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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보 스크랩 중부전선 철원 안보관광 답사기
노빈첸시오 추천 0 조회 26 13.03.09 17: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부전선 철원 안보관광지를 찾아서

□ 답사일자/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갬

참가인원/ 철원군 안보관광버스에 승차하여 동참 

□ 답사진행상황

   10시 15분 : 파주집 출발

   10시 25분 : 경의선 월롱역 버스정류장

   10시 50분 : 법원리 우체국 앞 버스정류장

   11시 35분 : 양주역(전철 1호선)

   12시 12분 : 동두천역(전철1호선, 경원선)

   12시 50분 : 경원선(백마고지역행) 출발

   13시 45분 : 백마고지역(경원선) 도착

   14시 10분 : 철원 안보관광버스 출발

   14시 24분 : 민통선 제2검문소 통과

   14시 40분 : 제2땅굴

   15시 27분 : 철원 평화전망대(x268m)

   16시 20분 : 두루미 전시관

   16시 36분 : 월정리역

   16시 45분 : 제5검문소 통과

   16시 50분 : 백마고지역(경원선) 도착

   17시 52분 : 백마고지역(경원선) 출발

   18시 46분 : 동두천역(전철1호선, 경원선)

   19시 25분 : 양주역(전철1호선)

   20시 15분 : 법원리 천연초교  

   20시 45분 : 월롱역(경의선) 버스정류장

   21시 05분 : 파주집 도착

 

 

□ 철원관광지도

답사코스/ 백마고지역~제2땅굴~철원평화전망대~두루미전시관(월정리역)~백마고지역

                                                                                                                                  <지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 안보관광개요

북한이 땅속으로 파 내려온 남침용 땅굴

북한에서 남쪽으로 파 내려온 남침용 땅굴은 서부전선 지역에 2곳(제1땅굴, 제3땅굴)이 있고,

중부전선 지역에 1곳(제2땅굴), 동부전선 지역에 1곳(제4땅굴)이 있는데...

이 제4땅굴이 발견되면서 북한이 한반도 전 전선지역에서 남침용 땅굴을 파 내려온 것이 입증되었다.

1974년 11월 5일 고랑포에서 동북방 8km 지점의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제1 땅굴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불과 800m 남겨놓은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1975년에 발견된 제3땅굴은 서울에서 불과 44km 거리에 있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1971년 9월 25일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 폭탄보다 효과적이다" 라는

김일성의 교시로 1972년 5월부터 공사가 이루어졌고, 이로부터 2년후인

1974년 11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고랑포 비무장지대 내에서 최초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해 남파된 무장간첩이 침투하였던 인근지역이기도 한 곳이다.

이 땅굴의 위치는 서울에서 불과 65km 떨어진 거리로서, 그  규모로 보아서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의 땅굴이다.

이 제1땅굴은 비무장지대(DMZ)내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일반에게 개방을 안하고 있다.

1974년 11월 15일 제1땅굴 수색 중 북한의 방해 매설물로 인하여

한국군과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당하는 희생을 치루기도 하였다.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제2땅굴은 한국군 초병이 경계근무중에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시추작업으로 땅굴 소재를 확인한 후 수십일간의 끝질긴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한국군 지역에서는 두번째로 발견된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서,

지하 50m~160m 지점의 견고한 화강암층에 뚫은 이 땅굴의 총 연장은 3.5km인데

그 중에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1km까지 파 내려왔고 그 규모는 높이1.65m~2m의 아치형 터널로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된 북괴의 엄청난 도발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 이 땅굴은 국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안보관광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 제2땅굴은 제1땅굴 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철원 북방 13km지점의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땅굴내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 시길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출구는 세 갈래로 분산시켜 놓았고, 1시간에 3만명의 무장병력을 이동 시킬 수 있으며

이 제2땅굴 수색중에도 북한의 방해 대책 강구로 한국군 7명이 희생되었다.

1978년 10월 17일에 발견된 제3땅굴은 제2땅굴과 거의 같은 규모로

판문점 남방 4km 지점의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제3땅굴도 아치형으로 1시간에

3만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동 시킬 수 있는 규모로 이 제3땅굴은 제1, 제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위치가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밖에 안 되는 곳으로서 서울까지는 불과 44km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 3월 3일에 발견된 제4땅굴은 양구 동북방 26km 지점에 위치한

동부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 145m 깊이에 폭2m, 전체 길이가 2,052m나 뻗어 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무려 1,502m나 남쪽으로 내려온 지점에서 발견 되었다.

이 제4땅굴은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였슴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이 제4땅굴의 현장 답사는 다른 땅굴과 달리 밧데리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답사사

경원선 백마고지역

오늘은 모처럼 철원군에서 실시하고 있는 철원안보관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파주집에서 늦은 시간에 출발을 하여

 경의선 월롱역에 차를 주차하고 600번 시내버스를 타고 법원리를 거쳐서 양주역으로 향하였다.

양주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동두천역에서 12시 50분에 출발하는 경원선열차를 타고 백마고지역으로 향하였다.

이 경원선 백마고지역은 지난해 말에 개통을 하여서 중부전선 철원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동두천역에서 출발하는 경원선 열차는 06시 50분에 첫 차를 시작으로 막차 22시 50분까지 매시 50분에 출발하고 있는데

이 열차들 중에서 09시 50분 열차와 12시 50분 열차가 백마고지역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서

철원 안보관광버스는 이곳 백마고지역에서 출발을 하여 제2땅굴과 철원 평화전망대, 월정리역을 순회하고 있다.

동두천역에서 12시 50분에 출발하는 경원선 열차로 전곡~신망리~대광리 등을 지나서

 백마고지역에 13시 44분에 도착하여 역 광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철원 안보관광버스 승차권 매표를 하고 나서

남쪽 방향으로 철원평야에 떠 있듯 보이는 소이산과 그 뒤로 금학산, 고대산의 모습과

북서쪽으로 ?향으로 가깝게 보이는 평온해 보이는 대마리마을 뒤로 백마고지를 잠시 바라보고 나서

두 대의 안보관광버스가 서 있는 역 광장으로 나와 버스에 승차하여 제2땅굴을 향하여 14시 10분에 출발을 하였다.    

 

 

 

백마고지역에서 철원안보관광버스에 승차하여 민통선을 통과하여 첫 번째 답사지인 제2땅굴로 향하면서

차창밖으로 바라본 2만 5천헥트아르의 광활한 철원평야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동안 금학산과 고대산 등에서 바라본 철원평야의 모습에 비하여 방대한 모습으로 시야에 다가오고 있다.

 

 

 

안보관광버스에서 내려서 첫 번째 답사지인 제2땅굴로 향하고...

 

 

 

제2땅굴

서울 북방 106km지점에 위치한 북한의 기습 남침용 제2 지하땅굴은 1973년 11월 20일

푸른별 청성부대 상병 이기태, 일병 김효섭이 경계근무중 지하로부터 폭음을 청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수십일간 끈질길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24일 발견되었다.

DMZ일대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제2땅굴은 총 연장 길이 3.5km에 달하며

지하 50~160m의 견고한 화강암층을 뚫고 군사분계선 남쪽 1.1km까지 파 내려 왔으며

유사시 높이2m의 아치형 터널을 통해 북한군 무장병력 1,600여명이 한 시간 동안 0.8m의 간격을 유지한 가운데

2열 또는 3열 종대 대형으로 침투가 가능한 엄청난 도발현장으로 땅굴 발견시

내부 수색작전에 투입 되었던 선배 전우 중사 김호영외 7명의 대원은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산화되었다.    

땅굴은 유사시 아군 후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켜 국가 혼란을 조장하고 국군의 방어태세를

무력화하여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한 기습남침용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엄청난 도발현장에서 분단의 고통과 아픔의 주범인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깨닫고,

우리 모두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경각심을 갖고 긴장의 고삐를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철원 평화전망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중강리 588-14에 위치하고 있는 철원 평화전망대는 2007년 8월 30일에 준공하였으며

총 52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착공한지 5년만에 연면적1,578㎡에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 전시실에는 민족의 아픔이 서린 6.25영상물과 상처의 땅 철원 전적물 등이 전시되어 있고

제2땅굴 및 군막사와 검문소 재연, 북한 바로 알기 인터넷 검색와 DMZ생태보고 사진전시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는 관람석 300석 규모의 전망대와 망원경을 이용한 야외 관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관광객들의 체험관광을 위하여 길이 283m의 모노레일카(50인승)를 설치하였다.

2층의 전망대는 휴전선 비무장지대(DMZ)를 비롯하여 평강고원, 북한선전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2층 전망대 바로 앞쪽에서부터 광활한 모습의 비무장지대(DMZ)가 펼쳐지고 있다. 

남북간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폭4km의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는 비무장지대(DMZ)는

동서간 길이 155마일(248km)에 달하며 면적은 992㎢로 계곡과 분지,

여러줄기의 강이 포함되어 있으며, 산악지대 생태계, 그리고 담수 및 해안 생태계가 함께 존재하는

생물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휴전 후 60년 세월 동안 이 비무장지대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었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이 비무장지대에는 국제적 보호종 뿐만 아니라 많은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 및 보호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물새나

두루미류의 서식처 및 유네스코에서 국제 자연환경조성과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적할 정도로

국제적 차원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으로 한반도에 서식하는 2,900여종 이상의 식물 가운데 1/3이,

70여종의 포유류 가운데 1/2이, 320여종의 조류 가운데 1/5이 이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2층 전망대로 올라가기 전에 바라본 남방한계선(GOP) 안의 비무장지대(DMZ)의 생생한 모습 뒤로 

백마고지와 이북 지역의 김일성고지(고암산), 피의능선, 낙타고지, 그리고 평강고원 등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이고 있다.

 

 

 

25만평 규모의 동송저수지(강산저수지) 뒤로 금학산과 고대산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철원평야는 해발고도 200m의 고지로서 2만 5천 핵트아르(hr)의 철원평야 농토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이런 저수지가 이 철원평야 내에 아홉곳이 있다고 철원 안보관광 해설사의 설명으로 알수가 있었다.

 

 

 

궁예(弓裔)의 태봉국도성도(泰封國都城圖)

 신라의 왕실 태생으로 전해지는 궁예(?~918년)는 일찌기 궁중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세달사에서 성장한 후

북원(원주)의 양길 밑에 들어가 세력을 키웠는데(892년) 특히 명주(강릉)등 영동지역 일대를 장악한 궁예는

사원의 수원승도들을 세력기반으로 삼아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미륵사상을 내 세우면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진성여왕(877년~897년) 통치하의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영서지방을 거쳐 철원으로 진출한 궁예는 계속 서진하여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요 왕씨 세력의 아성인

송악을 장악한 후 그곳에 후고구려를 건설하였다.(901년)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통합하려는 야망을 지녔던 궁예는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으로 바꾸고(904년)

도읍지도 한반도의 중심지인 넓은 철원평야의 풍천원으로 다시 옮겼다.(905년)

그는 새 도읍지에 대규모의 도성을 쌓고 국호도 태봉(泰封)으로 바꾸면서(911년)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수립하여 나아갔다.

그는 불교적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정치를 추구하였으나

이러한 신정정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호족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초래하여 궁예는 결국 그들과의 대결에서 패자가 되고 말았다.(918년)

비록 궁예는 몰락했지만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그의 정치이념과 대제국 건설의 이상은 왕건(王建)을 통하여 고려로 계승되었다.

궁예가 풍천원의 새 도읍지 주위에 쌓은 태봉국 도성지는 현재 월정역 북방 비무장지대안에 놓여 있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남북으로 긴 사각형 형태이고 북쪽이 동쪽으로 9.5도 기울어져 있다.

성의 둘레는 외성이 12.5km, 내성이 7.7km로서 대부분 토성이지만 일부는 현무암을 섞은 토석 혼축성이다.

해방 당시 외성의 하단폭은 10.9m, 높이3.6m 였고, 내성의 하단폭은 3.6m, 높이 2.1m 정도 였으나

최근 확인결과 현재 남아있는 성의 폭과 높이는 해방 당시 규모의 절반 정도이고 많은 부분이 붕괴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 해방 당시에는 내성안 북쪽에 궁궐터인 포정전지(布政殿址)와 석등(해방당시 국보118호) 그리고 외성 남벽에

 남대문지(南大門址)와 석탑 및 돌거북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또 도성안 동쪽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경원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었으나 철도는 모두 제거되고 철도 제방만 남아 있다.

지금은 이 도성 한 가운데를 군사분계선이 가로 지르며 도성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어서

앞으로 이 도성의 조사와 연구는 남과 북이 뜻을 합하여 함께 추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민족 공통의 과제로 남아 있다.

 

 

 

앞쪽의 남방한계선(GOP) 북쪽의 비무장지대 내에 보이는 곳이 옛 태봉국의 도성이 있었던 곳이다.

 

 

 

월정리역의 두루미전시관으로 향하면서 버스안에서 바라본 멀리 시베리아에서 날아 온다는 두루미들의 모습 

 

 

 

월정리역 앞의 철원 두루미전시관

 

 

 

경원선 최북단 역 월정리역(月井里驛)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경원선 철마가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 바로 맞은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 는 간판 아래 6.25동란 당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채 누워있어 분단의 한을 실감케 하고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속으로만 몸부림 일뿐

60년을 늘상 그 자리에서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원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인들의 강제동원과 당시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1914년 8월 강원도 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원산간 227km를 연결하는 산업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하였다.  

 

 

 

월정리역의 두루미전시관에서 관람을 마치고 백마고지역으로 향하면서 관광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철원평야지대

 

 

 

제2땅굴과 철원평화전망대, 월정리역 두루미전시관을 관람하고 다시 돌아온 백마고지역

 

 

 

 백마고지역에서 바라본 백마고지(x395m)의 모습

6.25동란(한국전쟁) 초기에 낙동강 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육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 한만국경까지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2차례나

38선을 오르내린 끝에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는

현 휴전선 일대에서 서로간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휴전협상을 앞 두고 적군은 백마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 칭호까지 받은

중공군 정예 3개사단(112사단, 113사단, 114사단)을 동원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간이나 계속되었는데

약30만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백마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보병 9사단은 사망 3428명, 중공군은 사망 8234명, 포로 5097명, 귀순 57명 등

1만 4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중공군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은 이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고 사단의 명칭이 명명되었다.

  격렬했던 전투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엉켜 악취가 산을 뒤덮을 정도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그 이름을 395고지에서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역에서 바라본 철원평야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고도 362m의 소이산의 모습

 

 

 

백마고지역에서 바라본 철원의 진산 금학산(x947m)과 고대산(x831.8m)의 모습

 

 

 

무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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