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문화의 산실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이탈리아어:Medici)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과 피렌체의 통치자(그 가운데서도 위대한 로렌초는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로 가장 유명함)를 배출하였으며,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일원까지 되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자기네 도시 정부를 지배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권력 아래 피렌체를 두었으며,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라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다른 위대한 귀족 가문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하였다.

▲ 메디치 가문의 문장
역사[편집]
가문의 유래와 성장[편집]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에 왔다고 하며,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230년대 문헌에서였다. 비록 메디치가 이탈리아어로 “의사”를 뜻하는 말이지만, 명칭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14세기 초, 메디치 일족들은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과 더불어 모직물 교역의 걸출한 집단으로 자랐다. 도시 정부 시설에서 일부 메디치 사람들이 참석했음에도 아직 알비치나 스트로치와 같은 저명한 가문들보다 중요성이 떨어졌다.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라는 사람은 치옴피의 난 동안 모직물 제작자 조합의 의장직을 맡았으며, 1396년 안토니오라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400년에 메디치 일가는 또 다른 음모와 연루되어 두 명만 제외하고 20년 동안 피렌체의 정치에서 추방되었다. 이 둘 중의 한 사람인 아베라르도(비치) 데 메디치는 나중에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아베라르도의 아들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으며,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록 얼마간의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그는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조반니 디 비치 이후 메디치가의 계통은 둘로 나뉜다. 조반니 디 비치의 장자 국부 코시모(Cosimo de' Medici 'Pater Patriae') 계통과 조반니 디 비치의 차남인 대 로렌초(Lorenzo di Cosimo de'Medici)의 계통이다.
1434년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의 자리를 인계받았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가문의 장자 계통 -국부 코시모의 계통- 은 1537년 피렌체의 초대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암살 때까지 군림하였다. 수 세기 동안의 긴 통치는 겨우 민란으로 국외추방을 당한 두 번(1494년-1512년 사이, 1527년-1530년)만 중단되었다. 권력은 차남 계통-대 로렌초의 계통- 에게 넘어갔는데, 그의 증손자이며 초대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1세와 함께 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 상승은 연대기 베네데토 데이(Benedetto Dei)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세대에 걸친 출세 기반을 확실하게 잡았다. 아무튼,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은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어 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피에로 데 메디치의 가족을 그려넣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마니피캇의 성모.(좌)/ 메디치 가문 주요 인물을 곳곳에 그려 놓은 동방 박사들의 행렬, 베노초 고촐리, 프레스코, 1459년경
금융에서의 업적[편집]
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복한 가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에까지 확대되었다. 회계 전문직에서의 그들은 신용과 차변을 추적하기 위한 복식부기 체제의 개선이라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 체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는 회계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5세기[편집]
피에로 데 메디치[편집]
국부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겨우 5년(1464-1469) 동안 정권을 잡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통풍을 앓고 있어 '통풍병자 피에로(Piero il Gotosso)'라고 불렸으며, 통풍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예술 후원 사업에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다. 병에 걸린 그는 집권기 동안 시간 대부분을 자택에서 보냈으며, 그 결과 피렌체에 대한 메디치의 지배력은 점차 약해져 갔다. 그와 같이 메디치의 통치는 그의 아들 로렌초가 물려받을 때까지 정체되어 있었다.
로렌초[편집]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게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죽은 후에 그는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또한,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었다. 로렌초는 자신의 성공적인 도시경영을 계속 이어가게 하고자 아이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들의 미래와 직업을 설계하였다. 1478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부활절에 교회에서 암살당했다. 로렌초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 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활동[편집]
메디치 가문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영향력을 끼쳐 16세기 유명한 두 명의 교황들(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을 배출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로마와 피렌체 두 곳을 손에 넣어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살아남게 하였다. 그들 모두 예술을 후원하였지만, 신학분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또 다른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으로는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레오 11세)가 있다.
코시모 1세[편집]
16세기 메디치 일족 가운데 가장 우수한 풍채를 가진 사람은 코시모 1세였다. 무젤로로 물러갔다가 돌아온 그는 대부분의 피렌체 시민들이 싫어했던 맞수 시에나를 정복하고서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창건하면서 토스카나 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잡게 된다.
유명한 인물[편집]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 (1331–1388), 비정규직 섬유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인 치옴피의 난을 진압하여 피렌체의 절대 권력자가 등극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1360–1429), 메디치 가문의 재산을 회복시켜 유럽 최고의 부유한 집안으로 만듦
코시모 데 메디치 (1389–1464), 메디치 왕조의 개조
로렌초 데 메디치 (1449–1492), 르네상스 황금기 동안의 피렌체 군주
조반니 데 메디치 (1475–1523), 교황 레오 10세
줄리오 데 메디치 (1478–1534), 교황 클레멘스 7세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1498–1526), 교황군 용병대장. 어머니는 카테리나 스포르차, 대공 코시모의 아버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1519–1574), 메디치의 영광을 회복하여 토스카나의 초대 군주로 등극
카트린느 드 메디치 (1519–1589), 프랑스의 왕비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 (1535–1605), 교황 레오 11세
마리 드 메디시스 (1575–1642), 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 (1667–1743)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