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여전히 푸르른 통영의 피랑을 누빈다.
가는 자리마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12공방의 후예들,
그리고 오늘을 만들어가는 젊은 창작자들의 이야기가 샘솟았다.
예술가란 섬처럼 묘연한 존재다. 먼 바다 너머 아른거리는 섬들의 이마를 마주하며 생각한다. 통영이 낳아 기른 수많은 예술가들은 어쩌면 이로부터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헤아려도 본다. 한산도, 매물도, 비진도 혹은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서피랑 꼭대기에 오르니 사방으로 섬과 바다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이 앞에 서면 누구나 시 한 수에 노래 한 곡조, 그림 한 붓 그려 내리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리라. 마침 해풍은 맑고, 흰 구름만 떠도는 날이다.
서피랑에 오르니 푸른 대숲이 어른거린다. 서포루 너머로는 찬란한 통영 앞바다가 펼쳐진다.
통영, 섬들의 고향 들쳐 맨 배낭엔 엊그제 새로 산 책 한 권이 들었다. 제목은 <통영을 만나는 가장 멋진 방법: 예술 기행>(이하 <통영 예술 기행>). 통영의 구석구석을 오래도록 걷고 공부해온 지역 커뮤니티인 ‘통영길문화연대’가 구술하고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엮어낸 신간이다. 남해의봄날은 5년 전 통영 미륵도 봉수골에 터 잡은, 작지만 알찬 출판사다.이들을 필두로 통영에 정착하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통영의 중심인 강구안, 동피랑과 서피랑 마을 인근에 자리한 창작 공간들이 그 증거다. 최근엔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도 SNS를 통해 ‘믿는 구석 통영’이라는 공간을 만드는 중이니 기대해달라고 공언한 바 있다. 통영이야말로 제주 다음으로 낙점된 젊은 창작자들의 낙원이 아닐까? 이 고장에 제2의 르네상스가 도래하려는 걸까? “통영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청마 유치환이 우체국 창가에서 건너편 수예점 일손을 돕던 시조시인 이영도를 바라보며 연서를 쓰고, 그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서점에 박경리가 책을 보러 들르고, 조금 더 걷다 보면 유치환의 작업실이 있어 시인 김춘수, 화가 전혁림, 작곡가 윤이상, 시조시인 김상옥 등이 모여 시대와 예술을 논하고 예술 운동을 펼쳤다.”-<통영 예술 기행> 중
1.알록달록한 무늬의 나비가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서피랑 99계단의 모습. 층계에 박경리 소설의 구절들이 적혀 있다.
발목을 잡아끈 건 책의 이 구절이었다. 이것은 통영의 첫 르네상스다. 그러고 보면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김춘수를 읊고 박경리를 논하던, 이제는 까마득한 문학도 시절. 새삼스럽지만 그때의 내 영웅들이 한 장면 속에서 살아 숨 쉬었다는 사실이 문득 뭉클하게 느껴졌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이 소환한 파리의 벨에포크가 유독 눈부시게 다가왔던 것처럼. 책을 덮은 후엔 통영에 달려가고픈 마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4시간 하고도 30분이 지나서야 터미널에 닿았다. 다행히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영 낯설진 않다. 초행이 아니라서다. 6년 전, 영화 <하하하>를 봤을 때도 무작정 통영행을 결심했다. 나폴리모텔을 기점으로 떠난 답삿길은 동피랑 벽화마을의 노란 대문집을 지나 다시 강구안으로 돌아오는 짧은 코스였다. 곁가지로는 충무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오미사꿀빵과 빼떼기죽으로 허기를 달래다, 카페 울라봉에서 ‘쌍욕 라테’를 받아 먹으며 깔깔거리는 ‘먹방’ 코스도 체험했었다. 이번엔 좀 다른 노선을 택하기로 했다. 유쾌한 기억에 아릿한 낭만을 덧대는 여행. 동피랑보다는 서피랑, 시내보다는 미륵도에서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자연주의 예술 기행 말이다.
서피랑, 예술의 언덕 피랑이란 통영말로 ‘벼랑’을 뜻한다. 통영성의 중심인 세병관을 기준으로 동쪽의 벼랑을 동피랑, 서쪽의 벼랑을 서피랑이라 불렀다. 세병관이란 삼도수군통제사가 한양의 임금에게 예를 갖추고 배를 올렸던 건물로,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학교(통영제일공립보통학교)로 사용했는데 박경리와 윤이상이 바로 그곳에서 수학했다고 전해진다. 서피랑은 행정구역상 명정동과 서호동 일대에 걸친다. 아직 동피랑에 비해 덜 알려진 동네지만 예술가들의 흔적은 오롯이 서피랑에 모여 있다. 여기엔 박경리 생가가 있고, 마을 할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박경리 학교가 있고, <김약국의 딸들>에 등장하는 ‘하동집’이 있고, 윤이상의 등하굣길이 있고, 시인 백석이 통영 여인 ‘난’을 흠모하며 시를 썼던 우물가가 있다. 서피랑의 골목대장이자 서피랑공작소 소장인 문화해설사 이장원을 만나 이 동네를 제대로 구경시켜달라고 청했다. “잘 오셨어요. 서피랑은 통영 문화예술의 성지이자, 머지않아 관광 1번지로 손꼽힐 곳이거든요.” 서피랑에는 이름 붙은 길이 크게 둘 있다. 통영시립박물관에서 마을 도서관 명정책장까지 이어지는 ‘윤이상 학교 가는 길’, 그리고 충렬사에서 하동집을 지나 박경리 생가까지 이어지는 언덕인 ‘박경리 생각하는 길’. 99계단은 그 둘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명정동주민센터에서부터 서피랑 꼭대기에 자리한 서포루를 오르려면 ‘나비의 꿈’(윤이상 대표 곡)과 <나비야 청산 가자>(박경리 시집)를 한데 형상화한 그림 계단 99개를 지나야 한다. 언덕의 언저리에는 이중섭이 즐겨 걸터앉았다고 전해지는 200살 먹은 후박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2.서포루에 오르면 강구안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대장의 뒤꽁무니를 쫓아 가장 먼저 당도한 곳은 ‘서피랑 떡볶이집’ 옆 전기불터다. 1917년 10월, 경상남도에서는 최초로 이곳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영전기주식회사의 설립이었다. “서피랑은 과거 통영을 주름잡던 도련님들의 동네랍니다. 일본 유학생이 서울 다음으로 많은 도시일 만큼 부유한 지역이었기에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당대의 도련님들은 통영청년단이라는 문화 단체를 조직했다. 주요 멤버는 윤이상, 유치환, 김춘수였고 그들을 만나러 서울서 자주 내려왔던 이들은 정지용과 백석이다. 이들의 아지트는 현재 한옥 펜션 ‘이즘’이 점유하고 있는 ‘하동집’이다. 전기불터를 지나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의 담벼락 건너편 골목으로 쑥 들어가면 얼추 이 집에 닿는다. 이곳이 하동집이 된 까닭은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있다. 서사 속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하동집은 실제로 마을을 주름잡던 ‘박부자댁’이 기거하던 집이다. 과거 일가친척 중 한 명이 바로 백석이 흠모했던 여인 ‘난’의 주인공인 박경련이며, 후일엔 통영의 요리 연구가인 제옥례 선생이 이곳에 살았다고도 전해진다. 여기서 좀 더 가면 명정동과 문화동을 가로지르는 고개가 하나 있다. 이름은 서문고개. 초입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그들은 서문고개를 넘는다. 물감는 처녀, 각시들로 밤길은 어수선하였다. 용란이 친정으로 올 때마다 이 고개를 울먹울먹 넘어가는 한실댁은 양지기만 같았다. 대밭골을 지났다. 인적은 끊어졌다.”-<김약국의 딸들> 중
3.서피랑공작소의 서피랑지기 이장원과 함께 골목골목을 누볐다.
김약국 주인 김성수와 한실댁은 이곳 명정골에서 다섯 딸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를 봤다. 딸들은 자라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하나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서문고개에서 골목을 살짝 꺾어 올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박경리 생가가 자리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20대에 이 고장을 떠난 박경리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은 명정골 이야기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김약국의 딸들>을 집필했다. 50년이 지나서야 겨우 고향 땅을 되돌아봤을 만큼, 그에게 통영은 시대와 민족의 비극을 견뎌내야 했던 세월 그 자체였다. <김약국의 딸들>이 지닌 이야기의 굴곡이 서피랑을 꼭 닮은 이유다.
4.나비를 모티브로 서피랑 마을 곳곳을 장식했다.
<201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