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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없음, 무감정
무감정 50을 초월하는 길
무감정의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은 영적의지를 경유하는데,
오직 영적의지만이 정신 내적에너지의 결핍을
보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힘이 없다는 것과,
오직
신만이
우리를 광기에서
구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는 낮은 의식수준의 반영이고,
무력감의 표현이다.
신이 내려준 삶이라는 선물을 거부하는 것
beyond reason!!
unconditioned love!!
서론
무감정의 수준은
태만, 무관심, 가난, 보다 심각하게는
절망과 희망없음을 특징으로 한다.
세계와 미래는
황량해 보이고,
비애가 삶의 주제이다.
무감정은
무력함의 상태인데,
모든 면에서 결핍되어 있는
무감정의 희생자들은 자원뿐 아니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
돌보는 이들이
외부의 에너지를 공급해주지 않는다면
수동적 자살을 통한 죽음이 초래될 수 있다.
희망없는 이들은
살려는 의지없이
자극에 대한 반응을 그치고
멍하니 응시한다.
눈동자는
대상을 좆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제공된 음식을 삼킬 수 있는
에너지조차 모자란다.
무감정은
노숙자와 사회 낙오자들의 수준이다.
그것은 또한
만성질환이나 진행성 질환으로 고립된
수많은 노인과 여러 사람의 운명이기도 하다.
무감정한 사람은
의존적이다.
이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버겁고 짐스럽게 느껴진다.
이들은 세계에 고유한 힌두교의 고전적 구나(성질), 세가지, 타마스(무기력, 저항), 라자스(높은 에너지), 사트바(평화) 중에서 타마스의 인간적 표현을 나타낸다.
사회는
무감정의 수준에 있는 문화나
개인들에게 그 어떤 실제적 도움이 되려는
충분한 동기부여가 결여된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자원의 유출구로 본다.
그것은 콜카타 거리의 수준인데, 오직 마더 테레사와 추종자들 같은 성스러운 이들만이 감히 그 땅을 밟을 용기를 냈다. 그것은 희망을 포기한 수준이며, 그것의 얼굴을 정말로 들여다볼 용기를 가진 이들은 극히 적다.
임상적 측면
무력증의 형태를 띈
인지되지 않은 무감정은
개인의 문제는 물론
숱한 사회문제의 한복판에 있다.
관료/정부 기관이
돌봐주고 책임지는데 실패하는 것 또한
대중적 재앙으로 귀착될 수 있다.
행동하거나 기능하는데 실패한 사례들은 많은데, 예컨대 진주만 이전의 방심상태, 한국전쟁에서 허를 찔린 일. 9.11과 다른 알카에다 공격 이전에 나온 경고들, 미해군 구축함 콜호가 폭탄테러를 당한뒤 행동하지 않은 것,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군부의 준비부족,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늑장대응 등이 그것이다.
무감정은
에너지와 관심의 이용도가
매우 낮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대도시의 빈곤지역을 망라하는 문화와 지역들에서는 풍토적일 수 있다. 해이함과 무관심은 미묘한 수단을 통해 문화적으로 전파될 수 있다.
"그게 무슨 소용이람?"
은 전염되는 태도다
나태함이
일곱가지 대죄에 포함되는 것은,
그것이
신이 내려준 삶이라는 선물을 거부하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방종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은 우리에게 ‘일곱 가지 대죄(大罪)’의 목록을 전하고 있다. 교만을 비롯해 시기와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 등이다. 신원하 교수에 따르면 이 목록은 사막의 수도사들이 처음 만들어낸 후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원에서 일반 교회로 가지고 왔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1천년 이상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seven deadly(capital) sins)’로 부르며 가르쳐 왔다.
①교만: 뭇별 위의 보좌 ②시기: 녹색 눈의 괴수 ③분노: 사탄의 화로 ④나태: 정오의 마귀 ⑤탐욕: 불룩 나온 올챙이 배 ⑥탐식: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 ⑦정욕: 타는 갈증에 마시는 바닷물
그 상태에서는
타인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나
심지어 자신의 삶의 질에 대한
적절한 관심조차 없다.
바로 그러한 태도가
그 다음에는
신을 향해 투사되며,
그래서
신은
거부하는, 접근 불가능한,
돌봐주지 않는 존재로 보인다.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것은
신이 무관심한, 비난하는,
접근 불가능한 존재라는 개념으로
귀착된다.
이것은
희망없음과
비관주의로 인도한다.
무감정은
수동성과 자책의 바탕이 되는 일이 많으며
결국에는
낮은 자존감과
낮은 자아상을 낳는다.
쓸모없다는 느낌은
부정적인 사회적 태도와
행동을 강화하고,
이는 결국 빈곤과
낮은 삶의 질로 이어진다.
희망없음은
그 이상의 몰락으로 인도하고
이 몰락은 그 다음에
면피를 위한 합리화로 이용된다.
그 핵심은
책임은 거부되고
만성적 피해자 정신상태로
대체된다는 것인데,
만성적 피해자 정신상태는
문제의 상상된 근원을
외부세계에 투사함으로써
실제 문제를 피하려고 한다.
외부세계는
그 다음에
편리하게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난받는다.
피해자/가해자의
이원적 분리는
피해자/가해자 환상을 영속시키는
현재의 포스트모던한
상대주의적 사회이론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미숙한 양육은
초기의 행동양식 정립에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데,
미숙한 양육에는
사랑결핍과 보통의 동기유발적 행동요인들의
결핍이 있다.
이것은
불충분한 내적 보상체계와
낮은 자존감을 낳는데,
실망이 문제를 가중시킨다.
비록
자아이상이 발달하고
영웅적 인물이 찬양될 수 있기는 하나,
이상적인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과 회의주의에서 기인하는
내적확신이 있다.
정상인은
시도하고 있는 노력에 대해
어떤 인정을 받는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희망없는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기능을 시도해보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여긴다.
무감정의 에너지 끌개장은
그와 동일한 낮은 에너지 장에서
다른 표현들을 끌어오는데,
이것은
범죄와 빈곤을 양산하는
전반적 암울한 사회환경을 낳는다.
무감정 상태는
면피용 구실들에 대한 의존을 낳는
손상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건강염려증, 만성적 병약함,
자기중심적 성격을 낳을 수 있는데,
자기중심적 성격은
수동적이고 기능부전이며,
의존적 관계를 구한다.
또한
마약이 주는 위안이
내면의 황폐함으로부터
도피처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마약으로 유발된
일시적 도취감이 찾아들면서,
어두운 면이 되돌아오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약물의존은 단지 중독이 아닌
생활양식이기도 하다.
끝없이 내려가는 하강 나선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 시도를 낳을 수 있는데,
학대적 관계에 대한
매달림이 거기 포함된다.
자책은
신과 사회에 투사되고,
따라서 그 상태에 대해
비난받는 것은 신과 사회이다.
장애의 핵심은
개인의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혹은 개인의 책임을 받아들이는데 대한 거부임이 분명한데,
이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낳고
또한 노숙, 부랑생활,
사회적 의존으로 끝날 수 있는
낮은 에너지로 귀착된다.
삶의 기술 결핍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에
주기적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이는 결국 자살로 끝날수도 있다.
무감정의 초월
무감정한 순간이나 시기들은
거의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의 삶에는
침체의 때와 실망의 느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감정한 생활양식자체는
생명의 가치에 대한 부정이자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 된다.
무감정의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은
'영적의지'를 경유하는데,
오직
영적의지만이
정신 내적에너지의 결핍을
보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본성에서나
기원상으로
영적인 의지를
정신적이고 심리적일 뿐인 의지력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무감정상태에서
개인적 의지는
허약하고 효과가 없다.
무감정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은
850으로 측정되며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신성한 영적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 뿐이다.
에고/자기는
생존을
으레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만,
생존의 진정한 근원은
참나로서의 신성의 현존이다.
에고가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참나로 인한 것이다.
에고는
자신이
생명에너지의 기원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수령자일 뿐이다.
신성한 간청은
원하는 결과를 낳을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참나에게는
역경이나 심지어 육체적 죽음이
에고를 굴복시키는
유일한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참나에게는
개인적 세계나 육체의 내맡김이
영혼의 변형을 위한
필수조건일 수 있다.
그래서
표면상의 역설에서
에고/마음/육체의 패배는
사실상 영원한 것(영혼의 진화)을 위한
일시적인 것의 희생이고,
따라서 카르마적 이득이다.
개인적 의지는
오직 그 개인과 동일한 수준으로 측정될테지만,
의지는
매우 강력한 수준으로 측정된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불행이 신에게는 기회라는 진실뒤에 숨어있는 역동적 힘을 예시하는 조건들이다. 예들들어 12단계 모임은 신성에의 초대를 잘 보여주는데, 이 모임 초기단계는 다음과 같이 의역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힘이 없다는 것과,
오직 신만이
우리를 광기에서 구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개인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에고에 등을 돌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신에게 넘기겠다는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 다음
대담한 도덕적 재고조사가 뒤따르고
뒤이어 기도를 통해 안내를 구하는 것,
그리고 일상적인 영적 생활양식의 확립이 뒤따른다.
12단계와 12가지 전통 twelve steps and twelve traditions 1996
위 과정을 통해
전세계 수백만의 사람이
수십년에 걸쳐
매우 어렵고 가망없는
갖가지 인간문제들에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결과적 변형은
그것의 정도로 인해
기적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이 단순한 프로그램은 원래 영국의 옥스포드에서 시작되었다. 롤랜드가 미국에 도입했다. 롤랜드는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분석의 카를 융의 가망없는 환자였는데, 융 자신의 정직성이 롤랜드가 바닥을 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융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카를 융이 롤랜드에게 주는 마지막 조언
"아아,
나도 내기술도
당신을 도울수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어떤 영적 프로그램에
마음을 다해 투신하는 것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회복이 일어났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결국 롤랜드의 극적인 회복덕분에 믿음에 기초한 다름 프로그램들은 물론 지금 범세계적으로 일어나는 12단계 운동에서 그러한 패러다임이 정착되었는데, 그것은 고질적 상습범들의 35%에서 효과를 발휘하기조차 했다.
인간의지나
사회의 해결능력을 넘어선
표면적으로 희망이 없는
수많은 조건의 한복판에는
무감정이 있다.
영적모임에의 참여는
이러한 무감정 상태에서의
회복을 돕는데,
왜냐하면
이들 집단의 전체적 에너지는
전체 인구중에서 드문
무조건적인 사랑의 수준
540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책임을 철저히 수용함으로써
회복과 삶의 개선에 헌신하는
영적이진 않아도
강력한 또 다른 프로그램을 입증해준 것은
측정 수준 400의 EST(Erhard Seminars Training)였다.
EST기법은
무책임과 끊임없이 직면시키거나
혹은 모든 구실과 합리화,
책임회피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었다.
무감정으로 보이는 것에는
사실상 "난 못해"라거나
"난 원치 않아"로 묘사되는
미묘하게 위장된 자부심과 자만심으로서의
강력한 내적 저항이 있다.
에고의 버티기는
너무도 강력해서
에고가 자신해서 내맡길 정도로
그것과 대결하려면
전쟁이나 지진과 같은
대참사가 자주 요구된다.
그래서
집단적 카르마로 인해
집단전체가
특정한 상황에 이끌리는데,
이는 재앙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카르마적 이익이 있다.
우연
무한한 의식의 장은
오직 현존하고,
막강하며 전존재를 포함한다.
그래서
의식의 장의 무한한 영역밖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가 없는데,
그것은
무한한 의식의 장이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힘의 장 안에는
에너지 장들의
저하하는 수준들이 있다.
이 에너지 장들의 저하하는 수준들이
점진적으로 형상으로 표현될 때,
그것들이 갖는 상대적 힘은
개체에 이르기까지
줄곧 감소한다.
그 거대한 장은
엄청난 정전기장에 비유될 수 있는데,
여기서 개체는
하전입자와 같다.
하전입자는
무한한 의식의 장의
무한한 힘으로 인해
개별적 전하량에 따라
장내에서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카르마적 영체의 전하량은
의도, 결정, 의도에 따른 정렬에 의해
정해진다.
순진한 지각에게는
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우연함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특히
그 사건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일때
그렇다.
무한한 의식의 장이
무제한의 차원을 갖는 한,
무한한 의식의 장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무한한 의식의 장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장의 영향력 아래 있으므로
실상에서
우연한 것이란 가능하지 않다.
정상적 개인의 무감정
무감정의 시기는
거의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현상으로 재발된다.
영적 지향을 가진 이가
무감정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한 현상의 핵심을 찾아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
정상적 개인의 무감정은
대개 삶의 일정한 영역들에
해당되는데,
이는
사람이
그동안 무시하고 저항했던,
혹은 책임지기를 거부했던 영역들이다.
이러한 영역들은 또한
혐오와 매력들로 표현되는데,
조사해보면 그러한 것은
환상에 기초하고 있음이
판명된다.
거의 모든 저항, 혐오, 환상이
완전하고 전적인 내맡김을 통해
그리고 환상적 목표들을 포기하려는 자발성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운용상으로
이는 선형(에고)을
비선형(신성)에 내맡기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수동/골격의 양분
수치심, 무감정, 죄책감은
자기혐오, 비난, 부정적 시비분별을 수단으로 하는
자기 공격의 모든 형태들이다.
이러한 기제들의
또 다른 측면은 투사되고,
외현화된 증오와 비난이라는
방어적 책략에서 사용된다.
무감정 또한
성숙과정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며,
부정과 거부,
즉 감춰진 고집스러움의 한 방식이다.
이러한 기제들에서
개인적 책임은
다시 부정되고,
다른 면에서는
표면적으로
정상적인 개인들이
극단적 공격성을
타인을 향해 주기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
자기혐오의 꿈틀거리는 벌레가
자기에 대한공격에서
외부로 방향을 틀때,
그것은 독설, 원한, 악의, 중상,
심지어는 극단적이 될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방으로 표현된다.
외부로 방향을 돌린
자기혐오는
매우 낮게 측정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깊은 수준에서의
진실에 대한 부정이고
이차적으로
사회와 사회기준에 대해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이 외부로 향한 공격성은 사회적 승인을 찾아내며, 따라서 전쟁, 조직범죄, 테러, 급진적 환경 운동가들의 방화, 군중폭력, 쿠 클럭스 클랜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투사는 정신병자처럼 양심이 부재하거나 혹은 합리화로 인해 양심이 무너진 경우에 한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십자가를 불태우는 KKK 단원들.
미국 남북전쟁 이후 테네시주 펄래스키에서 6명의 퇴역군인에 의해 탄생한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개신교 근본주의, 반가톨릭주의,[1] 반동성애주의 성향 사이비 종교 및 테러리스트
정당화의 필요성은
마음속에 품은 원한,
사회에 대한 왜곡된 해석,
불의수집으로 충족된다.
이 심리기제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작동할 때,
수천 혹 심지어는 수백만의 사람이
주기적으로 사망한다.
이것은
악성 메시아적 자기에 증후군으로 불리며
"진실대 거짓'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같은 지도자들의 극단적 병리는 미움받는 그리고 개, 총알받이 혹은 죽어 마땅한 존재로 보이는 자국민들에 대한 고의적 학살에서 명백해진다.
그러한
왜곡된 성격들은
사랑을 경멸하고 나약한 것으로 보며,
속으로 두려워하는
자신들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투사된 기제들이
행동화 될 수 없을 때,
의식안에서 내적 갈등이 일어나며
그러한 메시아적 지도자들의 종말은
흔히 자살이다.
이와 동일한 기제들이
명성을 구하는 적대적 성격들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보다 제한되고
약화된 정도로 작동하는데,
이들은
혀위에서 찬 비난과
사건들의 왜곡을 통해
공인들에게 악담과 비방을 퍼붓는다.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투사를 통해 심한 부정성과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무구한 좋은 나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그러한 위장이 환히 들여다 보인다.
부정직성은 종종
잘난 척으로
그리고 자신을
남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것으로
귀결된다.
에고는 또한
자기방어를 견고히 하기 위해
영적 이미지와 영적 개념들을 끌어들이는데,
이로써 영적이미지와 개념은
불신자, 이교도, 이단자 등이므로 죽어 마땅한 이들의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반대로 왜곡된다.
지각된 내적 약점에 대한 자기 비하의 투사를
극적으로 행동화한 것은 일본인이었는데,
이들은 만주와 중국에서
미국인 포로들을 상대로 항복한 적군 병사를 즉결처분했다.
매우 낮은 에너지 장이
지성을 통해 합리화될 수 있는데,
이때
지성은
유사종교적 왜곡을
진실로 보고,
순교와 자살을 기괴하게 찬양한다.
할복은
보통의 건강한 사람에게선
내면화된 갈등으로 악압될 것을
외현화시켜 행동화하고
극화한 고전적 사례다.
수용할 수 없는 욕구와 갈등의 정신 내적 억압은
정신에너지를 고갈시켜
그것이 정상적 적응작용에
이용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무감정을 낳고,
무감정은 소진, 피로와 허약감,
삶의 즐거움의 결핌(무쾌감증)으로 표현된다.
정상적 수단을 통한
즐거움의 결핍은
다양한 중독을 통해
인위적으로 보상될 수 있다.
현실도피가
차단되거나 어려워질 때
내면의 우울이 되어 되돌아오는데,
이는 결국 행동화 및
필사적 회피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내면의 갈등과 대면하고
갈등 그 자체에 대한 책임
혹은 도움과 해결책을 구할 책임을 인정하는 대신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한다.
점차적 하강나선은
결국 체포 이혼, 실직, 파산, 입원,
노숙생활과 같은
직면적인 사회적 위기로
인도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직면은
표면상의 불행에서 일어나는
긍정적 귀결의 하나이다.
표면적 불행이
사실은 생명을 구하는,
변장하고 온 구원인 경우가 많다.
통계적으로
병리적 생활방식으로부터
이런 유형의 회복에 이르는
가장 성공적인 해결책은
믿음을 기초로하는
모임을 거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정직성은
강력한 촉구가 없다면
불가능하진 않다고 해도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회복에는
강력한 지지외에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하우가 필요한데,
회복된 구성원들의 사례는
부정하는 것을 단념 시킬 수 있다.
도덕적 온전성을 고수하는 것과
죄책감에 빠지는 일없이
성격상의 결함의 인정하는 것 역시
부정하는 것을 단념시킨다.
게다가
남을 돕는 것은 유익하며
자존감을 높여준다.
엄격하게
심리적인 방식은
일시적으로 이로울 수 있지만
이러한 장애는
대개가 만성적이어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성격을 띤 프로그램들이 요구된다.
그것은
영적 프로그램들은 사안의 핵심을 다루며
심리적, 행동적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저변에 깊숙히 자리잡은
자기 혐오는
540의 무조건적 사랑의 치료와 같은
대단히 높은 의식수준의
치료를 필요로 한다.
400대로 측정되는
심리적 방식은
실제로 내적치유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치유과정에서는
안내를 제공해줄
그리고 하나의 본보기로서 동일시하고
사랑하고 존경할 대상이 되어 줄
조언자이자 후원자, 혹은 상담자가 필요하다.
그러한
모임들의 수십년에 걸친 경험으로는
오직 회복된 구성원만이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치료적 "전이"나
동일시를 일으키는
필수적 권위를 갖는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랑은
수용 가능한 형태로 돌아오며,
현실적이고 영적으로 온전한
겸손함이
사랑의 수용을
용이하게 해준다.
영적 겸손함을
그에 대한 사회적 해석인
"굴욕"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역설적으로
영적으로 겸손한 이는
굴욕을 당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존감의 상실없이 결함을 수용할 수 있다.
자신의 내적 결함을
인정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시비분별없는
존중을 허용해주고,
전 인류를 향한
연민에 이르는 문을
열어준다.
무감정대 동기부여
인간의 행동은
본능적 욕구의 결과일 수 있고,
아니면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목표들에 이끌리거나
혹은 그러한 목표를 동기로 한 결과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자아이상은
감탄스러운 성질과 성취를,
혹은 영웅적 인물을 내면화한 것이다.
영웅적 인물은
영감을 고취시키며
성장과 발달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감탄스러운 인물은
개인의 우세한 의식수준에 맞게 선택되며
그래서 각 수준은
특징적으로 그 수준에 걸맞은
영감을 고취시켜주는
지도자들을 보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내면화된 인물의 결여는
미숙한 양육이나 양육의 부재에서 비롯되거나
자존감이나 개인적 가치감의 결핍은
실패에 대한 예상, 비관주의, 무의욕 증후군으로 이어진다.
무감정을 벗어나기 위한
자신감 형성은
대개 동기부여적인
격려의 도움으로
한걸음씩,
조금씩 더해가는게 가장 좋다.
부정적 자아상은
과거의 실패로 인해 혹은
난 못해라거나
난 그만한 가치가 없어 식의 태도를 낳는
또래나 부모 인물의 비판으로 인해
악화될 수 있다.
"첫번에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시도하고
또 시도하라"
이러한 옛 속담이 종종 무시되는데,
무감정은
대개 '수치심을 피하기 위한 수많은 합리화된 구실과 정당화로 방어되기 때문'이다.
무감정의 일부 표현들은
뇌화학의 결함으로 인한
임상적 우울증의 귀결일 수도 있는데,
이때는
심령을 재건하기 위해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불균형의 교정을 위한
항우울제가 필요하다.
무감정과 부정적 자아상에 대한
고전적 평형추는
"믿음, 희망, 사랑'이다.
남을 돕는 일은
그것이 선택과 영감에서 나온 것이든
심지어는 강압에서 나온 것이든,
그 유익함이
사회전반에서
아주 훌륭히 입증된다.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이들에게는
그저 동물을 돌보는 일만해도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맹도견 훈련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상습범 수감자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일부 수감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개들의 훈련을 끝내기 위해
출소일이 지나도록
감옥에 남아있는 쪽을 선택하기조차 한다.
무감정 상태의 노인환자들은
양로원에서 애완견을 제공해주면
기운을 차린다.
현재의 연구는
그저 애완견을 갖는 것만으로도
우울증과 고혈압이 완화되고,
전반적 건강에 긍정적 효과가 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체를 돌보는 일은
치유적이다.
이것은
가망없는 알콜 중독자들이
신입자들을 돕기 시작할 때,
그리고 사기가 꺾인 운동선수들이
순전히 다른 팀 구성원을 격려하는 행위만으로
패배적인 태도에서 회복될 때 잘 드러난다.
또한 영적작업에서
집단참여는
그 집단의 내재적,
영적 에너지의 귀결로서
동기를 재부여해준다.
그래서
성직자 단체들은
큰 목적에 기여하는데,
이는 조언자, 교관, 동기부여 연사,
인도주의적 단체, 성직자,
영감을 고취시키는 스승들 역시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이라면
적어도 일정 시기에는
어떤 제한된 영역들에서
무감정을 겪는 일이 흔한데,
이 무감정의 영역은
이용가능한 시간과 에너지
혹은 관심의 경제적 사용에서 기인하는
등한시의 영역이다.
영적 무감정은
또한 내면의 갈등과
대면하는 것을 회피하고
꺼리는 태도의 표현으로서
대단히 흔하다.
그로 인해
진보와 성장에
방해가 된다.
이러한 지체는
예상될 수 있으며
또한 기도를 통해
그리고 활발한 영적 모임의 고유한 영감을 통해
뛰어넘을 수 있다.
동기부여는
거의 모든 인간노력에서
조언자, 가까운 측근, 혹은 믿음직스러운 친구를 두는 것으로
촉진되고 강화된다.
무감정은
종종 고립의 결과이며
관여에 의해,
그리고
돌봄의 원천을 제공하는
긍정적 관계의 활기에 의해
치유된다.
무감정은
사랑의 부재를 가리키며,
사랑은
무감정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해독제다.
무감정은
상황적인 것일수도 있고,
에고 중심성으로 인해
사랑을 거절한 귀결일 수도,
혹은
생애 초기의
사랑과 양육의 결핍에서 비롯된
매우 낮은 자존감의 귀결일 수도 있다.
신을 향한 사랑의 선택은
기도와 예배를 통해
신의 사랑을
활성화시킨다.
그러므로
다름아닌 낙담이
영적관심과 진보의 출현에 이르는
문을 여는 열쇠일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희망없음과
절망의 수렁속에서야
신을 발견했다.
에고는
너무 강력해서
때로는 심하게 바닥을 치는 것만이
에고지배에 대한 충성을 내맡기려는
자발성을 활성화시킬 만한
자극이 된다.
자발성이 활성화될 때
내면의 영은 소생되고,
무감정은
희망으로 교체된다.
쉼없이 기도하려는 것은
심하게 질질 끄는
카르마적 부재의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이용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일 수 있다.
그것은 때로 "믿음에 대한 시험"으로 불리는데,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와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자 또한
그 분을 섬기는 것이니라'
라는 확신으로 가로질러 가는 것이 최선이다.
무감정은
진화의 길에 있는
그 어떤 장애와도 마찬가지로
부정이 아닌 수용으로 해결된다.
영적 무감정에 대해서는
경전이나 영적 문헌에서 제공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영적진실에
재노출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시편 91편이나 다른 좋아하는 구절들에 대한 묵상과 명상은 그 고유의 높은 의식수준으로 인해 영감을 재활성화해주는 일이 많다.
1. Psalm 91 He who dwells in the shelter of the Most High will rest in the shadow of the Almighty.
2. I will say of the LORD, "He is my refuge and my fortress, my God, in whom I trust."
3. Surely he will save you from the fowler's snare and from the deadly pestilence.
4. He will cover you with his feathers, and under his wings you will find refuge; his faithfulness will be your shield and rampart.
5. You will not fear the terror of night, nor the arrow that flies by day,
6. nor the pestilence that stalks in the darkness, nor the plague that destroys at midday.
7. A thousand may fall at your side, ten thousand at your right hand, but it will not come near you.
8. You will only observe with your eyes and see the punishment of the wicked.
9. If you make the Most High your dwelling--even the LORD, who is my refuge--
10. then no harm will befall you, no disaster will come near your tent.
11. For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to guard you in all your ways;
12. they will lift you up in their hands, so that you will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13. You will tread upon the lion and the cobra; you will trample the great lion and the serpent.
14. "Because he loves me," says the LORD, "I will rescue him; I will protect him, for he acknowledges my name.
15. He will call upon me, and I will answer him; I will be with him in trouble, I will deliver him and honor him.
16. With long life will I satisfy him and show him my salvation."
영감의 재활성화는 또한
좋아하는 기도문과 찬송가를 되풀이 하거나
아름다운 환경에서
고전음악을 연주한 귀결인 경우도 많다.
리버댄스 배경음악
높게 측정되는 음악은
어떤 에너지 장을
곧바로 드러내며,
지성과 부정적 정신작용을 우회한다.
500이상으로
측정되는 음악은
고양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음악은 리버댄스의 배경음악에서 고전음악, 스코티시 블랙워치(scottish black watch)의 장쾌하기 이를데 없는 고음의 백파이프 연주나 심지어는 비지스의 사랑스러운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편차를 나타낼 수 있다.
블랙워치 음악
일시적 무감정은
내면의 개인적 결함과 대면하는데 대한
저항을 가리킬 수 있는데,
이것은 무력하게 만드는 대신
영적움직임을 재활성화한다.
회피조차도
그것이 현재 작동중이라는
사실을 수용함으로써
그에 맞설 수 있다.
사람은 회피를 통해
어떤 문제의 영향력에 좌우되는 대신,
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 대안은
그저 문제를 지금 처리하지 않고
그 대신 치료적 현실도피로
비칠 수 있는 것을 통해
그것에서 휴가를 떠나는 선택지를 열어준다.
치료적 현실도피란
영화를 보고,
휴가를 가고,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것
등이 될 수 있다.
의식적 선택을 통한
수용(받아들임)은
무의식적 부정과는
다른 귀결을 낳는다.
자기관리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질 때
하나의 온전한 의도이다.
특히
그것이
신에게 봉헌된다면
자기관리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발전시키는
연습이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
휴식과 회복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것은
놀이와 휴양이 갖는 기능들 중
하나이며,
단순한 방종이 아닌
의식수준 향상의 단축에
기여한다.
무감정의 이원성
다른 수준들과 마찬가지로
무감정의 위치성은
매력과 혐오의 이원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것은
기도와 종종 타인들의 도움을 통해
해결된다.
첫댓글 무력증의 형태를 띈 인지되지 않은 무감정은 개인의 문제는 물론 숱한 사회문제의 한복판에 있다. 관료/정부 기관이 돌봐주고 책임지는데 실패하는 것 또한 대중적 재앙으로 귀착될 수 있다. 행동하거나 기능하는데 실패한 사레들은 많은데, 예컨대 진주만 이전의 방심상태, 한국전쟁에서 허를찔린 일. 9.11과 다른 알카에데 공격 이전에 나온 경고들, 미해군 구축함 콜호가 폭탄테러를 당한뒤 행동하지 않은 것,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군부의 준비부족,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늑장대응 등이 그것이다
저변에 깊숙히 자리잡은 자기 혐오는 540의 무조건적 사랑의 치료와 같은 대단히 높은 의식수준의 치료를 필요료 한다. 400대로 측정되는 심리적 방식은 실제로 내적치유를 불러일으키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표면적 불행이 사실은 생명을 구하는, 변장하고 온 구원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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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클래식 음악은 영성을 일깨우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KBS 1FM 클래식 전문 방송을 통해 다양한 클래식 장르의 음악과 제3세계 음악까지 들으실 수 있답니다
무감정/무기력하다면 음악을 틀어놓고 음의 선율을 따라가며 흥얼흥얼 허밍을 해 보세욤
천상의 소리에 동참하는 것 만으로 치유가 안되고는 못배길거예요^^
아하.. 그렇군요 .
음악치유 ㅎㅎㅎ
무감정의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은 영적의지를 경유하는데, 오직 영적의지만이 정신 내적에너지의 결핍을 보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 무감정 50을 초월하는 길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힘이 없다는 것과,
오직 신만이 우리를 광기에서 구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안녕하세요 ㅠ검색하다 왔는데 넘공감되서 댓글 남겨요
달과 고양이님 환영합니다 ㅎㅎㅎ
선생님 선생님은 기독교신가요? 이 글계기로 종교 다녀보려고해요 감사합니다
저는 신성한 신에 헌신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은거 같은데요 ㅎㅎ
그러시군요 굿굿입니다!!👍
선생님. 출처밝히고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될까요?
네 ㅎㅎㅎ
출처는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이에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