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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 대회가 오늘 폐막합니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하여 개막이 연기되고 우여곡절 끝에 열리게 된 이번 올림픽은 폭염까지 겹치는 악조건 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뜨거운 열정과 투지는, 코로나로 지쳐가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위로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월드 스타를 보유하고 있는 여자배구팀은, 열두 명의 선수들이 그야말로 ‘원 팀’을 이루어 객관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하고 4강에 오르는 선전을 펼쳤습니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가 있다고 해서 그 팀이 저절로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배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독과 코치가 있고, 코트에서 함께 뛰는 여섯 명의 동료가 있고, 힘든 훈련과 준비과정을 함께 하고 벤치에서 응원하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선수단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동료의식으로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좀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지만 스타 의식에 젖어있거나, 혹은 자신이 인정받기 위하여 이기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가 있다면, 그 팀은 결코 강한 팀이 될 수가 없는 법이고, 어떤 결과를 얻었든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세워줄 줄 아는 태도는, 실력 못지않게 선수에게 중요한 덕목일 것입니다. 팀을 하나로 묶어주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한 교회와 성도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임수와 유혹과 온갖 세속적인 교훈의 풍조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 가운데 요동하지 않고, 성도의 믿음을 지키며 교회를 세워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택하여 불러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곧 교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교회 공동체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고, 죄에 매여 종노릇하던 어두움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받은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내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연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선택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 첫머리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에베소 교인들을 선택하여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였습니다. 1장 6절에,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1장 12절에서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사람들은 최고가 되고 일등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등이나 최고가 되는 것을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일등을 하고 최고가 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입니다. 최선을 다하였더라도, 패배하였거나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사람들은 기억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실패한 것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에베소 교인들에게 요청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최고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2절과 3절에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기 위하여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번역된 단어는 희랍어 원어로 ‘타페이노프로쉬네’입니다. 이 단어는 ‘기어간다’,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의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 사회에서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노예는 자기를 절대로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늘 무릎을 꿇고 기어가는 것 같은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단어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하면서 바로 이 겸손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가지신 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제부터 ‘겸손’은 사회적으로 노예와 같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 약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한 자이건, 높은 자이건, 배운 자이건 배우지 못한 자이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그 누구라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겸손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겸손과 온유’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짝과 같이 나란히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9에서도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는 한자어로는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자를 씁니다.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이나 성격이 부드러워서, 그 말이나 성품이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 행동 역시 온화하고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온유’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말로 ‘온유’라고 해석된 헬라 원어는 ‘프라외테스’입니다. 이 ‘프라외테스’는 길들여지지 않은 강하고 거친 야생 동물이 훈련 받고 길들여진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절제할 줄 모르는 야성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이, 스스로를 잘 절제하고 조절하여 부드럽고 유연하게 그 힘을 쓸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사람의 의지와 결단만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제멋대로 사용하던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스스로 낮아져서 그 힘을 잘 절제하고 조절하며 사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는데 중요한 요소가 바로 겸손과 온유입니다. 강력하고 뛰어난 한 지도자가 있어 그 권위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온유한 구성원들이 있어 공동체가 하나가 될 때, 그 공동체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인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롬 9:22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벧전 3:20에서 베드로는 “노아의 심판 때, 노아가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주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그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가 더 성숙하기를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나를 힘들게 하면, 우리는 바로 되 갚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아직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가 성숙하여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기다려 줄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성숙한 사람들 또한 서로를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주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까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이나 문화, 혹은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다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는 편 가르기가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이나 이해관계에 따라서 서로 편을 가르고, 상대진영을 적대시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증오하고 공격하고 상처를 줍니다. 정치지도자들은,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국민을 섬기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갈등과 편 가르기와 증오를 자신의 지지와 권력의 기반으로 삼으려 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아주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관용의 리더십이 절실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나라, 혹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나라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공존하며 지켜나가야 할 우리나라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통과 통합의 정신으로 하나 되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 하나님을 각 사람에게 은혜를 나누어 주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께서 불러내신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은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선물의 분량대로 다양한 은사와 직분들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나누어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왜 은사를 주셨습니까?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를 선물로 나누어 주시고 직분을 세우신 이유를 12절에서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언뜻 우리 말 성경 본문을 보면 세 가지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성도를 온전케 하고,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은 “그것은(다양한 은사들을 선물로 주신 이유는)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고, 성도를 온전케 하는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준비시킨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이기심이나, 혹은 여러 가지 상처로 인한 좌절감이나 무력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한없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 풍조 속에서, 자기 육신의 안일만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봉사를 잊어버렸습니다.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나누고 섬기며 봉사하려 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하여 봉사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성숙한 교회와 신앙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는 말은 완전히 성장하여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14절에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같은 신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신앙적으로 미숙한 어린 아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풍조, 세상의 유행, 세상이 가르쳐주는 온갖 가치관이나 교훈에 밀려 요동치는 사람입니다. 내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나를 보며, 스스로 상처받고 스스로 열등감에 빠지고, 아니면 스스로 교만하고 스스로 만족하여 안일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의 신앙입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봉사하며 주님의 몸을 세워가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깨우칠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완전성, 그리스도의 충만하심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15절에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현세에 축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내가 믿는 바 예수님은 누구신지, 그가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분은 지금 어떻게 나를 돌보시는지, 세상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알아가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닮아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다다르기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모양과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음을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존중할 일입니다. 다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모든 지체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할 때,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은 세워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공동체가 하나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으로 살아가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