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교정승 예문관대제학 시문희 송암공 추모비명 병서 역문에서 - (7)
[매(邁)의 아들 경지(敬之)는
*전법판서(典法判書-정3품)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종2품) 오성군(鰲城君)이요,
경원(敬元)은 *수찬(修撰-정7품)이요,
사위 이사빈(李士斌아래貝)은 용천(龍川) 사람이니 판서(判書)이다.
과(艸頭아래過)의 아들 원보(元普)는 *지인주사(知仁州事)이며
수(蓚)의 아들은 숙로(淑魯)·처중(處中)·영재(永梓)·군재(君梓)의 후손은
진주(晋州)로 본관을 옮겼다고 한다.]
- 송암공(휘 세기)의 차자인 부정공 매의 장자 경지는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정3품)를 거쳐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종2품)에 오르고 오성군(鰲城君)에 봉군 되었고
차자인 경원은 벼슬이 7품인 수찬(修撰)이다.
사위 이사빈은 용천 사람으로 벼슬이 판서이다.
송암공(휘 세기)의 3자인 상서공 과의 아들 원보는
현 인천의 지사인 지인주사(知仁州事)이고
송암공의 4자인 사인공 수의 아들 다섯 중 장자 숙로는 가선대부이고
차자 처중은 휘와 묘소 위치만 기록되고
3자인 지협(之俠)은 태조가 사헌부 대사간 좌찬성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지만
증직으로 대광보국 의정부 좌의정이고
4자인 영재와 5자인 군재의 후손은 진주로 본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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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법판서(典法判書)
- 고려 시대 법률(法律) 사송(詞訟)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전법사(典法司)의 벼슬 이름.
정3품의 품계로서 판사(判事) 다음에 해당함.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고친 이름임. 전법사(典法司)
*진현관(進賢館)
- 고려 시대에 재능 있는 문신(文臣)이 모여 임금을 시종(侍從)하던 관아.
충렬왕 때에 처음 베풀어서 34년(1308)에 문한서(文翰署)에 합하였다가 다시 베풀었고,
공민왕 때에 없애고 베풀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수찬(修撰)
- 고려 시대에 예문춘추관에 둔 정7품 벼슬.
충렬왕 34년(1308)에 예문춘추관이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되면서 정8품 벼슬로 되었다.
*지인주사(知仁州事)
- 인주는 현 인천의 옛 이름.
각도의 도통사(都統使) 밑에 딸린 5품에서 6품까지의 벼슬.
중앙 관아의 우두머리 다음가는 벼슬. 2품에서 5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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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공(文孝公- 휘 천)과 다못(=다만) 평리공(評理公)의 아들
*사인(舍人) 부(賻-貝대신木)와 부사(府使) 규(木+초두없는蓼),
동암공(東菴公)의 아들 가락군(駕洛君) 관(琯),
익재 문충공(益齋文忠公) 제현(齊賢)이
다같이 성균시(成均試)에 장원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묵헌(默軒) 민문인공 지(閔文仁公漬)가 *조문량공(趙文良公)으로 더불어
「빛나는 꽃송이 3가에서 다섯이 장원급제하야
대제학(大提學)에 갖춘 경사(慶事)는 보고 듣기에 드물다」는 시(詩)가 있고
고려 사기(高麗史記)에는 3대에 여덟 경(卿)과 4대제학(大提學)이라 칭하여
*이도은 숭인(李陶隱崇仁)이 *세과(世科)라 일렀으니 아! 성대(盛大)하도다.]
- 문효공(菊堂公 諱 천)과
더불어 평리공(성암공 휘 인정)의 장자 사인공 휘 부, 부사공 휘 규와
동암공(문정공. 휘 진)의 장자 가락군 휘 관과
차자 익재 문충공 휘 제현 등
다섯 명이 다같이 성균시에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묵헌 문인공 민지와 문량공 휘 조간이 이를 찬양하는 시를 남겼다.
「빛나는 꽃송이 3가에서 다섯이 장원급제하야
대제학(大提學)에 갖춘 경사(慶事)는 보고 듣기에 드물다」
이는 즉 '성암공(평리공. 휘 인정)과
동암공(문정공 휘 진)과 송암공(문희공. 휘 세기)의 3 집안에서
휘 부. 휘 규. 휘 관. 휘 제현. 휘 천 등 다섯이 장원급제하고
대제학에 오른 경사는 보고 듣기에 드문 일이다.' 라는 뜻이다.
△ 3대(代)
고려의 역사 기록에 3대라고 하였는데
3대란 중조 15세 열헌공(휘 핵)과 중조 16세인 열헌공의 아들 3명과
중조 17세인 9명의 손자들을 가리켜 3대(3세)라 한다.
중조 15세 16세, 17세의 3대(세)에 모두 13명이다.
15세- 열헌공 (휘 핵)
16세- 성암공(휘 인정). 동암공(휘 진). 송암공(휘 세기) 등 열헌공의 3형제
17세- 사인공(휘 부). 헌납공(휘 규). 이암공(휘 관). 익재공(휘 제현). 호군공(휘 지정).
국당공(휘 천). 부정공(휘 매). 상서공(휘 과). 사인공(휘 수) 등 열헌공의 9손자
△ 8경(卿)
여덟 경(卿)은 재상급 이상으로
15세 ① 열헌공 핵(문하평리- 종2품. 증 상서좌복야-정2품).
16세 ② 성암공 인정(문하평리- 종2품).
16세 ③ 동암공 진(검교정승- 정1품. 임해군. 시호 문정).
16세 ④ 송암공 세기(봉익대부 밀직부사 대제학 검교정승- 정1품. 시호 문희).
17세 ⑤ 이암공 관(가락군- 종1. 2품).
17세 ⑥ 익재공 제현
(추성량절 동덕협의 찬화공신 벽상 삼중대광 우정승
계림부원군 영예문관사- 정1품. 시호 문충).
17세 ⑦ 국당공 천
(추성보리공신 삼중대광 검의정승 예문관 대제학 문하시랑 동평장사
월성부원군-정1품. 시호 문효).
17세 ⑧ 상서공 과(상서- 정3품. 판서判書· 전서典書)를 8경이라 말한다.
△ 4대제학(大提學)
대제학을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① 동암공 진(출납으로 사림원-예문관. 16세).
② 익재공 제현(예문관사. 동암공의 차자. 17세).
③ 송암공 세기(밀직사 대제학. 16세).
④ 국당공 천(예문관 대제학. 송암공의 장자. 17세).
△ 5장원(五壯元)
-열헌공의 손자 9명 중 5명이 과거에 장원 급제.
① 사인공 부(성암공 장자. 17세)- 成均魁,
② 헌납공 규(성암공 차자. 17세)- 成均魁,
③ 이암공 관(동암공 장자. 17세)- 成均魁,
④ 익재공 제현(동암공 차자. 17세)- 成均魁,
⑤ 국당공 천(송암공 장자. 17세)- 成均魁
도은 이숭인이 대대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으로
열헌공 집안을 세과(世科)라고 하였으니
집안의 번창함이 풍성하고 크기도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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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못- 더불어. 함께. 이로 인하여. 다만(전라도 방언)
예] 문효공(文孝公)과 다못 평리공(評理公)의 아들
예]“흩날린 꽃송이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한 비구니승이 단정히 일어나 대답했다.
“흰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
만공스님이 칭송했다.
“다못 일편지를 얻었도다.”
*사인(舍人)
- 고려 시대에 내사문하성의 종4품 벼슬. 문종 때 중서사인으로 이름을 바꿈.
*묵헌(默軒) 민 문인공 지(閔文仁公漬)
- 묵헌 문인공 민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1248~1326).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默軒).
충숙왕 때 수정승(守政丞)에 올랐으며,
《천추금경록(千秋今鏡錄)》을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를 만들고,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편찬하였다.
*조문량공(趙文良公)
- 문량공 조간(趙簡)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제(金堤).
1279년(충렬왕 5)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서적점녹사(書籍店錄事)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왕이 문신들에게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또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황패(黃牌)를 받고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88년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왕명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점차 올라 보궐(補闕)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자,
왕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기거주(起居注)로 특진시켰고,
다시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서 경상안렴사(慶尙按廉使)에 보임되었다.
1298년에는 좌사의(左司議)로 과거를 주관한 바 있고,
1300년 좌부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부고시관)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그 뒤 좌간의·좌승지를 거쳐 우상시권수밀직부사(右常侍權授密直副使)에 올랐다.
충선왕 때 형조시랑우간의대부(刑曹侍郎右諫議大夫)를 거쳐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충숙왕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역임한 뒤 찬성사에 올라 죽었다.
시문에 뛰어나
조선 영조 때 유광익(柳光翼)의 《풍암집화 風巖輯話》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도은 숭인(李陶隱崇仁)
- 도은 이숭인
고려 말기의 학자로 본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삼은(三隱)
-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세 사람을 아울러 이르는 말.^
도은은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곧 장흥고사(長興庫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으며
명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할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달하여 보내지 않았다.
우왕 때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주청하다가 한때 유배,
그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전임하였으나
친명(親明)· 친원(親元) 양쪽의 모함을 받으며 여러 옥사(獄事)를 겪었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할 때 정도전의 원한을 사서
]그의 심복 황거정(黃巨正)에게 살해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 언어가 우아하고 고상하며 고전적인 품위를 지님)하여
중국의 명사들도 탄복하였다.
저서에 《도은집(陶隱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