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매력은 “끼라 끼라”와 “블룸”
서 영 복
"신들의 섬“이라는 발리의 여행은 여느 여행과는 좀 다를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보다 걱정이 앞섰다. 칠순을 코앞에 둔 친정 언니들과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언니들과 별반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할머니 여행자이다. 언젠가 TV의 여행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우연히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알게 되어 기회를 기다리던 중에 언니들과의 여행지로 선택하게 되었다.
보통 때처럼 여행사의 완전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절반은 자유여행이어서 그야말로 나의 임무가 막중하였다. 인터넷 예약에서부터 집에 돌아오는 마지막 날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남편이 신신당부하였다. 하지만 그런 말은 귓가에서 잠시 맴돌았을 뿐이었다. 공항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살던 둘째 언니와 함께 택시를 잡아타자마자 평소와 같이 수다를 떨어댔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뒤 트렁크에 실었던 두 사람분의 여행 가방은 내려놓지 않고 택시를 보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몇 분 동안 어쩔 줄 모르고 있었더니 우리를 내려놓은 택시기사가 한참 만에 되돌아와서는 해외여행 가는 사람 맞느냐며 함께 한바탕 웃어댔다. 공교롭게도 다른 방향에서 형부가 태워다 준 큰언니마저 잠겨버린 여행 가방을 열지 못해 열쇠 가게를 전전하다가 늦을 뻔했다고 했다. 아침부터 실수의 연발은 여행 첫날 첫 시간의 경고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 일은 두고두고 웃을 추억담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언니들과 국내 여행을 다녔지만 “발리 여행”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일곱 시간을 남쪽으로 날아가니 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나라 인도네시아의 발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도 크기의 약 3배가 좀 못 되는 면적인 이곳 섬, 웅우라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향기가 매우 좋은 천리향 꽃으로 환영 레이를 만들어 머리에 둘러주며 먹음직스러운 열대과일 바구니부터 안겨준다.
‘발리’의 뜻이 ‘축제’라는 어원답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적하고 환상적인 기후 때문에 추운 걸 싫어하는 우리 자매들은 얼마든지 기분 좋게 지낼 수 있는 매력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변화가 거의 없는 날씨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기에 뉴스 시간에 ‘일기예보’라는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산도 거의 준비 없이 다니기 때문에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을 받쳐주고 돈을 받는 직업도 있다는데 500~1000루피아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는 100원 정도나 될까? 열대우림지역이라서 사철 내내 과일이 풍성하다. 우리 언니들과 나는 모두 ‘과일 귀신’들인데 나무에서 갓 따온 듯한 신선한 열대과일들이 얼마나 값싸던지 평생 먹을 것 실컷 먹고 가자고 하였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건설회사도 종종 들어와 공사를 맡아 몇 년씩 머물다 가게 되는데 남편을 따라서 함께 들어오는 아내들이 보통은 세 번씩 울게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곳에 오자마자 미개한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스러워 울고, 두 번째는 생각보다 편하고 좋아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단다. 한 달 생활비로 이천 달러만 써도 운전기사에 가정부를 2명씩 고용하며 왕비처럼 살 수 있으니 그럴 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세 번째는 이곳을 떠날 때 가기 싫은 마음에 슬퍼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했다.
아무튼, 이곳 발리에는 스키장만 빼고 없는 게 없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데 그래서 신들이 그렇게 많을까 싶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사람들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지만, 이곳 사람들의 90%는 힌두교를 믿는다. 그리고 매일 아침 기도하는 것을 가장 자랑스레 여긴다. 이들은 집마다 대문 쪽에 꽃과 음식이 담긴 ‘짜낭’이라는 작은 바구니를 차려놓는다.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어서 매일 생화로 장식하며 바꾸어 놓는데 자동차마다 도 앞 좌석 유리창에 빠짐없이 놓여있다. 발리의 신은 야자나무 높이보다 높은 건물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3층 이상의 건물을 보기 어렵다.
노을이 지는 짐바란 해변의 노천카페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즐기던 씨푸드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집시들의 노래와 이곳 전통악기인 ‘린딕’이라는 악기연주 또한 들어줄 만하였다. 고기보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무한 리필 되는 온갖 해산물을 야자수껍질로 만든 숯불에 구워 먹는 저녁 만찬은 역시 원더풀이다.
열대어 수족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물고기들과 함께 마음껏 맑은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놀던 스노클링이며 적당한 속도의 래프팅도 아직은 건강한 우리 나이에 즐길만한 놀이였다. 공원에서 원숭이가 안경을 빼앗아 가는 바람에 3달러를 들여 먹을 것 사주고 살살 달래서 되찾은 일도 재미있던 기억이다. 발리 왕비들이 즐겼다는 두 시간짜리의 아로마 꽃물 스파와 마사지는 달랑 일회용 팬티 하나만 입고 받게 되었는데 언니들이 가장 좋아했던 코스이고 평생 처음 해보는 호강이었다.
데이 크루즈를 선택하여 인도양 바다로 나가 작은 섬마을 원주민들과도 한나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인도네시아어인 바하사에는 참 재미있는 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끼라끼라(kira kira)”는 about의 뜻이다. ‘대략, 약, 대충’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아주 많이 쓰이는 말이다. 시간을 물어보면 절대로 정확히 말하지 않고 “끼라끼라 9시”라고 말한다. 대략 9시쯤 되었다는 말이다. 시간관념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약속 시각에 늦어도 왜 늦었느냐고 묻지 않고 늦은 사람 또한 미안해하지도 않는단다.
어찌 보면 참 너그럽고 여유롭다. 우리네처럼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 없나 보다. 천천히 대충 살아가는 이들, 둘째 언니는 이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심지어 나이를 물어도 “끼라끼라 50살” 이렇게 말한다. 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럴 때 ‘아이고! 속 터져!’ 이러지 않을까?
재미있는 말이 또 하나 있다. “블룸(belum)"이라는 간단한 말 한마디는 'Not yet'의 뜻이다. 우리나라 말로 쓰자면 ‘아직’이라는 뜻이지만 만병통치약쯤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점심때가 가까워져 오는데 아침 식사했느냐고 물어보니 ‘안 먹었다’가 아닌 ‘블룸’이다.
아직 먹지 낞았다는 뜻이다. 며칠 동안 우리가 묵게 되는 펜션에 취사도구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블룸’이었다. 없으면 없다고 확실히 말할 것이지 ‘아직’이라니 ‘아직’이라는 말은 부정의 뜻이지만 그 안에 긍정의 뜻을 담아두는 것이다. 더욱더 가관인 것은 칠십도 훨씬 더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가족이 몇 명이냐고 물으니 ‘블룸’이라고 대답한다. 이상히 생각되어 조심스레 결혼했느냐고 했더니 역시 ‘블룸’이라고 말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아직 결혼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장가를 갈 것이며 아이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로 말했을까?
그렇다. 이들의 말에는 여운이 있고 희망이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제부터 ‘아직’이라는 매력적인 말을 부정의 말 대신 사용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