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는가. 조선 인조가 오랑캐인 청 태종 앞에 세 번 큰절을 하고 땅바닥에 아홉 번이나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면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자존심 상해하는가.
그처럼 수치와 치욕의 역사를 겪고 조선이 망했던 이유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던 요한 바그너가 지적한 대로 국론 분열과 지도자를 경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도 영적 지도자를 끌어내리려는 풍조가 급속히 나타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날까. 먼저는 지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한국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서 지도자들이 귀족의 옷을 입고 너무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영혼의 지도자를 공격하고 흠집 내려는 시대적 흐름 때문이다. 80년대부터 시작된 민주화를 향한 갈망은 교회 안에까지 급속하게 유입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신정주의이며 그 신정주의를 이루기 위한 과정과 수단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빠른 기간에 조화시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조건 객관적 민주화를 요구하고 사회적 잣대로만 교회와 목사를 바라보고 비난하려 한다. 더 큰 문제는 주로 교회에서 마이너리그나 아웃사이더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선악의 개념과 사회적 기준으로만 지도자를 판단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내분과 다툼, 갈등을 격발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 법정과 언론에까지 확전시킨다. 그 결과 지도자의 이미지 추락이 한국교회 이미지 추락으로 연결되고 선교와 전도의 부정적인 역기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정의감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고 교회의 참신한 개혁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야 한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오히려 불의가 될 수 있고 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정한 정의란 사랑이 상대적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정의는 오히려 더 불법이고 부정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정의가 없는 사랑 역시 감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과 함께하는 정의가 행해질 때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다. 시편 기자도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사회를 염원했지 않은가(시85:10).
그러므로 교회 안의 정의와 개혁은 지도자를 존중하고 세워주는 사랑과 함께해야 한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하는 개혁이 되어야 한다.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한국교회가 먼저 지도자를 존중하고 높이는 사회 풍조를 주도하자. 설사 영혼의 지도자가 불의를 행하고 부정을 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할지라도 먼저 함처럼 까발리지 말자. 오히려 셈과 야벳처럼 수치와 허물을 먼저 덮고 교회의 덕과 공동체의 화평을 위하여 눈물로 보듬고 기도하자. 그리고 은밀히 찾아가서 이야기하자. 그가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라면 반드시 회개하고 겸손하고 새롭게 출발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국교회 안에 영혼의 지도자를 존중하며 세우는 풍조를 만들자.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춤하는 공동체를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