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월 30일 00:01에 미군은 제5보병사단 제1여단을 선두로 1968년 6월에 철수하였던 케산(Khe Sanh)으로 진격을 개시하였고, 남베트남군 제1사단은 동하(Dong Ha)에서 DMZ 방향으로 기만공격을 실시하였다. 에이브럼스(Abrams) 대장은 6일간 보도관제를 명하였으나 남베트남군의 작전보안 태세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미군이 9번 도로를 따라 진격하자 북베트남측은 이미 작전기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 월경 작전이 개시되지도 않았던 2월 1일에 하노이, 모스크바에서는 일제히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월경 작전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은 또 다른 침략전쟁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어서 맨스필드(Mansfield) 의원을 중심으로 미 의회에서도 맹렬히 비난하였고 UN사무총장, 라오스 정부도 월경 작전에 대하여 미국에게 강력히 항의하였다.
미군 공병은 진격 동안 도로를 보수하고, 버려졌던 옛날의 화력기지와 케산 기지의 비행장을 보수하기 시작하였다. 악천후와 지뢰 등으로 작업은 지연되어 2월 15일에야 첫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었다. 이제 케산 기지는 다시 한번 각광을 받는 기지가 되었다. 작전을 위한 보급물자가 집적되고 공중기동 작전 동안에는 탑승지역이며 재급유 장소가 된 것이다.

라오스 월경작전에 대해 기자회견하는 호앙 쑤안 람 중장

케산에 있는 람손 719 작전 사령부를 방문한 구엔 반 티우와 구엔 카오 키
케산 비행장이 기능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남베트남군은 계획대로 2월 8일 10:00부터 제1기갑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고, 공수사단과 제1사단의 부대들이 9번 도로 북쪽과 남쪽에 연하여 공중기동으로 착륙하여 화력지원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2월 9일까지 제1기갑여단은 최종목표까지의 중간지점인 알루이(Aloui)를 점령할 수 있었다. 9번 도로 북쪽에 4개, 남쪽에 2개의 화력지원기지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1사단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팜 반 푸 준장(남베트남 패망시 2군단장)

짧았지만 승리의 한순간... 라오스에 침입한 월남군은 북베트남군의 PT-76전차를 노획하였다.
북베트남군은 최초 남베트남군의 공격에 저항하지 않고 물러났다. 남베트남군이 DMZ를 넘어 북베트남으로 월경 작전을 실시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북베트남군은 부대를 역습에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9번 도로 남쪽 지역은 급경사 지역으로 공격이 곤란하여 주로 북쪽에서 남베트남군 공수사단과 레인저부대의 각 기지에 연대규모 이상의 부대가 집중공격을 가하였다.

라오스 월경작전에 출동대기중인 남베트남군 레인저 부대
미군의 항공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과 북베트남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악천후와 짙은 안개는 항공지원을 어렵게 만들었고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 기지에 접근함으로써 미군의 강력한 폭격을 회피하기도 하였다. 계곡 속에 은폐하고 있던 북베트남군의 대공화기는 재보급을 하고 있는 미군 헬기를 계속 격추시키고 있었다. 피아의 포병 화력이 계속 작렬하고 있었다. 베트남전 이래 남, 북의 정규군이 정식으로 맞붙은 최초의 정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라오스 월경작전에서 격추된 미군 헬기
한편은 미군의 최신장비를 이용하여 공중기동과 기계화 부대 기동이라는 화려한 기동력을 과시하면서 강력한 항공지원과 공중보급을 받는 미군의 초현대식 전투를 그대로 흉내내어 보려고 시도하였고 한편은 도보기동으로 항공지원도 없이 제1차 세계대전시의 전투방식으로 인명손실을 감수하면서 악착같은 재래식 전투를 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레인저 대대가 방어하고 있는 기지를 포위하고 대공화기로 재보급을 시도하는 미군 헬기를 격추하면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2월 22일에 남베트남군 레인저 대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남베트남군의 사상자는 298명이었고 그들은 북베트남군 639명을 사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알루이 북쪽의 남베트남군 공수대대의 기지는 2월 25일부터 북베트남군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미 고문관이 참가하지 않아 항공지원을 받는데 애로가 많았다. 3일 동안 북베트남군의 파상공격을 격퇴하여 1,000여 명의 북베트남군을 사살하였다고 보고하였으나 결국 기지는 포기되었고 대대장을 포함한 1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북베트남군은 항공지원이 불가능한 악천후를 이용하여 PT-76 수륙양용전차를 투입하여 보전포(步戰砲)협동으로 이 기지를 탈취한 것이다.

북베트남군의 PT-76 수륙양용전차
9번 도로 북쪽의 다른 2개의 기지에 적의 압력은 계속되었다. 3월 1일 남베트남군 람(Lam) 군단장은 북베트남군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9번 도로 북쪽의 화력지원기지 지탱이 어렵게 되자 계획을 변경하여 9번 도로 북쪽에 화력지원기지 구축을 포기하고 대신 남쪽에 3개의 기지를 더 구축하여 테체폰(Techepone)까지 화력지원이 가능하도록 계획을 변경하였다.

화력 지원 기지
3월 5일까지 기지가 구축되자 3월 6일 람손 719 작전의 하이라이트인 대규모 공중기동작전이 실시되었다. B-52가 테체폰 지역에 맹폭을 가하고 남베트남군 제1사단 예하 증강된 2개 대대와 연대 지휘부가 케산으로부터 테체폰까지 공중기동되었다. UH-1휴이 120대가 적의 활동이 거의 없는 9번 도로 남쪽을 따라 왕복 78㎞의 베트남전 이래 최대 규모, 최장거리의 공중기동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헬기 항로 전, 후, 좌, 우로 건쉽이 의심지역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목표지역 근방의 적 대공화기에 1대가 격추되었을 뿐 목표지역에도 큰 저항 없이 착륙하였다.
3월 8일 서덜랜드(Sutherland) 중장과 에이브럼스 대장은 람손 719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최종목표가 확보되었고, 지금까지의 전과는 적 사살 7,100명, 8개 대대 분의 호기, 159 대대의 1개월분 식량이 노획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북베트남군이 계속 증강되어 본격적인 북베트남군의 반격을 예상한 람 군단장은 3월 10일 전 부대에 축차적인 철수를 지시하였다. 헬기로 철수하는 남베트남군에 대하여 북베트남군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북베트남군은 각 기지에 보병 공격, 교란부대 침투, 포격, 대공화기 등의 공격수단을 총 동원한 것이다.

철수 헬기를 기다리는 남베트남군
헬기에 최대의 인원을 탑승시키도록 하였으나 겁이 난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다음 제대의 헬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헬기의 착륙용 스키드에 매달린 채 철수하기도 하였다. 이를 본 북베트남군들은 추후 남베트남군은 라오스에서 헬기 스키드에 매달려 철수할 정도로 대패주를 하였고 이 매달린 병사들을 미군이 발길로 차고 스키드에 기름칠을 하여 떨어져 죽게 하였다고 선전하였다. 3월 25일까지 남베트남군의 철수작전은 완료되었다.

램슨 719의 한 장면... 공황상태에 빠진 남베트남군이 미군 헬기에 마구 매달리고 있다.
첫댓글 미군의 지원없이는 남베트남군의 활약은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전쟁에 단련된 북베트남군과 온실 속에 자란 남베트남군은 전투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