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는 소나무로 뒤덮여 유난히 푸르다. 차라리 저 하늘에 떠도는 바람 같은 구름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유유한 구름을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자주 고향의 소중함을 잊어버린다. 가을이 깊어 도로변은 추수를 끝낸 들판이 황량하게 버려져 있었다.
이제 자신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맹렬하게 노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느끼지만 어느새 몸은 노년이 되었다. 추수를 끝낸 들판처럼 풍요로워야 할 노후가 꼭 그렇지도 않을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은 어쩌면 현실이 되어 사방에 엄습한다.
수시로 찾아오는 곳이지만 덩그레 텅 빈 동리가 안타깝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재미있게 정담을 나누던 그분들은 먼 세상 사람이 되었고, 자신도 그 길을 밟을 수밖에 없는 처지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예전 추계마을의 혈족들은 흙과 한 몸이 되었다. 그저 풍년을 간절히 바랄 따름이고, 담배 농사가 끝나자마자 논에 물을 대고 서로서로 번갈아들면서 김매기를 하느라, 땀이 흘러 흙이 젖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위에서 내리쪼이는 놋쇠 같은 햇볕 때문에 숨이 막히곤 했다.
아낙은 곡식 한 알갱이도 살점처럼 아까웠다. 무심하게 입으로 들어가는 그 곡식 한 톨에 허리가 몇 번이 구부러지며 손은 몇 번 가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뙤약볕에 등이 뜨끈하게 익어가면서 자식을 키웠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다 같지만, 특히 이들에게는 자식들이 멀리 도시에서 돌아올 때는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들의 끝머리에서부터 집 안마당까지 등에 볏짐을 지고 나르는 남정네들은 잠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시간도 아까웠다. 이것이 바로 옛 고향의 가을날 아니겠는가.
농사꾼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늘을 믿었고 땅을 믿었다. 하늘은 절기가 되면 비를 내려주고 뙤약볕에 곡식을 여물게 해 주었으며, 때가 차면 익어 넘치도록 지열을 다스리고 거기다가 거두어들이기 알맞게 날씨마저 부조해 준다면 풍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은 삭막해도 마음만은 풍족한 계절이다. 재실 ‘천헌재’는 예전 그대로지만 한줄기 비만 오면 금세 풀은 자라듯 재실 역시 풀이 많이 자라 있었다. 집안 아낙들이 먼저 도착하여 청소 준비하고 있다. 산하의 혈족들은 또다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네들이 재실 건립에 동참했던 당시 곱고 젊었던 시절은 이제 등도 굽고 갈수록 많이 연로해졌지만, 몫을 다하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두 시간여 흐르고 일을 마무리 지어 본다. 흐르는 세월처럼 갈수록 사람이나 건물도 퇴색하기 마련이며, 내년에는 건물 보수를 해야겠다.
어느 가을 오후의 햇볕 아래였을 것이다. 읽고 있던 검은 가죽 표지의 성경책과 팔다 남은 흰 파 뿌리 사이를 오가다 설핏 졸음 반, 잠 반에 든 할머니. 난전 한가운데서 천국에 드신, 파 할머니의 선잠에서 삶의 수고로움과 노곤함을 엿본다. 할머니는 기운을 북돋는 파를 팔다 풋잠이 들었다. 이 계절 파김치를 먹고 싶어, 한참을 기다려서 한 단을 사기도 했다.
재실 앞 나무 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느티나무는 그 줄기를 곧고 탄탄하게 세워 강한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틸 몸집을 가졌다. 늠름하다. 가지는 어디 하나 거칠 것 없이 위로만 나아가는 젊은이들처럼 쭉쭉 뻗어있고, 잎은 하늘 향해 그 푸름을 발산하였지만,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노거수는 따뜻한 가을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