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상수
홍상수 영화가 떴다. '기다리던'이라는 앞말이 붙어야 한다.
그동안 내 생각에 어떤 공백이 있었다면 홍상수 담론의 부재였을 것.
그의 영화는 그게 그거 같다고 머리를 흔드는 사람도 있다.
있다기보다 많다는 말도 될 것이다.
나는 그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화를 기다리는 마니아가 되었을 것.
어떤 네티즌은 관객에 영합하는 영화도 문제지만
평론가의 눈치를 보는 영화도 문제라고 했다. 관객반응보다 평론가의 편애를
받는 홍상수를 꼬집는 말일 것이다.
역시 나는 이 '망민'(網民, 네티즌의 중국식 표현)의 말에 애정 깊게 동의한다.
이 대목은 그러나 영화만이 아니라 한국문학의 어떤 부면에도 일부 적용될 수 있겠다.
그래도, 홍상수에 대한 편애는 이유 있고, 이유 넉넉한 것을.
시나리오 없이 즉흥적으로 촬영한다는 홍의 작업방식도 눈길을 끈다.
'대본 대로'가 아니라, 무의식의 어떤 개입을 통해 찍는다는 말인가.
필름 제목은 '자유의 언덕'
그거 보고 나면 또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2. 밀란 쿤데라
쿤데라의 신작 출판 소식이 검색되었다. 14년 만이란다. 그의 시대는 엄연히 지나갔지만
그의 신작은 여전히 기다려지는 뉴스다.
생존 작가 중 가장 20세기적인 작가가 그일 것.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만으로도 그는 결코 허름한 소설가가 아니다.
그의 나이는 85세. 1929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는 86세인 것. 내 아버지보다
한 살 연하다. 이 연식이면 한국작가들은 다 은퇴한 뒤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은퇴 타이밍이 문제가 아니라, 사유하고 있다는 '현실' 그게 문제적일 것.
그의 소설 제목은 '무의미의 축제'
3. 하루키와 위화
하루키의 출판 소식도 검색되었다 (검색은 좋은 것이여, 검색만이 살 길).
하의 것은 장편이 아니라 단편집이다.
위화의 것은 내가 지금 독서 중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라는 논픽션.
2012년에 서점에 깔렸지만 지금 접하고 있으니, 내게는 신작인 셈.
하루키와 위화를 읽으면서, 한국소설가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것도 뽕나무를 보면서 소나무를 보는 셈인가.
'상실의 시대'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허삼관 매혈기' 역시 거저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굳이 하게 된다. 일제 강점, 한국전쟁, 지루한 민주화 과정을 겪은 우리에게는
죄송하고 안타깝지만, 하루키도 위화도 쿤데라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게 뭘까? 나야 알 턱이 없다. 위화의 '사람.....'을 읽으면서 내게 직선으로 온 것은
한국의 소설가들이 자신의 현실을 피상적으로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소설이 아닌 산문작업에서 깊은 천착을 보인
우리나라 소설가의 예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왜?
--하루키는 일본인이고, 위화는 중국인이군. 비극이다, 비극.
임진왜란은 무엇이고, 병자호란은 다 무엇인가.
쓸쓸한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