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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성들이 살펴본 불교
글/배성옥
머리말
이 책은 1989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해변도시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외곽에 위치한 ‘세인트 매리 신학대학’에서 열렸던 북미주 여성 불자들의 수련회(retreat)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책을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필자가 불자는 아니지만 한국사람으로서 우선 흥미로운 점은 18세기말 한국천주교의 발상지가 경기도 A수원 근처에 있었던 천진암(편집자 주 참조 )이라는 절이었던 반면에, 20세기말 미국 여성불자들이 토론과 수행을 위하여 모인 장소는 미국의 한 카톨릭대학 캠퍼스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어, 라틴어가 대부분인 갖가지 천주교용어를 우리말로 옮겨야 했던 옛시절에는 오래오래 우리 민중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불교, 그 불교를 비롯하여 도교(道敎)와 무속신앙의 용어까지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미국 여성불교 지도자들이 영어로 쓴 이 책에는 그리스도교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용어와 표현들이 간혹 심심찮게 나타나 있기도 하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14명의 여성지도자들이 거의 한 장(章)씩 맡아서 집필하였고, 총 13장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이(editor)는 카르마 렉쉐 초모(Karma Lekshe Tsomo)이다. 이 분은 현재 캘리포니아 주 최남단의 항구도시 샌 디에고(San Diego)에 있는‘샌디에고 대학’의 종교학과 교수로서 불교와 세계종교 및 비교종교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다람살라(Dharamsala) - 티베트 본토에서 추방당한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거주지인 동시에 티베트 추방정부의 수립지로 이름난 도시 – 에서 15년 동안 불교공부를 한 후,‘하와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87년 사캬디타(Sakyadhita)라고 불리우는‘국제여성불자협회’를 창설하였고 최근까지 회장직을 역임하였으며 개발도상국 여성들을 위한 혁신적 교육기획재단의 책임자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불교와 생명윤리학 및 죽음에 관한 저서 외에도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한 바 있으며 세계적인 여성 불교지도자로서 대단한 관록을 지닌 인물인 것 같다.
엮은이 카르마 렉쉐 초모는 우선 서문(Openings)에서 밝히고 있다. 불교는 남녀 구별없이 누구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밝히고 가르쳐주는 종교인데, 원시불교 시대로부터 현 시점까지 길을 제시하고 본을 보여준 모범 인물들은 예외없이 모두가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한 편, 불교의 여러 면모(面貌) 가운데는 서양의 문화 및 사고방식과 어울리는 점도 있으나 서양문화, 특히 미국인들의 생각과 상당히 어긋나는 점도 없지 않다고 했다. 나아가 엮은이는 불교의 세 갈래 전통을 언급하였다. 첫째,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미얀마, 타일랜드)로 퍼져나갔으며 우리나라에서 흔히‘소승불교’라고도 일컫는‘테라바다(Theravada)불교’, 둘째로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같은 한자문화권에 융성한 ‘대승(Mahayana)불교’, 셋째로 티베트와 몽고로 퍼진 북방불교‘바즈라야나(Vajrayana)-금강승 불교라고도 번역됨-전통’에 대하여, 그리고 각각의 전통에서 숭앙(崇仰)되는 여성적 이미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관음(觀音)보살’이 지닌 여성적 신성미(神聖美)는 예로부터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을 통틀어 모든 불자에게 숭배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여성불교도들이 불교서적을 읽고 명상할 기회는 어렵지 않은데 비하여, 직접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여성불교지도자들이 아직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가운데“오늘날의 여성들은 오늘날의 여성들로부터 얘기를 듣고자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14명의 여성이 모두13장의 글모음을 통하여 들려주는 얘기는 교리에 관한 학문적 모색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여성 불자들이 제각기 생활 속에서 직접 체험한 산 경험담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분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이제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나하나 읽어내려 가고자 한다.
제1장: 소외된 이들에게 자비를
(Forging a Kind Heart in an Age of Alienation)
글쓴이 하이디 씽(Heidi Singh)은 명상수련 법사(meditation teacher)이자 시인(詩人)이며 한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다르마비쟈야(Dharmavijaya) 사원’에서 ‘평신도직 법사(lay minister)’계를 받았으며 오래 전서부터 UCLA대학 불교학생회 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친정가족은 모두 스리랑카 출신이고, 인도사람인 남편은 시크(Sikh)교도, 남편의 친척과 친지들은 힌두교도, 이처럼 다문화 가정의 주부로서 또한 로스앤젤레스라는 다문화사회를 살아가는 불자요 지도자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하이디 씽은 우선 1992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던 흑인폭동사건을 화두로 삼았다. 백인들의 주류사회에서 따돌림 받았다는 소외감, 불신, 노여움, 욕구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사건이었다. 근처의 코리아타운에서 영업하던 수 많은 한인들이 폭동으로 피해를 입었다. 하이디 씽(Heidi Singh)은 그러나 노여움을 노여움으로 맞대응할 것이 아니라 화해(reconciliation)의 실마리를 불경 읽기, 그리고 명상수련에서 찾고자 노력하였다. 노력과 동시에 규칙적이고 정기적인 명상을 수행함으로써만 진정한 의미의 화해가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경전공부와 명상수련을 꾸준히 해나가던 어느날 갑자기 67세 나이의 아버지가 폐암 말기 환자라는 소식에 접하였다. 병실에 찾아간 딸에게 아버지는 노여움에 가득 찬 어조로 “왜 내가 죽을 병에…? 난 평생 아무한테도 나쁜 짓 한 적이 없는데…!”라고 한탄하셨다. 그 때 하이디 씽은 불경공부와 명상수련을 하지 않고 지냈던 옛날 같으면 아버지의 노여움에 자기도 노여움으로 맞대응하여 “아무한테도 나쁜 짓 한 적이 없다구요? 엄마 속을 그토록 썩힌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도 속을 뒤집는 별별 소리를 다 했잖아요?...”운운 하며 마구 퍼부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죽음을 앞 둔 아버지에게 이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임을 금세 깨닫고서, 인간이면 누구나 거쳐 가야할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수레바퀴에 대하여 나직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가운데 천천히 그리고 고요히 아버지와 화해의 길을 향하여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돌아가시던 바로 그날 아침 “반야심경(Heart Sutra)”을 아버지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읊어드렸을 때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녁이 이슥해질 무렵 돌아가시기까지 곁을 지키던 딸과 아내를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해 가까스로 이미 뻣뻣해진 몸, 뻣뻣해진 입을 가다듬고서 “I love you.”라고 소리낼 수는 없었지만 말소리 그대로 입모양을 해 보이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숨을 거두셨다.
“반야심경”과 더불어 그녀에게 특히 도움이 된 책은 “The Wheel of Death(죽음의 수레바퀴)”였다고 한다. 이 책은 필립 카플로(Philip Kapleau)의 편찬으로 1971년 뉴욕에서 출판되었으나 현재 품절되어버렸고, 1989년에 다시 “The Wheel of Life and Death(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이 나와 있다고 한다. “죽음의 수레바퀴”의 내용 가운데‘죽는다는 것: 실천적 지침’이라는 항목 아래 나열된‘대승(Mahayana)10계율’이야말로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괴로움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특별한 지침이 되었다고 하며‘10계율’전체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이 제1장은 책 전체 13장을 통틀어 인용문과 주(註)가 가장 많이 들어있다. UCLA처럼 관록있는 대학의 불자학생들을 가르치는 법사이자 시인으로서 글솜씨와 품격이 돋보이는 글이라 하겠다.
끝으로, 로스앤젤레스 주변에 살고있는 필자의 눈에 흥미롭게 보인 내용에 관하여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하이디 씽의 아버지는 임종 전(前) 병원에 소속된 카톨릭신부들의 방문을 받으며 종부예식도 한 번 이상 받았다고 한다. 임종 직후 딸은“죽음의 수레바퀴”에 서술된 지침에 따라 ‘10계율’과 죽은이를 위한 경문, 그리고 “반야심경”을 정성껏 낭송하였다. 1주일 후 카톨릭사제가 주례한 장례미사에서 딸은 아버지를 기리는 ‘추모사’를 작성하고 낭독하였다. 이어서 그녀가 법사로 봉직하고 있는‘다르마비쟈야 사원’에서 불교 예식대로 장례를 치루었고, 49제는 여러 스님들이 함께 모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 사후(死後) 90일 째 되는 날은 아버지의 고국 스리랑카의 전통에 따라 특별 예식을 드렸다. 뿐만 아니라 사위, 즉 하이디 씽의 남편과 친척들은 시크(Sikh)교 식으로, 남편의 친지들은 힌두교 식으로 예를 올렸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세계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합중국(合衆國)이다. 그 서쪽 해안의 넓은 땅 캘리포니아, 그 중에서도 로스앤젤레스를 둘러싼 소위 남가주야말로 흔히들 인종과 종교의 모자이크라고들 한다. 세계 곳곳에서 종교로 인하여 갖가지 씨끄러운 싸움이 그치지 않는 오늘날, 참된 평화를 가르치는 종교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화두는 아닐런지…?
하이디 씽
제2장 : ‘불타’의 참 뜻 (Being Buddha)
글쓴이 프라바사 다르마 로시(Prabhasa Dharma Roshi, 1931-1999)는 일본불교 선문오종(禪門五宗)의 하나인 임제종(臨濟宗)에서 교육받고 수행을 쌓은 후 스님이 되었으며 임제종 종문(宗門)의 법사로 활약하였다. 그 후 베트남 선문에서도 법사의 계를 받았고 미국과 유럽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미국 및 유럽 국제 선원(禪院)’을 창설하였다.
제1장에 비하여 이번 글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라기 보다는 좀 더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인상을 풍긴다. 글쓴이는 삼라만상, 즉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하여 우리네 범인(凡人) 누구나 지니고 있는 허상(虛像)과, 불교의 진리를 배우며 수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꿰뚫어볼 수 있는 진상(眞像)을 대조시켜 뚜렷이 설명해주고 있다. 불타(Buddha), 즉‘부처’라는 말은 시끄러운 세상만사의 허상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바로 이 진상을‘깨달은 자(awakened)’를 뜻한다. ‘깨달은 자(者)’는 곧‘부처’요, 성불(成佛)한 자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사람들을 절 안으로 이끌어들여 불교신도가 되라고 종용하는 종교가 아니라, 대부분 잠든 상태나 다름없이 지내는 사람들의 의식(意識)을 일깨우는 데에 진정한 가치를 두고 있다. 잠들어 있던 의식이‘깨우침’을 느끼고 허상에서 깨어나 진상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되는 자는 누구나 이제 세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편과 네 편, 이쪽과 저쪽, 이렇게 양편으로 갈라져 끊임없이 싸우는 양자택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끝없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게 될 날도 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제3장 : 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며 실천하는 불교
(Buddhist Practice in the Emergency Room)
세 번째 글의 저자 마거릿 코벌리(Margaret Coberly)는 정규자격을 갖춘 간호사이다. 또한 ‘하와이 대학’에서 초(超)개인심리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후 하와이 주립 윈드워드(Windword)초급대학에서 초개인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말기환자 간병운동(hospice movement)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 편, 노인간병원 운영회사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하다.
마거릿 코벌리는 응급치료 전문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1975년부터 뉴욕의 ‘스페니쉬 할렘(Spanish Harlem)’구역에 있는 큰 병원의 외상(外傷) 응급실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치정사건에 얽혀 총질이나 칼부림으로 피투성이가 된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매일같이, 때로는 하루에 서너 차례씩 죽음의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복도에서 울며불며 비탄에 젖은 환자의 가족들에겐 눈길 한 번 돌릴 틈도 없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숨막히는 숨바꼭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서양사회에서는, 특히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팽배한 미국에서는 누구든 가까이에서 죽음을 직접 대하기 전에는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며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다. 20년 전에 중년을 훌쩍 넘은 나이로 한국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이민온 필자의 눈에도, 미국사람들의 삶에 대한 집착은 좀 지나치다고 생각될 때가 없지 않다. 아무리 고령(高齡)일지라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 “암과의 투쟁에서 패배”했다고들 하며 가족의 죽음을 언제나 비극(tragedy)으로 받아들인다. 미국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는 대신 죽음에 대한 마취제로서 술이나 마약의 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고 제3장의 저자 마거릿 코벌리도 지적하였다.
저자는 이어서 달라이 라마의 저술과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를 여러 차례 인용하면서, 인간이면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라는 사실,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permanence)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오직 무상(無常)할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위에 쓰인 제3장의 제목은 원래 부제이고 원제목은“Reflections on Impermanence”인데 이를 우리말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에 대한 생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서양사회를 오래 지배했던 그리스도교(敎)의 영향 때문인지 영원불멸의 진리라든가 영생(永生) 따위의 말은 미국사람들의 귀에 조금도 낯설게 들리지 않는데 비하여, “비(非)영구성”을 뜻하는“Impermanence” 같은 말은 아주 낯선 철학용어로 들리게 마련이다. 반면에, 적어도 15세기까지 우리네 선조들의 종교로서 민중의 마음 깊이 스며들었던 불교용어들 중에서도 특히 ‘인생무상’ 같은 말은 우리 한국사람들에겐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누구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 아닐까? 길고 긴 역사를 지닌 한국 불자들과는 달리 마거릿 코벌리는 불교의 역사 뿐 아니라 역사자체가 짧은 나라 미국의 불교신도이다. 그러나 그녀는 서슴치 않고 힘주어 말한다. 자신은 불교 덕분에,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가운데 매일같이 대하는 응급실 환자들과 자기 가족들의 죽음을 예전보다는 훨씬 덜 비극적으로, 나아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제4장 : 엄마노릇 하기와 명상수련
(Mothering and Meditation)
저자 재클린 맨들(Jacqueline Mandell)은 딸쌍동이를 낳고 키운 어머니요 아내요 가정주부인 동시에 “의식 집중 명상수련(Mindful Awareness Meditation)”을 가르치는 법사(senior teacher)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글에는 전업주부이자 법사로서 일하는 여성의 눈에 비친 불교에 대하여 나름대로 색다른 비판의식이 엿보인다.
전장(前章)과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도 미국사회와 한국사회의 문화적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면 세대간의 격차라고 해야할까? 전업주부로서, 특히 쌍동이 자매를 낳은 후 2살이 될 때까지 어렵고 바빴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에는 “아침에 화장실 갈 틈도, 세수할 틈도 없었고, (…) 남편과 나는 기저귀 1만2천개를 갈았다”고 쓰여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라면, 적어도 필자처럼 60대 중반이라면 한 집에 대개 3/4명, 때로 8/9명이 넘는 자식들을 키우고 건사했던 부모, 친척, 친지들의 부산했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한 편, 남편과 자식을 가진 직장여성들이나 21세기의 젊은 세대가 이 글을 읽고 느끼는 반응은 사뭇 다르리라고 짐작되기도 한다. 또한 이 글은 어린 아이들을 둔 여성불자들에게 유익한 조언과 함께 훌륭한 교육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제5장 : 매일매일 생활로 실천하는 다르마(Everyday Dharma)
저자 미셸 레비(Michelle Levey)는 테라바다(Theravada) 불교 및 티베트불교 계통에서 집중적 훈련을 받은 후, 시애틀(Seattle)에 본부가 있는 컨설팅회사 ‘InnerWork Technologies(내면작업 기술)’의 사장으로서 남편과 함께 여러 권의 책을 공저하였다.
영어권에서 출판된 불교에 관한 서적들은 제대로 된 책이라면 예외없이 ‘용어해설(Glossary)’이 책 끝부분에 붙어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도 불교의 핵심용어(key word) 가운데 하나인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에 대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게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teachings), 즉 깨달음에 이르는 길(path)”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파되면서 ‘Dharma’는 ‘달마(達磨)’라고 가끔 음역(音譯)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법(法)’이라고 의역(意譯)되었다. 그러나 ‘다르마’처럼 의미가 풍부한 말을 ‘법’이라는 하나의 낱 글자 안에 담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 같다.
미셸 레비에게 ‘다르마’는 또한 삼라만상의 이치를 밝혀주는 진리로 인식된 듯하다. 1975년에 불교신도가 되자 7년 동안 꾸준히 ‘비파사나(Vipassana)’ 명상수련을 수행하였고, 한 편으로 일본의 선원(禪院)에서 참선훈련도 쌓았다고 한다. 1982년 워싱톤대학 철학과 초빙교수로 시애틀에 온 티베트 스승으로부터 티베트계통의 대승불교에 입문하였으며 그로부터 ‘중도(中道, Middle Way)의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베트남의 선승 틱 낫한(Thich Nhat Hanh)이 지도하는 수련회에 여러 차례 참석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불교지도자로부터 다양하게 배운 바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미셸 레비는 또한 생체자기조정(bio-feedback) 치료사로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게다가 남편과 함께 공동저술 및 전문직을 행사할 수 있는 행운의 여성이기도 하다. 심리치료사로서 하는 일의 90퍼센트를 매주 화요일 집에서 남편과 함께 지도하는 명상수련회와 병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상모임에 오는 이들 대부분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건강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환자들과 더불어 함께 명상하는 구체적인 방법 및 절차 설명에 이어, 치료사겸 명상지도자와 수련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질의와 응답이 오가는 대화 또한 이 글이 지닌 흥미로운 점이라 하겠다.
미셸 레비
제6장 : 인간관계 깊숙이‘다르마’를
(Bringing Dharma into Relationships)
글쓴이 카루나 다르마(Karuna Dharma)는 비구니로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베트남 선원(Zen Center)인‘국제 불교 명상센터’의 원장(Abbess)으로 봉직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처럼 인종과 언어가 다양한 지역의 선원(禪院)을 맡아 지도하는 책임자인 만큼, 선원에 모이는 신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왜 저 사람의 저 말은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가?, 왜 이 사람은 내 비위를 건드리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나?”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자신의 이미지(self-image)라는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항상 싸움이 그칠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명상수련을 통하여 자아(self)라는 틀을 벗어남으로써 마음을 비우는 훈련을 적극 권장하는 내용이다. 자기자신에게서 해탈해 버린 텅 빈 자아(自我)로서만이 세상의 법도(法道), 즉 ‘다르마’를 깨우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깨달음”에 다다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제7장 :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면(Dealing with Stress)
이 글의 저자 아야 케마(Ayya Khema, 1923-1997)도 비구니로서 ‘테라바다(Theravada)’ 계통의 명상수련법사(meditation teacher)였다. 여러 권의 불교서적을 영어로 저술했을 뿐 아니라 오스트랄리아, 스리랑카, 독일에 세워진 불교회관 건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글쓴이는 먼저 팔리(Pali)어 불교용어인 ‘두카(Dukkha)’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팔리(Pali)어는 산스크리트어와 같이 인도-유럽계 언어로서 불교의 초기경전이 기록된 언어이기도 하다. 언어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산스크리트(Sanskrit)’란 “문법이 완벽하게 정돈된 문어체의 글”이라는 뜻인데 비해, 팔리어는 일반대중이 듣고 말하던 구어체(口語體)의‘프라크리트(Prakrit)’, 즉 “자연 그대로, 다듬지 않은 언어”였다고 한다. 힌두교의 최고(最古) 경전(Rig Veda)이 브라만 승려들만 쓰고 읽을 줄 알았던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사실을 돌이켜 보면, 인도 카스트제도의 틀을 벗어나 모든 중생을 향하여 호소했던 부처님의 설법이 당시의 팔리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자명한 이치요 당연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미주현대불교에 광고되어 있는 바, 뉴저지 원적사에서 팔리어를 가르치는 강사님에 의하면 “빠알리어”라고 해야 원어(原語)에 가까운 발음인 것 같다.]
‘두카(Dukkha)’는 흔히 영어로‘suffering(괴로움)’, 우리말로는‘번뇌(煩惱)’라고 번역되지만 이는 또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마음, 성이 차지 않는 심리상태를 가리키는 만큼, 21세기의 세상 곳곳에 퍼진 영어단어‘스트레스’와 다름없는 말이라 하겠다. 미국사람들은 대부분이 불평불만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직장의 윗사람, 이웃, 부모, 자식, 배우자, 등등)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라고 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 해결책으로서 TV을 비롯한 갖가지 흥미거리에 몰입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두카(Dukkha)’의 원인을 남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외부상황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찾도록 인도해주며 궁극적으로‘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밝혀주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이면 누구나 부딪히게 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집중과 더불어 마음을 깨끗이 비워 내면의 평화를 얻게 해주는 명상수련(meditation)이야말로 최상의 스트레스 치료제요 해결책임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제8장 : 임신중절/낙태(Abortion)에 관하여
글쓴이 이본 랜드(Yvonne Rand)는 선(禪)불교 계통의 여승(priest)으로서 북가주(北加州)의 작은 선방에서 가르치는 명상수련법사(meditation teacher)이다. 그녀가 주관하는 명상수련회는 불교 신도로서의 수행경험과, 아내요 어머니로서 살아온 경험에다 심리치료술, 미술, 원예술, 서양문학을 오랫동안 공부하며 두루 섭렵한 지도자가 베풀어주는 풍부한 내용의 학습장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미국사회는 낙태니 임신중절이니 하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생명파(pro-life)”와 “선택파(pro-choice)” 이렇게 양 편으로 나뉘어 때로는 티격태격, 때로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시끄러운 싸움질만 계속하고 있다. 이에 이본 랜드 자신은 우선 “낙태 반대론자”이면서도 임신중절을 원하는 여성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택파”임을 서슴없이 밝히고 있다.
일본 선불교 사찰에서 수행하던 절친한 친구가 열차사고로 갑자기 죽음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이본 랜드는 ‘지장(地藏)보살’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에 몇 달 동안 머물며 ‘지장보살을 향하여 올리는 예식’ (Jizo ceremony)에 대하여 더욱 폭넓게 공부하고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 돌아온 후, 일본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사람들에게 적합한 요소를 점차적으로 가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처음엔 여성들만 모여서 올리던 예식이었지만 이젠 남성들과 아이들, 불교신자와 비신자들, “생명파”들,“선택파”들, 또한 양쪽 어느 편도 아닌 각계각층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불교식 장례 예불(Buddhist Memorial Ceremony)을 올리게 되었다.“살생을 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계율을 절대로 부인하거나 등한시하지 않으면서도 낙태를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여성들에겐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며, 미국사회는 낙태를 법으로 금지시켰던 1950년대의 무지와 암흑의 시절로 뒷걸음질 치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제9장 : 불교와 12단계(Buddhism and the Twelve Steps)
이 글의 저자는 레이첼(Rachel)이라고 이름만 밝힐 뿐 성(姓)은 머리글자(V.) 한 자 뿐이다. 알콜중독자였던 그녀가 어떻게 하여 중독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던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 글의 내용인 만큼, 독자들도 굳이 그녀의 정확한 성명에 대해 캐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레이첼은 또한 정규적으로 절에 다니는 불교신자요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알콜중독에 걸렸던 여성들 및 성인남녀에 대하여 이미 2권의 책을 출판한 바 있는 문필가이다.
알콜중독자들로 하여금 중독에서 벗어나게끔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세계적인 단체의 미국 내 명칭은‘Alcoholics Anonymous(알콜 무명씨들)’의 머리글자 ‘AA’로 불리우고 있다. 저자 레이첼은 이 협회에서 제공하는 “술끊기 12단계” 프로그램에 가입하여 거의 10년 넘게 애쓰고 노력한 후에야 결실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협회에 가입하기 전부터 꽤 오래 불교도로서 살아왔던 연유 때문인지 불교와 12단계 프로그램이 처음에는 비슷한 점보다 서로 상충하는 점이 더 많아 보였다고 한다. 신(神)을 들먹이지 않는 불교에 비해 12단계 모임은 하느님 얘기로 꽉 차거나 “높으신 데서부터 비롯하는 능력(higher power)”을 부르짖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때로는 소리지르며 문밖으로 뛰쳐 나가고도 싶었지만, 이 또한 마음을 비우고 자아(self)에서 해탈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덕분에 자신을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세월과 더불어 차츰차츰 불교와 12단계 모임 사이에는 서로 비슷한 점, 서로 화합하는 점이 전보다 훨씬 많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이 두 제도가 서로 협력하여 미국사회가 보다 나은 세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으로 글을 마감하고 있다.
제10장 : 카르마, 즉 창조적 책임
(Karma : Creative Responsibility)
이 글의 저자는 위에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을 엮은이로서 철학 박사요 대학교수 카르마 렉쉐 초모이다. 종교학을 강의하는 학자로서의 자질과 글쏨씨가 엿보이는 이 글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불교의 핵심용어 가운데 하나인 ‘카르마(Karma)’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나름대로 전개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 ‘카르마’는 우리말로 ‘업(業)’이라고 의역(意譯)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내 전생에 무슨 업보때문에 이 고생을…?” 이런 식으로 한탄하던 할머니들의 얘기를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법하다. 한데, ‘카르마’에 대하여 미국의 불교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떤 것인지, 그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인도의 전통 힌두교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불교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자아(自我, self)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 영혼”이니“내 마음”이니 하는“나”라는 개념에서 탈피한 상태, 곧‘무아(無我, selflessness)’에 이르러야만 해탈이 가능하고‘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 끝없이 되풀이되는‘윤회(輪廻, samsara)’의 수레바퀴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는 심판하고 벌을 주는 유일신(唯一神)도, 옳고 그름을 정해주는 최고 지도자도 없는 종교이다. 대신,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바탕을 둔 초개인적 율법(impersonal law)인 ‘카르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현재 우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과거와 미래로 연결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전생에 행했던 어떤 행위의 결과가 현재를 사는 모습이고, 현재의 삶은 또한 다가올 내세(來世)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단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식으로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집안청소하는 주부의 발에 짓눌리는 바퀴벌레도 포함하는 온 누리의 중생(衆生)에게 두루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낙태(abortion)에 관해서도 불교에서는 어떤 구체적 법령을 정하여 여성불자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지시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대신, 태아를 포함한 생명체 하나 하나에게 연민의 정(compassion)을 느끼며 슬기로이 불자다운 판단과 지혜로운 처신을 권하고 있다.
제11장 : 보살 평화 훈련(The Bodhisattva Peace Training)
글쓴이 체링 에버레스트(Tsering Everest)는 티베트의 불교학자 착둣 린포체(H. E. Chakdud Rinpoche)의 제자로 여러 해에 걸쳐 수련을 쌓은 후, 12년 동안 스승의 영어번역 및 통역사로 일했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 따른 3년과정의 수련회를 완수하였으며 현재는‘닝마(Nyingma)’계통에서 가르치며 능력을 베풀어주고 있다.
티베트 불교의 법사가 쓴 이 글에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용어가 간간이 눈에 띄는데 우선 ‘타라’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할 것 같다. ‘타라(Tara)’는 엮은이 카르마 렉쉐 초모가 이 책의 첫머리에 밝혀 놓은 바와 같이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깨달은 자”이기에 “모든 불타(Buddha)들의 어머니”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우리네 대승불교의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로서 티베트 불자들 모두에게 절대적 숭앙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위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글은 티베트의 관음 보살인 ‘타라’보살을 향하여 기도 드림으로써 평화를 얻기 위한 수련, 혹은 훈련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이다.
‘보살 평화 훈련’은 불자들만 참석하는 훈련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나아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세상의 평화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수련회요 기도회라고 한다. 이와 같은 훈련은 수련회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마음속에 첫째로 자비심(compassion)을, 둘째로 평온감(equanimity)을, 셋째로 사랑(love)을, 마지막으로 즐거움(rejoicing)을 키워 나가도록 해준다. 이렇듯 네 단계에 걸친 설명 가운데, 1970년대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veteran)로서 본의 아니게 폭탄을 던져 죽였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기억과 양심의 가책때문에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던 미국 군인의 이야기도 있다. 그 군인 또한 이 ‘보살 평화 훈련’을 꾸준히 받은 덕분에 괴로운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현재는 불자로서 평온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제12장 : 승가(僧伽) 경험(The Monastic Experience)
산스크리트어‘Sangha’는‘승가(僧伽)’로 음역(音譯)되어 우리말로 정착되면서 줄인말 승(僧), ‘중’의 높임말 ‘스님’의 어원이 되었다. 세속에서 사는 불교도와 구별하여, 출가(出家)한 승려들이 모여 도(道)를 닦으며 지내는 공동체를 말한다. 서양의 수도원(monastery)제도 및 수도공동체와 비슷한 점이 많은 관계로 영어로는‘monastic order(수도단체)’라고 번역되고 있으며 또한‘비구’는‘monk’로 ‘비구니’는‘nun’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 글은 미국 여성불교 지도자 5명이 집필한 각자의 경험담이다. 제각기 어떤 연유로 불자가 되었으며, 더욱 깊이 나아가 삭발하고 절에서 불도를 닦고 지낸 개인적 경험을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다. 글쓴이 다섯 분 가운데는 앞의 글(5장, 10장)의 저자가 둘, 곧 이어질 13장의 저자, 그리고 12장에만 부분적으로 기고한 분들이 두 명이다. 이 다섯 분의 이야기는 모두 훌륭한 경험담이긴 하지만, 여기에 일일이 거론하기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다만, 모임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한 청중이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은 여기 소개될 만 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질문은 13장의 저자이며 결혼 경험을 지녔던 에코 수잔 노블(Eko Susan Noble)에게 여승으로서 어떻게 수도생활과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할 수 있었던가,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에코 수잔 노블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일본 대처승과 결혼하여 함께 살며 수행했으나 결국은 이혼하게 된 사연을 숨김없이 털어 놓은 후, 그러나 ‘승가’에의 입문과 결혼이 양립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혼한 여승의 삶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기에 각자 나름대로 적응력과 비젼(vision)을 갖추어야 하리라고 조언해 주었다.
제13장 : 서양에 심어진 동양의 전통
(Eastern Traditions in Western Lands)
글쓴이 에코 수잔 노블(Eko Susan Noble)은 일본 불교 중에서도 일종의 밀교(密敎)로 알려진‘진언종(眞言宗)’의 법사이다. 일본의 영산(靈山)이라는 고야산(高野山)의 ‘비구니 수련원’에서 수행하고 교육 받은 후 1988년 ‘비구니’의 계를 받았다. 일본 나라(Nara) 지방 사찰의 주지(住持)로 있다가 지금은 미국 서북부 와싱턴(Washington)주에 있는‘진언종 바즈라야나 승원(Shingon Vajrayana Sangha)’의 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에코 수잔 노블은 미국 사람으로서 쉽게 익힐 수 없는 외국어인 일본어, 말하자면 8세기 한문으로 쓰인 불경을 일본어로 낭송할 수 있는 수준의 일본어 실력을 쌓으며 오랫 동안 일본에서 배우고 익히며 불도에 전념한 여성답게 아시아 사람, 특히 우리네 한국인 특유의 성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참을성, 은근과 끈기가 가득 넘치는 분 같다. 불교를 가르치는 법사로서도 길거리에 나서서 아무나 붙들고 자기 교회나 절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전도행위(proselytism)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 대신, 미국처럼 각양각색의 인종과 갖가지 문화가 서로 섞이며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불교의 진리를 가르칠 때에도 대단한 참을성이 요구된다는 점을 누누이 얘기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faith)’이란 어떤 신(神)에게 무조건 매달리는 눈 먼 신앙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밟았고 지금도 밟아 나가고 있는 길이 있다는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끝으로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악습(惡習)을 하루 아침에 없애버릴 수는 없다”는 어느 참선지도자(Zen master)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동양에서 배운 종교인 불교를 서양인의 마음속에 심어주는 일에 있어서도 인내심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이후로 이어지는 대화(Continuing the Conversation)
북미주 여성 불자들의 수련회 폐막을 장식하는 이 마무리 글에도 이 책의 엮은이 카르마 렉쉐 초모의 글솜씨가 여실히 드러나 보인다. 오랜 전통을 지닌 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이렇다할 전통이라고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미국의 불교문화를 대조해 보이며, 불교는 결코 유일자에 대한 신앙(monolith)이 아닌 만큼 한 전통에 얽매어 그 전통만의 권위를 내세우는 행위는 오늘날 세계 여러 종교들의 큰 문제인 분파주의(sectarianism)를 일으킬 뿐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가 어떻게 중국, 한국, 일본 땅에 전파되었으며 동북 아시아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독특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는지, 이에 대하여 꾸준히 배우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다문화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의 미국 불자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내용으로 매듭짓고 있다.
끝말
전문분야가 전혀 아닌 불교에 관한 책에 대하여 서투르게나마 위와 같이 쓴 소개글을 마감하면서 한 마디 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싶다. 불교의 교리 가운데‘카르마(Karma)’와‘윤회(Samsara)’에 대한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교리 가운데 원죄(原罪)와 원죄로 인한 결과가 온 세상 만인에게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가르침만큼이나 내 머릿속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종교란 머리로 받아들이는 지적 행위와 더불어 마음을 다하여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며 봉양하는 심적이면서도 신체적인 행동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런지…?
편집자 주
천진암
불교 천진암은 스님 300명이 수행하는 큰 수행처였다. 한때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였으며 나중에는 대궐의 음식 장만하는 일을 관장하는 사옹원의 관리를 받기도 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벽·이승훈·권일신·권철신·정약종, 이른바 한국 천주교 ‘5인의 성조’들은 1779년 이곳에서 강학회를 결성한 뒤 약 5년간 천주교리 연구와 강의, 공동 신앙생활을 하며 천주교회를 창립했다.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참수됐고, 그들에게 도피처를 내줬다는 이유로 스님 10명도 참수되면서 폐사됐다. 당시 천주교를 돕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천진암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천주교를 도왔고 그 결과로 스님들은 처형되었고 절이 폐사가 되었는데 이런 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이 천주교가 성지로 주장하여 불교와 천주간의 갈등이 있는 장소이다.
서평의 필자 배성옥은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인문대학원에서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1979년 프랑스로 건너가 1989년에 Paris-Sorbonne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하였고 2015년까지 Los Angeles Harbor Colleg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현재 전문번역가, 문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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