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월15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청주] 권위있는 가르침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히브 2, 5 - 12
† 복음 : 마르 1, 21ㄴ - 28
★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어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시편 8편 5절부터 6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곧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통치권을 진정으로 얻게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셔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기 때문이다(제1독서).
★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두 번 놀란다. 첫 번째로는 그분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더러운 영들조차 그분께 복종할 만큼 예수님의
명령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권위’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대개
권위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권위는 좋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권위가 있었다.’는
표현이 곧잘 나옵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위’는 좋으나, ‘권위적’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권위가 있었지만, 그분께서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철부지
어린이처럼 기도하시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훈계하시되 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은 ‘권위적인’ 사람이 많아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지고
있는 권위가 실추되어서도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권위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의 권위, 교사의 권위, 어른의
권위, 신앙인의 권위 등 말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학자의 권위는 어디에서 옵니까?
논리적이면서 근거 있는 지식에서 옵니다. 건축가의 권위는
어디에서 옵니까? 풍부한 경험과 능력 있는 기술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거룩한 순종에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권위가 제대로 살아나려면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권위를 존중하고,
이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권위있는 가르침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월15일 연중 제1주일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마르코 1,21ㄴ-28
권위 있는 가르침
오늘은 청주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에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하는 삶이 항구하게 지켜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하느님의 권위가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 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
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악령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권위 있는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이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 신학생 때 지방에서 인천으로 올라오는 버스를 탔다가
아주 고생했던 적이 기억납니다.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산에
갔다가 올라오는 차편이었지요. 그런데 차를 타기 전에 맥주
마신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화장실을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움직임도 갖지 않고 고속버스가 잠시 정차해서 쉬는
휴게소까지 참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버스기사 분께 가서 어렵게 부탁을 했지요.
“제가 화장실이 너무나 급한데 잠깐만 서면 안 될까요? 정말로
잠깐이면 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매정하게 저의 부탁을 거절하시더군요.
“버스 시간 때문에 중간에 설 수 없어요. 30분만 더 가면
휴게소에서 쉴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저는 먼 거리를 이동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전에는 절대로 물이나 맥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혹시나 그때의
상황이 또다시 반복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그런데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할 때는 그러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차나 비행기 안에는 화장실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내게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있다면 또 가질 수 있게 해 준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을 위해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또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게 함으로 인해 이 세상 안에서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엉뚱한 곳을
선택하곤 합니다. 마치 세상이 내게 풍요함을 주는 것처럼,
물질의 만족만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같은 말을
자주 하지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마치 커다란 구속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분명히 나를 위해 함께 하시는 분, 나의 발전을 위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 나의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시는 분인데도 주님이
아닌 세상과 물질을 선택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만
합니다. 주님은 고리타분하신 분이고, 주님은 뜬구름 잡는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과 물질이 과연
내게 어떤 것을 주었는지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 주었을지는 몰라도 영원한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상관없는 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에만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 안에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것으로 시작해서 당신의 것으로 끝내라(발타자르 그라시안).
교구청에 새로운 신부님 5분이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
자신이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갖게 될 때, 열심히 노력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정말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뜻밖의 좋은 성적을 얻었을 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겼을 때……. 이런 경우 행복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 나오는 호르몬이 바로 ‘도파민’
이라고 하더군요. 도파민은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즐거움과 쾌감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도파민에게는 커다란 문제점이 있습니다. 즉, 한 번
반응한 자극에는 더 이상 이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새 차를 하나 뽑았습니다. 새 차니까 기분이
좋아야 할텐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타고
있던 차보다 훨씬 작은 소형차를 구입했기 때문입니다. 도파민
호르몬 때문입니다. 이 호르몬은 더 큰 성취를 계속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또 더 비싼 것을 통해서만 만족하고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곁에는 또 다른 행복이 있습니다. 성당에서 기도와
묵상을 할 때, 마음이 편안할 때, 가족과 즐거운 여행을 했을
때, 숲속을 걸을 때, 남을 돕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 봉사 할
때 등등 계속적으로 기억되는 행복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아니라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꾸준한 행복을 위해서는 무슨 호르몬이 필요할까요?
결국 더 많이 성취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다른 이들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삶인 세로토닌 적인 삶이 필요합니다.
세로토닌 호르몬이 가득한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오랫동안
행복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버리고 낮춤으로서 얻는 참된 권위
2013년 다해 1월15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마르 1,21ㄴ-28
버리고 낮춤으로서 얻는 참된 권위
요즘 2010년에 취임한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의 가난한
삶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놓게 했답니다. 자신은 부인 소유의 작고 허름한
농장에서 기거하는데 난방도 제대로 안 된답니다. 대통령
사저 밖에는 빨래가 내걸려 있으며 필요한 식수는 대통령이
직접 잡초가 무성한 마당 가운데 우물에서 퍼온답니다.
출근은 털털거리는 오래된 중고차에 의지합니다. 대통령
사저를 지키는 사람은 일개 중대의 무장 병력이 아니라
언제나 한가해 보이는 두 명의 경찰과 다리 하나를 잃은
그의 개 마누엘라가 전부랍니다.
나라로부터 받는 급여는 대부분 기부에 쓴답니다. 월급여의
90%에 해당하는 1만2000달러를 빈곤층과 소상공인을 돕는
자선단체에 건넵니다. 그의 손에 남는 월 소득은 우루과이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인 약 775달러 정도입니다.
때문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내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면서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노인들과 장애 아동을 불러 함께 담소도 나누고,
사진도 찍는 송년 파티를 벌이는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말합니다. “내 인생을 ‘소비’하느라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합니다. 제 정치
철학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유심히 역사를 살펴보면 소박하고 격의 없던 국가지도자들을
가뭄에 콩 나듯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 역시 특권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미혼모 출신의 그녀는 대통령 재임시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직접 자신의 옷을 다려 입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머리는 작은 빗 하나로 쓱쓱 빗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녀는 일반시민처럼 살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 복지와 소외계층에
대한 지지를 지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핀란드 국민들은 그런
그녀를 ‘우리 중의 하나’라고 표현하며 신뢰했습니다.
이렇게 존경받는 리더, 참된 리더는 특권을 자신을 버리고
낮춤으로써 사람들에게 신뢰와 권위를 얻습니다.
한 자리 차지하면 갑자기 신(神)이라도 된 듯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아랫사람들을 힘으로
내리누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리더십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대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 백성들을 아끼고 섬기는
지도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는
지도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인데, 이는
결국 복음서가 강조하는 리더십이고,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리더십이며,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권위는 인간을 억압하고 힘겹게 하는
권위가 아니라 인간을 격려하고 고무하는 권위, 인간을
치유하고 살리는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권위로 악령 들린 사람에게 다가가셔서 그를 치유하시고
새로운 삶을 되찾아주십니다.
사랑과 생명의 권위,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한 마디가
오늘 내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사랑과 생명의 권위로 이웃들을 고무시키고 에너지를
부여하고 생명을 되찾아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마귀마을(마르 1, 21-28)
2013년 다해 1월15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마르 1, 21ㄴ-28)
마귀마을(마르 1, 21-28)
믿는 이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저희교구 바닷가의 한 본당에 마귀마을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동네는 마귀가 전교하여 마귀마을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 가정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으면 본당의 신부님을 청하여
마귀를 쫓아냅니다. 그러면 그 마귀가 다시 다른 집의 사람에게
들어가 또 사제를 부르고 하여 동네 사람 모두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원로 사목자가 된 신부님은 그러한 과정을
녹음기로 녹음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엑소시스트 영화를 보는
것처럼, 쫓겨나지 않으려는 마귀와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저도 사제 생활 초기에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제생활을 하면서
성경말씀에 대한 믿음이 더욱 생기면서 주님을 믿는 그 만큼
많은 권능의 힘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40대 초반의 자매님이 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세례는 받았지만 기도도 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도 안 되는데 사제한테 간다고 별다른 일이 있을까?”
하면서 마지못해 찾아왔습니다.
저는 먼저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이 자리에
함께 하셔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 만남을 주관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묵주기도 5단씩 드리고 잠잘 때
성모님 노래가 담겨져 있는 CD를 들으면서 잠자도록
권하였습니다.
너무 힘들어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상담할 순 없었고, 즉시
고해성사를 보도록 도와주었으며 안수기도로 마쳤습니다. 그
후로 한 주에 한 번 정도 만나면서 꾸준히 기도를 하도록
인도해드렸는데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토록 우울증과 합병증이 심하던 자매님이 한 달도 못되어
잠도 많이 자고, 어느 정도 활동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유인이 되어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서 살아갑니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 어둠을 밝혀줍니다. 사제들이나 믿는
이들이 예수님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권능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저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임마누엘 하느님,
오늘 하루 저희 삶에 함께 하셔서 저희가 어둠의 영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수원] 서로 다름
성당에서 봉사를 하다 보면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나 또한 사람 때문에 힘든 적이 많았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회를 하고 있지 않지만 제대회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는 온갖 이야기를 들었다. 옷을 너무 차려 입어도, 편하게
입어도 이야기를 듣고, 제대 꽃꽂이 색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나 또한 제대회 소속이라는 권위의식으로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뒷말을 자주 나누었다. 단체부터 개인의 허물을 말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러다가도 아주 가끔은 몸으로
실컷 봉사해서 덕을 쌓고 입으로는 덕을 다 깎아먹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입을 조심해야 함을 느끼면서도 생각은 잠시뿐이었고,
늘 불만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토수도회의 정신처럼 기도가 기본이
되지 않으면 봉사 또한 기도의 연장선이 아닌 그저 죄의 도구가
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동적으로 일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겸손하지 못할 때면 불편한 마음부터 쑥 올라오지만 기도로
단단해지면 그 마음이 조금 덜하다. 삶이라는 것이 계속 자신을
닦아나가는 수양임을 알고 끊임없이 노력해야겠다. 봉사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나와 다른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다름을 인정하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 장유진(수원교구 신장동 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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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