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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개론으로 21세기에 다시 역주행을 하기전에도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90년대에 유명한 히트곡이었습니다. 제 기억엔 94년 대학가요제에서 가수 김동률이 친구이자 최근 안타깝게 작고한 서동욱과 전람회로 출전해서 대상을 받았던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찾아보니 전람회는 93년 대학가요제에서 '꿈속에서'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고 이후 낸 1집에 수록된 기억의 습작이 94년에 히트했더군요.
기억의 습작은 여러모로 저도 기억에 남는 곡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눈에 띄게 (귀에 띄게?) 조를 바꾸는 모듈레이션이 많고 일반적인 한국 발라드 음악들에 비해 사용된 코드등도 훨씬 세련된 느낌이었죠. 그래서 꽤 좋아했었는데, 동시에 늘 애매한 곡이기도 했습니다. 뭔가 슬프고 처연한 곡인듯 한데 쉽사리 노래의 감정이 잘 느껴지지는 않았거든요. 곡의 형식과 모호한 가사의 세련미가 노래의 감정보다 더 앞서 있는 노래, 그래서 듣기는 좋지만 그 감성을 온전히 느끼기 힘든 외국 팝음악을 듣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다만 가사가 무슨 뜻인지 딱히 궁금해한적은 없고 그래서 사실 아직도 내용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이젠 버틸 순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봐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 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 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이제라도 국어문제 풀듯 독해를 해보려 하니 이거 좀 난감합니다. 힘들어하는 상대방이 나에게 기대고 있고, 위로를 주고 싶지만 내가 철이 없어서 못해줄것 같고, 먼훗날 나도 힘들어지면 힘들어하던 너가 생각나려나, 아니면 화려한 미래라서 생각이 안날수도? - 그러니깐 현재의 관계는 결국 실패하게 되고 기억속 습작처럼 남는다는 것일까요? 제 문해력의 한계내에서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슬쩍 짜증나는 내용이군요. 아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속의 아련한 그림으로 남는다는 의미라면 그것은 시간의 터널을 지나 반추하면 생각해볼수 있겠지만 대학교1학년 나이의 젊은 뮤지션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힘든 관계는 결국 깨어질것 같은데 '지나면 다 추억'이라며 힘들다는 상대방을 포기하는 뉘앙스로 느껴지거든요. (아c)
또 한가지 이 클래식한 가요의 결정적 단점이라면 바로 김동률의 음역대입니다. 중저음의 멋진 음색으로 시작하는 '이젠-' 은 순식간에 청자를 휘감으며 노래속으로 초대하지만 고음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당시 그의 발성으로 듣는 클라이막스는 늘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내용이 '지금은 모르겠고 나중에 철들면 알려나'하는 찌질함으로 해석이 되는 순간 답답함은 짜증이 됩니다. (그동안 별 생각없이 들었는데 이렇게 뜯어보니 -_-;;) 아무튼 그래서 저는 김동률이라는 젊은 천재작곡가의 커리어초기에 재능과 의욕이 감정보다 앞서나간 케이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서 상대방보다 자신을 먼저 보는 미숙함도 90년대 X세대의 개성으로 통했을수도 있지만, 정작 그 세대에 속하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도라도님이 파이널 두번의 무대중 하나로 전람회의 이 곡을 선곡했습니다. 한국인인 나도 가사를 잘 이해 못하겠는데 이 곡을 부른다니 역시나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었고 그녀는 그걸 찾아낸것일까? (그렇더라도 이젠 놀랍지 않음) 그렇게 곡이 공연되었고, 원곡이 나온지 32년이 지난후, 저는 이 곡을 들으며 처음 눈물이 났습니다.
메이킹과정으로 보자면 도라도님을 보러온 가족들과의 재회와 그들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에 오롯이 담았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소개할때 첫사랑에 관한 노래이지만 쌍둥이 동생을 떠올리며 불렀고, 지금의 어려운 현실에서 동생들과 가족들과의 즐거웠던 기억에서 힘을 얻는다는 의미로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노래 가사의 일부내용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서 부른것이라 할수 있겠죠.
하지만 그녀는 몇소절이 빠지긴 했지만 철없는 화자의 이야기다 담긴 전 곡을 불렀습니다. 만약 원곡의 이기적인 가사 내용을 다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을 떠나왔던 결정과 그로 인한 가족들의 희생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까지 함께 표현한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게다가 한국어 공부를 위해 가족들과의 소통도 제한했다고 하니...) 하지만 그렇더라도 도라도의 기억의 습작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이 출발선은 아닙니다. 집을 떠나오면서 가장 힘든 것은 도라도 자신일것이고 가장 큰 희생과 고생도 본인이 겪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을 걱정하는 그녀의 사려깊은 마음과 사랑이 느껴지고 가족의 기억이 오늘의 그녀를 지탱해주는 따듯한 서사가 완성됩니다.
관객석에서 노래를 들으며 함께 우는 가족들이 있었고 그 관계성을 빼놓고 듣기는 힘들지만 이 곡은 그 문맥을 빼고 들어도 여전히 전람회의 원곡과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같은 가사 내용이지만 현재의 관계를 포기하는 무책임 대신 실패한 사랑에 대한 진심어린 회한이 느껴지거든요.
그 중심에는 역시나 그녀의 압도적인 가창이 있습니다. 원곡의 막혀있던 음역대의 천장이 활짝 뚫리자 미성숙의 답답함이 진심어린 회한이 되어 거대한 감정으로 폭발하고 공간은 확장되어 가슴을 치는 비극의 장이 됩니다. 이번에도 그녀의 가창은 강한 중력장으로,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과거의 실패를 반추하는 화자로 또 한번 시공간을 가로질러 그 회한이 의미있게 성립되는 시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불안한 미래를 바꿔버리던 '그때 헤어지면 돼'의 가수 도라도는 현재의 실패와 미래의 회한을 동시에 경험하고 표현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러한 도약이 없었더라면 이 노래의 화자는 힘든 연인을 곁에 두고 '미래에 후회할 내 모습'만 미리 불쌍해하는 천하의 찌질이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 찌질함의 정서도 있는 그대로 노래하지 말란 법은 없고 이런 자기애적인 냉소의 태도가 쿨함으로 통했던 시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기억의 습작은 공감은 힘든 내용을 세련된 형식미 속에 슬쩍 감춰놓은 묘한 부조화와 오그라듦이 있었는데 도라도님은 그 구조적 한계를 근본부터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도라도님은 가사의 감춰진 의미를 찾은게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해낸 것입니다. 그녀가 이곡을 처음 부르던 당시 전람회와 비슷한 연령으로 먼훗날보다는 찬란한 현재가 더 눈에 들어오는 젊은 아티스트인것을 생각하면 이런 표현의 폭과 힘은 다시 한번 놀랍습니다.
그녀의 열창은 심지어 가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과도 공명을 했습니다. 그녀의 쌍둥이 동생들은 특수관계이니 언니의 모습자체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기억의 습작 유튜브 영상에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이 노래의 감정을 처음 느낄수 있었다는 답글을 달았을때 한 외국인이 다음과 같은 답을 달았습니다.
한국말 가사로 들어도 이해가 안가던 음악이, 한국어를 모르고 들어도 눈물이 나는 호소력을 지니는 극적인 변화를 이뤄낸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성대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뒤트는 도라도님 가창의 정점은 반전처럼 '비워냄'에서 완성됩니다. 그때 헤어지면 돼의 연습과정에서 그녀가 밴드와 곡의 진행과 마무리에 대해 논의하는 인상적인 모습중의 하나는 노래의 내용에 어울리도록 엔딩을 자꾸 축소하려던 노력입니다. 큰 성량과 표현력으로 듣는이들을 완전히 장악할수 있는 디바의 화려한 엔딩대신 마지막 리허설에서도 좀 더 비워달라는 주문을 계속 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마지막 가사가 끝나고 그녀의 목소리만으로 끝나지 않고 조금은 전형적인 피아노의 마지막 추임새가 들어간것이 살짝 아쉬웠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좀더 완결적이고 전형적인 엔딩을 원하는 밴드와 최대한 비워내고자 했던 도라도님의 방향 사이의 타협이 아니었나 생각되더군요.
화려한 마무리 대신 고요함을 원하던 도라도님은 기억의 습작에서 드디어 그녀가 원하던 엔딩을 만들어냅니다. 후렴을 반복하며 서서히 페이드아웃되던 원곡은, 기왕 원곡을 까는 마당에 말하자면, 서서히 멀어져가며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확신이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도라도님의 버젼은 클라이막스의 폭발이후 가사 첫줄을 조용히 되뇌입니다.
이젠, 버틸 수 없다고.
이곡의 유명한 도입부의 '이젠'이 나오는 순간 '버틸수'가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도라도님이 부르는 이 구절은 자세히 들어보면 발음이 좀 이상합니다. '버'와 '허' 사이에 걸쳐있는 묘한 자음의 뭔가 새는 발음입니다. 모국어가 아님에도 도라도님은 한국어 노래중 딕션이 어색하거나 새는 경우는 없습니다. 엄청난 연습량을 짐작케하는 면이죠. 그렇다면 분명 의도된 저 발음은 노래에서 저 가사가 유일하게 힘들어하는 존재가 내뱉은 발화라는점을 이해하는 순간 납득이 됩니다. 'ㅂ' 발음을 내기도 힘겨운 지친 상태의 존재가 노래의 화자에게 건네던 유일한 말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노래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읖조려지는 그 문장에서 '버'티다는 완전히 '허'티다라는 비문이 되어버립니다. 그때는 이해해주지 못했던 옛사랑의 말을 자신이 되뇌이며 뒤늦게 과거를 공감하고, 위로하고, 자신은 무너집니다. ㅂ발음을 할 기운이 없고, 문장의 모든 자음이 거의 소멸되어 버린 상태. 그리고는 잠시라도 기댈 어깨도 없이, 노래는 끝이 납니다. 원곡의 찌질한 흑역사는 장중한 비극으로 승화되며 노래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는 7초의 정적이 이어집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 힘의 마지막은 시간을 멈추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적은 경이로왔습니다. 모두가 숨죽이고 노래의 미세한 잔향까지 오롯이 음미할수 있는 감각의 진공상태가 지나고 서서히 시작된 박수는 비로소 환호로 복귀합니다. 크고 작은 자극의 연타에 익숙해진 시대에 슬픔과 회한의 비극을 고요히 음미할 여백을 만들어주자 32년된 습작은 마침내 걸작으로 완성됩니다. 채움만큼 비워냄을 아는 아티스트 도라도의 탁월한 감각과 통제력은 그녀의 성량만큼이나 놀라운 자산입니다.
유명가수에게는 히트곡이 필요하고, 도라도님도 그렇습니다. 넷플릭스의 프로그램을 통해 더 많은 동료음악인들과의 콜라보가 이뤄지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은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길을 뚝심있게 갈것이고, 많은 명곡들을 만들고 부르고 남길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지난한 여정을 그녀가 버틸수 있기를.
기댈수 있는 어깨가 늘 그녀 가까이 있기를.
그녀의 음악이 얼만큼 의미가 되는지 잊지 않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jRjrD-l0IJw
첫댓글 좋은 내용이네요~~. 김 동률님이 도라도님에게 곡 한곡 주시면 어떨까 싶네요. :)
김동률표 감성 발라드 한 곡 받아 도라도님이 부르시면...😱🥹 생각만으로도 감동이 몰아치네요~😭
제가 글에서 김동률님의 원곡을 너무 깐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네요. 도라도님에게 줄곡을 안주는 일은 없겠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