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영의 도전자들]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인재 모으는 데 인생 80%를 보냈다” 한국 경제 개척가 이병철
- 놀기 좋아하고 지기 싫어한 소년 이병철, 서울로 상경하다
- 일본 와세다대 가는 배에서 느낀 망국의 설움으로 미래 경제 발전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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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병철과 소년 이건희. |
1961년 6월 26일 저녁, 도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이병철은 창밖의 저녁놀로 붉게 물든 운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5·16군사정변 뒤 ‘부정축재자 1호’로 찍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어떤 사람일까? 목숨 걸고 혁명을 이루어 내다니 보통 강단과 투지가 아닐진대…. 그런 그가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이런저런 상념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이병철은 마음이 무거웠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요원들에 의해 서울 명동 메트로호텔로 갔다. 이튿날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있는 태평로 사무실로 안내되었는데, 박태준 의장 비서실장이 미리 나와 정중한 태도로 맞이했다. 그를 따라 자못 삼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방으로 들어서자 박정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안경을 쓴 얼굴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는 순간 이병철은 긴장감으로 굳었으나 박정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조선왕조 500년 이래 고관대작들의 부정축재로 백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왔소. 오늘날에도 국민이 이토록 굶주림, 질병에 시달림은 국민의 고혈을 쥐어짤 줄만 아는 정치인들 잘못이 반, 사회적 책무를 버리고 탐욕에만 빠져든 경제인들 잘못이 반이오. 정치, 경제가 썩어 나라가 무너지면 기업과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오?” 질책하듯 카랑카랑 울리는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이병철은 입안이 바짝 마르며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라가 있어야 기업이 산다는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처벌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현행 세법은 6·25전쟁 때 기업의 수입을 훨씬 넘는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한 비상사태의 세제 그대로여서, 곧대로 세금을 내다간 모든 기업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법을 개정하여, 기업인들에게 새로운 각오로 국가 건설에 참여토록 기회를 주십시오. 반드시 최선을 다해 국가 경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아울러 저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이때 박정희가 호통을 쳤다. “이보시오, 이 사장! 내가 언제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소! 양복지나 설탕, 조미료 같은 소비성 물건이나 만들고 들여다 팔고 있으니 젊은이들이 삼성을 매판재벌이라고 하는 거요. 그런 장사치 노릇은 그만하고 제대로 된 사업을 한번 해보라는 말이오.” 설탕과 양복지! 이 말로 이병철의 마음은 아프고 크게 울렸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벌여온 장사가 그것뿐인데 어쩌겠습니까?” 이병철이 멋쩍게 웃자 박정희가 다그치듯이 말했다. “사나이로 태어나 한번 사업을 일으켰으면 제대로 벌여 봐야 할 것 아니오? 자동차, 배, 전자제품을 만들어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째서 머뭇거리느냐고 세지마 류조 회장이 그럽디다. 이병철 사장이 앞장서시겠다면 힘닿는 데까지 내가 밀어드리리다.” 자동차, 배, 전자제품! 이병철의 머릿속에서는 번쩍 섬광이 스쳤다.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전 세계를 누빈다! 냉철한 이병철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순간 나쇼날전기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박정희가 이병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나지막히 말을 이어갔다.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보시오.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나왔지만 세계적인 전자회사 나쇼날을 이루어냈잖소! 이 사장도 이제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국산품을 제조 수출하는 세계적 대기업을 일으켜, 진정으로 국가 경제에 기여해 보라는 뜻이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병철은 입술을 꽉 깨물고 박정희에게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죄송한 부탁 올리겠습니다. 먼저 메트로호텔에 갇힌 기업인들부터 풀어주십시오. 그들의 잘못도 있겠지만, 광복을 맞아 열악한 경제 환경 아래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운영을 해본 노하우가 있으므로 이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들 또한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기업인들 스스로도 자정(自淨)의 뜻에서 국가발전기금을 마련하겠사오니 그것으로 경제 개발을 추진하십시오.” 비로소 박정희는 웃음을 지으며 이병철의 두 손을 꽉 쥐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병철 회장, 우리 한번 조국을 일으켜 세워 봅시다.” 이때 박정희는 44세, 이병철은 51세였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업을 기획하는 것인데 세상의 많은 이들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일생의 80퍼센트를 인재를 모으고 육성하는 데 보냈다. 삼성의 발전도 그런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인 것이다.”(1980년 7월 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이병철 강연에서)
이병철은 1910년 2월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손위 누이 둘과 형 해서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리산 지맥인 마두산이 완만히 이어지는 골짜기 마을 중교리는 예부터 벽촌이었다. 그해에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한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시작되었다. 뒷날 경제계에서의 활약으로 한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조국과 민족의 수난의 해에 탄생한 것이다. 이병철의 아버지 이찬우는 아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늘 엄했지만 아들이 세상 이치를 이해하도록 세심히 이끌었다. 어머니 권재림은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특히 마을에서 누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미역과 쌀을 보내 축하하곤 했다. “찔레꽃이 필 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가장 힘들 때란다. 그들을 모른 척하면 안 돼.” 어머니는 곧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왕조 연산군 시대에는 신변에 미칠 화를 피하려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목숨을 보전한 선비들이 많았다. 이병철의 경주 이씨 가문 16대 선조도 이렇듯 중교리 땅을 은신처로 정해 이주했다. 조부 이홍석은 영남의 이름난 유학자 허성재의 문하생이었다. 그가 문산(文山)이라는 호를 붙여 ‘문산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홍석은 이찬우에게 학문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목숨도, 부귀영화도 유한하지만 문장의 생명은 영원하다. 문장은 인격 그 자체의 발로이니 모방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섯 살의 이병철은 학교에 가지 않고 서당 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 교본은 ‘천자문’으로 뜻도 이해하지 못한 채 암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인지 두세 달 만에 통독한 동무들과 달리 그는 1년이나 걸렸다. 서당에 5년 가까이 다니는 동안 ‘논어’와 ‘자치통감(資治通鑑)’도 뗐지만, 영특한 편은 아니었던 듯 “문산 선생님의 손자가 이래 가지고서야”라며 더러 스승에게 매를 맞았다. 어린 이병철은 공부보다 장난치며 놀기를 더 좋아했다. 싸움을 잘하지는 않았지만 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무엇보다 입담이 좋았다. 꼬치꼬치 이치를 따지고 드는 통에 상대가 질려 달아날 정도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집에까지 쳐들어가 결말을 짓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런 그가 고집불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병철은 어릴 적 자신이 골목대장이긴 했지만 ‘무기는 힘이 아니라 입’이었다고 떠올렸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 꼭 들어맞는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춘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 애쓴다. 결국 진보는 비합리적인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 시절 누구도 고집불통 장난꾸러기에게 그런 내일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3·1 독립선언으로부터 2년 뒤, 열한 살의 이병철을 부모는 일본식 보통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친척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부모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어린 이병철은 서당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시집간 둘째누나 집에서 가까운 진주시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둘째누나는 그를 이발소로 데려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주었다. 소년 이병철에게도 개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 고향에 쉬러 온 사촌형이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록 정치, 경제, 사회의 어려운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내는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세련된 건물이 즐비하며 물자가 풍부하다는 등의 얘기는 소년을 들뜨게 하고도 남았다. ‘그래, 나도 서울에 가서 공부하자.’ 호기심이 왕성했던 소년 이병철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힐 각오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진주나 서울이나 타향이기는 마찬가지”라고 거들자 뜻밖에도 흔쾌히 허락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친정이 서울인 게 승낙을 얻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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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씨는 틈틈이 서예로써 마음을 닦았으며 그의 휘호 무한탐구는 삼성인의 좌우명이 되었다. |
상경하는 날 아버지는 조심해야 할 점들을 열심히 타일렀다. 어머니 또한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안절부절못했다. 겨우 열한 살짜리 아들을 300㎞나 떨어진 먼 곳으로 혼자 보내는데 어느 부모가 걱정하지 않겠는가. 이병철은 외갓집이 있는 가회동에서 가까운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처음 등교하던 날, 설레는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섰지만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반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 아이들은 그의 사투리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친절한 아이들은 그를 보살펴 주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개중에는 심술궂게 따돌리는 아이도 있어 한동안 고독감을 맛보았다.
서울에 올라왔다고 해서 갑자기 성적이 좋아질 리는 없었다. 이병철은 산수는 자신이 있었으나 국어와 일본어는 고작 60점을 받는 정도였다. 음악이나 미술은 겨우 낙제를 면했던 터라 반 등수는 50명 가운데 35등이나 40등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무슨 배짱인지 그는 하루빨리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2년을 공부한 뒤 4학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제 보통학교에서 배울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게 속성과가 있는 중동학교로 옮기고 싶습니다.” 그의 뜻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거듭 강조했다. “어떤 일이든 성급히 뛰어들지 말거라. 일을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거듭해 학교를 바꾸는 아들이 아버지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는 아들 앞에서 그 일에 대해 끝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강조한 것은 사필귀정에 이어 “거짓과 위선은 자신의 일생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도 큰 재난이다”라는 말이었다. 이병철은 중동학교 속성과를 택했다. 여기서는 보통학교의 5, 6학년 과정을 1년에 모두 끝내지 못하면 중학부에 올라갈 수 없었다. 꽁무니에 불이 붙은 이병철은 계획대로 중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학교는 지방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의 자유로운 자취생활을 부러워하던 그는 결국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더불어 생활하고 싶다는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워 외할머니 집을 나왔다. 그즈음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네 혼담이 이뤄져 12월 5일 혼례를 올리게 됐으니 내려오너라.” 당시에는 조혼 풍습이 있었다. 개화의 물결로 자유주의 연애론이 득세하던 무렵으로 그는 여성이나 결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순순히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열여섯 살 겨울, 전통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같은 경상도 출신으로 두 살 위의 건강한 여성이었다. 여름방학으로 고향에 내려간 이병철은 아버지에게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처음과 끝이라는 것이 있다. 열여덟 살이나 됐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느냐!” 아버지의 엄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유학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며 며칠 뒤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이병철은 와세다대학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서둘러 부관(釜關) 연락선에 올라탔다.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배에서 그는 처음으로 조국을 잃은 국민의 서글픔을 깨닫게 되었다. 3000t급의 제법 큰 배였는데도 객실 시설은 변변치 못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갑판으로 나간 이병철은 같은 고향 출신인 안호상 박사를 만났다.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교토대학에서 1년 더 동양철학을 연구하려고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다. 배가 현해탄에 이르렀을 즈음 거친 파도 때문에 몹시 흔들렸다. 심한 뱃멀미로 고생하던 안호상과 이병철은 견디기 힘들어 2등 선실보다 시설이 좋은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했는데 일본인 형사가 다가와 고함치듯 내뱉었다. “이봐, 너희는 조선인이잖아. 1등 선실은 너희가 들어갈 데가 아니야!” 몸도 좋지 않은데 당하는 설움은 자꾸만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형사는 조선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대역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함부로 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2등 선실로 돌아가야 했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국민의 가치라고 하지 않던가. 엄청난 굴욕감에 시달린 이병철은 처음으로 망국의 의미를 실감하면서 비애에 젖었다.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국이 되려면 경제를 발전시켜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뒷날 불처럼 사업을 일으킨 배경에는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년기에 식민 지배를 받는 국민의 원통함을 가슴에 새기게 된 사건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산을 떠나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로 갈아탄 뒤 도쿄역에 내렸다. 그는 먼저 자취방을 정하고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 절차를 밟았다. 이병철은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나 와세다대학에서는 달랐다. 강의를 절대 빼먹지 않았고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꼭 앞쪽에 앉았다. 또한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고 ‘○’나 ‘×’ 표시를 해둔 부분이 많아 읽기 어려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도 곧잘 읽었다.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그는 ‘열심이었다’고 와세다대학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자취로 건강은 전혀 생각지 않고 편식한 탓에 이병철은 심한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몹시 피곤했다. 대여섯 명의 중산층 가정 한 달 생활비가 60엔이었던 시절에 그의 부모님은 달마다 200엔을 보내주었으므로 돈은 넉넉했다. 그는 2학년 때 1년간 휴학계를 낸 뒤 남은 돈으로 온천과 명소, 유적지 등을 여행하며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렇게 허송세월할 수 없다. 아쉽지만 대학을 그만두어야겠다.’ 오랫동안 고민한 그는 마침내 1931년 2학년 가을에 와세다대학을 중퇴했다. 그러고는 연락도 않고 조용히 귀향했다.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와 중동학교, 그리고 와세다대학까지 연속 네 번이나 중퇴한 셈이다. 결국 그는 졸업장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 한심한 감회에 젖지도 않고 ‘앞으로는 더 잘될 것’이라는 대책 없이 낙천적인 생각을 했다. 고희를 맞았을 때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똥배짱만 남아 있던 나 자신이 생각나 고소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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