망이다.
사견에는 물론 다른 의미도 있겠지만 제일 직접적으로 우리가 가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과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생사농함원소구(生死籠檻怨所拘)니 : 생사의 덫과 우리에 가려서 원망의 걸리는 바가 되었으니
아응영피최마적(我應令彼摧魔賊)이로다 : 내가 응당 그들로 하여금 마구니와 도적을 꺾어서 제거하게 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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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류표탕심몰닉(四流漂蕩心沒溺)하며 : 사류 네 가지 흐름이라고 해서 저 앞에 나왔다.
욕류(欲流)는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탐욕, 보고 듣고 향기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에 대한 어떤 흐름이 끊임없이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유류(有流)는 욕계 색계 무색계 모든 존재에 대한 미혹 세계의 생존의 흐름이다.
견류(見流)라고 하는 것은 삿된 견해 그릇된 견해, 인과를 모르고 참다운 이치를 모르는 견해의 흐름이다. 무명류(無明流)라고 하는 것은 고집멸도 사제에 대한 무지의 흐름을 말한다. 표탕한다는 말은 여름날 장마가 져서 개울물이 불어 소리를 내면서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흘러가는 모습이다. 심몰닉하며 거기에 마음이 빠져 있으며
삼계분여고무량(三界焚如苦無量)하며 : 삼계가 불타듯이 고통이 한량이 없으며
계온위택아재중(計蘊爲宅我在中)하니 : 그 오온을 ‘내가 사는 집이다’ 라고 여겨서 내가 그 가운데 있다고 계산 계교를 하니, 중생들의 한계는 대개 거기다.
나부터라도 한계가 거기다. ‘오온이 나다’‘오온에 내가 있고 오온이 나고 오온이 내 집이고 내가 그 오온 속에 들어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언젠가 그것을 벗어나야 할 일이다.
위욕도피근행도(爲欲度彼勤行道)로다 : 오온에 갇혀 있는 그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도를 행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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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구출리심하열(設求出離心下劣)하야 : 설사 오온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마음이 하열하고 말하자면 너무 저급해서
사어최상불지혜(捨於最上佛智慧)일새: 최상불지혜를 버렸을새 거기까지는 넘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을 나도 얻어야겠다는 욕심까지는 아직 내지 못한다. 설사 오온에서 벗어났다손 치더라도 그런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욕영피주대승(我欲令彼住大乘)하야 : 내가 그들로 하여금 대승에 머물게 해서, 불승,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그런 경지다.
우리가 크게 오온과 대승 두 가지만을 짚어서 본다면 대승은 바로 불성이고 불성은 우리 진심, 참마음, 참마음의 경지다.
오온하면 물론 거기에 참마음이 섞여있지 아니한 것은 아니로되 그러나 오온하고 대승심 참마음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로 하여금 대승에 머물게 해서
발근정진무염족(發勤精進無厭足)이로다 : 근정진을 발해서 싫어함이 없게 하는 도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어쨌든 이러한 성인의 가르침을 자꾸 접하고 여기에 맛을 느끼고 취미를 갖게 되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된다.
(5) 離垢地의 功果
菩薩住此集功德하야 見無量佛咸供養하고
億劫修治善更明하니 如以好藥鍊眞金이로다
佛子住此作輪王하야 普化衆生行十善하고
所有善法皆修習하니 爲成十力救於世로다
欲捨王位及財寶하야 卽棄居家依佛敎라
勇猛精進念中에 獲千三昧見千佛이로다
所有種種神通力을 此地菩薩皆能現이나
願力所作復過此하야 無量自在度群生이로다
보살이 이 지위에 머물러서 공덕 모으며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경 공양하여
억겁 동안 선을 닦아 밝고도 깨끗한 것이
마치 좋은 약[明礬]으로 진금을 단련하듯 하도다.
불자가 여기에선 전륜왕 되어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 행하며
여러 가지 선한 법을 모두 닦아서
십력을 이루어서 세상 구하도다.
왕위나 재물을 다 버리고
집을 떠나 불법에 귀의하여서
맹하게 정진하며 잠깐 동안에
일천 삼매 얻고서 천불을 친견하도다.
가진 바의 가지가지 신통의 힘을
이 지위에 있는 보살이 능히 나타내며
원력으로 짓는 일이 이것을 지나
한량없이 자재한 힘으로 많은 중생 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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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지(離垢地)의 공과(功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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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주차집공덕(菩薩住此集功德)하야: 보살이 이구지에 머물러서 공덕을 모아서
견무량불함공양(見無量佛咸供養)하고: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다 그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억겁수치선갱명(億劫修治善更明)하니 : 억겁동안 닦고 또 닦아서 아주 잘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밝아지니
여이호약연진금(如以好藥鍊眞金)이로다: 그것은 비유컨대 마치 좋은 약으로써 진금을 단련하는 것과 같더라. 진금을 단련하면 금은 그 양이 조금도 줄어들지 아니하면서 금빛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정말 진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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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주차작륜왕(佛子住此作輪王)하야 : 불자가 여기에 머물러서 윤왕이 되어서 혹은 세속에 있을 경우는 어떻고, 출가할 경우는 어떻다 하는 이야기가 산문에서는 나왔었다.
보화중생행십선(普化衆生行十善)하고: 널리 중생을 교화해서 십선을 행하게 한다.
처음 불법에 귀의해서 환희심을 일으키고 그 다음 제2지 이구지에 들어와서 십선을 잘 지키기만 해도 상당한 경지와 상당한 이익을 얻는다. 십선 지키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소유선법개수습(所有善法皆修習)하니 : 있는 바 선법을 다 수습하니, 선법이다.
위성십력구어세(爲成十力救於世)로다 : 십력을 이루어서 세상을 구제함이로다.
부처님을 십력존이라고 표현한다. 선법만 잘 지켜도 십력을 이루어서 부처가 된다. ‘불교가 무어냐?’ 라고 물었을 때 ‘선행하는 것이 불교다’라고 하면 99점짜리 대답이다.
그 유명한 자사가 도림선사에게 가서 ‘불법이 뭡니까?’ 하니까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착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천하의 대선비는 ‘그런 소리는 세 살 먹은 아이들도 다 아는데 그걸 불교라고 하느냐?’고 하였다. 심오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착한 일을 하라고 했으니 그것은 세상의 유치원 선생도 유치원생들에게 많이 하는 가르침이다. ‘착한 일 하라’ 그것은 불교고 유교고 일체 교육 받지 아니한 사람도 기본적으로 다 할 줄 아는 소리다. 그런데도 ‘불교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했을 때 99점짜리 대답이다. 사실은 100점짜리 대답이라고 해도 허물이 없다. 내가 여지를 좀 남겨 두느라고 99점짜리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다.
착한 일 하는 것이 불교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칠불통계다. 역대 일곱 부처님의 공통된 경계의 말씀이다. ‘착한 일 하는 것이 불교다’ 라고 하면 그것이 ‘불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100점짜리 답이다. 착한 일을 하면 악한 일을 할 턱이 없다. 제악막작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사실은 중선봉행이면 끝이다. 또 자정기의라고 하는 말도 착한 일 하는 사람이 마음이 맑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 마음이 맑으니까 착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앞 뒤 두 구절을 빼버리고 ‘중선봉행(衆善奉行)이 시제불교(是諸佛敎)다’ 라고 해버리면 된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이 없다.
온갖 착한 일이라고 하는 착한 일은 그저 자기가 다 도맡아 놓고 하려고 하는 그 자세가 불교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말은 천하에 쉽다.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알고 유치원에서도 그것부터 배운다. 그런데 80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80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고 하여서 자사가 그만 코가 서 말이나 빠져 버렸다.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고개를 숙여야 된다. 자사는 천하에 이름 있는 선비니까 그 말에 그만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불교가 이렇게 간단하다. 그러나 정작 실천하려고 하면 그렇게 80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여기도 소유선법개수습하니 위성십력구어세로다. 십력을 이뤄서, 부처를 이뤄서 성불해서 세상을 구제한다. 착한 일 잘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따르고 다 공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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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사왕위급재보(欲捨王位及財寶)하야 : 왕위와 그리고 온갖 재물과 보배들을 다 버려서, 말하자면 세속에 있을 경우의 과보가 이렇게 되고 만약에 출가한 사람이라면
즉기거가의불교(卽棄居家依佛敎)라 : 곧 집을 버리고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함이라.
용맹정진일념중(勇猛精進一念中)에 : 용맹으로 정진하는 일념 가운데
획천삼매견천불(獲千三昧見千佛)이로다 : 일천 가지 삼매를 얻고 일천 부처님을 친견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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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종종신통력(所有種種神通力)을 : 있는 바 가지가지 신통의 힘을
차지보살개능현(此地菩薩皆能現)이나: 이 진리에 있는 보살이 이구지에 있는 보살이 능히 다 나타내니, 종종신통력을 다 나타낸다.
원력소작부과차(願力所作復過此)하야 : 원력으로 짓는 바 다시 이것보다 훨씬 더 지나가서 훨씬 더 뛰어나서
무량자재도군생(無量自在度群生)이로다: 한량없이 자재하게 군생을 제도하는 도다. 온갖 중생들을 제도한다, 이것이 이구지의 공과다.
(6) 結說
一切世間利益者의 所修菩薩最勝行인
如是第二地功德을 爲諸佛子已開演이로다
일체 세간을 이익하게 하는 이의
보살들 수행하는 가장 좋은 법이라
이와 같은 제2지(地)의 모든 공덕을
모든 불자들을 위하여 이미 연설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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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설(結說):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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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세간이익자(一切世間利益者)의 : 일체 세간을 이익하게 하는 사람
소수보살최승행(所修菩薩最勝行)인 : 닦는 바 보살의 가장 수승한 행인
여시제이지공덕(如是第二地功德)을 : 이와 같은 제 2지의 공덕을
위제불자이개연(爲諸佛子已開演)이로다: 모든 불자를 위해서 이미 다 열어서 연설했도다.
제 2이구지에 대한 중송부분은 여기까지 이렇게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 볼수록 우리와는 거리가 멀고 우리가 따라가도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계속 하는 것이다. 그나마 맨날 하는 이야기고 듣는 일이고 들어봐야 실천도 안되는 것이라고 해서 밀쳐놓게 되면 그때부터는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참 갈등이다.
늘 배우면서도 실천에 못 옮기니까 갈등하고 고민하고 거기에서 씨름하는데 그것이 수행이다. 그렇게 하는 시간이 그래도 우리에게 가장 가치있는 수행의 시간이다. 나는 늘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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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법향 가득한 화엄경...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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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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