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9.月. 흐림
문수사文殊寺의 오후, 개포시장의 밤.
먼저 개포시장의 밤.
아내와 운동을 하자며 나선 밤 산책길이 양재천변을 걷다가 영동5교를 지나서 개포시장까지 가게 되었다. 오늘은 일주일에 세 번 정도라도 걷고 싶다는 아내와 일주일에 다섯 번은 걸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나의 의견이 어쩌다 일치를 보는 밤이었다. 일주일이면 몇 번이든 함께 양재천을 걸으면 좋겠지만 서로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다르고 밤에 해야 할 일들이 다르니 시간을 딱딱 맞추기가 간단하지는 않으나 가능하면 많이 걷자고 했었다. 영동5교 즈음에 갔을 때 아내가 개포시장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렇다면 개포시장에 들렀다가 가보자며 발길을 그쪽으로 향했다. 상가들로 형성된 재래형 개포시장은 여름만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사람들이 한가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둘러서있는 어묵가게 앞에서 우리도 어묵 꼬챙이를 하나씩 들고 양념간장에다 찍어 먹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더 맛나겠지만 쌀쌀한 가을밤에도 꼬챙이 어묵과 국자로 떠서 종이컵에 담아 후후~ 불면서 먹는 국물 맛이 썩 좋았다. 그렇게 어묵을 하나씩 먹고 돌아서는데 건너편 과일가게에서 주인아저씨가 “바나나 한 송이에 천원.. 천원.. 떨이요.. 떨이..” 하면서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집에는 아내가 사다놓은 사과와 감, 그리고 바나나가 여러 송이나 있었으나 한 송이에 천원이라는 말에 아내 손을 이끌고 과일가게로 향했다.
“바나나 한 송이에 천원이에요?”
“네, 이쪽에 있는 것은 다 한 송이에 천 원씩입니다. 요쪽에 있는 것은 이천 원짜리고요.”
“그런데 한 송이에 천 원이면 사면서도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팔아도 남나요?”
“아니요, 이렇게 팔면 손해지요. 그래도 오늘 팔아야지 내일이면 상품가치가 없어지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럼 이걸로 두 송이 주세요.”
“네에, 자아 여기 두 송이 담았습니다.”
거스름돈을 받고 돌아서던 아내가 잔돈을 헤아려보더니 다시 과일가게 아저씨에게로 걸어갔다.
“저어 돈을 더 남겨준 것 같은데요. 요쪽은 한 송이에 이천 원씩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요, 그것도 모두 천 원씩입니다.”
“어머, 그래요? 그러면 두 송이를 더 주세요.”
그래서 합이 네 송이가 되는 바나나를 양 손에 각각 한 묶음씩 들고 개포시장을 나와 다시 양재천변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등나무 지붕 아래로 벤치가 놓여있는 곳에서 잠깐 앉았다가 가자고 했다. 천변을 따라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지나가니 잘 숙성된 바나나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러자 아내는 비닐봉지를 풀어 바나나를 두 개를 뚝 떼어내 나에게 한 개를 건너 주면서 “바나나 냄새가 맛있게 나내요. 우리 하나씩 먹고 가요.” 라고 했다. 바나나를 맛나게 먹던 아내가 갑자기 스마트폰을 들더니만 아이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서울이 밤9시면 뉴욕은 아침7시이고, 샌프란시스코는 새벽4시가 된다. 아들아이에게서 금방 짧은 답문자가 들어왔다. “일해요.” 아마 어젯밤에도 사무실에서 밤을 샌 모양이었다. 좋은 환경에 높은 연봉도 좋지만 한 팀원들끼리 밤새는 것을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엄마로서는 아들아이의 건강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듯했다. 아내가 아들아이에게 뭐라고 문자를 계속 보내는 모양이지만 한 번 답문자를 보낸 아들아이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딸아이에게서 답문자가 들어왔다. “엄마, 안녕. 나는 지금 출근 준비 중.” 아내는 딸아이에게 또 무언가를 연신 보내는 것 같았다. 출근 준비로 바쁜 딸아이도 답문자가 없자 아내가 바나나를 하나 더 때어내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들은 서로 말끔하게 가로등불에 비친 얼굴을 마주쳐다보면서 하하~ 하고 웃었다. 운동 겸 산책길이 오늘밤은 어찌어찌하다보니 먹자판이 되었으나 여유 있는 시간과 한가로운 분위기 속에서 어묵과 바나나도 먹고 아이들과 실시간 카톡까지 주고받았으니 마음이 참 좋았다. 한국에서 한 육십 여년을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텍사스 목장의 암송아지 스테이크를 먹고 박차가 달린 장화를 신은 채 말을 타고 소떼를 쫒으면서 들판을 돌아다니거나 와인 향 익어가는 포도농장에서 쇠스랑을 어께에 들쳐 매고 땀을 흘리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문수사文殊寺의 오후.
가을이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전해왔으나 누구 하나 답하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법당 앞 붉은 담쟁이 잎이 문수사 주지스님을 대신해서 방문객들에게 그나마 반가운 마음을 드러내보여 주었다. 가을에 대한 상냥한 예의를 미처 준비해놓지 못한 일주문 안 도량은 넓고, 쓸쓸하고, 스산해보였다. 아직 점안을 하지 않은 부처님과 미처 단청을 올리지 못한 나한전羅漢殿은 가을의 정중한 방문에 못내 당황하고 있었으리라.
(- 문수사文殊寺의 오후, 개포시장의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