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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6)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4구간 (대구 강정→현풍) ② [사문진→ 달성보]
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독보 27km]▶ 백파
* [대구 T,O,P 호텔]→ 성서산단역→ 대실역→ (택시)→ 강정보(도강)→ 고령 다산면 곽촌제(堤)→ 대가야역사문화공원 길→ 다산 호촌제(堤)→ 다산문화체육공원→ 사문진교(도강)→ 달성군 화원유원지(사문진 나루터)→ 천내천→ 강둑길→ 화원 수변야구장→ 강둑 길(옥포생태공원)→ 강변 팔각정 쉼터→ 길고 긴 억새꽃 수변공원 길→ (광주-대구고속도로) 교각→ 담소원→ 고령교→ 강변야구장→ 성산대교→ 달성노을공원→ 달성보(두 친구의 마중)→ 친구의 환대(현풍 테크노폴리스 식당)→ 현풍 홍시호텔
오늘의 낙동강 종주 (2) ; 사문진→ (천내천)→ 88낙동교→ 달성보→ 현풍
* [경유1] 화원유원지(사문진나루터)에서 다시 (사문진교) 도로의 굴다리를 지나와 화원교(천내천)를 건너 낙동강 제방 길로 들어섰다. 제방의 오른 쪽 낙동강 둔치에는 화원체육공원(강변축구장)이 있다. 그런데 이 좌측의 화원읍내에서 내려오는 천내천은 화원의 삼필봉-작봉-용문산 산곡에서 발원하는데, 이 천내천 중류에 남평 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수봉정사)이 있고, 천내천 건너 그 맞은편에 추계 추씨의 인흥서원이 있다.
문익점(文益漸), 남평 문씨 그리고 수봉정사(壽峰精舍)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인흥) 세거지는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인흥(仁興) 마을에 있는 9채의 고택(古宅)은 모두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어 잘 꾸며진 담장 밖으로까지 생기(生氣)가 전해온다. 튼실하고 빼어난 솜씨로 지어진 ‘수봉정사’, ‘광거당’, ‘인수문고’의 문중 공동재산이 있다. ‘광거당(廣居堂)’은 1873년(고종 9)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 부자가 지은 건물로 문중 자제들을 가르치던 수양장소이다. 정면 4칸·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ㄱ’자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전면 좌측 3칸에 전퇴가 설치되었고, 우측 1칸 앞으로는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는데 누마루는 툇마루보다 1단 높게 만들어졌다. ‘인수문고’는 8천 5백책(약 2만권)의 고서를 소장한 일제시대 국내 최대의 문중문고였다. 인수문고의 현판 글씨는, 박팽년의 19대손 삼가헌의 효남(曉楠) 박병규(朴秉奎)가 썼다.
‘수봉정사(壽峰精舍)’는 1936년 일제 때 문영박(文永樸 : 1880∼1930)의 인격과 학식을 기리고 후손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한 교육 장소로서 남평 문씨 후손들이 1936년에 세웠다 한다.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의 대표적인 건물로, 세거지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전면 상단에는‘수봉정사(壽峰精舍)’, 후면 상단에는‘수백당(守白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문영박의 호(壽峰 수봉)와 별호(守白堂 수백당)를 딴 것이다. 수봉(壽峰)은 1919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속적으로 전달한 애국지사로 나라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80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정면 6칸·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건물 앞쪽에 마루를 설치하고 뒤쪽으로는 5칸의 방과 1칸의 누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과 관청, 사찰 건물에만 원주(둥근 기둥)를 사용할 수 있었고, 민가에는 사각기둥을 세웠는데 수봉정사의 기둥은 원주(7개)로 되어 있어 전통한옥 양식과 구별된다.
수봉정사는 손님을 맞고 가문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건물로 특히 정원이 아름답다. 앞마당 중앙에 둥글게 흙을 돋워 소나무 고목을 심었고, 담장가로는 화단을 조성하였다. 수봉정사로 들어오는 대문채는 정면 3칸·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는 인흥사(仁興寺)라고 하는 절터에 조성되어 인흥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수봉정사는 인흥사의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이곳은 일연(一然)스님이 11년간 주석하면서 『삼국유사』의 행적편을 완성하는 등 삼국유사의 기틀을 잡은 옛 인흥사(仁興寺)의 터전이다. 수봉정사는 일찍이 폐허가 된 인흥사의 대웅전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옛 인흥사의 흔적이라고는 수봉정사 옆 대추밭에 허물어진 석탑 한 기, 수봉정사 행랑채 옆 우물(고려정), 몇 개의 옛 주춧돌, 부서진 기와 조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경북대학교 박물관 앞 정원(월파원)에는 인흥사지 3층석탑이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이전 복원되어 있다.
노당(露堂) 추적(秋適), 그리고 인흥서원(仁興書院)
남평 문씨 (인흥)세거지 맞은편 개울[천대천] 건너에는 ‘인흥서원(仁興書院)’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인 노당(露堂) 추적(秋適, 1246~1317) 선생을 봉안한 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 순조25년(1825년)에 추적의 20대손인 추세문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1866년(고종 3)에 추계 추씨(秋溪秋氏) 추황(秋篁, 1198∼1259), 추적(秋適, 1246~1317), 추유(秋濡, 1345∼1404), 추수경(秋水鏡, 1530∼1600) 등 추계 추씨 4현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화를 피하여 창건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과 10월 3일에 춘추 향사를 봉행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의 서원을 비롯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사당 등 6동의 건물이 있고,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신도비’는 1261년(고려 원종 2) 문과에 올라 직사관 좌사간을 거친 후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을 지낸 노당(露堂) 추적(秋適, 1246~1317)의 행장을 새긴 것으로 1864년(고종 1)에 건립되었다. 높이 210cm, 폭 83cm이며 두께 56cm 규모이다. 비문은 홍문관제학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해장 신석우(1805~1865)가 지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명심보감(明心寶鑑)』은 고려 충렬왕 때 예문관 제학을 지낸 노당(露堂) 추적(秋適, 1246~1317)이 편찬한 책이다. 추적은 안향(安珦)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유교(儒敎)를 전파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공자(孔子) 등 제자백가의 경서와 저술, 시부(詩賦) 가운데에서 쉬우면서 생활에 기본이 되는 내용만을 골라 엮은 것이다. 책의 이름에서 ‘명심(明心)’은 마음을 밝게 한다는 뜻이며, ‘보감(寶鑑)’은 보물과 같은 거울로서 교본이 된다는 뜻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국내에서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에도 보급되어 있고, 영문으로도 번역되어 한국학 연구의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흥서원 『명심보감(明心寶鑑)』 판본은 1869년(고종 6) 조선 노당 추적의 20대손인 추세문이 간행한 ‘인흥재사본’으로 총 31매이다. 이 판본은 국내의 다른 명심보감 판본에 비에 틀린 글자가 적고 글의 표현이 정확한 데다 이율곡 선생 등 유명한 학자들의 서문과 발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소장되어 있는 이 명심보감 목판 31매가 유일본으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이왕 소개한 김에 『명심보감(明心寶鑑)』 맛좀 보자. 천명(天命)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음미할 만하다,
莊子曰 若人이 作不善하여 得顯名者는 人雖不害나 天必戮之니라 (장자가 말하였다. “혹 사람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하여 훌륭한 이름을 얻는 자는 사람이 비록 해치지 않더라도 하늘이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 種瓜得瓜요 種豆得豆니 天網이 恢恢하여 踈而不漏니라. (오이씨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 하늘의 그물이 넓어서 보이지는 않으나 새지는 않는다.)
다시 직선의 제방 길
다시 제방의 길 위에 섰다. 천내천 화원교를 지나 우측의 낙동강을 끼고 내려가는 바이크로드이다. 강변의 둔치에 화원야구장이 있다. 오늘의 제1포인트인 달성보까지 19.5km(이정표)를 남겨두고 있다. 길의 왼쪽은 화원읍 시가지, 가까이엔 가을걷이를 끝낸 빈 들판, 그리고 그 뒤로 화원읍 아파트 건물이 보이고 멀리 산들의 실루엣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은 사문진교에서 내려온 낙동강, 강안의 둔치는 가을의 마른 풀더미가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낙동강 건너편 고령군 다산면의 하얀 아파트 단지도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 가지 않아 ‘기세곡천(奇世谷川)’을 만났다. 천변을 따라 조금 올라가서 다리를 건너 다시 강변의 길로 들어섰다. 기세곡천은 달성 비슬산 북단의 산곡(-용연사)에서 발원하여 옥포읍으로 경유하여 낙동강에 유입되는 지천이다. 기세곡천의 상류 기세리(奇世里)에 아름다운 옥연지(玉蓮池)가 있다. 그리고 옥포읍과 낙동강 사이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支線)과 대구-광주간 고속도로의 분기점[옥포J.C]이 있다. 고속도로의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주선(主線)은 강 건너편의 지역인 성주-고령을 경유하여 현풍(玄風)으로 이어진다. 지선은 현풍J.C에서 주선과 만나서 창녕-남지 방향으로 내려간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그야말로 아득한 아스팔트 대로(大路)이다. … 안동댐에서부터 바이크로드가 이어지면서 낙동강 종주는 한결같이 넓은 도로를 걷는 것이다. 태백에서 안동의 도산서원까지는 강변의 오솔 길, 한 여름 풀밭 길이었다. 길이 고르지는 않아도 거기에는 풋픗한 풀내음이 감도는 정서가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었다. 눈앞에 이어지는 길은 직선의 탄탄대로(坦坦大路), 거리낌 없이 뻗어가는 팍팍한 문명(文明)의 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길은 낙동강과 함께 흐르는 도도한 도맥(道脈)이 아닌가. 도산의 퇴계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낙동강 도맥은 풍산, 예천, 문경, 상주, 선산, 구미, 달성 하빈, 성주를 거쳐 오면서 하늘[天理]과 땅[地理]을 아울러 사람의 도리를 궁구하고 실천한 선현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물길이다.
군자(君子) 대로행(大路行)
넓은 길을 가다보니, 문득 ‘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行)’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여기 바이크 대로(大路)가 지금 나의 앞길을 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군자는 하늘의 품성을 지니고 사람다운 도리를 실천궁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 ‘군자 대로행(大路行)’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떳떳한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참다운 도리를 다하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일찍이 공자 이래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치는 유학에서는, 대인(大人, 君子)과 소인(小人)을 구분하여 가르친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인은 스스로 인격을 갖추고 아름다운 덕망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에 반해 소인은 공공(公共)의 선(善)보다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다. 맹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군자의 품성을 타고 났다[人性本善]’고 설파한다.
우리나라 유학에서는, 사람은 하늘에서 품부(稟賦) 받은 본성(本性)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 착한 본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 주변에는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삶의 행태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요즘 세상은 돈[물질]이 인간의 도리[정신]를 우선하고 몸의 욕구(慾求)가 마음의 의리(義理)를 압도하는 것 같다. 이러한 세태적인 경향은 물론 이기적인 천민자본주의의 패악이기도 하지만. ...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근본(根本)이고 무엇이 말단(末端)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사람은 마음으로 산다.’ 마음이 근본(根本)이고 몸은 말단(末端)이다. ‘마음’이 명령하는 장수이고 ‘몸’은 마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졸이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물질을 우선하는 가치를 ‘당연한 상식’, 아주 ‘원만한 처세’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착각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벌어지는’ 모든 패륜과 비리적인 사건들은 모두 이 전도된 가치관에 의해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범박하게 말하면, ‘참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대인(大人)이고 ‘몸의 욕구’에 따라 사는 사람은 소인(小人)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도 나무처럼 가꾸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수양을 통해 덕(德)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기동 선생의 말씀처럼, ‘내가 바로 서면 모든 것이 바르게 되어 이 세상은 조화로움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내가 바로 서야 한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낙동강 탄탄대로는 대인의 길을 펼쳐 보이고 있다. …
그런데, 아프게 자각한다! 아직 나 자신도 소인의 기질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사심(私心)이 작용할 때가 많으니 얼굴이 뜨거워진다. 따가운 햇살 때문이 아니다. '아직' 미완의 인생이다. 아, 어디까지 가야 이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낙동강 대로를 걷는 일은 그래서 내 자성(自省)의 길이요, 내 인생사의 참회록이다.
강안의 습지 … 하얀 억새꽃, 초록의 떡버들
길은 변함없이 직선으로 이어진다. 좌측에는 화원의 들판, 우측에는 사문진교가 저만큼 멀어져 가고 강안의 둔치와 습지가 계속되고 있다. 강물은 둑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고 넓은 둔치를 사이에 두고 흐르기도 한다. 둔치는 아직도 초록빛을 띠고 있는 떡버들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기도 하고 갈색의 풀밭위로 눈부신 억새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낙동강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다양한 모습의 바뀌는 강안의 습지가 나그네의 마음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옥포생태공원
오전 11시 44분, 길목에 대·소의 삼각형으로 디자인한 ‘옥포생태공원’ 세련된 조형물이 있다. 한국수자원공사(K-water)에서 시설해 놓은 것이다. 그 옆에 이정표가 있다. 화원유원지 사문진 나루에서 3.5km, 마겟나루까지 2.5km, 옥포수변테크까지 5km를 앞두고 있는 지점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은 화원읍과 논공읍 사이의 지역이다. 강안을 바라보면 낙동강 옥포의 둔치에 습지가 자연스럽게 생태공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강안의 습지에는 노란 들국화 군락과 하얀 억새꽃이 무더길 피어 가을의 정취가 넘쳐 흐른다. 강 건너 멀리 고령군 다산면의 하얀 아파트군이 보인다. 이어지는 옥포생태공원은 호수(湖水)처럼 고여 있는 낙동강 연안의 둔치, 버드나무 군락와 억새가 어울려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팔각정, 그리고 강안 수변공원 길
낮 12시, 강둑 길 옆 팔각정에 이르렀다. 신발을 벗고 팔각정에 올랐다. 무거운 배낭을 풀고 물을 마시고 준비해온 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가을 날씨는 청랑하고 부드러운 바람결이 더운 몸을 식혀준다.
팔각정부터 바이크로드는 강둑이 아니라 강변의 둔치, 수변공원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이었다. 12시 32분 마겟나루 이정표를 만났다. 둔치에는 억새만 무성하였다. 실제로 나루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화원유원지에서 6.0km를 지나왔다. 이어지는 길 양 쪽은 군락을 이룬 억새꽃 천지다.
수변테크공원
오후 1시. 달성보까지 12.5km 바이크로드 이정표 앞을 지났다. 길은 여전히 억새꽃 군락지를 지나고 있다. 오후 1시 10분, 강안의 가까이에 시설되어 있는 옥포 수변테크공원에 나아갔다. 인적이 없는 강가, 일정한 거리의 테크 산책길을 만들어 놓았다. 호수가 되어 있는 고요한 낙동강을 바라보며, 큰 버드나무 아래 통나무 의자가 있어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백주의 정적이 흐르는 강가, 호젓한 기분에 젖는다. 은은히 고독감이 스며들기도 하지만, 호젓하고 고요한 마음이 평화를 누린다. 주변에 사람은 없다. 자전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고독은 유연한 자연 속에서 더욱 아름다움이 있다. 달성보까지 아직도 10km를 더 걸어야 한다.
다리가 무겁다. 연일 강행군을 하고 있는 노정이다. 아침 출발할 때 발바닥에 바세린을 듬뿍 바르고 두터운 양말을 신었지만, 발바닥이 무척 아프다. 일전, 가운데 발가락에 물집이 생겨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감은 상태, 조심스럽게 걷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직선의 주로에 섰다. 혼자서 걷는 길, 아득한 길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귀하게 ‘사람’을 만났다. 마침 앞에서 길 주변을 정리하는 분이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이 옥포수변공원을 관리하는 분이라고 했다. 가끔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바이커들만 지나다니는 곳, 거기에서 사람을 만나니 여간 반갑지가 않다. 낙동강 종주의 여정을 이야기하면서 스냅 사진 한 컷을 부탁했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화사한 가을 햇살이 내리는 낙동강, 길게 뻗은 직선의 길 위에 홀로 걷는 나그네의 모습을 담았다.
금포천 다리를 건너다
오후 1시 33분, 길은 다시 강둑으로 올라간다. 강안의 너른 습지에 초록의 버드나무 군락과 하얀 억새꽃이 가득하다. 우측으로 강 건너 저만큼 고령군 다산면 산업단지의 공장건물도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들판 너머 금계산과 지나온 옥포읍의 하얀 아파트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 1시 38분, 금포천을 만났다. 달성군 논공읍에서 내려오는 지천이다. 다리는 금포천을 조금 거슬러 올라간 위치에 있었다. 상당히 너른 지천이다. 금포천은 논공읍 왕영산에서 발원하여 노홍지를 이루고 논공읍 금포리를 지나 이곳 낙동강에 유입된다. 논공읍(금포리)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청이 있다. 금포천을 바라보니 논공읍 건물들과 아파트 단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금포리 낙동강은 명경지수(明鏡止水)였다. 길은 거침없이 뻗어가고 있는데 고요한 강심은 침묵의 언어로 하늘을 담고 있었다. 길은 아득한 직선이다가 아주 완만하게 S자를 그리며 휘어져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직선의 주로가 이어졌다. 오후의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걷는 길,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는다. 아득한 길 위에 따가운 가을 햇살이 온몸을 감싼다.
친구의 전화
그런데 전화가 울렸다. 내가 낙동강 종주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대구에 사는 고향 친구 류응하였다. 어제 전라남도 여수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가, 나를 보기 위해 지금 대구로 가는 길인데 달성보 도착시간이 좀 늦어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구 효목동에 사는 고향 친구 정복순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하루 종일 나의 전화를 기다렸다고 하면서 달성보 도착 시간을 묻는 것이었다. 사실 낙동강 대구 구간을 지나면서 대구에 사는 고향의 친구에게 전화 한 마디 없이 지나는 것이 예가 아닌 것 같아 어제 대구 강정보에 내려오면서 안부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오늘 두 친구가 달성보까지 마중 나와서 나를 영접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괜히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사양을 했으나 두 친구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면서 달성보로 나오겠다는 것이다. 류응하과 정복순은 워낙 의리와 인정이 넘치는 친구들이라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위치(달성보 4km)와 도착 예정 시간을 말해 주었다. 친구들으 목소리를 들으니 온몸에 힘이 솟는다. 마음이 살아나니 몸에 활력이 생긴다. 늘 생각하는 바이지만 ‘사람은 마음으로 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저만큼 중년의 여성이 혼자서 걸어오고 있다. 수인사를 하고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더니, 논공읍 금포리에 사는 분으로 달성보까지 갔다가 다시 금포리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낙동강 연변에 사는 지역 주민이었다. 오후의 가을 햇살이 강렬했다. …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끝에 콘크리트 교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88낙동교, 고령교 그리고 성산대교
이곳 논공의 낙동강에는 아주 가까운 거리를 두고 세 개의 교량(橋梁)이 있다. 첫 번째 만나는 다리는, 대구-광주간 고속도로의 ‘88낙동교’이다. 낙동강 좌안은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이요, 우안은 경북 고령군 성산면 강정리이다. 달성과 고령을 잇는 이 다리를 지나고 나면 고속도로는 강정리 고령J.C에서 남북으로 지나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만나 교차하게 된다. ‘88낙동교’ 교각을 지나고 나면, 서쪽으로 향하던 낙동강이 방향을 바꾸어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고속도로 교량 500m 아래에는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고령교가 지나고, 그 바로 아래 고령읍과 달성의 논공을 잇는 26번 도로의 성산대교가 있다.
수변공원 ‘담소원’
길목의 안내판을 보니, 세 개의 교각 아래 둔치의 수변공원을 ‘담소원’이라고 했다. 강변의 너른 둔치에는 달성강변야구장이 있고, 이어서 가을빛을 띠고 있는 너른 잔디광장과 억새꽃 군락이 이어진다. 성산대교 교각 아에서 달성보까지는 3.4km, 완전한 직선의 바이크로드인데, 이 구간을 ‘달성노을공원’이라고 했다. 아마 낙동강의 저녁노을이 일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금 지나는 시점은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화사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고 있다. 길목이나 둔치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눈부신 억새꽃은 참으로 장관이다. 그리고 가을색이 짙은 공원의 가로수가 강안으로 이어져 있는데, 눈길이 닿은 곳마다 그냥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광활한 잔디광장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만추의 낙동강 풍경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날, 만추의 낙동강 수변, 나는 오후의 맑은 햇살이 환하게 내리는 달성노을공원을 걷고 있다. 자로 잰 듯이 일직선으로 쭉 뻗은 바이크로드, 그윽한 계절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고개를 들어보면, 바라보는 곳마다 밝은 색상이 화면에 가득한 수채화. 그림 같은 풍경들이다. 특히 가을 햇살을 역광(逆光)으로 받은 억새꽃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산을 다니면서 매년 가을이 깊어가면 억새가 아름다운 산을 찾아다녔다. 경기도 포천 명성산 억새, 경남 창녕의 화왕산 억새밭 등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오늘, ‘정작 순수하고 맑은 억새꽃을 보려면 이곳 달성노을공원에 와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낙동강 강바람에 부드럽고 일렁이는 뽀얀 가을꽃!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여정이다.
오후 3시, 바이크로드 길바닥에 ‘달성보 2km' 표시를 선명하게 해 놓았다. 길 좌우에는 버드나무 군락이 가로수를 이루어 촘촘히 늘어서 있다. 그리고 여기 달성노을공원의 성산대교에서 달성보까지의 수변공원길은 2차로의 바이크로드에서 인도 1차로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넓고 시원하게 열려 있다. 좌측의 둑방 비탈에서 억새꽃이요 우측의 둔치에는 버드나무와 억새가 어우러져 있다.
그림 같이 아름다운 달성노을공원 길
담소원에서 2.4km 내려온 지점, ‘오실나루’ 이정표를 지났다. 이정표에 의하면, 달성노을공원을 ‘88낙동교’(담소원)에서 이곳까지는 ‘성산별빛공원’이라고 하고, 여기 오실나루에서 달성보까지 1.1km를 ‘천년별빛공원’이라고 구분하고 있었다. 캄캄한 밤 찬란하게 반짝이는 낙동강의 밤하늘을 상상해 본다. 아름다운 별빛의 이름으로 수변공원을 가꾸어 놓았다. 오실나루는 강안의 둔치가 넓어 옛날의 나루터 흔적을 찾아가 살필 수는 없었다. 낙동강 정비 사업을 하면서 강안의 구조를 많이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달성보 좌측에 있는 잠용산(300m)의 삼각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달성보까지 0.7km 지점에서 달성보의 구조물이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아아, 드디어 오늘의 포인트인 달성보가 지척에 있다! 배는 고프고, 몸은 천근(千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옥포생태공원 강둑의 팔각정에서 요기한 것은 이미 다 소진된 상태, 사실 기진맥진이다. 그러나 마음은 저 맑은 하늘의 새털구름처럼 가볍다. 아름다운 낙동강 가을 풍경에 심취하여 걷다보니 배가 고프고 몸이 고단한 줄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 강변의 1km 구간이 본격적인 달성보 노을공원이다. 오실나루 아래쪽에 있는, 약산여울은 달성보 부근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강변 일대를 ‘억새물결원’이고 명명해 놓았다. 그 습지와 수변공원에는 나무테크로 탐방로를 시설해 놓아서 가족과 연인들이 산책하기에 좋은 명소이다. 강 건너편은 고령군의 산들이 강안까지 내려와 있다.
대구 달성보(達城洑)
오후 3시 30분, 드디어 달성보에 도착했다. 달성보는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하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인안리 사이에 건설된 보(洑)이다. 길 앞 정면에 백색의 ‘달성나래센터’ 우뚝한 건물이 솟아있고, 그 오른쪽으로 달성보가 낙동강 위에 가로질러 가고 있다. 달성나래센터는 달성보를 관리하고 수문을 통제하는 곳으로,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달성보는 보의 한 가운데 주탑이나 시설물이 없어 언뚯 보면 일반 교량처럼 보인다. 그런데 강의 우안으로 수문이 설치되어 있고 물을 관리하는 시설이 되어 있다. 달성나래센터 건물 아래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는 타임캡슐광장이 있다. 한반도의 내륙을 종단하여 내려오는 5번 국도가 지나가는 길목이다.
‘달성노을공원’, 길가에 공원을 표시한 아름답게 디자인한 조형물이 서 있다. 맑고 밝은 날, 화창한 오후의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공원 안에 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이 가득하고 그 주변의 잔디밭에는 여러 개의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변공원에는 낙동강 캠핑장 주자장 등이 시설되어 있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가을풍경을 즐기러 강안에 나와 있었다.
고령 낙산서원(洛山書院)
여기 달성노을공원 건너편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인안2리 산 아래에 낙산서원(洛山書院)이 있다. 조선 중기 학자 배신(裴紳)을 제향한 서원이다. 배신(裴紳, 1520~1573)은 조선 중기 학자로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경여(景餘), 호는 낙천(洛川)이다. 조선시대 동인(東人)에 속했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수학하고 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배웠다. 스승인 조식이 죽자 조정의 명령으로 『남명선생언행록(南冥先生言行錄)』을 지어 올렸다.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565년 남부참봉에 제수되고 경기전참봉을 지냈으며 빙고별좌(氷庫別坐)를 거쳐 1572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 [낙산서원의 변천] … 본래 배신(裴紳)은 현풍의 도동서원 별사(別舍)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 1)에 건립되었으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정구(鄭逑)를 배향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서쪽 담장 밖에 있는 별사에서 김굉필의 제자였던 곽승화(郭承華)와 배신(裴紳)을 모셨으나 1868(고종 5)년 별사가 훼철되고 난 후 후손들에 의해 낙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낙산서원(洛山書院)은 1952년에 건립되었다. 저서로 『낙천집(洛川集)』이 있다.
* [형태] … 낙산서원은 강당인 주경당(主敬堂)과 사당인 경현사(景賢詞) 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에는 마루를 두었으며 양쪽에 각각 온돌방이 있다. … [현황] 현재에도 음력 3월 중정(中丁)에 성산 배씨 낙천공파 종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인안2리 이장이 관리하고 있다. 경내의 현판으로 ‘낙산서원(洛山書院)’, ‘주경당(主敬堂)’, ‘경현사(景賢祠)’가 있으며 기판에 ‘낙산서원기(洛山書院記)’가 있다.
달성보에 마중 나온 대구의 고향 친구
마침 대구의 효목동 정복순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구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오는데, 달성보에 거의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여수에서 올라오는 류응하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먼 길을 오다보니 도착시간이 조금 늦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를 마중하러 오는 친구가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다.
친구를 기다리며, 여유 있는 마음으로 강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성보의 가을풍경은 아름답고 낙동강의 햇살은 부드럽고 고왔다. 청신한 강바람을 가슴에 맞는다. 몸은 고단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이 가슴을 채운다. 오늘은 달성군 현풍읍에서 유숙하고 내일은 도동서원을 경유하여 합천-창녕보까지 종주할 예정이다. 친구들이 마중 나온다고 하지 않는다면, 여기 달성보에서 현풍읍까지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냥 걸어갔을 것이다.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이 망중한(忙中閑)이다. 친구 덕분에, 여유가 생겼다. 하루 종일 어기차게 걸어온 고단한 몸이 가을 햇살 속에서 풍욕(風浴)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두 친구들로부터 두어 차례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은 모두 고향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들이다. 존도(尊道)의 류응하는 서애 류성룡 선생 풍산 류씨의 후예답게 예의와 법도가 반듯하고 친구에 대한 우정이 깊다. 나와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각별한 우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불암(佛岩)의 정복순은 어린 시절 나와 같은 마을에 살았으며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다. 착하고 깔끔한 품성에 유난히 인정이 많은 친구다. 두 사람은 일찍이 대구에 와서 자리를 잡고 각자 사업을 하면서, 서울이나 고향의 초등학교 동기회는 물론, 친구들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장본인들이다.
오후 4시 30분께 예쁜 정복순이 수변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류응하가 도착했다. 두 사람이 각기 자기 차를 가지고 온 것이다. 참으로 반가웠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낙동강 강가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게 되었으니 … 잠시 강변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반가운 마음으로 담소를 나누었다. 일단 현풍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류응하의 차에 내가 동승하고 정복순이가 뒤를 따라왔다. 현풍에는 원조 ‘할매곰탕’이 유명하지만 두 친구는 나를 특별한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현풍읍내에 들어가 농협주차장에서 차 한 대는 세워놓고, 류응하의 차에 동승하여 비슬산 아래, 새로 조성된 첨단과학기술도시 ‘테크노폴리스’로 들어갔다.
테크노폴리스 신도시는 어느 대도시 못지 않게 번화했다. 일찍이 이곳에 와 본적이 있는 정복순이 식당을 잡아 들어갔다. ‘글로벌 치킨 갈비’ 매콤한 경양식 요리를 시켜놓고 맑은 술 한 잔을 기울였다. 고향친구를 만나면 할 이야기가 참 많다. 과거와 현재의 세월을 함께 하면서 인생에서 공유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늦게까지 담소(談笑)를 나누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 먼 낙동강 종주의 여정에서 정겨운 고향의 친구를 만나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주차장에 돌아와서 정복순은 먼저 차를 몰아 대구로 가고, 류응하는 나를 숙소까지 태워주고 돌아갔다. 현풍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홍시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오늘 우정 달성보까지 달려와 긴 여로에 지친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 두 친구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현풍도 대구광역시이지만 워낙 먼 곳에서 달려온 친구들이다. 정복순은 동대구역 근처의 효목동에서 대구의 서남쪽 끝에 있는 현풍까지, 또 류응하는 여수에서 일정을 앞당겨 불원천리 달려왔다. 친구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낙동강은 이렇게 유연한 생동감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우리의 은빛 우정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현풍(玄風), 대구테크노폴리스 신도시
오늘 대구의 두 친구와 함께 찾아간 ‘테크노폴리스’는 2006년부터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과 현풍읍 지역에 조성한 대규모 복합형 첨단산업지구이다. 동쪽으로 비슬산, 서쪽으로는 현풍읍 구(舊)상권들이 형성되어 있고, 남서쪽의 구지면에는 달성2차산업단지와 대구국가산업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대구 시내의 주요대학인, 경북대학교, 계명대학교, 대구과학기술원(DGIST)의 연구소와 국립대구과학관, 현대로보틱스(현대중공업지주), 현대모비스 및 각종 기업, 연구기관 등 과학, 기술, 산업, 연구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다. 수성알파시티, 대구신서혁신도시, 사이언스파크 등과 같이 대구광역시가 개발하는 곳 중 하나이다. 대구시 중장기 발전계획에서 예전부터 부도심으로 지정되었다. 부도심의 통칭은 현풍 또는 텍폴. 또한 달성군 남서부(논공읍, 현풍읍, 유가읍, 구지면)의 중심지다.
현풍(玄風), 아름다운 유풍(儒風)이 깃들어 있는 곳
현풍은 동쪽으로 유가읍(瑜伽邑), 서쪽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고령군 개진면(開津面), 남서쪽은 대니산(戴尼山, 408m) 산릉을 경계로 구지면(求智面), 북쪽은 논공읍(論工邑)과 접한다. 동쪽에는 비슬산이 있다. 신라 때부터 현풍군으로 존속하다가 1914년 달성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달성군이 대구에 편입됨에 따라 대구 달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2018년 11월 현풍면에서 현풍읍으로 승격하였다.
낙동강 현풍(玄風)은, 1592년(선조 25)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이곳의 왜병을 격파시켜 창녕과 현풍간의 왜군을 대구로 철수하게 하였다. 이곳 소이산(所伊山)의 봉수는 남쪽의 태백산, 북쪽의 말응덕(末應德) 봉수와 연결되었다. 현의 서쪽에 있는 강창(江倉)은 이곳의 세곡을 모아 낙동강을 따라 운반하였으며, 육상교통으로는 창녕·대구·고령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현풍천(玄風川)은 동쪽의 비슬산 산곡에서 발원하여 현풍읍 한 가운데를 관통하여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리고 달창(達昌) 저수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중앙부를 북서 방향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는 차천(車川)은 유역에 넓은 해안평야를 전개하여 이 지역의 젖줄이 된다. 농작물로는 주곡생산을 비롯하여 무·배추·양파 등을 생산한다. 지금은 고속도로, 국도와 지방도가 남북으로 가로질러 인근 각 시군과 연결된다.
대구시 달성군 현풍읍은 대구 도심에서 35㎞ 떨어진 낙동강 동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구마고속도로의 현풍휴게소가 있다. 원래 ‘추량화(推良火)’라 하여 ‘화(火)’자가 포함된 신라문화적 요소를 안고 출발한 이름이다. 이후 현풍현(玄豊縣)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다시 ‘豊→ 風’으로 글자가 바뀜으로써, 바람과 관련된 땅 이름을 지닌 고을이 되었다. 여기에서 바람은 교화(敎化)의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풍은 본래 아전(衙前)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심한 피폐의 땅으로 알려졌다. 이런 불명예를 씻고 새로운 교화(敎化)의 땅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조정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고, 이를 기념하여 앙풍루(仰風樓)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풍기(風紀)라는 말처럼 기강 확립으로, 새롭게 조성된 위풍당당한 관아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누각이 앙풍루인 것이다.
이첨(李詹)은 앙풍루 기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대지에서 불어 만물에 부딪히는 기운이 바람이다. 교화가 행해져 백성들이 좇는 것이 마치 바람이 물건에 부딪혀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하여 윗사람의 가르침을 풍(風)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풍(風)은 곧 교화가 미치는 곳을 말한다. 그러기에 천자에게는 천하를 바람처럼 쏠리게 하고, 수령(守領)이 군과 현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바람처럼 쏠리게 하는 데 목표가 있다. 풍으로 군 이름을 지은 것은 군자의 풍도(風道)가 있기 때문이요, 백성들은 이런 풍도를 숭배했으므로 앙풍(仰風)이라는 누각 이름도 나타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화재로는 현풍 석빙고(石氷庫:보물 673), 현풍향교대성전(경북문화재자료 27), 현풍곽씨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 경북문화재자료 29), 구읍동(舊邑洞) 고분군 등이 있다. 현풍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본관이다.
현풍 비슬산(琵瑟山)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과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옥포면·유가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정상의 바위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비슬(琵瑟)’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는 하나, 이는 전형적으로 우리말을 음차한 한자에 의미를 뜻을 부여한 것이다. 고대 창녕지역에 있었던 진한의 소국의 이름이 '비사벌' '비자발'로 불렸으며 이를 '비화'라고 하기도 하였다. 비화의 '화'는 우리말 벌의 훈차이므로 사실상 비사벌, 비자벌, 비자발 정도로 불렸던 것이다. 이는 순우리말 '빛'과 그리고 벌판, 나라 등을 나타내는 '벌'이 원래 음가로 여겨진다. 따라서 창녕과 현풍 일대의 땅 이름이 '빛벌'이었고 여기에 있는 산은 자연스럽게 '빛산'이 된 것이다. 이것을 음차한 것이 여러 차례 변형된 것이 지금의 비슬산인 셈이다. 즉, 이 산의 원래 뜻은 '빛의 산'이 된다.
최고봉은 천왕봉(天王峰, 1083.4m)이다. 종래의 최고봉은 대견봉(大見峰)이었으나, 2014년 10월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천왕봉으로 변경했다. 남쪽으로 조화봉(照華峰, 1,058m), 관기봉(觀機峰, 990m)과 이어지며, 유가사(瑜伽寺) 쪽에서 올려다보면 정상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바위 능선이 우뚝 솟아 있다. …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경치가 아름답고 봄철에는 철쭉·진달래, 가을에는 억새 군락이 볼 만하다. 스님바위,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등의 이름난 바위와 달성군 옥포면(玉浦面)의 용연사(龍淵寺)를 비롯하여 용문사(龍門寺)·유가사 등의 사찰이 산재한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